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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 50권, 정조 22년 11월 30일 기축 1번째기사 1798년 청 가경(嘉慶) 3년

농사를 권장하고 농서를 구하는 구언 전지에 대한 배의 등 27명의 상소문

농사를 권장하고 농서(農書)를 구하는 윤음을 내렸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내년 기미년은 바로 선왕께서 적전(籍田)에서 친히 밭을 간 해이다. 50년 간을 임금 자리에 계시면서 온 나라를 덕으로 함육하셨는데, 대개 백성들을 위해 부지런하고 농사를 중히 여기는 것으로 정사와 교화의 근본을 삼았으며, 오래 사는 공효의 바탕으로 삼았다. 크고도 높은 공으로 크게 무궁한 터전을 닦으셨는데, 태세성(泰歲星)510) 이 한 바퀴 돌아서 예전의 그 기미년이 눈앞에 다가왔으니, 나 소자가 어찌 감히 선왕께서 남기신 뜻을 공경히 이어받아 그 빛나는 위업을 만분의 일이나마 드날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농사를 지어 살아간다. 그러니 농사가 잘 되지 못하면 백성들에게 곡식이 없게 되니, 백성들이 곡식이 없으면 나라가 어찌 다스려지겠는가. 나 자신이 먹는 것은 줄일 수 있지만 백성들이 끼니를 거르게 할 수는 없으니, 백성들이 끼니를 거르는 것은 그 책임이 농사를 잘못 짓는 데 달려 있다. 농사를 부지런히 짓지 않으면 어찌 가을걷이할 것이 있겠는가.

백성들이 농사지음에 있어서는, 비록 천시(天時)를 따라야 하나 마땅히 지리(地利)를 다하여야 하며, 비록 지리에 의지한다 하더라도 마땅히 사람이 해야 할 일을 다하여야 하는 법이다. 오행(五行)이 교대로 운행하는 것을 따르고 사계절에 붙어 왕성하는 토(土)의 성질을 체득하여 흙에 의지해 농사짓는 것이 백성들의 사명(司命)인바, 밭에서 일하는 수고로움이 또한 많다. 거름을 져내는 수고와, 물을 대는 수고, 호미질하여 풀뽑는 수고, 밭갈이하는 수고, 씨뿌리는 수고, 김매고 북돋아 주는 수고, 들밥 나르는 수고, 짐승 기르는 수고가 바로 그것이다. 겨울부터 봄까지 1백 일은 족히 수고하는데다가 가을이 되어 곡식이 익으면 또 이를 베어 거두어들이는 수고와 타작을 하는 수고가 있다. 그러나 수고를 많이 하느냐 적게 하느냐에 따라 풍년이 드느냐 흉년이 드느냐가 결정되니 아, 우리 농민들이 어찌 감히 수고로움을 말할 수 있겠는가.

옛날에 주부자(朱夫子)천주(泉州)장주(漳州)에서 관리가 되었을 때 산골에서 농민들을 위로하면서 새로 빚은 술을 마주하고 ‘곡식을 적기에 수확할 것에 대한 시[銍艾中熟之詩]’를 지었는데, 그것은 대개 백성들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었다. 수고하는 자는 백성들이고 그들을 위로하는 것은 아전들이다. 백성들이 수고하고 있는데 관리들이 어찌 감히 편안히 지내겠는가.

돌아보건대 우리 나라는 산으로 덮이고 바다로 둘러쌓여 있으며 기름진 들판이 많아 본디부터 입을 것과 먹을 것이 풍족한 지역이라고 칭하여 왔다. 그런데도 농사짓는 방법에 어둡고 게으른 습속이 있으며, 권농관(勸農官)은 제 직책을 다하지 못하고 시기를 놓치고 있다. 그리하여 한번 수재나 가뭄을 만나기만 하면 입을 것이나 먹을 것이 모두 떨어지게 되는데, 이것은 어째서인가? 한마디로 말하자면 사람이 제 할 일을 다하지 못하고 지리를 다 이용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농사짓는 근본은 부지런함과 수고함에 달려 있는데, 그 요체는 역시 수리(水利) 사업을 일으키고 농작물을 토질에 맞게 심으며 농기구를 잘 마련하는 것뿐이다. 이 세 가지가 그 요체인데, 그 가운데서도 수리 사업을 일으키는 것이 첫번째를 차지한다. 《주역(周易)》에서 수(水)와 지(地)가 합쳐진 것이 비괘(比卦)이고 지와 수가 합쳐진 것이 사괘(師卦)가 되는데, 이것이 정전법(正田法)의 기본 원리이다. 토질에 잘 맞게 하고자 한다면 물을 놔두고 어떻게 하겠는가. 그러므로 공류(公劉)511) 가 황무지에 살다가 황간(皇澗)을 끼고 있는 곳으로 옮겼고, 태왕(太王)512)서호(西滸) 가에 집을 지은 것이다. 그리고 농삿일에 밝은 원성(元聖)513) 도 먼저 장인(匠人)을 두어 크고 작은 수로를 만들었으며, 이를 《주관(周官)》에 기록하였다. 위(魏)나라에는 이회(李悝)가 만든 하천이 있었고, 진(秦)나라에는 정국(鄭國)의 도랑514) 이 있었으며, 한(漢)나라에는 문옹(文翁)의 못이 있었고 당(唐)나라에는 위단(韋丹)의 못이 있어서 물을 끌어 저축해 놓았다가 이것으로 밭에 물을 대었다. 그리하여 비록 비가 제때에 내리지 않더라도 6, 7월에 곡식들이 무럭무럭 자랐다.

그런데 지금은 제언(堤堰)에 관한 정사를 오랫동안 버려두어 제언에다 불법적으로 경작하는 일이 잇따르고 있다. 호남 지방의 벽골제(碧骨堤)와 호서 지방의 합덕지(合德池), 영남 지방의 공검지(恭儉池), 관북 지방의 칠리(七里), 관동 지방의 순지(蓴池), 해서 지방의 남지(南池), 관서 지방의 황지(潢池)와 같은 제언은 나라 안에서 큰 제언이라고 칭해지는데 터놓을 곳을 터놓지 않고 막을 때 막지 않아서 장마가 지나간 뒤 즉시 말라붙어 해마다 흉년이 들고 있다. 오늘날의 커다란 계책으로서는 이미 만들어져 있는 큰 제언들을 먼저 손보는 것보다 더 앞서는 일이 없으며, 이를 미루어 나가서 모든 일을 골고루 베풀어야 한다. 그리하여 여러 도로 하여금 각자 자기 관할 구역 안에서 자신들의 능력을 다 바치게 한다면 정성과 노력이 이르는 바에 따라 그 효과가 금방 드러날 것이다.

그리고 수리의 효과는 토질의 적절함과 서로 잘 맞은 뒤에야 나타나는 법이다. 평평한 땅과 습한 땅, 밭두둑과 밭고랑은 각각 등급이 다르고, 늦벼와 올벼, 기장과 조는 성질이 다르며, 습한 땅에는 벼가 잘 자라고 마른 땅에는 오이를 심는 법이다. 빈(豳) 땅 사람들은 밭을 새로 일구어서 보리를 심었고, 기(岐) 땅 사람들은 잡초를 베고 밭을 갈았으며, 온(溫) 땅 사람들은 보리를 중하게 여기고 낙(雒) 땅 사람들은 벼를 중하게 여겼으니, 이는 바로 《시경(詩經)》에서 읊고 있는 것이다. 벼는 높고 건조한 땅에 심고 기장은 평평하고 비옥한 땅에 뿌리는가 하면 기름진 땅은 모두 다 담배를 심는 밭이 되고 말아서 농사가 형편없게 되었고, 명산(名山)은 대부분 화전(火田)으로 일궈졌으나 곡식은 흔해지지 않고 있다. 남쪽 지방에서 잘 자라는 것이 북쪽 지방에는 적당치 않으며, 산골짜기에 잘 자라는 것이 들판에서는 잘 되지 않는 법이다. 그런데 남쪽 지방이나 북쪽 지방이나 농사짓는 방법이 똑같고 언덕과 습지를 구별하지 않고서 이앙법(移秧法)만을 위주로 하고 씨를 심는 자가 드무니, 세상에서는 이 두 가지 방법의 이해가 엇비슷하다고 하지만 필경에는 해로운 점이 둘일 경우 이로운 점은 한 가지가 될 뿐이다. 이에 제때에 비가 내리지 않으면 흉년이 드는데, 이는 어느 곳이나 다 그러하다.

농기구를 편리하게 이용하는 방법에 이르러서는, 우리 나라 사람들은 더더욱 어두워서 복희씨(伏羲氏)신농씨(神農氏) 시대 이전과 다름이 없으니 이에 대해서는 《시경》에 나오는 창고나 풀 베는 기구가 진실로 지금보다 나았을 것이다. 단지 그 가운데서 긴요한 것만 말한다면, 수차(水車)는 가뭄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고, 수레는 두 사람 몫의 일을 하기 위한 것이며, 대바구니는 곡식을 저장하기 위한 것이고, 방아는 곡식을 찧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예로부터 지금까지 이를 사용한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하였다.

돌아보건대, 그 일을 제대로 해서 그 이익을 다하지 못하면서도 오히려 농사가 잘 되지 않는다느니 농사지어 보아야 굶기만 할 뿐이라느니 한다면, 이는 나무를 거꾸로 심어놓고 무럭무럭 자라기를 바라는 것에 가깝지 않겠는가. 구공(九功)515) 으로 독려하고 구가(九歌)로 권장하여 도롱이를 입고 논밭에서 일하는 백성들로 하여금 모두 다 각자의 힘을 다하게 하고 지혜를 다 쓰게 하여서, 밭은 개간되지 않은 곳이 없고 개간된 밭에는 씨뿌리지 않은 곳이 없으며, 씨뿌린 곳은 먹지 못하는 곳이 없게 한다면, 《관자(管子)》에 이른바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부지런한 데 달렸으니 부지런하면 굶주리지 않는다.’고 한 것과, 《위지(魏志)》에서 이른바 ‘사람들이 모두 부지런히 일하면 풍년드는 해가 자주 있을 것이다.’고 한 것이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 될 것이다.

내가 일찍부터 근본을 돈독히 하고 실제적인 데 힘쓰는 정사에 뜻을 두고 농서(農書)를 편찬하여 여러 주와 군에 반포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옛날과 지금은 사정이 서로 다르고 풍토(風土)가 똑같지 않으며, 가난하고 부유함을 고르게 하기 어렵고 일과 힘이 미치지 못하여서, 획일적으로 정하여 놓고 그것만을 지키게 할 수가 없었다. 대궐은 만리나 멀리 떨어져 있지만 사람마다 각자 좋은 방책을 진달하라. 그러면 나는 그것을 받아들여 절충해 쓸 것이니 그런즉 농가(農家)의 대전(大典)이라고 이를 수 있을 것이다.

