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정조실록52권, 정조 23년 7월 10일 병인 1번째기사 1799년 청 가경(嘉慶) 4년

차대 때 임업의 상소문에서 수교를 어긴 것 등에 대해 이르다

차대(次對)가 있었다. 상이 이르기를,

"나의 시력이 점점 이전보다 못해져서 경전의 문자는 안경이 아니면 알아보기가 어렵지만 안경은 2백 년 이후 처음 있는 물건이므로 이것을 쓰고 조정에서 국사를 처결한다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 것이다. 요즘 일기 등 문서를 상고해 볼 일이 있었는데 역시 마음대로 훑어보기가 어려웠다. 이는 예사로운 눈병이 아니어서 깊은 생각을 한다거나 복잡한 일이 있을 경우 어김없이 이상이 생겨 등골의 태양경(太陽經)과 좌우 옆구리에 횃불이 타는 듯한 열기가 있는데 이것이 눈병의 원인이 되고 있다. 간혹 시험삼아 불을 때지 않은 온돌바닥에 누워 있으면 몸의 열기로 바닥까지 차츰 따뜻해지므로 처음에는 조금 시원한 것 같아도 나중에는 또 견디기가 어려우니, 이는 전부 태양경의 울화가 팽배해 있는 결과로서 나의 학문의 힘이 깊지 못해 의지의 힘이 혈기(血氣)를 제어하지 못한 때문이다. 이미 내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내 몸을 다스리지 못한 처지에 또 어찌 남을 다스릴 수 있겠는가. 하지만 왕위에 오른 지 스물 서너 해 동안 정사가 뜻대로 되지 않고 그저 애만 쓴 병통이 있긴 하나 스스로 반성하여 그 원인을 찾아볼 때 그 수준이 그다지 낮은 정도는 아니었다. 아무튼 그렇다 하더라도 공부가 깊지 못해 혈기가 병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다만 사람을 다스리는 방도로 말한다면 현재의 상태는 결국 크게 고쳐지기 어려운데 이것은 내가 그 도리를 다하지 못해서인지, 아니면 지금의 세속이 완악한 오랑캐보다 교화시키기 어려워서인지 모르겠다.

돌이켜보면 내가 등극한 뒤로 등용한 자들이 모두 어진 사대부였다고 말할 수는 없더라도 환관이나 궁첩들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매일 승지를 접견하여 어떤 날은 그 횟수가 열번이나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폐단을 면치 못하므로 요즘은 이전의 규례를 약간 고쳤는데 자주 만나면 사이가 멀어진다는 경계 때문에 그런 것이긴 하나 이 또한 실효를 보지 못하고 있으니, 비유하자면 나의 눈이 좌우로 눈을 떠 보고는 있으나 다 어둡고 마음만은 눈처럼 어두운 정도까지 되지 않은 것과 같다.

내 반평생에 힘을 들인 것을 가지고 말한다면, 내 생각에 마음과 눈이 다 어둡지는 않다고 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의리의 측면에서 한 세상을 인도해나가 한푼이나마 나에게 지워진 책임을 저버리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하였다. 병신년 이전에도 내가 지향하는 의리는 회의적인 것이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는데, 갑오·을미년 이후 한두 신하가 한마음을 가져준 것에 힘입어 왕위에 오른 뒤로 그 규모를 지켰으며 아래에 있는 자들도 받들어나가는데, 어렵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세상일이 문제가 많아 사건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 관계로 을묘년 이후에는 이 규모가 또 한 차례 변경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모년(某年)의 의리와 전례(典禮)에 관한 문제에 대해 내가 고수하는 것이 극히 공명 정대하여 기타 크고 작은 모든 문제에 있어서 오직 정당한 것만 추구할 뿐 평범하게 하는 입장은 취하고 싶지 않았으나 아래에서 응하는 자들이 그것을 빙자하여 사심을 부리는 폐단이 없지 않았으므로 대강 바로잡았던 것이다. 그러나 갑인년046) 이전에는 조정의 신하들이 그야말로 이른바 ‘당나라 때 권신들 왕비 왕숙문 미친듯이 부귀에 급급하였네.[王伾王叔文 汲汲如顚狂]’ 한 말과 같은 상황이었으므로 사실 거론할 가치도 없고 그 뒤에도 세상의 도리가 어떤 성과를 거두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의리에 관해 물어보면 모두들 흐지부지 도외시해 버리려 하였으므로 지난날의 이른바 임금의 덕을 높이고 임금의 무함을 분간하자는 것이 도리어 그 덕을 더럽히고 그 무함을 보태는 꼴이 되고 말았다. 이 일은 과연 누가 이렇게 주장했단 말인가.

