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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 51권, 정조 23년 5월 5일 임술 1번째기사 1799년 청 가경(嘉慶) 4년

서학과 이가환의 집에 증직하는 문제로 이병모와 차대하다

차대(次對)를 하였다. 좌의정 이병모가 아뢰기를,

"신은 이가환의 집에 증직하는 일에 대하여 속으로 염려스럽고 탄식스러운 마음이 있습니다.

근년 이래로 불순한 학문이 날로 성하게 번지고 있습니다. 이른바 권일신(權日身)의 무리는 지금 이미 죽었으나 그 이웃 마을에 점점 물이 드는 것은 오히려 다시 이전과 같으며, 호남(湖南)까지도 선동될 우려가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대개 그 뿌리를 파내지 않고 그 말단만을 다스렸기 때문에 이러한 폐단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일전의 하교에 대해서 신이 성상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의 집안은 선대로부터 일찍이 사사로이 당파를 짓는 의논을 한 적이 없고 신과 가환의 사이에는 지난날에도 노여움을 품은 적이 없으며 오늘날에도 원수를 진 일이 없는데 어찌 감히 털끝만큼이라도 잡된 생각을 품겠습니까만, 근래에 불순한 학설의 피해가 점차 더욱 넓어지고 있으니, 이런 생각을 하면 간담이 서늘합니다.

이른바 죽은 뒤에 벼슬을 추증하는 일은 출세하여 이름을 날려 부모를 드러내는 일인데, 가환 같은 자는 곧 불순한 학문을 주장하는 세력의 괴수로서 제사를 폐지하여 윤리를 끊어지게까지 하였으니 그의 할아비와 아비에게 죄를 지은 자입니다. 그의 할아비와 아비도 어찌 추증하는 벼슬을 편안히 받으려고 하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벼슬을 추증하는 일을 시행하지 말도록 하는 명을 속히 내려야 한다고 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비록 이러하나 내 생각은 그렇지 않다. 설령 가환에게 참으로 그러한 죄를 범한 형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미 스스로 새 사람이 되도록 허락하였고 보면, 굳이 이것으로 죄를 삼을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가 외방인 호남의 고을에 수령으로 있을 때에 불순한 학문을 하는 자들을 적형(賊刑)으로 다스렸고 그전에 또 상소를 하여 스스로를 해명한 일도 있었다. 이러한 자들로 하여금 서로 단속하고 깨우치게 해서 그것으로 그 허물을 속죄하도록 한다면 불순한 학설을 물리치는 효과가 필시 다른 사람들보다 나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지난 일을 뒤미쳐 논란하니, 새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소망을 끊어버리는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병모가 아뢰기를,

"성상의 분부가 비록 이러하나, 신은 모든 일이 염려가 됩니다. 근래의 이른바 한 무리의 중인(中人)들이 저지른 잘못이라고 하는 것은 오로지 가환에게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가 문학적 명망이 조금 있기 때문에 모두들 휩쓸려 그를 추종하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난 일을 지금 와서 다스린다면 도리어 효과없는 임시 방편에 가까울 것이니, 차라리 바른 학문을 크게 밝혀 불순한 학설이 절로 수그러들도록 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예로부터 갈 데가 없는 사람들이 재주를 안고 한을 품고서 올바른 도리를 저버리고 문득 정도를 벗어나 다른 길로 빠져 들어가는 수가 많다. 이른바 중인(中人)이라는 자들은 나아가 사대부가 될 수도 없고 물러나 상민(常民)이 될 수도 없어 스스로 불우한 처지에 절망하며 실제적인 일에는 뜻이 없다. 간혹 재능이 조금 있는 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기량을 펴보고 싶은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문득 망녕된 생각을 하여 오로지 새로운 것만을 숭상하게 된다. 그들과 함께 배우고 익히는 자들은 경학(經學)에 종사하는 사람이 아니다. 이 때문에 그 학설이 쉽게 들어오는 것이니, 형세로 보아 도도하게 흐르는 폐단이 반드시 이르게 되어 있다.