무릇 농삿일이란 위로 중성(中星)에 속하고 겉으로는 기운(氣運)과 잘 맞아야만 하는 법이다. 축월(丑月)516) 의 중간은 대한(大寒)의 절기로서 토(土)의 기운이 처음으로 생겨나고, 미월(未月)517) 의 중간은 대서(大署)의 절기로서 토를 습하게 하는 태음(泰陰)의 기운이 비로소 생겨나니, 축월이 미월과 더불어 상대되어서 토가 비로소 용사(用事)하는 것이다. 그런즉 이미 지나간 일은 뒤쫓기 어려움을 개탄하고 앞으로의 도움이 있기를 기대함으로써 다가오는 새해를 일으키고 농부들을 격려하는 바이다. 중요한 것은 일찍 서두르는 것이니, 어찌 새봄이 오기를 기다려 교서를 내리겠는가. 오늘은 축일(丑日)이고 내일이면 축월(丑月)이 된다. 미시(未時) 정각에는 절기가 교대로 이르니 토우(土牛)를 빚어놓고 풍년들기를 기원하기에는 지금이 바로 적기이다. 더구나 전의 공적을 일으키기를 도모하고 그때의 날과 달을 따르는 것이 실로 내가 선왕의 뜻을 우러러 이어받는 한 가지 일이 되는 데이겠는가.

아, 경외(京外)의 대소 관료와 백성들은 모두 다 모름지기 잘 듣고 알도록 하라. 농삿일에 도움이 될 만한 자신의 견해가 있으면, 상소를 올리거나 책으로 엮거나 하여, 서울은 묘당에 바치고 지방에서는 감사에게 바치라. 그리고 이속(異俗)에 빠지거나 예전 방법에 구애되지 말고, 바닷가와 산골, 기름진 땅과 메마른 땅에 맞추어서 각자 마땅한 방법을 진달하라.

사람들의 계책이 진실로 훌륭하면 능히 하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늘이 풍년을 내려 곡식을 많게 하여 우리 백성들이 쌀밥을 먹고 태평 세월을 누리게 된다면, 이것은 우러러 우리 선왕께서 백성들을 편안케 하고 농정에 힘쓴 훌륭한 덕과 지극한 사랑에 부응하는 것이 될 것이며, 또 나 소자(小子)의 씨뿌리고 수확하는 데 대한 지극한 정성과 애달픈 마음을 돕는 것이 될 것이다. 내가 농정(農政)을 일으키고 농서(農書)를 한 곳으로 모으려고 하는 것은 농부들이 가을 수확을 고대하는 것보다도 더 간절하다.

내가 즉위한 지 22년 째 되는 해 축월(丑月)이 되기 하루 전날인 기축일(己丑日) 미시 정각에 교서를 내린다."

하였다.

이에 이 구언 전지에 응하여 글을 올린 자가 27인이었는데, 충의위 배의(裵宜), 홍주(洪州)의 유학 신재형(申在亨), 전 동지(同知) 김천숙(金天肅), 대구(大邱)의 유학 유동범(柳東範), 부호군 복태진(卜台鎭), 영암(靈巖)의 유학 정시원(鄭始元), 전 감찰 이우형(李宇炯), 수위관(守衛官) 윤보(尹溥), 전 영(令) 염덕우(廉德隅), 수위관 유종섭(劉宗燮), 전 찰방 강요신(康堯愼), 전 충의(忠義) 장지한(張志瀚), 전 순릉 참봉(純陵參奉) 이상희(李尙熙), 부사과 이인영(李仁榮), 전 군수 윤홍심(尹弘心), 신계(新溪) 유생 정석유(鄭錫猷), 순장(巡將) 정도성(鄭道星), 전라 도사 김하련(金夏璉), 영월 부사(寧越府使) 이경오(李敬五), 삼가(三嘉) 유학 정응참(鄭應參), 언양(彦陽) 유학 전만(全萬), 후릉 영(厚陵令) 김응린(金應麟), 전 동지 김양직(金養直)·최세택(崔世澤), 상주(尙州) 유학 이제화(李齊華), 순안(順安) 진사 김치대(金致大)였다. 전 지평 윤재양(尹在陽) 역시 시무 상소(時務上疏)를 올리면서 농정(農政)에 대해서도 덧붙여 진달하였다.

농서(農書)를 올린 자는 40인이었는데, 남원(南原) 유학 장윤(張)·허호(許顥)·허질(許耋)·노익원(盧翼遠), 공주(公州) 생원 유진목(柳鎭穆), 공주 유학 임박유(林博儒), 양주(楊州) 유학 안성탁(安聖鐸), 서울에 사는 서민 이필충(李必忠), 홍천(洪川) 유학 이광한(李光漢), 고성(高城) 유학 권현(權炫)·노재황(盧再煌), 흡곡(歙谷) 유학 조지영(趙之榮)·정치일(鄭致一)·표헌정(表憲正), 보은(報恩) 유학 이동응(李東膺), 덕산(德山) 유학 이의주(李宜璹), 수원(水原)의 절충(折衝) 원재하(元在夏), 정산(定山) 유학 김훈(金勳), 서울에 사는 유학 이만록(李晩祿), 교하(交河) 유학 이문철(李文哲), 나주(羅州)의 유학 나민휘(羅敏徽)·나학신(羅學愼), 순창(淳昌) 유학 신보권(申輔權), 영광(靈光) 진사 이대규(李大奎), 전주(全州) 유학(幼學) 김상직(金尙直)·이여효(李汝孝)·송상휘(宋相彙)·이장렬(李章烈), 진안(鎭安) 유학 박종혁(朴宗赫), 고부(古阜) 유학 박도흠(朴道欽), 능주(綾州) 진사 남익(南熤), 광주(光州) 진사 이의우(李宜), 유학 박문찬(朴文燦)·정윤국(鄭潤國), 무장(茂長) 유학 강석운(康錫運)·강순(康洵), 남원(南原) 전 현감 장현경(張顯慶), 장련(長連) 진사 박재설(朴載卨), 해주(海州) 유학 김호(金皓)·이훈(李薰)이었다.

배의(裵宜)의 상소에 아뢰기를,

"농사에는 세 가지 일이 있습니다. 첫째는, 예전에는 곡우(穀雨)에 씨를 뿌리고 하지에 모내기를 하였으니 농사철이 오히려 일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씨뿌리기와 모내기를 곡우와 하지 두 절기보다 먼저 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늦다고 여깁니다. 이에 씨뿌리기와 모내기를 일찍하도록 힘쓰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보리가 사람들에게 도움되는 점이 벼 못지 않은데, 사람들은 보리를 밭에 심는 것만 좋은 줄 알고 논에다 심는 것도 좋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무릇 논은 추수한 뒤에는 그대로 빈 땅이 되어버리는데 빈 땅으로 되었을 때 물을 빼내고 건답(乾畓)을 만들어서 수만 평의 논에 모두 보리를 심었다가 보리를 수확한 뒤 곧바로 모내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간혹 벼가 가을에 제대로 여물지 않았을 경우에도 보리로 굶주림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 번째는, 가난한 자와 부자가 서로 돕는 것입니다. 가난한 백성들의 경우에는 밭갈고 씨뿌릴 철에 소와 종자가 없어서 농사를 못짓는 자가 많습니다. 이러 병통을 고치자면 고을의 수령들이 면이나 리의 부로(父老)를 골라 뽑아서 그들에게 권농관(勸農官)의 책임을 지운 후 각기 면과 리의 부자와 가난한 자를 조사하여 장부를 만든 다음 부자로 하여금 종자 곡식을 내어 가난한 자에게 꾸어주게 합니다. 면이나 리에 부잣집이 없을 경우에는 관청에서 곡식을 내어주었다가 가을이 되거든 도로 받아들입니다. 만약 이 제도가 시행된다면 부자는 손해가 없고 가난한 자는 의지할 바가 있을 것입니다. 또 소를 도살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엄하게 하면 소가 저절로 흔해질 것입니다.

백성들로 하여금 생업에 안정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수령들에게 달렸는바, 수령들을 적임자로 임명하기만 하면 농사에 힘쓰는 것은 그 가운데서 저절로 될 것입니다."

하니, 비답을 내리기를,

"농정(農政)에 대해서 도움이 될 만한 의견을 듣고자 해서 특별히 교서를 내려 도와주기를 간절히 바랬었다. 나의 말이 사리에 어두워서 합당치 않다고 말하지 말라. 현재의 급선무 가운데 어찌 이보다 더 급한 일이 있겠는가. 그런데도 교서를 내린지 여러 날이 되도록 의견을 개진하는 상소가 올라왔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었다.

너는 공신(功臣)의 후손으로서 교서에 응하여서 조목별로 의견을 개진하였는데, 모두가 실용에 적당한 것이었다. 씨뿌리기와 모내기를 반드시 일찍해야 한다는 말과, 벼가 혹 미처 여물지 않더라도 보리로 굶주림을 면할 수 있다고 한 것이나, 부자가 종자와 식량을 내어 꿔주었다가 가을에 도로 받아들이며 또 면이나 리의 부로들 가운데 한 사람을 뽑아 권농관의 책임을 지우라고 한 것 등은 모두가 정확히 보고 충분히 헤아려 보고서 그렇게 말한 것으로 생각된다. 죽은 말 뼈다귀를 사서 천리마를 구한다는 뜻에서 가장 먼저 의견을 개진한 사람을 가상히 여기고 포상해야 마땅하겠으나, 혹 말하려고 하던 자들이 이를 혐의스럽게 여겨 물러나버릴까 염려되기에 우선은 교지를 내리지 않겠다. 그러니 너는 물러가서 묘당에서 부르기를 기다렸다가 사실대로 다 말하라."

하였다. 신재형(申在亨)의 상소에 아뢰기를,

"무(戊)와 기(己)는 천간(天干)에 있어서 토(土)에 해당되고, 축(丑)과 미(未)는 지지(地支)에 있어서 토(土)에 해당됩니다. 천간과 지지가 합하여 기미(己未)가 되었는바, 기와 미는 모두 토에 속하는데, 토는 농사의 근본이 되고, 농사는 먹는 것의 근본이 되며, 먹는 것은 백성들의 근본이 됩니다. 백성들을 농사에 힘쓰도록 이끌고 농삿일을 절기에 맞추도록 힘쓰는 것은 오로지 다음해인 기미년에 있습니다.