일전에 성균관 유생들을 시험보일 때 시의 제목을 ‘밤마다 돈꿰미 세느라 나 홀로 잠 못 이룬다.[夜夜算緡眠獨遲]’라고 냈는데 그것은 내 자신을 비유한 것이고, 부(賦)의 제목을 ‘소를 먹이니 소가 살졌다.[飯牛牛肥]’라고 냈는데 그것은 벼슬과 녹을 마음에 두지 않았던 백리해(百里奚)를 혹시 지금 사람들이 본받기를 바라는 뜻에서였다. 나의 이 고심을 경들이 아니면 누가 받들어 부응해 줄 것인가. 태고 적에는 거룩한 임금이 표준을 세워 스승의 도가 위에 있었으나 후세에는 그렇지 않아 스승의 도가 아래에 있는데 내가 어찌 감히 스승의 도를 지녔다고 자처하겠는가. 그러나 도가 있는 곳이 곧 스승이 있는 곳이고 도는 의리보다 큰 것이 없는데, 나는 내심 인(仁)을 행할 일을 당하면 스승에게도 사양하지 않는 의지를 갖고 있다. 대체로 오늘날 하늘을 이고 땅을 밟고 사는 사람으로서 한번이라도 혹시 이것과 반대로 나간다면 역적만 되고 마는 정도가 아니다. 우리 나라가 비록 삼족을 멸하는 법은 없으나 결국은 반드시 극형을 가해 없애버려야 마땅하다. 그러므로 의리에 혹시라도 흠결이 되는 점이 있다면 죽기를 다짐하고 간쟁하더라도 안 될 것이 없다. 만일 그와 같이 하지 않고 나에게 이점에 대해 미진한 것이 있다고 말한다면 과연 옳겠는가.

일전에는 뜻밖에 이잠(李潛)이란 두 글자를 거론한 한 장의 상소문을 보았는데 그 말이야 사실 조리가 없었으나 이가환(李家煥)의 간특한 학술을 배격하기 위해 그 어구까지 끌어들인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갑자기 보고 깜짝놀라 그 까닭을 알 수 없었다. 나는 일찍이 선대왕 때의 50년 동안 올린 소장을 50여 권 분량으로 베껴놓고 그 이름을 《장차휘편(章箚彙編)》이라 하였는데, 그 속에 이잠 두 글자는 전혀 없었다. 그것은 대체로 그 관계가 극히 중하기 때문에 선대왕 당시 경연의 분부에서 한 번 언급한 정도에 지나지 않았고 그 뒤로는 구두로 아뢰는 것이나 반포하는 교서에서조차 제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선대왕조에 없던 말이 갑자기 오늘날에 나올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연전에 이가환의 문제로 시끄러울 때 심 판부사(沈判府事)가 대사성으로 있으면서 언급하였고 이서구(李書九)도 그에 관해 말한 적이 있긴 하나 그때는 그들이 그에 관한 금법이 있다는 것을 듣지 못한 일이 이상할 것이 없기 때문에 내가 애당초 말을 내걸어 갈등을 야기시키지 않고 그저 금법이 있다는 것만 표시했을 뿐이다. 지금 임업(任㸁)의 상소문은 비록 거론할 가치는 없으나 명색이 대간의 상소라 하면서 금법을 범한 것이 이런 정도에까지 이르렀으니 어찌 말이나 되는가. 승지를 잡아다가 처분한 것은 일의 체모를 존중하기 위해서였다. 저 시골뜨기와 같은 무리들이야 사실 그 잘못을 책망할 것도 없지만 선대왕조의 금령이 지극히 엄중하기 때문에 장차 경들에게 한번 물어보고 파직시킬 근거로 삼을 생각이었는데, 때마침 김한동(金翰東)이 상소하여 사판에서 삭제시킬 것을 요청하였으므로 그의 말대로 적용할 것을 허락하였다.

