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조 판서 서용보를 불러 온릉 관리에 대해 하교하다
예조 판서 서용보(徐龍輔)를 불러 접견하였다. 하교하기를,
"온릉(溫陵) 국내(局內)의 좌우 및 주산(主山)의 재실(齋室) 근처에 있는 신씨(愼氏)의 묘와 성씨(成氏)의 묘에 대해, 무덤으로 드나드는 길을 닦고 나무를 베어내는 일을 사릉(思陵) 국내의 정씨(鄭氏)의 산소에 시행한 전례대로 하도록 하여 능을 지키는 관리로 하여금 각별히 돌보게 하였으며, 본가(本家)의 사람들도 바라보며 제사를 올릴 수 있도록 허락하였었다.
그런데 지금 들으니, 제단(祭壇)과 사초(莎草)를 수축하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혹시 능을 지키는 관리가 연전에 내린 하교를 여러 집안에 분명하게 알려주지 못해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집안이 영세하고 오래도록 침체되어 때맞춰 그 비용을 마련해 낼 수가 없어서 그런 것인가? 예조로 하여금 신씨와 성씨 집안의 여러 후손들을 깨우쳐 타이르게 하고 재랑(齋郞)에게 단단히 신칙하게 하라.
또 신씨와 성씨의 여러 무덤들이 비석이 있는 것 외에는 뭉개져서 분별이 안 되는 곳이 많다고 한다. 그와 같은 곳들을 나무 뿌리가 엉키도록 내버려둔다면 오르내리시는 왕후의 영령이 필시 저승에서 안타깝게 여길 뿐만이 아닐 것이다. 또한 예조로 하여금 엄하게 신칙하여 혹 그 뿌리의 줄기들을 잘라내기도 하고 혹 번식을 못하도록 하기도 하면서 표식을 세워 구역의 한계를 두어 서로들 준수하게 하도록 하라. 그렇게 하면 오래될수록 왕후의 생각에 깨닫는 바가 더욱 선명해져서 기쁜 마음으로 헤아리는 바가 있게 될 것이다.
오늘의 이 하교를 능을 지키는 관리가 감히 유념하여 준행하지 않아서야 될 일인가. 또한 예조로 하여금 판(板)에 새겨 재소(齋所)에 게시하도록 하라.
이 일로 인하여 생각나는 것이 있다. 사릉 국내에 있는 정씨의 무덤들에 대해 무덤을 보수하고 나무하는 것을 금하고 바라보며 제사를 지내게 하는 등의 일을 한결같이 선왕조에서 정한 법식대로 거행하고 있는가? 민회(愍懷)038) 의 무덤과 여러 강씨들의 산소에 대해 연전에 풀이 무성하다는 말을 비로소 듣고 제거하도록 하고 또한 사릉과 온릉의 국내에 있는 여러 산소들의 예대로 하도록 허락하였는데, 지금 모두 하나하나 준수하고 있는가?
또 생각하니, 장릉(長陵) 바깥 오른쪽 산줄기에 있는 이른바 정씨(鄭氏)의 산소라고 하는 곳은, 성씨나 정씨의 무덤과는 사정은 다르지만 그 집안 사람들로 하여금 관리할 수 있도록 한 것은 거룩한 선왕이 뜻이 있어 한 일인데 과연 오늘날까지 선왕조의 하교대로 시행되고 있는가? 그리고 제릉(齊陵) 근처에 있는 여흥 부원군(驪興府院君)의 묘도 수교대로 시행하고 있는가? 일체 상세히 물어서 적어 올리도록 하라.
또 생각하니, 정릉(貞陵) 복위(復位) 때의 사적(事蹟)이 흡사 온릉의 일과 같은데, 복위한 뒤 제사를 지내는 날에 능의 지역 안에 영험스러운 비가 많이 내렸으므로 선정(先正)과 당시의 정승과 여러 신하들 및 능의 공사일을 맡았던 여러 사람들이 모두 그 사적을 기록하였다는 말이 있다.