대개 사람으로서 할 일을 다하고 나서 지리(地利)를 다 이용하고, 지리를 다 이용하고 나서 천시(天時)를 기다려야 하는 법입니다. 수리 사업을 일으키고 토질에 맞는 것을 잘 살피며, 농기구를 잘 정비하는 것이 모두 사람이 응당 하여야 할 일들입니다. 천시(天時)에 있어서는 3년 동안 가뭄이 들고 3년 동안 홍수가 지며, 10년에 한 차례 크게 가뭄이 들고 10년에 한 차례 크게 홍수가 나는 법입니다. 그런데 가뭄의 피해가 홍수의 피해보다 더 심하니, 우리 나라는 논이 많아서 일단 가뭄을 만나기만 하면 농민들이 속수 무책입니다. 이것은 어째서이겠습니까? 모판을 만들었다가 모내기를 하는 방법을 쓰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기성(箕聖)이 처음에 정전법(正田法)을 가르친 때부터 높고 건조한 곳은 마른 땅에 씨를 심고 낮고 습한 곳에서는 물을 대고 씨를 뿌렸는데, 우리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그것을 일러 마른씨뿌리기[乾播], 물씨뿌리기[水播]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중기부터 비로소 모내기를 하는 이앙법(移秧法)이 생겨났습니다. 세속에서 전하기를 이 이앙법은 임진 왜란 때에 비로소 생겨났다고 하는데, 이 법이 한 번 유행되자 농사를 망치는 백성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절기가 곡우 때가 되어서야 모판에 볍씨를 뿌리는데 이때 만약 가뭄이 들면 아무리 부지런한 농사꾼이더라도 매번 하늘의 구름만 쳐다보다가 시기를 놓친 다음에야 볍씨를 뿌리게 됩니다. 또 하지 때에 가서는 모내기를 할 수 있지만 하늘이 이때에 가뭄을 내리면 번번이 비가 적은 것을 걱정하는데, 한 번이라도 제 시기를 놓치기만 하면 농사를 망치고 맙니다.

씨를 심는 부종법(付種法)의 경우에는, 겨울에 쌓인 눈이 녹고 봄비가 촉촉히 내릴 때에 올벼는 일찍 심고 늦벼는 늦게 심으며, 마른 땅에는 마른씨뿌리기를 하고 물이 있는 곳에는 물씨뿌리기를 하므로, 종자가 싹트고 줄기가 서는 데 있어서 가뭄과 홍수가 피해를 입히지 못합니다. 그러나 다만 봄에 씨뿌리고 여름에 김매는 데 있어서 이앙법의 경우에는 두어 차례만 김을 매주면 그만이지만 부종법의 경우에는 적어도 3, 4차례 이상 매주어야만 합니다. 부유한 백성은 토지 겸병(兼幷)에 힘쓰고 농사를 많이 짓는 것에 욕심을 내어 적게는 3, 4석씩, 많게는 6, 7석씩을 한꺼번에 모를 부어 노동력을 줄이고 한꺼번에 모내기를 하여 수고를 줄입니다. 비록 어쩌다가 가뭄을 당하더라도 대부분 좋은 논을 소유하고 있어서 수확이 많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백성은 볍씨를 뿌리고 모내는 일을 맨 나중에 하므로 가뭄을 만나 흉년이 들면 입에 풀칠할 길이 없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내년부터 모 붓는 법을 폐지하고 부종법을 쓴다면 비록 한때의 수고로움은 있을지언정 한 해 동안 먹을 것은 넉넉해지리라 생각됩니다. 어리석은 백성들은 오로지 고식적인 것만 좋아하고 영구적인 계책은 세울 줄을 모릅니다. 전하께서 참으로 삼농(三農)의 일에 힘쓰고자 하신다면 만대를 두고 전해질 법을 세우소서.

수리(水利) 사업을 일으키는 문제에 있어서는, 전하께서 ‘이미 있는 큰 제언(堤堰)부터 착수하여야 한다.’고 하교하셨습니다. 대개 산에 가까운 곳은 제언을 만들어서 물을 가두고, 들에 가까운 곳은 보(洑)가 있어서 물을 끌어대며, 바다에 가까운 곳에서는 제방을 쌓아서 바닷물을 막습니다. 이 둑과 보, 제방 세 가지는 수리(水利)를 일으켜서 가뭄과 재앙에 대비한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산과 들판을 낀 고을들이 수놓은 것처럼 뒤섞여 있고 호수와 바다를 낀 고을들이 바둑판처럼 펼쳐져 있는데, 옛사람들이 수축해놓은 것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제언은 모래에 막히고 보는 돌에 파괴되고 제방은 조수에 무너졌습니다. 그런데도 백성들은 이를 수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약 제언사(堤堰司)에서 감사와 수령들에게 신칙하여 작은 곳은 백성들의 힘을 빌리고 큰 곳은 관가의 힘을 들여 초봄에 역사를 시작하여서 물을 끌어다 채우게 하되, 혹 부지런히 하지 않을 경우에는 고과(考課)하여 징계합니다. 또 새로 쌓을 만한 곳이 있을 경우에는 늠료(廩料)를 출연하고 인력을 내어 역사를 시작하며, 그러고서도 또 힘이 모자라면 국곡(國穀)을 내어 공사를 끝내게 합니다. 그리고 만약 부유한 백성이 재물을 출연하고 힘을 내어 백성들이 그 이익을 입게 한 자가 있을 경우에는 특별히 상을 내려서 다른 백성들을 흥기시키는 방도로 삼습니다. 이렇게 할 경우 산간 고을이나 바닷가 고을이 어찌 올해와 같이 크게 흉년이 들겠습니까.

토질에 잘 맞는 것을 살피는 문제에 있어서는, 전하께서 하교하시기를 ‘남쪽 지방에 잘 맞는 것은 북쪽 지방에 맞지 않고 산골짜기에서 잘 자라는 것은 들판에서는 잘 자라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토질을 잘 살피고자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대개 조그마한 땅뙈기마저 모두 다 양안(量案)에 올라있습니다. 그런데 기름진 들판이 지금 혹 묵어가고 넓디넓은 습지가 지금 혹 버려진 채 있으니, 누군들 그것을 개간하고 싶지 않겠습니까마는, 봄에 개간을 하여 경작하기만 하면 가을에는 세금을 매기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서 ‘토지를 개간하고 백성들을 모여 살게 하라.’고 책할 수 있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개간할 만한 토지는 백성들에게 개간하게 하고, 경작할 만한 토지는 백성들로 하여금 경작하게 한 다음, 토질이 기름지고 메마른 정도에 따라서 세금의 많고 적음을 정하되, 6, 7년이나 혹 4, 5년간 세금을 면제해주어 입을 것과 먹을 것이 없는 우리 백성들로 하여금 넓은 은혜 아래에서 배부르고 따스히 지내게 한다면, 토질에 맞는 것을 살피는 것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하니, 비답을 내리기를,

"네가 부연 설명한 ‘무(戊)와 기(己)는 천간(天干)의 토(土)이고 축(丑)과 미(未)는 지지(地支)의 토인데, 천간과 지지가 합하여 기미(己未)가 되었으니, 기와 미는 모두 토에 속한다. 토는 농사의 근본이 되고, 농사는 먹는 것의 근본이 되며, 먹는 것은 백성들의 근본이 되고, 백성들은 나라의 근본이 된다.’라는 말은 이치를 잘 터득한 것으로서 참으로 취할 만한 말이다. 그리고 ‘기성(箕聖)께서 처음 정전법을 가르친 때부터 마른 땅에는 마른 대로 씨를 뿌렸고 습한 땅에는 물을 대고 씨를 뿌렸는데, 우리 조선조에서 마른씨뿌리기니 물씨뿌리기니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앙법이 유행되자 농사를 망친 사람이 많다. 그러니 내년 기미년부터 모 붓는 것을 폐지하고 부종법(付種法)을 행하면 그 이익이 클 것이다.’고 한 것은, 바로 요즈음 묘당에서 강구하고 있는 계책이다. 그러나 백성들은 따르게끔 할 수는 있어도 이치를 알게끔 할 수는 없으며, 또 백성들을 다스리는 법은 생선국을 끓이는 것과 같아서 뒤흔들면 옛날의 훌륭한 법을 본받는다 하더라도 반드시 효과를 거두지 못할 것이니, 지나친 것을 제거하는 방도는 감사나 수령들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산 가까운 곳에는 제언이 있는데 물을 가두기 위한 것이고, 들판에 가까운 곳에는 보가 있는데, 보는 물을 끌어대기 위한 것이며, 바다에서 가까운 곳에는 제방이 있는데 제방은 바닷물을 막기 위한 것이다. 산과 들판을 낀 고을들이 수놓은 것처럼 섞여 있고, 호수와 바닷가의 고을이 바둑판처럼 펼쳐져 있는 곳마다 옛사람들이 수축해 놓지 않은 곳이 없지만, 제언은 모래가 쌓여 묻히고 보는 돌에 의해 파괴되었으며 제방은 조수에 의해 무너졌다. 작은 곳은 백성들의 힘을 빌리고 큰 곳은 관가에서 인력을 동원하여 초봄부터 역사를 시작하여 수리하되 부지런함과 태만함을 조사하여 고과할 때 성적을 매긴다. 예전에는 쌓지 않았으나 지금은 쌓을 만한 곳은 또 공곡을 내어 역사를 마친다. 혹 재물을 출연하여 여러 사람에게 혜택을 입히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특별히 포상한다.’고 한 것도 적절한 의견이라고 할 만하다. 묘당으로 하여금 하나하나 초기(草記)를 올리게 해서 개간하기 전에 조처를 취할 수 있게 하겠다.

또 ‘묵고 버려진 땅을 누군들 개간하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나 봄에 개간하여 농사지으면 가을이면 곧바로 세금을 매긴다. 이렇게 하면서 토지를 개간하고 백성들이 모여 살게 하라고 책할 수 있겠는가. 개간하고 경작하도록 권장하고 토지의 비옥하고 척박함에 따라 세금의 높낮이를 정하며, 6, 7년이나 4, 5년 동안을 기한으로 해서 입을 것 없고 먹을 것 없는 우리 백성들로 하여금 따스하고 배부르게 지내게 하라.’고 한 것은, 바로 3년 동안 경작하도록 권장하고 차등을 두어 속전(續田)으로 등급을 내려주는 뜻이다. 얼마 전에 영남 지방에 이런 뜻을 알린 일이 있는데, 근래에 과연 성과가 있었는가? 끝부분에서 진달한 조항과 함께 묘당으로 하여금 품의하여 조처하게 하겠다."

