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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 51권, 정조 23년 3월 24일 임오 2번째기사 1799년 청 가경(嘉慶) 4년

여러 신하를 불러 정처 석방에 대해 통유하다

하교하였다.

"대신(大臣)·경(卿)·재(宰)·삼사의 제신들로 하여금 재전(齋殿) 문 밖에 와서 기다리게 한 뒤 이번에 내린 통유(洞諭)하는 윤음을 읽어 주도록 하라."

하였는데, 하교한 내용에,

"지금 조정에 있는 신하들치고 어느 누가 《명의록》의 의리가 부월(斧鉞)보다 엄하고 해와 별같이 밝다는 것을 모르겠는가. 그런데 그 근원이 어느 해에서 유래한 것인지 모르는 사람이 아직도 있다. 그것은 모년(某年)의 의리가 조금도 《명의록》 가운데에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어서 모년의 의리와 《명의록》의 의리를 서로 다른 것으로 보게 되었다. 지난번 경연에서 하교할 때에 그것들이 앞뒤로 하나로 꿰었다는 것을 대략 제시하기는 하였다. 다만 아직 문자로 나타내어 환히 알 수 있도록 하지 않은 것은 다만 차마 말할 수 없고 감히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인데, 이것이 지금까지 어언 24년이 되었다. 이번에 정치달 처의 일로 인해서 이러한 선유하는 일이 있게 되었는데, 이는 한편으로는 전년에 서로간의 다정했던 마음을 체득하여 성덕(聖德)을 드날림으로써 전년에 아름다움을 돌리기 위함이고, 또 한편으로는 《명의록》의 의리가 모년의 의리와 연결됨을 밝히기 위함이다.

대신 이하는 이 하교를 듣고 옳다고 할 것인가, 옳지 않다고 할 것인가? 받아들일 것인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인가? 깊은 밤에 관원을 불러 촛불을 밝히게 하고 이곳에 와서 선포하니, 그대들 중에서도 의당 나의 마음을 알아주는 자가 있을 것이다. 승지는 이 경연석상에서 한 전교를 전한 뒤에 굳이 강요할 필요도 없고, 또한 여러 말 할 것도 없다. 따르든 따르지 않든 간에 어느 한쪽으로 몰아지면 돌아와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내각 직제학 이만수(李晩秀)가 명을 받고 받들고 나가 윤음을 펴 읽었는데, 그 내용에,

"옛날에 우리 공부자(孔夫子)께서는 후세에 모범을 드리우고 교훈을 세우기 위해 전(典)과 모(謨)라고 편명을 달아 우리 후인들에게 남겨 주셨다. 이에 후인들이 그 뜻을 잘 계승하여 분명하게 증거하며 결정하고 보존하여 지금에 이르러서는 성법(成法)을 두게 되었는데, 《춘추》의 의리가 바로 이것이다. 의(義)라는 것은 마땅하다는 뜻이고 이(理)라고 하는 것은 공평하다는 뜻이니, 이는 천하의 지극히 공평한 이치로 천하의 지극히 합당한 의리를 행한다는 것이다. 그 큰 것을 말하면 천지도 능히 용납할 수 없고, 그 작은 것을 말하면 터럭끝으로도 능히 깨뜨릴 수가 없다. 그것은 마치 하늘에 상(象)을 드리운 것과 같이 큰데, 쉽게 볼 수 있고 알기 어렵지 않은 것으로는 인군을 높이 받들고 난적(亂賊)을 처벌하는 것보다 먼저할 것이 없다. 그리하여 《춘추》가 지어진 뒤에 인군은 인군 노릇하고, 신하는 신하 노릇하며, 아비는 아비 노릇하고, 자식은 자식 노릇하는 큰 인륜과 기강이 바로 서게 되었다. 오랜 세월 동안 주정(周鼎)과 한사(漢絲)가 우뚝하니 감히 어느 누구도 뽑을 수 없는 형세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부자의 공이다. 그런데 이른바 큰 의리라고 하는 것은 수십 가지의 은미한 말과 뜻으로 이루어져 있고 상황에 따라 합당하게 되어 있으며 정밀한 뜻이 신묘할 정도여서 포괄적으로 두루 감싸면서도 세부적으로도 합당하다. 비유하자면 마치 걸음을 옮기면 그림자의 형태가 바뀌는 것과 같아서 하나로 포괄해서 논할 수 없는 점이 있다. 그리하여 공이 있는 자를 누르기도 하고 죄가 있는 자를 풀어놓아 주기도 하며, 자취가 아직 드러나지 않았는데도 그 마음을 처벌하여 빼앗기도 하고 뜻이 아직 성취되지 못했으나 그 실정을 헤아려 인정해 주기도 하며, 중국에서 있었던 일이지만 간혹 물리치기도 하고 어떤 경우는 이적에서 있었던 일이지만 잘했다고 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춘추》를 배우는 자는 반드시 드러내서 말하지 않고 마음으로 깨달아 안 뒤에야 능히 그 은미한 경지에 나아갈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 에 구애가 되는 사람은 일에 대해서 말하기에 부족하고, 법에 제재를 받는 사람은 다스림에 대해서 논하기에 부족한 것이다.

