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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 51권, 정조 23년 6월 4일 신묘 2번째기사 1799년 청 가경(嘉慶) 4년

불순한 학설을 물리치는 방도에 대해 신하들에게 이르다

차대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올해는 바로 온릉이 복위한 60돌이 되는 해이기 때문에 지난번 전교에서도 이미 말하였다마는 조금이나마 추모하는 뜻을 나타내기 위하여 오늘 향과 축문도 직접 내주었다.

신도공(信度公)의 일은 알지 못하는 자는 필시 옳으니 그르니 말이 많을 것이다마는 이 일은 그렇지 않은 점이 있다. 그가 갑자년의 일에 간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설령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송(宋)나라의 왕륜(王倫)의 일과 같다. 왕륜이 처음에는 화의론을 주장하여 청론의 공격을 받았으나 마침내 한번 죽음으로써 군자들의 칭송을 받았다. 더구나 애당초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없는 신도공의 경우야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하였다. 좌의정 이병모가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참으로 지당합니다. 대개 그의 처지로 보아 충분히 화를 면할 수 있었지만 끝내 구차스럽게 모면하려 하지 않았으니, 그의 우뚝한 절개를 알 수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존창(李存昌)에 대해서 감사의 장계에서는 용서해 주자고 청하였다. 깨달았다고 하였고 보면 말라 죽게 하는 것은 또한 불순한 책을 불사르고 불순한 사람을 사람다운 사람으로 만드는 의리가 아니다. 심환지(沈煥之) 판부사는 의논 가운데에, 그것이 참으로 깨달은 것은 아니라고 하기는 했으나 그 말은 오히려 억측에 가깝다. 성인(聖人)이 《주역(周易)》을 만들면서 혁괘(革卦)에서, 그 태도부터 고치고 마음을 고치는 데에 이르게 하였다. 어찌 먼저 마음부터 고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설령 이존창이 과연 마음을 고친 실지가 없더라도 용서하자는 감사의 장계가 올라온 이상 조정의 체면으로서야 어찌 의심을 가지고 용서에 인색하게 해서야 되겠는가."

하니, 이병모가 아뢰기를,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감사의 장계가 경솔함을 면치 못한 듯합니다. 그가 이미 여러 해를 감옥에 갇혀 있었으니, 이른바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형장을 이기지 못하여 그런 것이지 반드시 정말 반성하여 새롭게 된 것은 아닌 듯합니다. 완전히 용서하는 일을 가벼이 의논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오늘날 온 세상이 모두 비린내나고 더러운 와중으로 휩쓸려 들어가고 있는데도 우리 나라만은 유독 깨끗함을 보존해 왔다. 그런데 어찌하여 불순한 학설이 횡행하여 그 피해가 장차 오랑캐나 금수와 같은 지경에 이르게 되었단 말인가.

지금 이 불순한 학설을 물리치는 방도는, 나는 바른 학문을 밝히는 길뿐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대해서는 앞뒤 경연의 하교에서 거듭 당부했을 뿐만이 아니다. 먼저 조정에서부터 인재를 등용하거나 버릴 때에 반드시 경학에 밝고 행실이 바른 사람을 구하여 등용하고 육예(六藝)의 과목에 들어 있지 않은 자는 물리치고 배척하여 조금도 용서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뒤에야 불순한 학설이 절로 사라질 것이다.

내가 한 세상을 속이려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위로는 높은 벼슬을 하는 사람으로부터 아래로는 조정에 널려 있는 관리들에 이르기까지 태반이 경학의 뜻에 대해서는 이야기하기를 부끄러워하고 바른길을 벗어나 알맹이 없는 외형만을 오로지 일삼는 사람들이다. 문체는 난잡하고 글씨는 바르지 못하며 몸은 선왕의 행실을 본받지 않고 입은 성현들의 말씀을 말하지 않는다. 위의나 용모에 이르러서도 모두가 이 모양들이다. 혹 타고난 자질이 도에 가까운 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먼저 배우는 것이 이런 것들이고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속된 투이기에 도도하게 흐르는 폐단을 구제할 만한 약이 없다. 바른 학문이 좋다는 것을 마치 고기 음식이 맛있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참으로 알아서 애쓸 것도 없이 실천할 수 있는 자가 몇 사람이나 되겠는가.

만약 후대에 이런 무리들이 선배가 되어서 후배들을 가르치게 된다면 세도에 끼칠 피해가 필시 오늘날의 불순한 학문보다 더 심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주자(朱子)《대학(大學)》의 서문에서, 시나 문장을 기억하고 암송하는 것과 허무하고 적멸한 것 이외에 따로 권모술수라고 하는 한 가지가 더 있다고 한 그것인 것이다.