하였다. 이에 대해 비변사가 복계(覆啓)하기를,

"제언과 보·제방을 수축하라고 신칙하는 일에 있어서는, ‘백성들의 힘을 빌리고 관에서 인력을 동원하며, 부지런함과 태만함을 조사해서 고과에 반영하라.’고 한 그의 말은, 바로 조금도 늦출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의 힘을 빌리고 관에서 인력을 동원하는 가운데에는 또 자연히 얼마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작지 않은 역사를 일으킨 곳에는 으레 반드시 힘을 들여서 해마다 수리해야 합니다. 먼저 각 고을의 제언과 보·제방 가운데서 많은 이익을 주면서도 심하게 무너지거나 막힌 곳을 각각 몇 군데씩 정한 다음, 천 명이나 만 명의 백성을 동원해야 될 곳에 대해서는 진휼할 곡식으로 떼어놓은 곳 가운데서 몇 석을 떼내어 양식으로 삼은 뒤 날짜를 따져서 기어이 완공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이는 실로 흉년에 공사를 일으키는 정사에 합당한 것이며, 장정들이 여기에서 품삯을 받아 먹으면 필시 진구할 대상자가 줄어서 민간에 곡식을 나누어주는 것에도 기대 밖의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선 이런 내용으로 삼남(三南)의 감사에서 분부하여 수령들과 직접 의논한 다음 수축하기에 합당한 곳을 즉시 계문하게 하고, 반드시 얼음이 풀린 뒤 농사철이 시작되기 전에 맞춰 모두 공사를 끝내게 하며, 그에 대한 상황을 본사(本司)에 치보하게 합니다. 그러면 본사에서 품지(稟旨)하여 각별히 농삿일을 잘 알고 수리(水利)에 해박한 사람을 택하여 이들을 나누어 보내어 살펴보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예전에는 수축하지 못하였으나 지금은 수축할 만한 곳에 대해서는, 십분 의심이 없는 곳을 제외하고는 한꺼번에 영을 내려 소요를 일으킬 필요가 없습니다. 이 일에 있어서는 대소 민인(民人)을 막론하고 형편을 보아서 공사를 이룬 자가 있다면 그 가상함이 어찌 재물을 출연하여 진휼을 보탠 공에만 그치겠습니까. 감사가 그런 사람을 계문하면 특별히 논상해야 합니다.

수령들의 업적을 고과하는 것은 본디 수령 칠사(守令七事)518) 를 따지는 데에서 벗어나지 않는데, 농정은 칠사 가운데서 으뜸을 차지하는바, 농사를 장려한 것을 가지고 고과를 하는 것은 바로 법의 본뜻입니다. 이 뒤로는 먼저 농정(農政)의 우열(優劣)을 기록하고 그 다음으로 다른 정사를 기록하라는 내용으로 규정을 정하여 알려야 합니다.

대개 이 제방의 수축에 대한 일은 삼남 지방만이 그러한 것이 아니니 다른 여러 도에서도 똑같이 거행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경기와 관동·관서·관북 지방은 사정이 각각 조금씩 다르니 이 복계(覆啓)한 내용을 간추려서 알려야 하겠습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유동범(柳東範)의 상소에 아뢰기를,

"신은 단지 영남 지방 일대에서 보고 들은 것만을 가지고 진달드리겠습니다. 대체로 농사에 재앙을 끼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가뭄이 가장 큰 재앙이 되며, 농사에 중요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소가 가장 중요한 것이 됩니다. 환곡을 나눠주는 것이 균등치 않아서 가난한 자나 부유한 자나 생업을 잃고, 첨정(簽丁)이 많이 숨어 있어서 잔약한 농민들이 견디어내지 못하고 있으며, 새로 일군 토지에 대해 세금을 정하여서 개간하는 면적이 넓지 못합니다. 벼는 습한 땅에 맞고 기장은 마른 땅에 맞으며, 목화는 햇빛을 좋아하고 삼은 비를 좋아한다는 등의 것에 이르러서는 모두 농사꾼들이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 요체가 되는 것이 여섯 가지가 있는데, 제언과 못을 깊게 파내는 것, 물을 절도있게 쓰는 것, 가축을 번식시키는 것, 환곡을 부자와 가난한 자에게 균등하게 나누어 주는 것, 누락된 장정을 찾아내어 신역을 부담시키는 것, 새로 개간한 밭에는 세금을 거두지 않는 것이 그것입니다.

근년에 들어서 해마다 가뭄이 들고 있는데, 사람들은 하늘 탓으로 돌리고 있으나 신은 사람들이 자초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무릇 여름에는 반드시 비가 내리나 때때로 가물 때도 있으며, 겨울에는 반드시 눈이 내리나 때때로 가물 때도 있으며, 또한 겨울에 이미 눈이 내렸는데 봄에 또 비가 내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눈이 녹은 물과 비가 고인 물을 한 국자도 낭비하지 않고 가는 물줄기까지 모두 가두어 둔다면, 겨울과 봄 5, 6개월 동안에 받은 물로 여름 3개월 간의 가뭄을 막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날의 제언과 못은 그 깊이가 헤아릴 수 없었는데, 깊기 때문에 물을 가둔 것이 많았고, 많았기 때문에 가뭄을 막기에 넉넉하였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아 뚝을 쌓은 것이 점점 깍여지고 흘러든 모래가 쌓인 것이 몇 천 섬이나 되는데도 10년 동안에 한 번도 쳐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공검지(恭儉池)는 예로부터 아무리 흉년이 든 해라도 마르는 것을 보지 못하였는데, 지금은 가문 지 몇 달도 안 되어서 물이 고갈되어 버립니다. 이것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닙니다. 단지 바깥만 수축하고 안을 파내지 않은 탓입니다. 안을 파내자면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어떤 제언의 물을 받아쓰는 백성들의 힘이 넉넉하지 못할 경우에는 관가에서 다른 제언의 물을 받아쓰는 백성들을 조발하여 힘을 합하여 함께 쳐내게 해야 합니다. 이 제언을 쳐낸 다음에는 다른 제언을 쳐내며, 해마다 반드시 한 차례씩 쳐내되 깊게 파내도록 하며 파낸 흙으로는 그 제방을 더 쌓습니다. 그렇게 할 경우 제언이 어찌 깊어지지 않겠으며, 물이 어찌 많아지지 않겠으며, 가뭄이 어찌 재앙이 되겠습니까. 이른바 제언과 못을 깊이 쳐낸다고 하는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대체로 백성들은 생각이 멀리까지 미치지 못하여 가뭄이 들었을 때에 한 국자의 물도 얻지 못하다가도 비가 조금 내리기만 하면 아끼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이미 땅이 젖었는데 물을 가두어서 무엇하겠는가.’라고 합니다. 무릇 논에서 이미 수확을 한 뒤에도 물이 남아 있을 경우에는 봄에 미쳐 갈아 엎기에 급급하므로 차례차례 물을 뽑아버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제언을 쌓았을 경우에는 참으로 터진 곳을 수리하여 물을 가두어 두어야만 합니다. 여름철에 모내기할 때를 당하여서는 하룻 동안만 물을 대면 4, 5일 간의 가뭄을 견뎌내기에 충분하니, 아침에 물꼬를 트고 저녁에 막고 다시 4, 5일이 되기를 기다려서 물꼬를 틉니다. 이것을 기준으로 하여야지 한결같이 모두 쏟아버려서 이곳에는 물이 남아돌고 저곳에는 남는 물이 없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이른바 물을 씀에 있어서 절도가 있게 한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무릇 농사짓는 데 있어서는 깊게 가는 것이 중요한데, 깊게 가는 것은 소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소를 함부로 도살하지 못하게 하는 법이 법전에 실려 있는 것입니다. 가난한 백성들 가운데에는 소가 없는 탓에 밭갈이를 못하는 자가 10에 5, 6은 됩니다. 그리고 환곡을 받아들일 때에는 반드시 소가 있는 자를 먼저 장부에 올려 그로 하여금 소를 팔아서 곡식을 납부하도록 독촉하고 있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거듭 밝힌 다음 한 통(統) 내에서 재물을 합하여 소를 마련하게 하고, 3, 4년에 한 차례씩 고치는 것을 허락해주며, 또 환곡을 받아들일 때 소를 팔아서 곡식을 납부하지 못하도록 한다면 장차 사람마다 모두 소를 소유하여서 모두들 깊게 가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른바 가축을 번식시켜야 한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를 두고 말한 것입니다.

물이 풍족하고 소가 있는데도 오히려 농사짓지 못하는 것은 농사철 동안의 양식이 없어서입니다. 환곡은 본디 부자나 가난한 자나 고르게 먹게 하기 위한 것으로, 봄에 고르게 받아가게 하므로 가을에 거두기가 쉬운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부자 백성은 하나도 환곡을 받지 않고 있으니, 가난한 백성이 치우치게 많이 받게 되는 것은 형세상 당연한 일입니다. 치우치게 받아 먹으면 곤궁하게 되는 것은 형세상 당연하며, 곤궁하게 되면 농사를 망치는 것 역시 형세상 당연한 것입니다. 비단 호별(戶別)로 내주는 환곡뿐만 아니라 전결(田結)에 따른 환곡도 있는데, 가난한 자는 전결이 없으니 이치상 당연히 환곡이 없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간혹 양호(養戶)를 하는 간사한 백성이 많이 있는바, 가난한 백성에게 전결에 따른 환곡이 많은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받아들이기를 일시 중지한 묵은 환곡이 있을 경우 비록 한 해 풍년이 든다 하더라도 여러 해 동안 쌓인 환곡을 갚기가 어렵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양호(養戶)를 하거나 부자를 빼어놓는 폐습을 통렬히 혁파한다면 가난한 백성들의 환곡이 줄어들 것이며, 이웃집에서 징수하거나 소를 팔아 내는 폐단이 없어질 것입니다. 이른바 가난한 자와 부자에게 환곡을 고르게 나누어 준다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예전에는 군포(軍布)가 2필이던 것이 지금은 1필로 되었으니 백성들이 더욱 넉넉해져야 마땅한데 도리어 더욱 가난해진 것은 어째서입니까. 누락된 군정(軍丁)을 찾아내지 못해서입니다. 파총(把摠)이나 초관(哨官)들은 모두 자기 일가를 보호하고 있고 풍헌(風憲)이나 약장(約長)들 역시 일가 전체를 비호하고 있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수령들을 엄하게 신칙해서 이른바 파총이나 초관, 풍헌, 약장 같은 자들에 대해서 본인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군역에 충당시키게 하고, 그 나머지 숨겨둔 자들을 엄명하게 조사해 찾아내도록 한다면 군정이 전보다 열 배는 많아지고 양정(良丁)과 부유한 자들도 모두 다 편호(編戶)의 역에 충당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른바 누락된 군정을 찾아낸다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대체로 풀이 없는 목장터나 버려진 빈터 가운데 개간할 만한 곳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토지가 없는 가난한 백성들이 감히 개간하여 농사짓지 못하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개간하자마자 곧바로 세금을 매기는데, 새로 개간한 땅의 소출이 혹 세금을 내기에도 부족한 경우마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백성들이 어찌 경작하려고 하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버려진 땅을 개간한 것에 대해서는 10년 동안을 기한으로 세금을 물리지 않고 10년 후에라도 절대로 높은 등급으로 세금을 매기지 않는다면 백성들이 반드시 경작하기를 원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른바 세금을 매기지 말라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말한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너는 영남 사람으로서 농서(農書)를 구한다는 교서를 보고서 전지에 응하여 상소를 올렸는데, 그 진달한 것이 모두 근거할 만한 점이 있는바, 인재는 거리가 멀고 가까움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을 더욱더 알 수 있겠다. 몹시 가상하다.