오늘날 그 의미를 조금이나마 천명하였더라면 먼 지방이야 논할 것이 없더라도 약간 가까운 호서지방에 살았던 임업같은 자들이 어찌 감히 법도를 지키고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겠는가. 설령 그가 자신을 위해서 변명하더라도 약간 경고만 하고 그칠 수는 없는 것이다. 현재의 풍습은 사실 을묘년 이전의 흐리멍덩하던 때와 다름없으니 지금의 도리로서는 다만 종을 내보내고 주인을 맞아들이는 의리에 눈을 밝혀 조금이라도 그것을 어기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못을 자르고 철판을 끊는 것처럼 단호하게 처벌해야 할 것인데, 경들이 어찌 그 책임을 거절할 수 있겠는가. 나의 의리가 혹시 옳지 않은 점이 있다 하더라도 이상하게 생각할 것은 없다. 나의 가장 높은 신조가 이미 분명하고도 엄격하니 만큼 그 나머지 일들의 규모를 누가 감히 한치라도 어길 것인가.

임업이야 우선 그만두고라도 옥당 한 사람이 상소하여 임업을 구제하는 말을 했는데 비록 그것이 대수롭지 않은 몇 줄에 지나지 않은 것이라 해도 그 가운데 하나는 명을 취소하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도리어 김한동을 문책하는 것이었으며 끝에 가서는 또 언로를 막는 처사라고 말했으니, 이것은 더욱이 천만 번 놀라운 일이다. 호판(戶判)이 지금 연석에 올라와 있는 자리에서 이 말을 하는 것은 자신의 입장을 생각하여 상대방이 친한 자의 잘못을 말하지 않는 의리에는 혹시 흠이 될 수 있으나 그 자에 대해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집안이 귀신이 변해 사람이 되고 문필에 종사하다가 변방땅에 귀양을 가고 한 것은 과연 무슨 까닭이었던가. 이른바 이조의 관리로서 인사행정을 한 문제는 을미년 이전은 내가 따지지 않았고 섣달에 인사행정을 했던 것만 가지고 그 죄안을 삼았는데, 지금 그의 종손자가 태연히 시비를 논하고 임업의 문제에 대한 처분에 대해 감히 언로를 막는 처사라고 말하기까지 하였다. 그 집안의 잘못을 그렇게까지 씻어준 것은 그 문제가 내 자신과 관련되어 기어코 보전해주고 싶어서였다. 또한 자궁(慈宮)의 지친(至親)이 되기 때문에 을묘년에 중신(重臣)으로 뽑아쓴 것은 그만한 의도가 있었다. 사적인 것은 공적인 것을 가리우지 못하는 법이니 내 마음에는 부끄러울 것이 없다. 요즘 서겸순(徐謙淳)이 평정에서 하등급을 맞은 뒤 기한 안에 거두어 서용한 것도 이와 마찬가지 규례인 것이다.

오늘날 조정에 벼슬하고 있는 자 가운데 그 누가 처음 병이 들었다가 다시 나은 무리가 아니겠는가. 그런데도 어떤 자는 처음 병들었다가 다시 나은 것을 가지고 도리어 높은 나무에 앉아 있던 새가 도로 깊은 골짜기로 옮겨간 것보다는 낫다고 말한다. 나는 그들을 위해 병을 치료해준 의원인데 그가 어찌 감히 이럴 수 있단 말인가. 그의 그와 같은 말들은 초야의 미천한 사람이라도 갑자기 꺼내기 어려울 것이다. 만일 호판(戶判) 집의 선대 중신이 인사행정을 하던 때의 풍습이 아니라면 어찌 감히 이런 일이 있겠는가.

옛날의 큰 의리를 가지고 논한다면 이를테면 온릉(溫陵)047) 의 복위(復位)는 선대 왕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시행되었고, 육신(六臣)의 신원은 숙묘조 때 비로소 거행되었으며 현량과(賢良科)를 복구하는 것도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야 시행되었다. 그 당시 선정(先正) 등 제현(諸賢)의 논의가 과연 얼마나 강력하였던가. 그런데도 그처럼 정중하게 처리했던 것은 반드시 공론이 크게 보편화되고 인심이 흡족하게 여길 때까지 기다렸다가 비로소 그 일을 언급하였기 때문이다.