옛날에는 초학자를 가르치는 법이 먼저 《대학(大學)》, 《논어(論語)》, 《맹자(孟子)》, 《중용(中庸)》, 《시경(詩經)》, 《서경(書經)》으로 가르치고 그 뒤에 차차로 《사기(史記)》를 가르치고 범위를 넓혀 문장가(文章家)의 글을 가르쳤다. 그런데 여기에 반대로 하는 자들은 먼저 《좌전(左傳)》, 《국어(國語)》, 반고(班固)《한서(漢書)》, 사마천(司馬遷)《사기(史記)》로부터 시작하고 그 뒤에 비로소 경서(經書)를 가르친다. 이래서 혈기가 정해지기 전에, 일상 생활에 꼭 필요한 사덕(四德)이나 오상(五常) 등의 학설을 들어보지 못하니, 어떻게 바른 학문이 마음속에 쉽게 받아들여질 수가 있겠는가.

내가 고 정승 채제공을 만났을 때마다 이르기를, ‘경들의 친지들에 대해서 지금부터라도 먼저 경서를 가지고 초학을 가르친다면 무릇 의리냐 아니냐의 갈림길에 관계되는 일에 있어서 그 분명히 깨우쳐 아는 바가 필시 다른 책보다 나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채 정승도 그렇겠다고 하였다.

오늘날의 폐단은, 동이냐 서냐 남이냐 북이냐와 저쪽과 이쪽의 같고 다름을 논할 것 없이, 평소 당연히 행해야 할 일상적인 일을 버리고 명나라와 청나라의 괴이한 문체가 있는 줄만 아는 것이다. 《패관잡기》에 이르기까지 온갖 책들을 정말 열심히들 읽고 있다. 이른바 명나라와 청나라 이후의 문장이라고 하는 것은 비록 많이 읽으려고 하더라도 결코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결국 얻는 것이 어떤 모양이 되겠는가. 작게는 사람을 속이고 물건을 취하는 거간꾼의 술수가 되기 때문에 한 번 구르면 바른 학문을 할 수가 없게 되며 두번 세번 구르면 마침내 바로 불순한 학설로 흘러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크게는 아비도 안중에 두지 않고 임금도 안중에 두지 않는 귀신이나 물여우 같은 자가 되어서 자신의 몸도 자신의 집안도 보전할 수가 없게 된다. 수십 년 이래로 대대로 벼슬을 한 훌륭한 집안 가운데 무사한 집안이 거의 드물다. 말이 여기에 미치니 춥지도 않은데 몸이 떨린다.

올바른 학문이 전혀 맛도 없고 뜻도 없는 듯하더라도, 오늘날의 세상에 살면서 오늘날의 폐단을 바루려면, 반드시 먼저 올바른 학문을 높이고 장려해야 한다. 그런 뒤에야 이단을 물리칠 수가 있다.

내가 일전에 내각(內閣)에 보관되어 있는 일처리 문서[形止案]를 우연히 보았더니, 이른바 불순한 학설을 담은 책자로서 연전에 옥당과 내각에서 거두어들여 불태운 것이 도대체 몇권이나 되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였다. 전에는 그런 책자가 넓게 퍼져 있었어도 점점 물들어가는 걱정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요즈음에 이와 같이 성행하는 것은, 종합하여 말하건대, 사대부들의 지조와 취향이 높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또 종합하여 말하자면 양기(陽氣)가 쇠퇴하고 음기(陰氣)가 치성하여 바른 학문은 사라져가고 불순한 학설이 세차게 번지고 있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대낮에 나타난 반딧불처럼 우임금의 솥에 비친 잡귀신처럼 그 빛을 드러내고 그 형체를 내보이고 있는 것이다.

근래의 풍속을 보면, 경술(經術)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며 오로지 옆길로만 치달아, 말이 경학에 미치면 황당한 헛소리를 하는 것으로 본다. 공당(公堂)에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도 말하는 것이라곤 외설스럽고 비루한 이야기들이며, 조금은 체신을 지키려고 말을 가려서 하는 자들도 또한 폐단될 것도 없고 해로울 것도 없는 말을 하는 데에 지나지 않는다. 조정에서도 학문을 논하고 경전을 이야기하는 선비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니, 참으로 한심스러운 일이다.