이른바 ‘농사에 재앙이 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나 가뭄의 재앙이 가장 크며, 농사에 중요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나 소가 가장 중요하다. 가난한 농사꾼은 환곡 때문에 생업을 잃고 잔약한 농부는 첨정(簽丁) 때문에 지탱하지 못하고 있다. 옛날에는 제언과 못의 깊이가 헤아릴 수조차 없이 깊어서 물고기나 용이 숨어 살고 배가 떠다녔다. 그런데 지금은 공검지와 같이 큰 제언도 가뭄이 들면 그 즉시 말라버려서 한번 흘러가 버리면 그만인 물과 같으니 물을 씀에 절도가 없다. 풀이 없는 목장이나 내버려진 밭들을 백성들이 감히 개간하지 못하며 이익을 보기도 전에 피해가 먼저 미친다.’고 한 것 등은 너의 말이 옳다.

사람마다 각자 힘을 다해 부지런히 농사지으면서 천시(天時)를 인하여 지리(地利)를 일으킨다면 재해가 유행할지라도 어찌 식량이 부족한 지경에야 이르겠는가. 사람의 노력을 대신하고 사람의 노동력을 돕는 것으로 있으면 땅이 개간되고 없으면 땅이 묵는바, 소 한 마리의 힘은 백 명의 인력에 해당한다. 이 때문에 소의 도살을 금하는 법이 사람을 죽인 살인죄에 비해 두 등급만 감하도록 법전에 실려 있는데, 근래에 대신의 말로 인하여 금령을 거듭 신칙하였다. 환곡과 첨정에 대한 폐단 및 물길을 소통시키고 개간을 권장하는 일에 대해서는 묘당에 회부하여 다른 사람들이 올린 상소를 참조해 보고 좋은 쪽으로 품의하여 처리하게 하겠다."

하였다.

복태진(卜台鎭)의 상소에 아뢰기를,

"농삿일에 있어서 급선무는 수리(水利) 사업을 일으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으며, 수리의 공효는 제언을 쌓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 신이 일찍이 고 처사 유형원(柳馨遠)이 지은 《반계수록(磻溪隨錄)》을 읽어보니, 거기에 ‘부안(扶安)눌제(訥堤), 임피(臨陂)벽골제(碧骨堤), 만경(萬頃)황등제(黃藤堤)는 소위 호남 지방의 3대 제언이다. 처음에 그 제언을 쌓을 때에는 온 나라의 힘을 다 들여서 완성시켰는데 중간에 훼손되자 내버려두었다. 지금 불과 몇 고을의 힘만 동원하여 예전처럼 수선해 놓으면 노령(蘆嶺) 이북은 영원히 흉년이 없을 것이며 호남 지방의 연해 고을이 중국의 소주(蘇州)나 항주(杭州)처럼 살기 좋은 곳이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근세에 국가를 경륜할 만한 선비로는 유형원을 으뜸으로 꼽는데 그의 말이 이와 같으니, 이 세 제언의 이익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가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조정의 신하 가운데 이 분야에 능숙한 자를 잘 가려 뽑아 봄이 되기를 기다려 공사를 시작하게 하되, 굶주리는 백성을 정밀히 뽑아 그들을 부역시키고 관가에서 먹을 것을 대주어, 보리가 익을 때까지 그렇게 하소서. 그러면 이 제언이 완성되자마자 백성들의 먹을 것이 넉넉해질 것입니다.

담배의 재배로 곡식의 생산이 줄어드는 피해가 몹시 심합니다. 신은, 원장(元帳)에 등재되어 있는 토지에는 차를 심는 것을 허락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산을 깎고 숲을 불사르는 버릇을 금지시켜야 하니, 무익한 작물을 지어 유익한 것을 해치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는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습니다.

술과 소와 소나무에 대한 금령은 실로 국가의 금석과 같은 법전입니다. 그런데 근년에 들어서는 술에 대한 금령이 몹시 해이해졌습니다. 이에 술에 빠져 화를 부르며 곡식을 낭비하는 해가 뚜렷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제사에 쓰는 것과 손님을 접대하는 데 쓰는 술까지 모두 금지시킬 수는 없지만, 신의 생각으로는 사사로이 술을 빚는 것은 금하지 말고 술을 매매하는 것만 금지시킨다면, 백성들의 식량에 도움을 주는 것이 결단코 적지 않을 것입니다. 소에 대한 금령은 아마도 일률적으로 정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수레를 뒤집어 엎는 사나운 소나 늙어서 쓸모없는 소는 처리할 방도가 없어서 가두어 둔 채 여물만 먹입니다. 그리고 1백 일 동안 수고한 뒤 하루를 즐기는 날이 바로 설날로, 사람들이 모두들 소를 잡고 술을 빚어 친구들이 모여 잔치하면서 마시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신은, 사사로이 도살하는 것을 금지시키는 영은 엄하게 해야만 하나, 설날에 한 차례 도살하는 것은 특별히 너그럽게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나라의 네 부류의 백성들 가운데에는 농사꾼이 몹시 적으며, 관리들이 농사꾼들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 아주 심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관리의 정원수를 정하여서 큰 고을은 40, 50명을 넘지 않게 하고 작은 고을도 반 정도 줄인 다음 그 나머지 관리들은 모두 돌아가서 농사짓게 해야 합니다. 그럴 경우 팔도를 통틀어 계산하면 토지를 개간할 수십만 명의 백성을 더 얻게 될 것입니다."

하니, 비답을 내리기를,

"3일 동안 정무를 본 뒤끝에 무언가 목에 걸려 있는 듯한 것은, 호서의 너와 호남에 사는 장현경(張顯慶)을 등용하려다가 번거롭게 특별히 제수하는 것이 혹 너무 서두르는 듯하여 제수하지 못해서이다. 너와 장현경은 모두 여러 해 동안 사관(史官)으로 있었는데, 너는 다시 등용된 뒤 임기가 차서 자급이 올라갔으나 아직 실직(實職)에 임명되지 못하였고, 장현경은 임신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내년이면 70이 되는데도 아직도 당하관 자리에 있다. 이번에 너의 상소를 보건대 경륜(經綸)의 계책을 성대히 진달하였는바, 몹시 가상하다. 묘당으로 하여금 품의하여 처리하게 하겠다."

하였다. 정시원(鄭始元)의 상소에 아뢰기를,

"우리 나라에는 기름진 들판이 수천 리나 되는데 그 가운데에는 간혹 공한지로 내버려 둔 것이 많습니다. 이는 바로 물을 끌어댈 방도가 없어서입니다. 지금 신에게는 통(筒)을 설치하여 물을 끌어대는 특별한 방법이 있습니다. 높은 곳에서부터 지형에 따라 흘러내리는 것이 물의 본성입니다. 그러나 논을 만든 곳이 물 아래쪽에 있더라도 그 사이에 구릉으로 가로막혀 있거나 깊은 골짜기가 놓여 있으면 끌어오는 물길이 중간에서 끊어지고 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기름진 들판이 있더라도 버려두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인 것입니다.

신이 말한 통을 설치하는 법은, 질그릇 통을 굽되 속은 통하게 하고 밖은 둥글게 만들어 상류에서부터 고기 비늘처럼 차례로 이어 땅 속에 묻은 다음 통 속으로 물을 끌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만약 시내나 골짜기를 만나면 지형에 따라서 물 밑으로 통을 묻어서 낮은 곳을 넘어가게 하며, 높은 언덕이 가로막혀 있을 경우에는 지세에 따라서 언덕 가에 통을 세워 높은 곳을 넘어가게 합니다. 이것은 딴 이치가 아닙니다. 원류(源流)가 높은 곳으로부터 흘러 통 속으로 들어가면 물이 통 속에 가득 차서 끊임없이 흐르기 때문에 높은 곳을 올라가 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물을 끌어댈 경우 높거나 낮거나 멀거나 가깝거나를 따질 것 없이 물을 대어 논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니, 어찌 제언과 보를 만들어 얻는 이익뿐이겠습니까."

하니, 비답을 내리기를,

"네가 이미 통을 설치하여 물을 끌어대는 특별한 방법이 있어 옛사람들이 발견하지 못한 방법을 개발하였다고 상소에서 분명히 말하였다. 그리고 이어 그 방법을 말하면서 질그릇 통을 굽되 안은 텅 비어 통하게 하고 밖은 둥글게 만들며, 골짜기를 만날 경우에는 통을 파묻어 낮은 곳을 뛰어넘고 언덕을 만나면 통을 세워서 높은 곳을 넘어가게 한다고 하였다. 그것에 대해서는 시험해 보면 편리하게 쓸 수 있는 것인지의 여부를 알 수 있을 것이니, 즉시 호조와 선혜청의 당상관들로 하여금 상소를 가져다가 따져본 뒤 초기(草記)를 올리게 하겠다."