이른바 조득영(趙得永)의 상소문은 올리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므로 다스리지 않는 것으로 다스리는 성과를 거두고 싶긴 하나 형정(刑政)을 가지고 논한다면 만약 그대로 둘 경우 정사의 원칙에 문제가 있을 것 같고 게다가 그 종조부의 종손자이기 때문에 지금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 중이다. 대체로 집안의 허물을 덮어보려는 호판의 생각에 부족한 점이 있어서 이런 결과를 초래하였으니, 한탄스럽지 않겠는가.

나의 깊은 고심을 드러내주는 사람이 없긴 하나 현재 나의 뜻을 받들어나가는 대책으로 말하면 지금 사람이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나는 오늘 말의 강도를 지나치게 높이고 싶지 않아 부드럽게 말을 하지만 이와 같은 무리는 가르침을 따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거의 임금을 속인 죄목에 가깝다. 우리 임금은 그 일을 못한다고 말하는 것도 오히려 역적이라 하는데 임금을 속여 무능하다고 한다면 어떤 죄에 해당되겠는가. 비록 문헌을 상고해내어 중외에 반포하라는 분부를 내리긴 했으나 내가 눈이 어둡기 때문에 자세히 볼 수 없으니 지금 이 사관(史館)에서 상고해낸 구두 진술과 반포한 교서 및 《일기》 속에 있는 경연석상에서의 말들을 경들이 한번 살펴보도록 하라. 대체적으로 더없이 중하고 공경해야 할 처지에 계신 분에게 관계되고 또 신하로서는 차마 듣지 못할 분부가 있는데, 이와 같은 문헌을 금오(金吾)의 《등록(謄錄)》과 정원 및 삼사(三司) 등에 베껴 반포한다는 것은 너무 무례한 일이다. 처음 분부를 내릴 때 내가 미처 두루 생각하지 못한 소치이다. 경들이 이것을 훑어보고 밖에 나가 여러 사람에게 일깨워준다면 온 세상 사람들이 자연 알게 될 것이다."

하고, 책자를 내려주며 승지에게 받들어 대신들에게 전해줄 것을 명하였다. 이병모(李秉模) 등이 엎드려 훑어보았는데 먼저 《정원일기》부터 읽어 해당된 부분까지 내려갔다. 상이 이르기를,

"대체적인 것이 그렇다. 경들이 읽어보고 내용을 전달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글로 써서 내놓는다면 어찌 무례하지 않겠는가. 선대왕조 때부터 이미 감히 말할 수 없는 일로 되었던 것은 이 때문인데, 조득영(趙得永)의 상소가 그 당시의 문서를 베껴 반포하라는 명을 내린 뒤에 올라왔으므로 더욱 놀라운 것이다. 이잠(李潛)의 문제가 만약 임금의 훈계에 속한 것이라면 선대왕 때에 그러한 분부가 계셨다 하더라도 신임 의리(辛壬義理)048) 를 내가 어찌 천명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를테면 김용택(金龍澤) 등 다섯 사람들의 문제는 선대왕의 자손된 자로서는 사실 그 억울한 것을 그대로 놓아둘 수 없는 일이니, 비유컨대 주(周)나라 때 남궁괄(南宮括)산의생(散宜生)의 문제를 무왕(武王)의 입장으로서는 정도가 아니었다고 책망할 수 없는 경우와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잠의 경우는 그와는 다르다. 그가 병술년049) 에 올린 한 장의 상소문은 고 상신 두 사람의 문제만 말한 것이 아니다. 또 경묘(景廟)가 동궁으로 계실 때 상소하여 잔치를 올려드리자고 청했으나 김진규(金鎭圭)가 막았다고 말하였는데, 그 때는 경묘의 병환이 나은 뒤였기 때문이다. 그 때의 상황을 돌아보면 신사·임오년 이후 양궁(兩宮)050) 사이에 이미 극히 말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었으나 그 사정을 따져보면 잔치를 올려 동궁을 기쁘게 해드리려는 것이었는데 김진규에게 저지를 당한 것이다. 이것이 곧 선대왕께서 지극히 가슴아픈 분부를 내리신 이유이다. 덕유당(德游堂)은 곧 우리 선의 왕후(宣懿王后)051) 가 거처하신 곳인데 선대왕께서 그분을 섬기신 것은 인원 왕후(仁元王后)052) 와 차등이 없었다. 이는 실로 그 마음이 크게 덕스럽고 선하기 때문인데 현판을 걸어놓고 오늘날까지 그대로 지켜 받들고 있으니, 그 의리는 역시 마찬가지인 것이다. 선대왕께서 내리신 분부에 ‘남(南)·유(柳)053) 에 관한 문제는 나를 위해 《천의소감(闡義昭鑑)》에 실으려고 하지만 나의 일로 한푼이라도 황형(皇兄)054) 에게 유익한 것이 없다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그 당시의 고 상신 김재로(金在魯) 무리들도 감히 이잠을 역적이라 하지 못했으며 이잠에게 증직했던 남대(南臺)055) 벼슬이 지금까지 사실 그대로 있는데, 경들은 과연 그런 사실을 아는가?"