마침 우상을 새로 임명한 초기인지라 또한 말을 해두고 싶다. 사람을 뽑을 때에 반드시 명망과 실제가 모두 훌륭하고 글을 많이 읽고 몸가짐이 반듯한 사람을 찾아 조정에 본보기가 되게 하여 폐단의 습속을 한번 변환시킨다면, 가환과 같은 자를 도리어 발탁하여 등용을 하더라도 무슨 해로움이 있겠는가. 그런데 이에 입신 양명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으로써 견책하고 이미 증직한 것까지 빼앗는다면 지나치게 박절한 것일 뿐만 아니라 불순한 학설을 물리치는 데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하였다. 병모가 아뢰기를,

"성상께서는 반드시 바른 학문 높이는 일을 급선무로 삼아야 한다고 분부하시지만, 오늘날 불순한 학문의 폐해는, 비유하자면, 중병이 든 환자가 밖에 불순한 기운의 응어리가 맺혀 비록 인삼과 부자를 넣어서 지은 진기한 약제로 처방을 하더라도 치료할 수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반드시 선행을 드러내고 악행을 처벌하는 일이 아울러 행해지고 형법(刑法)이 합당하게 시행된 뒤라야 비로소 성과가 있게 될 것입니다.

가환 같은 자는 성스러운 시대에는 응당 귀양을 보내야 할 자이니, 증직을 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애당초 거론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신이 오늘 아뢰는 바는 참으로 고심을 하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만일 윤허하지 않으신다면 신을 견책하시더라도 신은 감히 사양하지 않겠습니다만, 신의 말을 그르다고 여기지 않으신다면 속히 처분을 내리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이가환 한 사람을 배척하더라도 무슨 보탬이 있겠는가. 내가 이가환을 등용하고 홍낙안(洪樂安)을 몹시 배척한 것이 마치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이 뒤집어진 듯함이 있지만 내가 어찌 따져 생각해 보지 않고서 그렇게 하였겠는가.

대개 홍낙안은 그때의 사단이 바로 죽은 채 정승을 등용하려고 하던 때에 있었는데, 내가 채제공 정승을 등용하려고 한 것은 또한 취한 바가 있었던 것이다. 이번 제문에도 세 가지 의리를 한 가지로 잡고 지켰다는 말이 들어 있다. 그 글귀가 60구나 되는 것도 대개 알아줌을 받아 권장 등용된 사유를 서술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홍낙안 같은 자가 이에 감히 그 사이에서 일을 뒤흔들 계책을 부려 의도적으로 사심을 가지고 틈을 타서 농간을 부렸다. 그가 감히 몰래 판도를 뒤집을 생각으로 그렇게 한 것인가. 염(濂)·락(洛)의 오현(五賢)을 종사(從祀)하기를 청하는 것과 같은 일에 대해서도 그가 감히 잡된 생각을 품고 그렇게 하였단 말인가.

벌을 주고 상을 주는 일은 나 한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것이니, 벌주고 상주는 일이 어찌 아래로 옮겨갈 수가 있겠는가. 내가 지금 경들을 믿고 등용하였는데 설혹 이와 같은 절실한 참소가 있다고 한들 내가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동요가 되겠는가. 내가 한결같이 법을 지켜나가는 일은 오직 이런 일들을 엄하게 배척하는 데에 달려 있는 것이다."

하였다. 병모가 아뢰기를,

"그때에 신은 강 밖 교외에 있으면서 그 긴 글을 보게 되었는데 역시 어떤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홍낙안을 등용하느냐 마느냐 하는 일은 본디 이 일과는 관계가 없으며 낙안가환도 굳이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만약 이 일을 모르는 사람이 밖에서 갑자기 보게 된다면, 불순한 학설을 배척하다가 도리어 벌을 받게 되었다는 것을 가지고 필시 형정(刑政)이 뒤바뀌었다고 할 것인데, 이것 또한 경들이 마땅히 드러내 밝혀야 할 바이다.

이가환의 일은, 제사를 폐지했다는 등의 말이 비록 온 세상에 나돌더라도 사람들의 말을 또한 어찌 모두 믿을 수가 있겠는가. 근래에는 불순한 학문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다고들 하던가?"