난적을 주벌하는 것은 군부를 높이기 위해서이다. 그렇지만 가까운 친족에 대해서는 온전히 보호해 주어 난적을 주벌하는 것보다 비중을 더 두는 경우가 간혹 있다. 이는 각각의 상황이 서로 달라 어떤 경우에는 가볍게 하고 어떤 경우에는 중하게 하는 것이다. 《춘추》의 필법에 있어서 정백(鄭伯)이 단(段)을 이긴 것을 특별히 앞에 썼는데, 성인이 일을 판단하는 잣대가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순(舜)임금주공(周公)상(象)관숙(管叔)·채숙(蔡叔)을 처리한 것을 보면 또한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만일 관숙채숙이 못된 자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서 주나라 왕실의 운명이 경각에 달리는 위급한 사태가 발생하지 않았다면 주공과 같은 성인이 순임금을 살려주어 은혜를 온전히 한 것처럼 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비록 당(唐)나라 예종(睿宗)·현종(玄宗) 연간에 있었던 일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안락 공주(安樂公主)를 단지 폐위하여 서인으로 만들었고, 태평 공주(太平公主)는 처음에는 조사하여 안치시키기만 하였으니, 이는 그때에도 상고 시대와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아 그래도 볼 만한 것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나 소자는 슬프고 애통한 심정이 가슴에 가득하여 임금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즐겁지 않다. 음악 소리를 들으면 처량한 생각이 들고, 곤복을 입고 면류관을 쓰면 눈물이 난다. 그리고 머리털도 희끗희끗해졌다.

봄 이슬이 듬뿍 젖었는데 침궁(寢宮)에 와서 참배하게 되어, 내가 눈물을 흘리면서 말할 것이 있다. 내가 이미 이 자리에 올랐으니, 모년(某年)의 의리에 관계된 것을 어찌 감히 엄하게 지키고 강론하여 밝히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또한 내 개인의 사적인 마음을 가지고 용서해 주는 일도 감히 하지 않을 것이다. 이리하여 참으로 석년(昔年)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아 아름다움을 석년에 돌리고 석년에 은미했던 것을 밝힐 것이니, 임자년 재계하면서 내렸던 윤음 같은 것이 그러한 것들 중의 하나이다. 이 일도 오히려 이와 같았는데, 하물며 정치달 처(鄭致達妻)의 일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엄숙하고 충만하게 오르락 내리락하며 밝으면서도 아주 가깝게 임하여 있는 신령 앞에 이미 공손하게 고하였으니, 마음이 목석이 아닌 이상 의당 어떤 마음가짐이 되겠는가.

무릇 《명의록》 한 책은 모년의 의리를 밝히기 위한 것이다. 그 책이 비록 병신년과 정유년 사이에 이루어졌지만 그 근원은 대개 모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때문에 나 소자는 창을 베게로 삼는 의지로 분발하고 도끼를 가는 분노를 드날리며 일이 내 자신에게 속한다고 하여 혹시라도 복수하는 큰 의리에 소홀하게 하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지금 이 뜰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치고 어느 누가 이러한 것을 모르겠는가. 저 정치달 처는 비록 석년(昔年)의 동기(同氣)라고는 하지만 참으로 그만둘 수 있으면서도 그만둘 수 없는 점이 있다. 나도 또한 군자의 큰 도리에 대해서는 대략 들어 알고 있다. 어찌 굳이 이것저것 끌어다가 전혀 말해서는 안 될 데에다가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병신년 초기에는 할수없이 저와 같이 해서 우리 선왕의 성대한 덕을 밝히고 우리 자전의 음공(陰功)을 밝힌 것이다. 오늘날에 이르러서 이와 같이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첫 번째도 그렇고 두 번째도 그렇고 석년(昔年)의 마음을 몸받아서 한 것이다. 돌아보건대, 소자의 마음은 바로 석년의 마음이다. 심법(心法)이 서로 전하여 천고의 세월 동안 한 마음과 같았다.