하니, 병모가 아뢰기를,

"신은 사실 몰랐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선대왕의 마음에는 공격하는 자나 옹호하는 자들이 다 옳지 않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에 그러한 처분이 나온 것이며, 몇해 전 그에 관한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내가 이 일을 고 상신 채 판부사(蔡判府事)에게 말하지 않은 것도 그럴만한 생각이 있어서였다. 그를 옹호하는 자가 만약 벼슬을 추증하고 시호를 주자고 청한다면 누가 감히 저지할 것인가. 대체로 이러한 큰 의리가 이처럼 분명치 않으니 임업이야 사실 거론할 것도 없고 세상의 도리를 짐작할 만하다. 김용택(金龍澤)과 같은 무리는 제몸의 안전을 돌아보지 않고 자기 소신대로 행동하였으나 지금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서 한쪽에서는 법도도 안 지키고 또 가르침도 안 따르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또 반드시 이가환(李家煥)을 위해 이잠의 죄를 벗겨주려 한다고 말하니, 피차간을 막론하고 선대왕께 누를 끼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것을 감독하여 바로잡고 교화시키는 방도는 경들에게 그 책임을 맡기지 않을 수 없다. 대체로 의리란 두 갈래로 적용할 수 없는 것이니 임금을 섬기고 어버이를 섬기는 것을 둘로 나눈다면 안 된다. 지난날 이른바 임금의 덕을 높인다고 말하던 것이 지금 어디로 갔단 말인가. 오늘의 일은 내가 혹시 말이 중도에 지나치지 않을까 염려되어 부드럽게 말했으니, 경들도 밖에 나가면 조리있는 말로써 의혹을 일깨워 모두들 스스로 알게끔 하기 바란다."

하니, 병모가 아뢰기를,

"신들은 처음에 사판에서 삭제하는 벌로 임업을 처벌할 것을 청하려 했는데 대사간의 논의는 도리어 경하게 한 것을 면치 못했습니다. 조득영(趙得永)에 대해서는 더욱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하였다.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상이 이르기를,

"대체로 현재의 형편은 화를 주고 복을 주는 권한이 아래로 옮겨간 우려가 있다. 화를 주고 복을 주는 권한이 아래로 옮겨가고서도 나라가 과연 나라꼴이 될 수 있겠는가. 다행히 그 지경에 이르지 않는다면 어찌 좋지 않겠는가. 내가 듣건대 저자에서 전방을 세낸 자가 여러 가지 물건을 모아놓고 있는 것을 도가(都家)라 부른다고 하는데 지금 이런 짓을 하는 자가 이것과 무엇이 다른가. 성덕우(成德雨)정호인(鄭好仁)은 벌이 자기 한몸에만 그쳤으나 지금 이와 같은 자들은 나라의 권력을 훔쳐 나쁜 짓을 자행하려고 노릴 것인데 누가 어디에 엎드려 있는지 모르지만 결국에는 반드시 섬멸되고야 말 것이다.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한 죄는 이마에 먹물을 넣는 형벌을 적용하는 법이니, 지금 내가 해당하는 법조문을 적용하겠다고 분부하는 것이 어찌 지나친 것이겠는가. 우선 하고픈 말을 다하지 않고 참고 또 참는데 내가 어찌 일개 이가환을 위해서 그러는 것이겠는가. 경들은 이 책자를 보고 나가서 여러 재상에게 말해주어 서로 경계하게 한다면 어찌 이 의리를 천명하는 길이 없겠는가. 나는 권한을 잡고 있을 뿐이고 천갈래 만갈래 복잡한 문제를 하나하나 올바르게 처리하는 것은 그 책임이 오직 경들에게 있을 뿐이다. 오늘 경연 석상의 대담을 우선 심 판부사(沈判府事)에게 보여주어 서로 힘쓰도록 하라. 조가(趙家)의 집 문제는 미결된 문건이니 앞으로 대책을 생각해보는 것이 좋겠다."