하니, 병모가 아뢰기를,

"요즈음은 온 나라 구석진 곳에서까지도 서로들 모이고 있다고 하니, 참으로 말로 하기 어려운 걱정이 있습니다만, 바로잡아 구제할 방법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조정에서 모든 일이 합당하게 된 뒤라야 근본이 서고 원기가 채워져서 불순한 병의 빌미가 물리치지 않아도 저절로 물러갈 것이다. 경은 중병 환자에게 인삼과 부자로 지은 약제를 먹이는 일을 가지고 비유를 하였으나 온갖 병이 저절로 물러가는 것은 사실 인삼과 부자가 진원(眞元)을 증진시키는 데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사지와 몸 구석구석의 그 많은 병든 곳을 어찌 매 증상마다 그것을 치료하는 약제를 쓸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안을 닦고 밖을 물리치는 것을 가지고 말하자면, 반드시 밖을 방비하는 일에 전혀 유의하지 않는 것은 아니더라도, 그 근본은 반드시 안을 닦는 일을 우선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계책으로는 물러나 근본을 닦는 일보다 나은 것이 없다.

글은 경전을 위주로 하고 행실은 효성과 우애를 근본으로 하며 집에서는 어버이를 섬기고 나가서는 임금을 섬기되, 평소의 일상적인 언행에서부터 부지런히 힘써서, 잡되고 경박한 말을 하지 말며 괴상한 책은 읽지 말아야 한다. 그리하여 밥을 먹을 때에는 밥에 부끄러움이 없고 잠을 잘 때에는 이부자리에 부끄러움이 없고 평소 거처할 때에는 아무도 없는 방구석에서도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 세속에서 이른바 재미없는 말이라거나 웃음거리 일이라고 하는 것들을 착실히 실천해서 조금이라도 그냥 지나감이 없어야 한다. 그런 뒤라야 효과를 거두는 방도가 있게 될 것이다.

근래에 보면 조정에 참다운 기풍이 전혀 없다. 지난 수십 년 동안만을 거슬러 헤아려 보더라도 습속의 모양이 이미 아주 달라졌다. 더구나 천년 백년 전이야 이야기할 수가 있겠는가. 근래 경연의 체모가 영 말이 아니다. 조정이 이러하니 시골의 일이야 알 만하다. 가까이로는 아비를 섬기고 멀리는 임금을 섬기는 것이 애당초 두 가지 이치가 아니라면, 집에서도 삼가 바른 몸가짐을 지니지 못하고 지낸다는 것을 또한 알 수가 있다. 비록 겉모습을 가지고 보더라도 화려한 옷이 온통 오늘날의 유행이 되었다. 내가 일찍이 고 정승 김종수(金鍾秀)에게 이르기를, ‘옛사람이 사대부가 시정 잡배와 같은 것을 근심하였는데, 오늘날의 사대부들은 역관배와 같다.’고 하였더니, 대답하기를, ‘역관배와 같을 뿐만 아니라 기생과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김 정승의 말이 분격에서 나온 말이기는 하나 만약 그의 말이 맞는 말이라면 어찌 사대부의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경의 말을 나 역시 지나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불순한 학문은 마땅히 금해야 할 바이다. 그러나 금지하는 일을 정당한 방법으로 하지 않으면 단지 수치의 단서만 만들 뿐일 것이다. 기강이 서 있지 않고 위아래가 서로 미덥지 못한 지금으로서는 금지한들 무슨 효과가 있겠는가. 한 마디로 잘라 말하자면 근본을 돌이키는 방법밖에 없다. 비유하자면, 근래 농정(農政)을 강구하는 일과 같은데, 사람들이 필시 오활하다고 비웃을 터이지만 실제로는 이것이 바로 참으로 근본을 힘쓰는 일이다. 오늘날 우선 시급히 해야 할 일은 시골에 묻혀 경전을 깊이 공부하며 행실을 닦는 선비를 찾아내어 예우하여 모셔다가 그들부터 등용하는 일이다. 그렇게 하면 바람을 일으켜 크게 변화시키는 효과가 어찌 없겠는가.