아, 석년의 친애하는 마음은 백왕에 우뚝 뛰어나서 차마 자세하게 말할 수 없는 점이 있다. 그리고 병자년 간에 덕성합(德成閤)에서 《통감(通鑑)》을 강론할 때에 효문기(孝文紀)회남왕(淮南王)에 대한 일에 이르러 구구절절 자세하게 분석해 주자 경연에 있던 신하들 중에 눈물을 흘려 옷깃을 적시는 자도 있었다. 후생(後生) 만학(晩學)이 이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모년 이전에 이르러서도 감히 상세하게 말할 수 없고 차마 분명하게 하유하지 못할 것이 있다. 이를 직접 듣고 본 자로서 지금 다행스럽게 정치달의 처가 죽지 않고 있는데 이미 늙고 병들어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석년(昔年)에 한 것과 모년 이전에 정치달의 처에 대해 처리했던 지극한 정과 의리를 가지고 거슬러서 묵묵히 따져보건대, 초기에는 비록 사람들의 공의(公議)에 따랐지만 오늘날에 있어서는 반드시 이러한 조치가 있어야만 한다. 그런데 이러한 조치를 불만족스럽게 여겨 계속 전과 같이 해야 한다고 하면서 만약 오늘날 명을 받들어 따르지 않는다면 감히 석년(昔年)의 정신을 잘 이어받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한(漢)나라와 당(唐)나라 이후로 성인들의 세대와 멀어져 도가 어두워지게 되자 도도한 강물처럼 모두 한 길로 흘러 골육 간에 서로 해치는 짓을 하였다. 그래서 주자(朱子)가 ‘병들어 죽었는데 무엇 때문에 곡하는가.’라고 하여 후세의 인군이 된 자들을 경책했던 것이다.

대저 난리를 일으킨 역적을 처벌하는 의리는 인군이 잘 들어주는 것이다. 이것은 어느 사람이든지 다 말할 수 있는 것이어서 참으로 어질거나 어리석거나, 용맹스럽거나 겁이 많거나 간의 구분이 없다. 그러나 단지 ‘가까운 친족은 온전히 보호해야 한다.’는 말이 꺼리는 말이 되어 지사(志士)들도 입을 다물고 있다. 이번에는 대순(大舜)상(象)을 처리했던 전례에 따라 지난날의 매우 다정했던 마음을 몸받고자 하여 정치달 처의 연좌된 죄에 대하여 오늘날 석방하라고 명을 내린 것이다. 이에 대해 국사(國史)나 야사(野史)에 쓰기를 ‘참으로 용서해 주기 곤란한 죄인데 법을 굽히고 은혜를 편 것은 석년에 아름다움을 돌리고 그것을 드러내 밝히기 위해서였다.’고 한다면 의리가 깊고 정미해서 마치 해가 중천에 떠서 온 세상을 훤히 비추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러면 이것은 의리를 밝히는 중요한 전언(傳言)이 되어 우리 나라 억만년의 복이 장차 지금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비록 그렇지만 지극히 공정하고 지극히 합당한 것이 의리가 되는 점에 있어서는 공정한 것과 합당한 것과는 차이나는 점이 있는 것 같다.