하고, 이어 승지에게 하교하기를,

"이 경연 석상의 대담을 승지와 주서가 함께 기록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나누어주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2책 52권 3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197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왕실-국왕(國王) / 왕실-비빈(妃嬪) / 왕실-종사(宗社) / 사법(司法) / 인사(人事) / 변란(變亂) / 역사(歷史) / 정론(政論) / 사상-유학(儒學) / 사상-서학(西學) / 출판-서책(書冊)

  • [註 046]
    갑인년 : 1794 정조 18년.
  • [註 047]
    온릉(溫陵) : 중종 비 단경 왕후(端敬王后)의 능호.
  • [註 048]
    신임 의리(辛壬義理) : 신축·임인년의 의리. 곧 영조가 세제(世弟)로 책봉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싸움에 관한 의리임.
  • [註 049]
    병술년 : 1706 숙종 32년.
  • [註 050]
    양궁(兩宮) : 동궁과 세제.
  • [註 051]
    선의 왕후(宣懿王后) : 경종의 비.
  • [註 052]
    인원 왕후(仁元王后) : 숙종의 계비.
  • [註 053]
    남(南)·유(柳) : 남구만(南九萬)·유상운(柳尙運).
  • [註 054]
    황형(皇兄) : 경종을 말함.
  • [註 055]
    남대(南臺) : 사헌부 대간의 별칭.