그러나 풍속을 바로잡는 방도는 또한 시기에 적절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지위에 있지 않으면 그 정사를 도모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선비된 자는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 한다. 만약 혹시라도 가서는 안 될 자리를 주제넘게 넘어들어가거나 말해서는 안 될 일을 외람되이 지껄인다면 이런 일도 또한 모두가 육예(六藝)의 교과에는 들어 있지 않은 것들이다.

나는 본래 잡된 책을 보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삼국지》 등과 같은 책도 한 번도 들여다 본 적이 없다. 평소에 내가 읽는 책은 성인과 현인들이 남기신 경전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몇년 전부터 점점 눈이 어두워지더니 올봄 이후로는 더욱 심하여 글자의 모양을 분명하게 볼 수가 없다. 정사의 의망에 대해 낙점을 하는 것도 눈을 매우 피로하게 하는 일인데, 안경을 끼고 조정에 나가면 보는 사람들이 놀랄 것이니, 6월에 있을 몸소 하는 정사도 시행하기가 어렵겠다. 그러나 경전에 대한 공부는 오히려 감히 게을리하지 않는다.

오늘날 가까운 반열에 드나드는 사람들은 과연 나의 뜻을 널리 펴고 시행하여 작으나마 모범이 될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병모가 아뢰기를,

"성상의 분부가 참으로 옳습니다. 다만 신이 아뢴 말이 충후함이 부족한 듯하나 불순한 학문을 배척하기에 급하여 돌아볼 겨를이 없었습니다. 고 정승 채제공이 살아 있을 때에 신이 일찍이 불순한 학문을 공격하는 주인으로 자처하기를 권한 적이 있었습니다. 채 정승으로 하여금 오늘날 신이 한 이 말을 듣게 하더라도 필시 지나치다고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익운(李益運)의 일도 놀라운 일이다. 벼슬을 추증하는 법은 지극히 엄하니, 이것이 어찌 이조의 관원 하나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겠으며, 설령 전례를 뛰어넘어 추증을 하였다면 이것이 관직을 해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살았을 때에 수직(壽職)으로 돈녕 도정이 되지 못했던 것도 반드시 경연에서 여쭌 뒤에 의망을 허락하는 것으로 새로 법식을 정해두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체모가 중대한 증직의 경우이겠는가."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1책 51권 50장 B면【국편영인본】 47책 180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사상(思想) / 사법(司法) / 인물(人物) / 인사-관리(管理) / 정론(政論) / 신분(身分)