그달은 바로 우리 신덕 왕후(神德王后)께서 태어나신 달이기도 하다. 왕후의 본적은 상산(象山)이고 국구인 강윤성(康允成)도 상산 부원군이라고 칭하였는데, 상산의 또 하나의 명호는 바로 곡산(谷山)이다.
일찍이 고사를 보니, 왕후께서 시냇물을 떠서 그 위에 버들잎을 띄워 올리니 태조께서 그의 태도를 기이하게 여겨 뒤에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때의 그 시내는 바로 용봉(龍峰) 앞에 있는 용연(龍淵)이고 용연 옆에는 궁실터가 있는데 주춧돌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왕후의 본가 집터도 찾아낼 수가 있을 것이다. 읍지(邑誌)에 혹 실려 있는 곳이 있는지, 또는 나이 많은 노인들이 분명하게 전하는 곳이 있는지를 또한 예조로 하여금 해당 도에 관문을 보내 물어서 장계로 아뢰게 하도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1책 51권 73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191면
- 【분류】왕실-종사(宗社) / 왕실-비빈(妃嬪) / 풍속-예속(禮俗)
- [註 038]민회(愍懷) : 소현 세자빈 강씨.
○己丑/召見禮曹判書徐龍輔。 敎曰: "溫陵局內左右及主山齋室近處所在愼墓、成墓, 墓道除治, 樹木剪伐, 一依思陵局內鄭山例, 令陵官, 各別顧見, 本家人, 亦許望祭矣。 今聞壇莎, 無人修築云。 豈陵官之以年前下敎, 不能分明知委於諸家而然乎? 抑零替而寢遠, 莫能以時辦備而然乎? 令禮曹曉諭於愼、成諸家後孫, 嚴飭於齋郞。 愼、成諸山, 有碑有碣外, 平夷不辨處, 多有之云。 若於如彼諸處, 任其木根之盤錯, 則不惟聖后陟降之靈, 必有憫惻於洋洋之中。 亦令禮曹嚴飭, 或艾其根條, 或禁其播植, 定標置限, 轉相遵守。 則愈遠而愈當曉然於昭聖后之思, 怡豫欣悅, 有可以度測。 惟今之敎, 爲陵官者, 敢不着意遵行乎? 亦令禮曹, 揭板於齋所。 因此思之。 思陵之諸鄭墳山, 修瑩禁樵望祭, 一遵先朝定式擧行乎? 愍懷墓諸姜之山, 年前始聞鞠蕪蓊翳, 使之疏拓, 亦許倣用思陵、溫陵局內諸山之例, 今皆一一遵守乎? 又思之, 長陵外白虎所謂鄭山, 事面雖異於成與鄭墳, 而使家人許其修治, 聖意有在, 果至今遵用先朝下敎? 而齊陵近處所在驪興府院君墓, 亦依受敎爲之乎? 一體詳問草記。 又思之, 貞陵復位事蹟, 恰如溫陵事實, 而復位之後行祀之日, 靈雨祁祁於局內, 先正與故相諸人及敦匠者, 俱有紀績之說。 是月, 卽我神德聖后誕降之月也。 聖后籍本象山, 而國舅康公允成, 亦稱象山府院君, 象山一號, 卽谷山也。 嘗見故事, 聖后㪺斗溪水, 泛楊葉進之, 聖祖奇其所對, 後有舟梁之儀。 人云溪是龍峰之前龍淵, 而淵旁有宮墟, 柱石宛然。 然則聖后本第舊址, 又足可徵。 邑誌或有所載, 又或故老之有詳明傳道處乎, 亦令禮曹, 關問該道, 使之狀聞。"
- 【태백산사고본】 51책 51권 73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191면
- 【분류】왕실-종사(宗社) / 왕실-비빈(妃嬪) / 풍속-예속(禮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