어려서 공부하는 자가 가까이 부모를 섬기는 일이나 멀리 임금을 섬기는 일에 대한 진정한 도리에는 관심이 없는데다 경서는 읽지 않고 다른 책을 먼저 읽으니, 평소 마음속에 주객(主客)과 내외(內外)의 구분이 이미 분명하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불순한 학설이 이와 같이 쉽게 들어가게 되고, 결국에는 명교(名敎)까지 내던져버리고야 마는 것이다.

우리 나라의 문장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최항(崔恒)이나 서거정(徐居正) 등의 평이하고 질박한 글을 근래에는 글로 보지를 않는다. 그들이 일삼는 것은 명나라 말기와 청나라 초기의, 경학을 벗어난 올바르지 못한 글들이다.

명나라 문장의 폐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일전에 우연히 정초(鄭樵)《통지(通志)》를 보았는데, 반고(班固)의 문장을 깊이 배척한 것이 바로 내 생각과 꼭 일치하였다. 반고사마천의 문장은 예로부터 아울러 일컬어지고 있지만, 나는 곽광(霍光)이나 조 황후(趙皇后) 등의 열전(列傳) 따위가 벌써 소품(小品)의 뿌리가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 또한 육예를 벗어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1책 51권 74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192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왕실-종사(宗社) / 사법(司法) / 정론(政論) / 역사-고사(故事) / 사상-서학(西學) / 사상-유학(儒學)

○次對。 上曰: "今年, 卽溫陵復位之舊甲, 故向日傳敎亦已言之, 而以一分追慕之意, 今日香祝, 亦爲親傳矣。 信度公事, 不知者必應有雌黃之論, 而此有不然者。 非特其不干於甲子事而已, 設有可議, 如王倫。 始雖以和議, 見斥於淸論, 而畢竟以辦得一死, 爲君子所稱許。 則況於信度之初無可議者乎?" 左議政李秉模曰: "聖敎誠至當。 蓋其所處之地, 優可免禍, 而終不肯苟免者, 可知其卓然矣。" 上曰: "李存昌, 道啓請宥。 而旣云覺悟, 則使之瘦斃, 亦非火其書人其人之義。 沈判府議中, 雖言其非眞箇覺悟, 而此猶近於億逆。 聖人作《易》, 《革》之一卦, 許其革面, 而至於革心。 則安能先責其革心乎? 設令存昌果無革心之實, 道啓登聞之後, 在朝廷事面, 豈可致疑而有所靳惜乎?" 秉模曰: "以臣愚見, 則道啓恐未免率爾。 渠旣多年滯囚, 所謂覺悟者, 似是不勝刑杖而然, 未必眞箇自新。 恐不可輕議全宥矣。" 上曰: "今日海內, 盡入於腥羶醜穢之中, 而一隅靑邱, 獨保乾凈。 何來邪說之肆行, 其害將至於夷狄禽獸? 目今攘斥之方, 予則曰明正學而已。 前後筵敎, 不啻申申。 而先自朝廷用捨之際, 必求經明行修之士, 諸不在六藝之科者, 擯之斥之, 不少假貸。 然後邪說庶幾自息。 予非欲誣一世。 而凡今之人, 上自致位崇顯, 下至布列朝著, 太半是恥談經旨, 專事外騖之人。 文體則噍淫, 筆畫則欹斜, 身不服先王之行, 口不道先聖之言。 至於耍儀也容貌也, 皆是此箇樣子。 雖或有天姿近道之人, 而所先學者, 時樣也, 所未脫者, 俗套也, 滔滔流弊, 莫可救藥。 其能眞知正學之可好, 如芻豢之悅口, 不待勉强而爲之者, 能有幾人哉? 若使來後, 此輩爲先進而敎後輩, 則世道之害, 必將有甚於今日之邪學矣。 此正朱子 《大學》序中, 記誦詞章, 虛無寂滅, 二者之外, 別有權謀術數一段事也。 幼而學之者, 旣不在於邇事遠事之眞正道理, 而不讀經書, 先讀他書, 平日心中主客內外之辨, 已不分明。 故邪說之易入如此, 畢竟至於悖棄名敎而後已。 雖以我朝文章言之, 如崔恒徐居正之平淡質實者, 近來則不以文視之。 其所從事者, 不過是初不經不正之書。 文之弊, 固不可勝言矣。 日前偶見鄭樵 《通志》, 深斥班固之文者, 正與予意脗合。 文章, 自古竝稱, 而予則謂霍光趙皇后等傳, 實爲小品之根柢。 此亦可謂六藝之外矣。"


  • 【태백산사고본】 51책 51권 74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192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왕실-종사(宗社) / 사법(司法) / 정론(政論) / 역사-고사(故事) / 사상-서학(西學) / 사상-유학(儒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