○壬戌/次對。 左議政李秉模曰: "臣於李家煥贈職事, 有隱憂永歎者。 近年以來, 邪學日益熾盛。 所謂權日身之類, 今雖已斃, 而其隣里鄕黨之間, 漸染猶復如前, 至於湖南, 亦不無煽動之慮云。 此蓋不究其本而但治其末, 以致流弊之如此矣。 日前下敎, 臣非不知聖意之所在。 而臣家自臣先世, 未嘗爲黨私之論, 臣與家煥, 往日無慍, 近日無讎, 豈敢有一毫挾雜之意, 而近日邪說之害, 駸駸益廣, 思之及此, 心骨俱冷。 所謂追榮, 卽立身揚名, 以顯父母之事, 而如家煥, 卽爲邪學之魁, 至於廢祭而滅倫, 則宜其得罪於乃祖乃先。 乃祖乃先, 亦豈肯安受其貽贈乎? 臣意則其追榮, 亟命勿施宜矣。" 上曰: "卿言雖如此, 而予意則有不然者。 設使家煥, 眞箇有身犯之迹, 旣許其自新, 則不必以此爲罪。 且其外補湖邑時, 以賊刑治邪學者, 其前又有陳疏自明之事。 使如此輩人, 轉相禁諭, 以此贖愆, 斥邪之效, 必有勝於他人矣。 今乃追論往事, 不幾近於絶來蘇之望乎?" 秉模曰: "聖敎雖如此, 臣則慮無所不到。 近來所謂一隊中人輩之詿誤, 專由於家煥。 而以其稍有文譽之故, 莫不靡然從之矣。" 上曰: "如追理反近於揚湯而止沸, 豈若使正學大明, 邪說自戢乎? 從古無所於歸之蹤, 抱才齎恨, 擔却中行底道理, 輒多外入於異岐。 所謂中人之名, 進不得爲士夫, 退不得爲常賤, 自分落拓, 無意於實地。 間或有薄有才藝之人, 不堪伎倆之所使, 輒生妄想, 專尙好新。 所與學習者, 非從事於經學之人也。 以是其說易入, 滔滔流弊, 勢所必至。 昔則敎初學之法, 先以《大學》《論》《孟》《中庸》《詩》《書》敎之然後, 次及《史記》, 傍及文章家。 而反於是者, 先從《左》《國》《班》《馬》, 然後始及經書。 於是乎血氣未定之時, 不聞菽粟茶飯之四德五常等說, 安得不扞格牴牾乎? 予每對蔡故相謂曰: ‘卿等親知者, 自今先自經書敎初學, 則凡係義理關頭, 其所分曉, 必不讓他。’ 故相以爲然。 今之時弊, 無論東西南北, 彼此同異, 擔却日用常行之當然事, 只知有詭怪之體。 以至稗官雜記, 無不矻矻孜孜。 所謂以後之文, 雖欲多數誦讀, 而決不可爲者。 於是乎畢竟所得, 當作何狀? 小則只是欺人取物, 駔儈(龍)〔壟〕 斷之術, 故一轉而不得爲正學, 再轉三轉而終乃流入於邪學。 大則無父無君, 爲鬼爲蜮, 不能保其身而全其家。 數十年來, 喬木世臣之家, 無事者幾希。 言之及此, 不寒而栗。 雖似至無味極無意, 居今之世, 矯今之弊, 必先崇奬正學。 然後異端可熄矣。 予於日前, 偶見內閣所在形止案, 則所謂邪學冊子, 年前自玉署內閣, 收來燒火, 不知爲幾許卷。 在前則流布雖廣, 而未聞有漸染之患。 忽於近日, 如是肆行者, 統而言之, 則士大夫志趣不高而然也。 又統而言之, 則陽衰而陰盛, 正學微而邪說熾。 譬如螢爝之於白晝魑魅之於鼎, 現其光而出其形也。 近俗, 恥言經術, 專趨旁蹊, 語到經學, 視作謊譫。 公堂稠坐, 所言者淫褻鄙悖之說, 而稍欲自好而擇言者, 亦不過爲無弊無害之言。 朝廷之上, 亦不聞論學談經之士, 良可寒心。 適當右相爰立之初, 亦欲言及。 而取人之際, 必求望實俱優, 讀書飭躬之人, 矜式朝著, 一變弊俗, 則如家煥者, 雖反加擢用, 有何害乎? 今乃責之以不可謂立揚, 至奪其已贈之榮誥, 則非但太涉於迫切, 亦豈足爲助於闢邪乎?" 秉模曰: "聖敎必以崇正學爲先務, 而今日邪學之害, 譬如大病之人, 外邪結轖, 雖蔘附之珍劑, 力不能及。 必也彰癉竝行, 刑法得當, 然後始有成效。 如家煥者, 其在聖世, 宜在流放之典, 榮贈與否, 初非可論。 臣之今日所奏, 實出於苦心所在。 如不賜允從, 則雖譴責臣, 臣不敢辭, 而如以臣言, 不爲不可, 則亟降處分焉。" 上曰: "今雖斥一家煥, 有何益乎? 大抵予之用家煥, 而深斥洪樂安者, 有若好惡之顚倒者, 然而予豈無涇渭而然哉? 