하였는데, 호조 판서 조진관(趙鎭寬)이 아뢰기를,

"신과 선혜청 당상 정민시(鄭民始)정시원을 불러다가 물어보니, 그가 말하기를 ‘물이 아래로 흘러가는 것은 물의 본성이 그런 것이다. 만약 기계를 설치하여 물을 쳐서 올라가게 한다면, 이는 물의 본성대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잠시는 그렇게 할 수 있으나 오랫동안은 불가능하며, 작은 양은 할 수 있으나 많은 양은 할 수가 없다. 지금 진달한바, 통을 설치하여 물을 끌어대는 것도 역시 물을 쳐서 올라가게 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사실은 상류의 물을 받아들이는 곳이 하류의 물이 흘러나오는 곳보다 높아서, 비록 수백 보나 되는 먼 거리를 구부러지면서 돌고 높이 올라가기도 하고 낮게 내려가기도 하나, 결국에는 물이 뿜어져 나오는 곳을 물이 흘러드는 통 입구에 비하면 얼마쯤은 낮다. 이것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다. 물의 성질이 끝내는 반드시 낮은 곳으로 흘러내려가기 때문이다. 일찍이 시골에 있으면서 대나무로 통을 만들어 시험해 보았으므로 그것이 의심할 바 없음을 분명히 안다. 만약 진흙을 구워 통을 만들어 서로 맞붙는 부분의 양쪽 아가리를 맞물리게 하고 바깥쪽에다 작은 고리를 끼운 다음 그 틈을 유회(油灰)로 채우면 물이 새는 걱정이 없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그의 말대로 대나무 통을 가지고 시험해 보았더니 여러 차례 돌려서 높였다 낮추었다 하여 산(山) 자 모양을 만들었는데도 과연 물을 끌어들이고 토해내기를 법과 같이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쓴 글 등을 보니 두 쪽에 불과하였는데, 단지 이 법에 대해서만 논하고 다른 제도에 대해 언급한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대체로 예로부터 용골(龍骨)이나 옥형(玉衡)과 같은 물에 관한 기구들은 모두 다 땅에서 물을 끌어올려 충격을 주어 높이 올려보내는 것으로, 물의 본성에 따라 자연적으로 흐르게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랫동안 시행하지 못하였고 폐단이 없지 않았습니다. 농서(農書)에 들어있는 통을 연결하여 물을 끌어대는 법과 같은 것에 이르러서는 특별히 이를 미루어 크게 한 것일 뿐으로, 물을 끌어대는 다른 기구에 비하여 쉽게 시행할 수 있을 것 같으나, 여름에는 장맛비에 모래가 밀려들어 속이 막히기도 하고, 겨울에는 물이 혹 미처 다 빠지기 전에 안에서 얼어터지는 경우가 있을 것이니 봄 가을로 보수하여야 하는 것은 형세상 뻔한 일입니다. 비록 진흙을 구워 만든다 하더라도, 수백 보나 혹은 몇 리나 되는 먼 거리를 끌어올 경우 비용이 많이 드는 것이야 여사(餘事)이고 구워 만든 것이 흠이 없어서 쓰기에 알맞으리라는 것을 기필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그의 말에는 일리가 없지 않습니다. 그는 남쪽 지방에 사는 사람이니 지형이나 수세(水勢)로 보아 설치할 만한 곳을 아마도 익히 알고 있을 것입니다. 본도로 하여금 지방관에게 알려 그의 말에 의거해서 알맞은 곳을 골라 설치하여 시행해 보게 한 다음 성공하기를 기다려 여러 도에 반포하소서."

하니, 따랐다. 이우형(李宇炯)의 상소에 아뢰기를,

"신은 수리(水利)에 대한 설을 약간 강구해 본 바가 있어서 일찍이 수차 바퀴를 만들어서 물을 대는 논의를 진달하여 한편으로는 호조에서 만들게 하고 한편으로는 감사로 하여금 시험해 보게 하라는 비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공역은 방대하고 힘은 딸려서 지금까지 질질 끌어왔습니다. 그런데 신이 전에 상소를 올릴 때 미처 진달드리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보를 막고 제언을 쌓는 법입니다.

오늘날 세상에는 보를 쌓는 자가 몹시 많으나 모두 그 방법을 제대로 몰라서 재력만 헛되이 낭비하고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이 삼가 생각해 보건대, 제언을 쌓는 데에도 역시 방법이 있습니다. 네모난 벽돌을 많이 굽되 기와보다는 조금 크게 하며 너비는 각각 몇 자 가량 되게 구운 다음 이를 차례차례 쌓아 도랑을 만들되 아래로부터 점차 위로 쌓아 올라갑니다. 그런 다음 물을 가두고자 할 때는 닫아서 막고 물을 빼려고 할 때에는 열어서 빼내면 되니 돌을 쌓고 나무로 가로막는 법에 비해서 훨씬 편리하며 쌓은 것도 자연 견고합니다.

신이 일찍이 《농정전서(農政全書)》에서 그 도보(圖譜)를 상고하여 수책(水柵) 만드는 방법을 알아낸 다음에야 비로소 보를 쌓는 묘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평평한 습지가 개울가에 있어서 못을 만들어 농사를 지을 만한 곳이 있을 경우 5리나 10리쯤 되는 상류의 여울이 많은 곳에 가보아 돌이 서려 있어서 보의 입구를 만들기에 합당한 곳에다가 기둥을 세우고 말뚝을 박되 간가(間架)를 반드시 긴 복도와 같이 만들어서 개울의 너비를 가로질러 쭉 뻗게 만듭니다. 그런 다음 목책(木柵)의 아래 위 양쪽 곁에다가 나무를 엮어 세워두고 큰 돌로 물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한 뒤 큰 돌이나 작은 돌을 가리지 않고 뒤섞어서 쌓되, 나무를 엮은 곳까지 쌓아 올립니다. 그 목책이 일단 완성되면 돌산이 개울을 가로질러 뻗은 것 같아서 물을 아주 단단히 막으면서도 사용하는 나무는 매우 적게 들고 돌을 쌓은 것이 실로 많으면, 그 사이에 모래와 진흙이 엉겨 붙어서 장마가 지더라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으니 만전의 계획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약 모래가 많은 개울일 경우에는 짚이나 갈대 같은 것으로 목책의 주위를 둘러 막고 그 안에다 흙과 돌을 채워 넣어 물이 새지 않게 하면 역시 쌓은 것이 견고해집니다. 이렇게 한 뒤에도 언덕이 개울보다 한두 장쯤 높고 반드시 축과 바퀴가 있어야만 물을 가두었다가 관개할 수 있습니다. 수차(水車)의 제도가 몹시 많으나 오직 용미(龍尾)가 가장 좋습니다. 용미는 둥근 나무로 축을 만들되 아래와 위가 고르게 되게 하고, 도랑[溝]은 비스듬히 나선형(螺旋形)으로 만들되 판자를 엮어 칸을 막고 얇은 널판으로 둘러싼 다음 석회나 역청(瀝靑)으로 발라 틈이 없게 합니다. 또 철추(鐵樞)를 만들되 양쪽 끝이 직각삼각형 모양이 되게 만들어 세우고 곳곳마다 톱니가 8개가 되게 합니다. 그런 다음에 축(軸)을 눕히고 바퀴를 세운 뒤 그 톱니가 맞물리게 하고, 그 곁에 있는 한 바퀴에 물을 받는 날개[箑]를 붙이면 세 개의 바퀴가 서로 맞물려 돌아서 사람의 힘을 들이지 않고도 물이 흐르는 힘으로 인해 저절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하여 물이 판자로 만든 도랑을 따라 위로 솟아오르게 되는바, 그 제도가 다른 수차에 비해 더욱 묘합니다.

이 밖에도 고전통차(高轉筒車)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 역시 흐르는 물에서 쓸 수 있습니다. 강 언덕의 높이를 살펴보고 큰 바퀴를 만들어 물 흐름에 맞추어 설치합니다. 그런 다음 그 바퀴테[輞]에다 판자를 가로로 매어 물살에 부딪혀서 돌아가게 하고, 거기다 물통을 세로로 매달아 물을 퍼가지고 올라가서 쏟아붓게 만듭니다. 그러면 그 효과가 용미보다 못지 않으나 물을 퍼 올리는 것이 약간 적습니다.

못이나 우물과 같이 땅이 약간 깊은 곳에서는 항승차(恒升車)로 물을 퍼 올릴 수가 있습니다. 물통의 길이를 언덕과 나란히 되게 하고 하단(下端)을 얇은 판자로 막고 모나고 둥글고에 따라 구멍을 뚫은 다음, 쇠를 벼리어서 혓바닥을 만들어 여닫는 기구를 만들고, 판자에다는 별도로 긴 장대를 박아 오르내리게 합니다. 그러면 이것은 마치 풀무에서 바람이 생겨나는 것과 마찬가지여서 물이 통속으로부터 끊임없이 콸콸 쏟아져 나옵니다.

옥형(玉衡)의 반호(盤壺)나 쌍통(雙筒) 및 홍흡법(虹吸法)과 같은 것은 모두 구리나 주석으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신이 시험해보지 못하였습니다. 이상이 수차에 대한 대략적인 내용입니다.

신은 생각건대, 삼남 지방과 경기에는 수리(水利) 공사를 일으킬 만한 곳이 마을마다 있으니, 새로 쌓거나 예전에 있던 곳을 수리하여 보를 만들거나 제언을 쌓으면 그에 따른 이익이 몹시 클 것입니다. 그러나 드넓은 평야 지대로 큰강을 끼고 있어서 보를 막을 수 없는 곳에서는 수차를 이용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하니, 비답을 내리기를,

"네가 수리(水利)에 대하여서 부지런히 힘쓰고 있다는 것을 익히 듣고는 너의 성의가 가상해서 한번 만들어 시험해보라는 명을 내렸던 것이다. 그런데 아직까지 시험해 보지 않았다고 하니, 근래의 일이 모두 다 이 모양이다. 너의 상소를 묘당에 내려보내어서 이 뒤에 모여서 의논할 때에 너를 불러 자세히 물어본 다음 반드시 한 차례 시험해보게 하겠다."

하였다. 염덕우(廉德隅)의 상소에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잘 가르치는 것이 몸소 실천하는 것만 못하다고 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선대왕(先大王)께서 이미 시행한 규례를 준행하여 친경(親耕)과 친잠례(親蠶禮)를 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이는 국가에서 농가를 장려하는 큰 정사이므로 장려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장려될 것입니다.