어버이의 마음을 몸받는 것은 한 개인의 사적인 것이고, 큰 법을 세우는 것은 만세토록 공정한 것이다. 내가 어찌 혹시라도 사적인 것 때문에 공적인 것을 해치겠는가. 돌아보건대, 나는 이미 우리 효묘(孝廟)께서 세룡의 처를 처리했던 고사를 따라서 했다. 그리하여 섬에 두었다가 경기로 옮겼고, 경기에서는 다시 교외로 옮겼으며, 교외에 있다가는 서울로 옮겼는데, 그리하여 서울집에 머무른 지도 어언 한 해가 지났다. 그리고 아울러 도류안(徒流案)에서도 지워 그 이름을 없애버렸다. 이제 와서 그를 석방하라고 명하든 명하지 않든 이것은 붙어 있을 가죽이 없는 터럭이나 다름이 없다. 현재 성실하지 않은 폐단이 아주 많은 상황에서 한결같이 종을 훔치듯이 몰래 하는 것보다는 한번 결판을 지어버리는 것이 차라리 낫다. 그리고 섬에 옮긴 것이나 경기에 옮긴 것이나 간에 본 의리를 훼손시켰냐 시키지 않았냐 하는 여부와는 관계가 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나도 매우 많이 생각하고 따져보았는데, 이렇게 하고 나니 내 마음에 비로소 시원하였다. 비단 내 마음에 시원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늘에 있으면서 오르락 내리락하는 조종의 영혼들도 기뻐하실 것이니, 내가 이제서야 비로소 찾아가 참배할 면목이 있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의 하교는 많은 말을 고하는 데에 달려 있지 않다. 그리고 이른바 처분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대의(大義)에 덜 것도 보탤 것도 없는 것이며 연전(年前)과도 아무 차이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석년에 아름다움을 돌리고 천명함에 있어서는 하나의 바꿀 수 없는 의리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조정에 있는 신하들치고 어느 누가 감히 정신없이 받들어 따르려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오히려 계속 떠들어대며 쟁론하고 있으니, 그렇다면 석년의 아름다움이 도리어 막혀서 드러나지 않게 될 것이다. 이것은 비록 나 소자의 성신(誠信)이 여러 신하들에게 믿음을 주지 못한 것에서 기인한 것이지만 이것이 어찌 하늘과 땅의 널리 펴서 베풀어 주는 뜻과 하늘에 있으면서 오르락 내리락하며 보살펴 주는 조종의 뜻을 이어받는 것이겠는가. 옳다 그르다 하며 억지로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을 나는 차마 하지 못하겠다. 이렇게 지내며 백일 천일이 되더라도 그대로 재계하는 전각에 머무르면서 위와 아래가 서로 믿게 되는 것을 보게 된 뒤에야 의당 환궁하겠다.

아, 선대의 공렬을 드러내 밝혀 무궁한 후세에 고하는 것이 나 소자에게 있어서는 천년에 한번 있는 기회가 되니, 참으로 다행스럽고 감격스럽기도 하며 술에 취하고 꿈을 꾸는 듯하다. 그리고 부모님에 대해 맺힌 한이 이로 인해 조금 풀리고 금 칠한 첩장이 만약 이로 인해 더욱 드러나게 된다면 천년이 지난 뒤에도 의당 나의 마음을 헤아리고 나의 말에 감복할 자가 있게 될 것이다. 오늘 여러 신하들이 만약 내가 말한 것에 대해 즉시 깨닫지 못한다면 내가 20년 동안 한 세상을 교화했다고 여긴 것이 과연 무슨 일인가. 내가 모년의 의리를 부식(扶植)한 것이 조정 신하들이 《명의록》의 의리를 부식한 것보다 백배나 되는데, 이 하교를 듣는 자가 이러한 뜻을 알지 못하고 ‘혹시라도 《명의록》의 의리에 손상되는 점이 있을지도 모른다.’ 한다면, 이것은 내가 모년의 의리를 닦아 밝히지 못한 것일 뿐만 아니라 실로 내 자신부터 흐릿한 것이다. 신하로서 신하의 도리를 다하지 못해도 신하답지 못하다고 하는 것인데, 더구나 자식으로서 자식의 도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였으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내가 가지고 있는 신조는 의당 천하 사람들과 함께 할 것이니, 이것은 한 걸음 나아갈 수도 없고 한 걸음 물러갈 수도 없으며, 한 층을 더할 수도 없고 한 층을 감할 수도 없으며, 조금을 펼 수도 없고 조금을 줄일 수도 없는 것이다. 이 이른바 의리란 것은 공평하고 합당한 것이다. 주자는 두 정자(程子)를 스승처럼 대했으면서도 마음 속에 있는 호문정(胡文定)으로 문하에 온 제자들을 일깨워 가르쳐 주었다. 지금 사람들이 각기 자신의 마음 속에서 일개 정치달 처를 죽이느냐 살리느냐 하는 문제는 놔둬버리고 오늘날 환히 유시한 것을 몸받고 모년의 큰 의리를 밝히며, 오직 아름다움을 돌리고 드러내 밝히는 것으로 마음을 삼고 좀더 위를 향하여 토대를 잡는다면 사람들이 모두 부자를 외우며 익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소 신하들은 모름지기 모두 이러한 뜻을 잘 알아 듣도록 하라."