蓋樂安則伊時事端, 乃在於欲用故蔡相之時, 而予之欲用故相者, 亦有所取。 今番祭文, 有義三秉一之句。 而其文多至六十句者, 蓋亦欲敍其受知奬用之由也。 如樂安者, 乃敢於其間, 爲敲撼之計, 用意逞私, 投間惎郄。 渠敢欲潛圖換局而然乎? 雖如濂洛五賢從祀之請, 渠敢以挾雜而爲之乎? 作威作福, 在予一人, 則威福豈可下移乎? 予方嚮用卿等, 而設或有似此膚受之譖, 予其可一毫撓動乎? 予之一副規模, 惟在於此等處之嚴斥。" 秉模曰: "伊時則臣在江郊, 得見其長書, 而亦疑其有甚麽意思矣。 然而洪樂安之用不用, 固無關於此事, 而樂安家煥亦不必看作對疊矣。" 上曰: "若使不知本事之人, 從外驟觀, 則以斥邪而反被枳塞, 必將以爲刑政之倒置, 而此亦卿等之所當闡明處也。 至於家煥, 則其廢祭云云, 雖是一世之所宣傳, 人言亦豈可盡信? 近來則邪學何如云耶?" 秉模曰: "近日則天涯地角, 亦相湊合, 實有難言之慮, 而無一分可以矯捄之術矣。" 上曰: "朝廷之上, 事事得當, 然後根本立而元氣實, 邪沴之爲祟者, 不期退而自退矣。 卿雖以大病之蔘附爲喩, 而百病之自祛, 實係於蔘附之滋益眞元。 不然則四肢百骸之受其病者, 豈可每症而各施攻伐之劑乎? 且以內修外攘言之, 雖未必專不留意於外攘, 而其本則必以修內爲先。 爲今之計, 莫若退修本根。 書則以經傳爲主, 行則以孝悌爲本, 入則事親, 出則事君, 勉勉循循於庸言庸行之間, 勿爲淆薄之言, 毋讀奇詭之書。 以至於食不愧飯, 寢不愧衾, 平居而不愧屋漏。 於世俗所謂無味之言, 可笑之事, 着力做去, 無或一毫放過。 然後庶可有收效之道矣。 近觀朝廷之上, 全欠眞氣。 追計數十年間, 習俗貌樣, 已是判異。 況可議到於千百年前乎? 近來筵體放倒。 朝廷如此, 鄕黨可知。 邇之事父, 遠之事君, 初非二致, 則其居家之不能謹飭, 又可知矣。 雖以外面觀之, 粲粲衣服, 便成時樣。 予嘗謂故相金鍾秀曰: ‘古人以士大夫, 如市井爲憂, 而今之士大夫, 如胥譯云爾,’ 則對曰: ‘非但如胥譯, 乃如娼妓云。’ 故相之言, 有激而發, 而若使其言有中, 則豈非士大夫之羞恥事乎? 卿之所陳, 予亦不以爲過矣。 而邪學固所當禁。 禁之而不得其道, 則適足爲貽羞之端而已。 以今紀綱之不立, 上下之不孚, 有何禁之之效乎? 一言而蔽之曰, 反本而已。 譬如近來農政之講究, 人必笑其迂闊, 而其實則此乃眞箇務本也。 當今急務, 宜從山林之下, 窮經修行之士, 加以禮遇, 先自隗始。 則豈無風動丕變之效乎? 然而矯俗之道, 亦貴時措之宜。 不在其位, 不謀其政, 爲士者, 固當如是。 如或越俎於不當爲之地, 瀆屑於不當言之事, 則此亦諸不在六藝之科者矣。 予自來不喜看雜書。 如所謂《三國誌》等書, 亦未嘗一番寓目。 燕閑之所嘗從事者, 不外於聖經賢傳。 而年來漸覺眼昏, 今春以後愈甚, 字畫多不分明。 如政望落點, 亦費眼力, 而以眼鏡臨朝, 恐涉駭瞻, 六月親政, 亦難爲之矣。 然而經傳上工夫, 猶不敢自懈。 凡今日出入近列之人, 果能宣布對揚, 以爲一分模楷之方乎?" 秉模曰: "聖敎誠至當矣。 第臣之所陳, 似欠忠厚, 而急於斥邪, 有不暇顧。 故相蔡濟恭在時, 臣嘗勸之使自處以攻邪學之主人。 雖使故相, 聞臣今日之言, 亦必不以爲過矣。" 上曰: "李益運事, 亦可駭然。 貤贈之法至嚴, 是豈一銓官所可低仰, 而設令越例追贈, 此何異於賊職乎? 生前壽職之不得爲敦寧都正, 必待筵稟, 然後許擬, 新有定式。 況榮贈體重者乎?"


  • 【태백산사고본】 51책 51권 50장 B면【국편영인본】 47책 18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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