농정에 있어서는 첫째는 백성들을 소요시키지 않고 농사철을 빼앗지 않는 것이며, 둘째는 농사지을 종자(種子)를 보조해 주고 농사지을 동안 먹을 양식을 대주는 것이며, 셋째는 미리 씨를 뿌리면 잘 자라고 부지런하면 수확을 거둘 수 있는 것이며, 넷째는 전정(田政)을 균등히 하고 토지를 개간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의(義)로 가르치고 형(刑)으로 징계하는 것입니다. 어째서 그러냐 하면 백성들은 나라의 근본으로서 근본이 흔들리면 나라가 존재하기 어려우며, 농사짓는 데에는 철이 있는데 철을 놓치면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는 법입니다. 그리고 농사지을 종자를 보조해 주고 농사지을 동안 먹을 식량을 대주라고 한 것은, 맹자가 말한 ‘봄에는 밭갈이하는 것을 살펴보아 부족한 것을 보충해 주고 가을에는 가을걷이하는 것을 살펴보아 넉넉하지 못한 것을 도와준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불쌍한 우리 농민들은 한 해 동안 내내 고생하였는데 가을에 추수할 때가 되어서는 모조리 관가로 실어가 버립니다. 이에 실곡(實穀)은 모두 감영이나 고을로 들어가고 모곡(耗穀)은 간사한 아전들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버리며 농민들이 받아먹는 환곡은 피곡(皮穀)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약 흉년이 들게 되면 혹 탕감해 주거나 기한을 연기해 주거나 다른 곡식으로 대신 바치는 것을 허락해 주기도 하지만 탐욕스럽고 교활한 무리들이 공문(公文)을 숨기고는 마구 매질을 해대며 독촉해 받아들입니다. 그러다가 토지가 없고 인족(隣族)이 없어서 받아들이기가 어렵게 된 뒤에 이르러서야 관문(關文)을 뜯어봅니다. 이에 이른바 탕감해 주고 연기시켜 준 실제 혜택은 모두다 중간에서 농간을 부리는 자들의 수중으로 들어가 버리는바, 이는 실로 농민들의 큰 고통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폐단이 북쪽 지방에 가장 심한 것은 다름아니라 계축년과 갑인년 이후 암행 어사를 파견하는 법을 혁파하였기 때문입니다.

미리 씨를 뿌리면 잘 자라고 부지런하면 수확할 것이 있다고 한 것은, 봄에 일찍 밭갈이를 하지 않으면 가을에 수확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농민들이 어찌 일찍 서둘지 않겠습니까. 여름 동안 도롱이를 입은 채 밭갈고 씨뿌리고 김매기를 하여 가을에 추수하는 것은, 《시경》 칠월편(七月篇)에서 말한 모든 것을 다 미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정(田政) 역시 농정에 속하는 것입니다. 북도(北道)는 병오년에 양전(量田)한 뒤 무신년과 기유년 이후부터 물길이 변하였는데도 전세(田稅)는 한결같이 병오년의 양안(量案)에 따라 거두어들이고 있습니다. 전세가 이와 같이 불균등한데 농정을 어떻게 장려할 수 있겠습니까. 감사와 수령을 각별히 잘 가려뽑아 전정을 균등히 한 다음에야 농사에 수확을 바랄 수 있을 것입니다.

토지를 개간해야 한다고 한 것은, 우리 나라의 폐사군(廢四郡)을 오랫동안 내버려 둔 채 개간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일찍이 갑인년에 서쪽의 자성(慈城)과 북쪽의 후주(厚州) 두 진(鎭)의 지역을 백성들이 개간하도록 허용한다는 전교가 있었습니다. 후주는 진을 설치한 지 3년만에 민호(民戶)가 8백 호로 불어났는데 나라의 금법에 구애되어 더이상 개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군(四郡) 지역을 개간하도록 허락하여 날마다 모여드는 백성들로 하여금 이곳에 들어가 농사짓게 한다면, 이는 실로 농사를 권장하는 하나의 큰 정사가 될 것입니다.

의로 가르치고 형벌로 징계한다는 것은 무엇을 두고 한 말이겠습니까. 토지를 개간하여 농사짓고 배불리 먹고 편안히 지내는데 의로 가르치지 않을 경우 백성들의 윤리 기강이 무너질 것입니다. 그리고 가르쳤는데도 법을 범하는 자가 있으면 형벌로 다스린 다음에야 인륜이 밝아지고 왕법이 시행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비답을 내리기를,

"친정과 친잠은 바로 우리 열성조들께서 시행하던 전례(典禮)이다. 그러나 지금 상황을 돌아보건대 정사나 교화가 열성조에 전혀 미치지 못하고 있는데, 어찌 감히 먼저 의식 절차에 관한 일에서부터 선대왕들이 하시던 바를 따라 하겠는가. 선대왕들의 뜻을 잘 받들어 이어가는 실제는 지난 축월(丑月)에 반포한 교서가 조금이라도 실제적인 효과가 있느냐에 달려 있다. 관북 지방에 아직까지 암행 어사를 차임해 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은 미처 겨를이 없어서가 아니다. 전에 이미 대신(臺臣)에게 내린 비답에서 말하였으니, 앞으로 형세를 살펴보고서 내려보내겠다. 이 외에 진달한 것에 대해서는 마땅히 유의하겠다."

하였다. 유종섭(劉宗燮)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다스리는 방도에 있어서는 책임을 전담시키지 않으면 일이 한결같이 되지 않는 법입니다. 《주관(周官)》 사도(司徒)의 관직에 의거해서 권농사(勸農司)를 별도로 설립하고 토지를 균등히 하는 관리, 물을 다스리는 관리, 농기구를 담당하는 아전을 두어 그들로 하여금 각자 여러 고을과 마을들을 감독하면서 편리한 방법을 들어주고 품의한 뒤 시행하게 하고, 때때로 감사와 수령들의 근만(勤慢)과 허실을 살펴서 모두 논계하게 하소서. 그러면 방백과 수령들이 반드시 고무되는 바가 있어서 농삿일을 권장하는 데 힘쓸 줄을 알게 될 것입니다. 농부들의 걱정은 전세가 균등치 못하고 물을 이용하기가 힘들며 농기구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만약 전세를 균등히 하고 수리(水利)를 일으키고 농기구를 제대로 갖추게 한다면 하늘과 땅, 사람의 때와 힘이 저절로 합치될 것인바, 또한 어찌 위에서 명령을 내려 일일이 신칙하기를 기다리겠습니까."

하니, 비답을 내리기를,

"전세(田稅)와 수공(水功)과 농기구 세 가지에 대하여 조목별로 진달한 너의 말이 몹시 이치에 맞다. 권농함에 있어서 마땅히 이를 주관하는 관서가 있어야 한다고 한 것도 너의 말이 맞다. 모두 묘당에서 품의하여 조처하게 하겠다."

하였다. 윤재양(尹在陽)의 상소에 아뢰기를,

"오늘날에 있어서 시급하게 변통해야 할 것이 여덟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병작(並作)하는 것을 고르게 하는 것이며, 둘째는 백징(白徵)을 견감해 주는 것이며, 셋째는 담배의 경작을 금지하는 것이며, 넷째는 백성들에게 버려진 땅을 경작하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양역(良役)을 충당시키는 것이며, 여섯째는 환곡법을 바로잡는 것이며, 일곱째는 아전들의 정원수를 줄이는 것이며, 여덟째는 과거의 폐단을 없애는 것입니다.

병작하는 것을 고르게 하는 것은 실로 토지가 없는 자에게 토지가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백징을 견감해 주는 것은, 논의 경우에는 당초에 씨를 뿌리지 못하였거나 모내기를 못한 땅에 대해 재결(災結)로 처리해 주는 규정이 있어서 특별히 세금을 내지 않도록 허락해 주는데, 밭의 경우에는 현재 묵었거나 전부터 묵어서 나무가 숲을 이룬 땅에 대해서도 모두 세금을 내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에 현재 백성들은 모두 진전(陳田)을 조사하여 한 줌, 한 단이라도 백징하는 폐단이 없게 해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담배의 경작을 금하는 것은, 곡식을 생산하는 토지가 점차 줄어들고 백성들의 생활의 어려움이 더욱더 심해지고 있으니, 담배의 해로움이 이에 이르러 극심한바, 금지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백성들에게 버려진 땅을 경작하도록 허락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5군문(軍門)과 각 궁방(宮房), 충훈부(忠勳府), 세도가의 전지를 막론하고 경작할 만한 곳을 묵혀버린 곳이 많은데, 그 주위에 사는 백성들이 경작을 하면 본주인이 도로 빼앗아 가버리므로 영원히 묵혀버린 채 경작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땅을 백성들로 하여금 경작하여 먹도록 허락한다면 백성들에게는 곡식을 생산하는 이익이 있을 것이며, 국가에는 세금을 거두는 이익이 있을 것입니다.

양역(良役)을 충정하는 것에 대해서는, 양정이 부실한 폐단이 갈수록 더 심해지고 있는바, 입번(立番)을 면제받은 군관(軍官)과 시골에 있으면서 신역을 면제받은 자들을 일체 혁파한다면 죽은 사람의 번(番)을 채워넣을 수 있을 것입니다. 환곡법을 바로잡는 것에 대해서는, 지금부터 시작하여 환곡과 향미(餉米)를 모두 절반은 창고에 보관해 두고 절반은 나누어 주되, 경사(京司)에서 발매(發賣)하는 규례에 의거해서 봄에 작전(作錢)하고 이어 싯가에 준하는 범위 안에서 값을 낮추어 파는 것을 허락하며, 가을이 된 뒤 싯가에 따라서 그 돈을 가지고 햇곡식을 사들이며, 다음해 봄에는 작년 봄에 창고에 남겨두었던 나머지 절반을 발매하도록 합니다. 대체로 봄과 가을의 싯가가 싸고 비싼 차이는 있겠지만 값을 낮춘 가운데서 한 말당 반드시 3전(錢)의 우수리를 관가에서 취하고 그 나머지의 이익을 전부 백성들에게 돌아가게 합니다. 그럴 경우 관가에서는 독촉해 받아들이느라 수고하는 일이 없을 것이고 백성들은 이웃이나 친척들의 것까지 물어내는 고통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전들의 정원을 줄이는 것은, 크고 작은 고을을 막론하고 아전들로 인한 피해가 백성들에게 미치는 만큼 그 고을의 크기를 따져서 정원을 알맞게 조정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과거의 폐단을 혁파하는 것은, 오늘날의 계책으로는 서울의 유생들에 대해서는 사학 교수(四學敎授)가 오부(五部)의 거안(擧案)을 받고 각 문체별로 과거 시험의 제목을 내어 시취(試取)한 다음, 합격자의 방(榜)을 성균관에 제출하면, 대사성(大司成)이 사학에서 합격한 사람들을 모아 앞에서 시험치른 후 예조에 합격자의 명단을 통보합니다. 그리고 시골에 사는 유생들의 경우에는 각각 해당 고을에서 각 면에서 올린 단자(單子)를 받아 과제(科題)를 내어 뽑기를 한결같이 사학(四學)에서 하는 것과 같이 한 다음 각각 예조에 제출하게 합니다. 이렇게 하고서 대과(大科)와 소과(小科)를 치를 때 예조에 비치되어 있는 것과 대조하여 조사하면 영원히 억울함을 당하거나 요행으로 과거에 급제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네가 농삿일에 대해 진달하면서 곁들여서 여러 가지 사항에 대해 진달하였는 바, 몹시 가상하다. 병작(並作)을 고르게 하는 것은 정전 제도(井田制度)나 한전 제도(限田制度)를 제외하고는 가장 좋은 제도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기강이 확립된 다음에야 부차적인 항목이 시행될 수 있는 법이다. 그러므로 주자(朱子)와 같이 재주와 식견이 뛰어났던 사람도 새로운 제도를 시행하는 데에 있어서는 늘상 신중하게 처리하면서 하루아침에 즉시 고쳐야 된다고 말한 적이 일찍이 없었는바, 이 일 역시 그와 비슷한 일이다. 백징(白徵)을 견감하는 일은 너의 말이 참으로 옳다. 조금 풍년이 든 해를 기다려서 진전(陳田)을 조사하도록 하겠다.