하였다. 읽기를 마치니, 좌의정 이병모(李秉模)가 아뢰기를,

"삼가 수천만 자나 되는 윤음을 듣고, 신은 참으로 감격하여 목이 메이는 것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단지 약간의 틈을 내주신다면 우러러 아뢸 말이 있습니다."

하고, 판부사 심환지(沈煥之)가 아뢰기를,

"윤음 가운데의 의리가 지극히 정미하여 신과 같이 글을 읽지 않은 자는 감히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이제 물러가서 글을 읽은 뒤에 우러러 아뢰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승지에게 명하여 유지를 내주게 하면서 이르기를,

"면대하기를 요구한다는 것은 바로 맞장구를 치지 않은 일을 이른다. 한번 붓을 적셔 쓴 것은 바로 부득이해서 한 일이다. 방금 전 하교한 뒤에 남면하고 북면하여 인군이니 신하니 하면서 어찌 차마 이 일을 다시 제기할 수가 있는가. 윤음이 일단 나가게 되니, 전일에 두 가지로 보았던 의리가 이제 비로소 그 근원이 환히 밝혀지게 되었다.

그리고 자기와 대등한 사람 이하에 대해서는 만약 친족을 위해서 아름다움을 돌린다고 한다면 타인이 된 자들도 또한 다시는 이와 같다느니 저와 같다느니 하는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더구나 이것은 차마 말할 수 없고 감히 제기할 수 없는 일이니, 말할 것이 있겠는가. 대신이 만나줄 것을 요구한 것은 어떤 일 때문인지 알지 못하겠지만 나는 차마 이 말을 다시 꺼낼 수가 없다. 방금 전에 하교한 것은 정녕할 뿐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시끄럽게 떠들어대니, 그렇다면 신하가 되어 신하의 직분을 다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비록 대신일지라도 공경하는 예를 돌아볼 수 없는 점이 있다."

하니, 병모가 아뢰기를,

"신이 만나줄 것을 요구한 것은 이 일 때문이 아니었는데 엄한 하교를 이와 같이 계속 내리니, 신은 감히 이를 받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환지가 아뢰기를,

"지난번에 정치달 처의 일 때문에 전교를 내렸는데 만약 환수한다면 응당 하교를 받들겠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1책 51권 30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170면
  • 【분류】
    정론(政論) / 변란(變亂) / 왕실(王室) / 사법(司法) / 역사(歷史)