○丙寅/次對。 上曰: "予之眼視, 漸不如前, 經傳文字, 非眼鏡則難以辦認, 而眼鏡乃二百年來初有之物也, 帶此臨朝, 有駭觀瞻。 近有日記文蹟考見之事, 而亦難如意披閱。 此不但尋常眼病, 有思慮有事爲如期輒發, 背脊上太陽經及左右脅間, 有氣若燃炬, 以致此祟。 間或試處不之堗, 則堗面亦隨而漸溫, 始若稍爽, 終又難耐, 此莫非太陽經鬱火充滿之致, 緣予學力未到, 志氣不能制血氣故也。 旣不能治心而治身, 則又何可以治人乎? 然而嗣服卄三四年, 治不徯志, 徒有役心之病, 自反而求, 汙不至此。 而亦惟曰工夫未至, 血氣爲病故耳。 第以治人之道言之, 目下爻象, 終難丕變, 此予之不能盡道而然歟, 抑今之俗習, 甚於頑苗之難化而然歟。 顧予御極以來, 所進用者, 雖不可盡謂之賢士大夫, 而意或有勝於宦官宮妾, 故日接承宣, 殆至十次矣。 此亦不免有弊, 故近日則稍變前規, 蓋爲數斯踈之戒也, 而此又未見其效, 譬予之眼, 左右視而皆昏也, 惟予心, 則不至如眼。 半生用力, 竊自謂心目之不俱昏, 故凡於義理, 遵率一世, 期不負一分擔負之責。 丙申以前, 予之所處, 非敢曰危疑, 而甲午、乙未以來, 賴有一二臣同心, 卽阼以後, 守此規模, 在下者亦不難於對揚矣。 世故多端, 事變層生, 乙卯以後, 則此規又不得不一變。 蓋以某年義理及典禮間事, 予之所秉者, 至正至大, 其餘大小事爲, 惟務至當, 不欲處第二層, 而下之所以應之者, 不無藉賣之爲弊, 故所以略加矯正者此也。 甲寅以前, 眞所謂 ‘王伾王叔文汲汲如顚狂,’ 固不足道, 伊後世道, 未能食效, 問其義理, 皆欲漫漶, 向所謂尊聖德辨聖誣云者, 便是累其德而加其誣也。 未知此事, 孰主張是? 日前試泮儒也, 詩題曰: ‘夜夜筭緡眼獨遲。’ 是予自況也, 賦題曰: ‘飯牛牛肥。’ 欲以《百里奚》之爵祿不入心, 或冀今人之效此。 惟此苦心, 非卿等孰可以對揚乎? 上古則聖神立極, 師道在上, 後世則不然, 師道在下, 今予豈敢以師道自居? 而道之所存, 師所存也, 道莫過於義理, 予竊有當仁, 不讓底意。 凡今日戴天履地, 圓顱方趾者, 一或背馳於此, 則非特爲逆而已。 我國雖無夷族之法, 而終必劓殄滅之耳。 若於義理或有虧欠處, 則矢死爭之, 未爲不可。 如其不然, 而謂予有所未盡於此, 則豈可乎? 日前忽見一疏之爲李潜二字者, 疏語固不成樣, 而爲斥李家煥之邪學, 施及於此。 予於是, 瞥見驚駭, 莫究其故矣。 予嘗以先朝五十年章疏, 謄置五十餘卷, 名曰《章箚彙編》, 考其中未嘗有李潜二字。 此蓋關係至重, 故在先朝, 不過筵敎之一番提及, 而其後則口奏頒敎, 亦不提起矣。 豈料先朝所無之言, 忽發於今日乎? 年前以李家煥事擾擾之時, 沈判府以大司成言之, 李書九亦有云云, 而其時則無怪其不能聞之, 故初不言, 而葛藤之只示其有禁而已。 今者任㸁疏, 雖無足道, 名以臺章, 冒犯至此? 承宣之拿處, 所以重事面也。 如渠鄕曲之類, 固不足責, 而以先朝禁令之至嚴也, 故將欲一問於卿等, 以爲罷削之地矣, 適有金翰東之疏, 請以刊改, 故依其言許施矣。 今日義理, 少或闡明, 則遠方雖無論, 而如之居在稍近湖鄕者, 豈敢不順軌率敎乎? 設令爲渠自辦, 不可薄警而止。 目今風習, 果無異於乙卯以前醉生夢死時, 則爲今之道, 但當明目於出奴入主之義, 絲毫有違者, 若斬釘截鐵之不暇, 卿等安得辭其責乎? 予之義理, 若有不是處, 則無足怪也。 惟予之上上層秉執, 旣明且嚴, 則其外事之一副規模, 誰敢違越於尺度乎? 任㸁姑無論, 有一玉堂, 疏救任㸁, 雖曰草草數行說, 而其中一則反汗, 一則反詈, 末又曰杜言路, 此則尤萬萬驚心矣。 戶判方登筵, 爲此言者, 或欠絜矩於爲親者諱之義, 而不得不言之矣。 其家之變鬼爲人, 墨池雪嶺, 果何故耶? 所謂當銓行政者, 乙未至月以前, 則予不論也, 而只是臘月行政, 爲其罪案, 今者爲其從孫者, 居然爲言論, 至以任㸁事處分, 敢謂之杜言路。 渠家之拂拭至此, 以其事關予身, 必欲全保。 兼爲慈宮至親, 故乙卯之甄用重臣, 有意存焉。 私不掩公, 我心無愧。 近日徐謙淳之下考後, 限前收敍, 亦此例也。 今日立朝者, 夫孰非先病後瘳之徒? 而或者以先病後瘳, 謂之反勝於自喬遷谷云。 予則爲渠輩瘳病之醫, 渠何敢爲此乎? 似此等說, 雖草野之賤, 亦難遽陳。 苟非戶判家先重臣行政時風習, 何敢有是? 