○敎曰: "大臣卿宰三司諸臣, 齋殿門外, 皆令來待, 以今下洞諭綸音, 宣讀。" 敎曰: "凡今在廷之臣, 孰不知《明義錄》義理之嚴於斧鉞, 炳若日星? 而其源之自某年所由來, 則猶有未諦者。 以其某年義理之不少, 槪見於《明義錄》中也。 如是而某年義理, 與《明義錄》義理, 看件兩作。 向來筵敎, 雖略眎其前後一貫。 特以文字之未及渙發, 使之曉解者, 只緣不忍言不敢道, 至于今二十四年矣。 玆因鄭妻之事, 有此宣諭之擧, 一則體昔年因心之友, 闡揚聖德歸美昔年也, 一則明《明義錄》義理之接續於某年義理也。 大臣以下, 聞此敎而曰, 當乎否乎? 奉承乎不奉承乎? 達宵呼燭, 來此誕宣, 當亦有知予心者。 承旨傳此筵敎後, 不必强迫, 亦不在多言。 從違間指一歸奏。" 內閣直提學李晩秀, 承命奉出宣讀綸音, 若曰: "昔我孔夫子, 垂範立訓, 爲典爲謨, 以貽我後人。 爲後人者, 克述厥志, 明徵定保, 至于今有成法, 《春秋》之義理是也。 義者, 宜也, 理者, 公也, 以天下至公之理, 行天下至當之義。 語其大, 天地莫能容, 語其細, 絲毫莫能破。 其奕如垂, 象易見, 不難知者, 莫先於尊君父誅亂賊。 《春秋》作而後, 君君臣臣父父子子之大倫正, 大綱立。 歷數千古, 周鼎漢絲, 卓然有不拔之勢者, 夫子之功也。 然其所謂大義, 數十之微辭隱義, 時措從宜者, 精義入神, 泛應曲當。 譬如移步換形, 有非一槪論。 有功者抑之, 有罪者縱之, 跡未著而誅其心而奪之, 志未就而恕其情而與之, 在中國而或退之, 在夷秋而或進之。 故曰: ‘學《春秋》者, 必默識必通, 然後能造其微也。’ 拘禮之人, 不足以言事, 制法之士, 不足以論治。 誅亂賊, 蓋所以尊君父也。 而懿親之全, 或有重於亂賊之誅者。 彼一時此一時, 互輕互重。 《春秋》筆法, 特書鄭伯之克段, 聖人制事之權衡, 蓋在於是。 且觀於周公之處, 又有可以認得者。 若使爲者, 不與庶頑興戎, 而無室呼吸之虞, 則曾謂周公之聖焉, 而不若之全恩歟? 雖以 間事言之, 安樂只廢爲庶人, 太平初, 勘以安置, 蓋亦去古未遠, 而猶有可觀者存耳。 嗚呼! 予小子銜恤茹慟, 無樂乎南面。 鐘鼓焉悽耳, 袞冕焉泫目。 而髮又星星然耳。 春露方濡, 來展寢宮, 予將有垂涕而言之者。 予旣居此位矣, 凡係某年義理, 豈敢不嚴以守之, 講以明之? 而亦不敢以一己之私, 有所容假於其間者。 誠以昔年之心爲心, 歸義於昔年, 闡徽於昔年, 如壬子齋居綸音, 卽其一也。 此事猶尙如此, 況於鄭妻事乎? 肅肅洋洋, 陟降臨止, 已有祗告于於昭, 孔邇之前心, 非木石, 當作何懷? 夫《明義錄》一部, 闡某年之義理也。 其書雖成於丙丁, 其源, 蓋自於某年。 以是予小子, 奮枕戈之志, 揚飾鉞之怒, 不以事屬於自己而或忽討復之大義。 顧今入此庭者, 孰不領會? 彼鄭妻雖曰昔年之同氣, 苟有關於可已而不可已者。 予亦粗聞君子之大道。 何必旁引而曲援, 有所措說於不當說之地哉? 在丙申之初載, 則不得不如彼, 以明我先王之盛德, 以彰我慈殿之陰功。 而及至今日, 又不可不如是者, 一則體昔年之心也, 二則體昔年之心也。 顧小子之心, 卽昔年之心。 心法相傳, 千古猶一心。 嗚呼! 昔年因心之愛, 卓越百王, 有未忍詳道者。 且於丙子年間, 講《通鑑》德成閤, 至《孝文紀》 淮南王事, 縷縷剖析之旨, 在筵之臣, 有泣下霑襟者。 後生晩學, 何以諦悉? 至于某年以前, 亦有不敢詳道, 不忍明諭之。 承聆逮覩者, 今幸鄭妻不死, 而旣老且病, 與死等耳。 以昔年所以某年以前, 處於鄭妻之至情至義, 默究而敻溯之, 在初載則雖任他公議, 在今日則必當有是擧。 是擧之不足而又當源源如平昔, 若不奉承於今日, 敢云紹述於昔年? 以往, 聖遠而道晦, 滔滔一轍, 骨肉相殘。 故朱子有 ‘病死何哭’ 之語, 以警後世爲人君者。 大抵誅亂賊之義, 人君之所樂聞者。 夫夫也皆能言之, 固無賢愚勇㤼之分。 特於全懿親三字, 便成忌諱, 志士緘口。 今欲用大舜之例, 而體昔年篤友之心, 以鄭妻之所坐, 有今日之命釋。 國史書之, 野乘記之曰: ‘罪固難貰, 屈法而伸恩者, 以其歸美於昔年, 闡徽於昔年也云爾,’ 則(蓋)〔義〕 理之深造精微, 而如日中天, 光華普昭。 此所以爲明義之大頭臚, 而我國家億萬斯年之福, 其將自今伊始矣。 雖然至公至當底爲義理, 則眞若有纖芥差殊於公與當也。 體親心, 一己之私也, 立大防, 萬世之公也。 予豈或以私而害公? 顧予旣遵我孝廟世龍妻故事。 自島而畿, 自畿而郊, 自郊而京, 京第之留接, 亦已有年。 而幷與徒流案爻周而無其名。 則到今命釋與不命釋, 無異於皮不存之毛。 目下時樣不誠之弊爲大, 與其一味偸鐘, 無若一番出場。 且其移島移畿, 又不係於本義理之毁劃與否。 則予自有千商萬會, 而於予心如可以恔矣。 不但有恔於予心, 仰惟陟降, 悅豫在上, 小子於今, 始有歸拜之顔矣。 今日之敎, 不在多誥。 所謂處分, 旣無損益於大義, 又無異同於年前。 而於歸美闡徽, 有一副當不易之義理。 在廷群工, 孰敢不將順之不暇? 此猶爭執聒聒不已, 則昔年之徽美, 反有閼而不章之歎。 雖緣予小子誠信, 不能有孚於群工, 是豈答天地敷錫之意, 承陟降眷顧之志哉? 曰是曰非, 强事覶縷, 予不忍爲也。 雖一日二日, 以至百日千日, 仍留齋殿, 見上下相孚之效, 然後當還宮。 嗚呼! 揄揚先烈, 用詔無彊, 爲小子千一之會, 旣幸且感, 如醉若夢。 風樹之恨, 若將因此而少洩, 金泥之牒, 若將因此而彌光, 則千載之下, 亦當有亮予之心, 服予之言者。 今日諸臣, 若不能言下便悟, 予於二十餘年, 自以爲陶鑄一世者, 果何事也? 予之扶植於某年之義理者, 百倍於廷臣之扶植《明義錄》, 而聞此敎者, 不知此意, 謂 ‘或有傷於《明義》一部書,’ 則是予於某年義理, 不惟不修明, 實自予而漫漶也。 臣而不能盡臣道, 猶謂之不臣, 況以予而不能, 則天下寧有是耶? 予有所秉, 當與天下共之, 進一步不得, 退一步不得, 加一層不得, 減一層不得, 伸一分不得, 縮一分不得。 此所謂義理者, 公也, 宜也。 朱子二程如師, 而以肚裏橫却一箇胡文定, 曉解及門諸子矣。 凡今之人, 各於肚裏捨却一鄭妻殺活, 體今日之洞諭, 彰某年之大義, 惟以歸美闡徽爲心, 趲向上頭立脚, 則人皆可以爲誦習夫子也。 大小諸臣, 咸須聽悉。" 宣讀訖, 左議政李秉模曰: "伏聞綸音中, 屢千萬言, 臣固不勝感咽。 而但得借方寸之地, 則亦有所仰達之辭矣。" 判府事沈煥之曰: "綸音中義理至精至微, 如臣不讀書者, 未敢諦解。 自今退而讀書, 然後可以仰達矣。" 上, 命承旨出諭曰: "求對云者, 卽謂未出節拍之事也。 一番濡毫, 乃是迫不得已之擧。 則俄者下敎後, 南面北面, 曰君曰臣, 豈忍更提此事乎? 綸音一出, 前日之看作兩件義理, 今始洞晣源頭矣。 且於敵己以下, 若謂爲親歸美, 則爲他人者, 亦不可更言其如此如彼。 況是不忍言不敢提之事乎? 大臣之求對, 未知何事, 而予則不忍更提此言矣。 俄敎不啻丁寧。 而如是强聒, 此則不可以爲臣盡臣分言。 到今雖大臣, 敬禮有不可顧矣。" 秉模曰: "臣於求對, 非爲此事, 而嚴敎若是荐降, 臣不敢不奉承矣。" 煥之曰: "向來以鄭妻事, 初下傳敎, 若還收, 則當奉承下敎矣。"


  • 【태백산사고본】 51책 51권 30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17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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