在昔大義論之, 若溫陵復位, 至先朝而始行, 六臣伸冤, 在肅廟而始擧, 賢良復科, 亦久而後乃行。 當其時先正諸賢議論何如? 而若是其鄭重者, 蓋必待公議大行, 物論洽然, 然後始乃言之故也。 所謂趙得永之疏, 便同未徹, 固欲以不治治之, 然論以刑政, 若仍置, 則有涉如何, 而又以其乃從祖之從孫也, 故方在商量中。 大抵戶判蓋愆之念, 有所不足而致此, 寧不慨然? 予之苦心, 無人闡微, 目下宣揚之道, 非今人而誰? 予於今日, 實不欲過費辭氣, 雍容說去, 而若此類, 則非但不率敎也, 亦殆近於誣上之科。 吾君不能, 尙謂之賊, 則誣上不能, 當置何辟? 雖以考出文蹟頒布, 有所下敎, 而因予眼昏, 不能詳閱, 惟此史館考出之口奏頒敎及日記中筵說, 卿等試看之。 大體關係於莫重至敬之地, 又有不忍聞之敎, 以此文蹟, 謄頒於金吾謄錄及政院三司者, 太涉褻慢。 當初下敎, 予未及周思故也。 卿等見之, 出而轉諭, 則一世之人, 自可膮然。" 仍下冊子, 命承旨, 奏傳于大臣。 秉模等伏而披閱, 先看《政院日記》, 讀至云云。 次看史館考出文蹟, 讀至云云。 上曰: "大體然矣。 卿等見而傳之足矣。 書出則豈不褻慢乎? 自先朝時, 已爲不敢言之事者, 此也, 得永之疏, 出於謄頒事有命之後, 尤爲駭然。 李潜事, 若屬於大訓邊, 則先朝雖有此敎, 辛壬義理, 予豈不闡明之乎? 如金龍澤五人等事, 爲先王子孫者, 固不可仍置, 譬如南宮适散宜生之事, 在武王則不可以非正道責之故耳。 李潜則異於是。 丙戌一疏, 非但故相二人事爲言而已。 又言景廟在東宮, 陳疏請進宴, 而金鎭圭沮之, 以其時則患候後也。 顧其際則辛壬後兩宮間, 已有至難言之端矣, 跡其事則欲以此悅豫於大朝, 而爲其所沮戲。 此先朝所以有平日至痛之敎也。 德游堂, 卽我宣懿王后所御處, 而先朝事之無間於仁元聖后。 此實因心之盛德至善, 而揭板之至今遵奉, 其義一也。 先朝下敎, 若曰: ‘事, 則爲予而欲載於《闡義昭鑑》, 以予之事, 不能一分有益於皇兄可乎云云。’ 是故其時故相金在魯輩, 亦不敢以李潜爲逆, 之贈職南臺, 今固自在, 卿等果知之乎?" 秉模曰: "臣果不知矣。" 上曰: "先朝聖意, 以斥之者扶之者, 皆爲不可, 故有此處分, 年前事端時, 予不以此事言于故相蔡判府者, 意亦有在。 欲扶之者, 若請以贈爵贈諡, 誰敢爭之乎? 大抵此等大義理, 如是不明, 任㸁固不足說, 而世道可知。 昔之金龍澤輩, 則奮不顧身, 能有所辦, 而今之人則不然, 一邊則不順執不率敎, 一邊則又必曰爲家煥昭脫李潜矣, 無論彼此, 貽累則同。 董正矯揉之方, 不得不責之於卿等矣。 夫義理, 不可二用, 事君事親, 二之則不可。 曩所謂尊聖德云者, 今焉何去乎? 今日事, 予恐辭敎之過中, 好好爲言, 卿等出去, 亦須以不費之辭, 俾圖曉惑自解之方也。" 秉模曰: "臣等初欲以刊改, 請勘任㸁矣, 諫長所論, 未免反輕。 至於趙得永, 則尤不可仍置矣。" 語未畢, 上曰: "大抵目下事, 有威福下移之處。 威福下移, 而國可以爲國乎? 幸而不至於此境, 豈不好哉? 予聞市上, 有稱以貰物廛者, 聚雜色爲都家云, 今之爲此者, 何異於是? 成德雨鄭好仁, 罰止其身, 而若此者, 圖竊國柄, 稔惡醞釀, 未知何人伏在何處, 而終必至於誅殛而後已。 不匡之罪, 其刑爲墨, 則今予之至以擬律爲敎, 豈或過乎? 姑不盡言, 忍之又忍, 予豈爲一李家煥而然哉? 卿等見此而出語諸宰, 轉相告戒, 豈無可以闡明之道乎? 予則執其柄而已, 千枝萬轍, 泛應曲當, 則責惟在於卿等。 以今日筵說, 先從沈判府事示之以相勉也。 趙家事, 爲未決之案, 行且謀之好矣。" 仍敎承旨曰: "此筵說, 承旨與注書, 同爲錄出, 頒示諸臣。"


  • 【태백산사고본】 52책 52권 3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197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왕실-국왕(國王) / 왕실-비빈(妃嬪) / 왕실-종사(宗社) / 사법(司法) / 인사(人事) / 변란(變亂) / 역사(歷史) / 정론(政論) / 사상-유학(儒學) / 사상-서학(西學) / 출판-서책(書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