담배의 경작을 금지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금지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껄끄러운 점이 있을 듯하다. 백성들에게 관가의 전지나 부자들의 전지로서 묵혀버린 곳을 경작해 먹도록 허락해 주는 일은, 그것은 전적으로 감사에게 달려 있는 일이다. 양역(良役)을 어린이와 노인에게까지 지우는 것에 대한 폐단이야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번(番)을 면제하고 역(役)을 면제하는 것을 없애느냐 그대로 두느냐 하는 문제 역시 조정에서 다시 명령을 내릴 필요가 없는 일이다. 이것은 여러 고을에서 제대로 잘 시행하고 있는가만 조사하면 되는 일이다. 환곡의 폐단에 있어서 반을 창고에 남겨두는 일은 바로 요즈음에 방도를 강구하고 있는 중이다.

크고 작은 고을의 아전들을 줄이는 일은, 일찍이 다른 사람의 상소로 인하여 묘당에서 여러 차례 복계(覆啓)하였었다. 과거의 폐단을 개혁하는 일은, 내가 처음 즉위하여서 물어본 일 가운데 한 가지 일인데, 지금까지 세월만 끌어온 것은, 시행할 만한 좋은 법이 없다고 여겨서가 아니라 법만 부질없이 시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향거(鄕擧)와 이선(里選) 및 효성스럽고 우애로우며[孝悌] 농사에 힘쓰는 사람[力田]을 추천하는 등의 제도를 지금 시행하였다가 만에 하나라도 명목만 있고 실재가 없게 될 경우, 애당초 경솔하게 시행하지 않는 편이 차라리 처음부터 잘 계획하는 체모에 합당할 것이다. 근년 들어 내가 수령을 반드시 삼사(三司)의 관원 중에서 뽑고 사람을 쓸 경우 반드시 수령들 가운데서 뽑아쓰는 것은 등용하는 것을 구하는 것과 같게 하고자 해서이다. 그러나 두루 물어본 다음에야 결정을 내릴 수 있겠다."

하였다.

정석유(鄭錫猷)의 상소에 아뢰기를,

"신은 먼저 우리 나라의 지리(地利)와 전토(田土)와 농기구에 대하여 논한 다음 시기를 놓치지 않는 방도와 살 곳을 잃지 않는 방도에 대해 논하고자 합니다.

옥저(沃沮)는 산이 많고 바다를 끼고 있으며, 대방(帶方)은 골짜기가 깊고 냇물이 깊으며, 낙랑(樂浪)은 서북쪽은 산을 등지고 있고 동남쪽은 들판이 널려 있습니다. 삼남 지방은 물이 깊고 토질이 비옥하며, 해서와 경기 지방은 토질이 척박하고 산이 가파른데다가 바닷가에는 염분이 많고 바다 가까운 곳에는 모래와 돌이 많습니다.

신이 일찍이 집에 있으면서 궁리한 바가 있는데, 온 나라에서 두루 쓸 수 있는 것으로 마른 땅이나 습한 땅이나 높은 곳이나 낮은 곳이나 쓰기에 알맞은 기구는 오로지 달구지[田車]뿐입니다. 대개 달구지를 쓰면 이로운 점이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봄에는 거름 수레가 되는데, 수레 1대가 운반하는 양이 소 5마리에 싣는 것만큼이나 되니 한 사람이 수레 한 대를 쓰면 소 네 마리와 사람 네 사람을 줄이는 격으로 소와 사람의 노동력이 모두 여유가 있게 되는 바, 이것이 첫번째 이로운 점입니다. 농사가 한창 바쁠 때에는 밭에 거름주는 일이 더욱 급하여 한시라도 먼저 내면 소출이 배로 불어나고 한시라도 늦으면 수확이 절반으로 줄어듭니다. 이때 만약 거름 수레를 쓰면 제때에 맞춰 일을 민첩하게 할 수 있는 바, 이것이 두 번째 이로운 점입니다. 가을에는 부리는 수레[役車]가 되는데, 곡식은 한창 거두어들일 때 소가 있으면 노동력이 남게 되고 소가 없더라도 지게로 지고 다니는 수고가 없는바, 이것이 세 번째 이로운 점입니다. 각 군현(郡縣)에서 환곡을 받아들일 때 눈이나 빙판으로 길이 막히게 되면 소발굽은 미끄러질까 겁나고 사람들의 어깨는 빠질듯 아프게 되는데, 이때 만약 부리는 수레[役車]를 이용하면 큰 수레는 멍에를 지워 끌고 작은 수레는 뒤에서 밀면서 갈 수 있는바, 이것이 네 번째 이로운 점입니다. 그리고 소나 말의 병은 항상 어깨와 발에 나는데, 이는 짐은 무거운데 힘이 딸려서 그런 것입니다. 만약 수레를 쓰면 소나 말이 모두 병나지 않을 것인바, 이것이 다섯 번째 이로운 점입니다.

신이 듣건대, 조종조 때 전화(錢貨)를 통용시키려고 하였지만 백성들이 좋아하지 않자, 당시 고(故) 상신 김육(金堉)이 역참(驛站)에서부터 시행하기를 청하였다고 합니다. 대개 역참에서부터 시행하기를 청한 것은, 역참은 사람들이 길을 가면서 모두 지나는 곳이며 익숙히 보고 들어왔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수레에 대한 제도도 역참에서부터 시행한다면 반드시 점차적으로 본받아서 백성들이 소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개 팔도의 공부(貢賦)를 운반하는 때에 으레 모두 말을 전세내어 운반하는데, 1천 리를 운반하는 경우 2천 전(錢)을 전세값으로 주는바, 짐 한 바리를 운반하는 값이 거의 말 한 마리 값과 맞먹습니다. 만약 군현에서 운반하여야 하는 모든 짐바리들을 죄다 수레로 운반한다면 역참에서 말을 세놓는 자들도 앞으로 말 대신 수레를 세놓아 생업을 잃지 않을 것이며, 점차적으로 이를 서로 본받아서 온 나라에 두루 퍼질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오늘날에 있어서 급선무는 두 가지 해로운 것을 제거하고 네 가지 이로운 것을 일으키는 것만한 것이 없습니다. 무엇이 두 가지 해로운 것이냐 하면 쓸데없는 관리와 쓸데없는 군사가 그것입니다. 무엇이 네 가지 이로운 것이냐 하면 어진 인재를 가려뽑고, 전제(田制)를 고르게 하며, 노는 토지를 개간하고 환곡법을 제대로 시행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하니, 비답을 내리기를,

"환곡의 폐단에 대해서는 이미 책문(策問) 제목으로 내어 물었으니 어찌 혹시라도 쓸데없는 빈말을 하였겠는가. 수십 년 전에 감사나 병사가 녹봉을 출연(出捐)하거나 방역(防役)하는 등과 같은 자질구레한 명색(名色)에 대해서는 거의 다 그 문서를 없애고 빚을 받는 것을 중지시켰지만 필경에는 이자로 받아들인 곡식에다 손대는 것에 지나지 않았었다. 그리고 그런 것은 서울에 있는 관청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강원도의 삼(蔘)이니, 노비의 신공(身貢)이니 하는 것들은 그 가운데 특히 큰 것이고 그 나머지는 일일이 거론할 수 조차 없다. 무릇 법이란 것은 그릇을 땅에 놓아둔 것과 같아서 오로지 어떻게 쓰는가 하는 데 달려있는 것이다. 환곡이 백성들에게 있어서 절박한 폐단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외에도 공물을 줄여서 다른 물품으로 대체해 주고 은택을 내려 부담을 덜어주어야 할 것이 수십 만 가지도 넘는다. 그런데 만약 그에 대해서는 양쪽이 다 편리한 방도를 별도로 강구하지 않고서 지시만 내리면서 어쩌고저쩌고 한다면 어찌 옳겠는가. 첨부하여 올린 견해에 대해서는 묘당에 내려 상세하게 살펴본 뒤 조처하게 하겠다."

하였다. 정도성(鄭道星)의 상소에 아뢰기를,

"대체적으로 볍씨는 강한 종자도 있고 약한 종자도 있는데, 약한 종자는 가뭄을 당하면 잘 자라지 못하고 쉽게 말라 죽으며, 강한 종자는 홍수나 가뭄에도 피해를 입지 않습니다. 대개 볍씨에는 강한 종자가 세 가지가 있는데, 천상도(天上稻), 두어라산도(斗於羅山稻), 순창도(淳昌稻)가 그것입니다. 이 세 가지 볍씨는 그 성질이 아주 강하기 때문에 논에는 모를 붓고 밭에는 씨를 뿌리는데, 2월에 땅을 갈고 3월에 씨를 뿌리면 늦모를 낼 때쯤 이 세 종류의 벼는 줄기가 이미 절반 정도 성장하며, 결실 역시 빨라서 비록 가뭄이나 홍수를 만나더라도 조금도 손상되지 않습니다. 삼남 지방에는 논이 많고 나머지 다섯 도에는 밭이 많으니 이 세 가지 벼 종자를 심는 법을 시행한다면 삼남 지방에는 그 이익이 더욱 클 것입니다.

춘궁기에는 가난한 백성들이 종자곡을 마련하기가 어려워 걸핏하면 농사철을 놓치고 마니 특별히 환곡을 꿔주어 그들로 하여금 농사철을 놓치지 않게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관가에서 시골 백성들에게 지시를 내려 농토를 일구게 하면 들판이 묵고 황폐해지는 폐단이 없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백성들 가운데 게을러서 농사짓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특별히 암행 어사를 파견하여 놀고 먹는 백성들을 찾아내게 한다면 백성들이 모두 농사에 힘쓸 것입니다."

하니, 비답을 내리기를,

"네가 올린 글이 10여 줄에 불과하지만 세 가지 벼 종자를 심는 법과 소의 도살을 금지하라고 진달한 것은 모두가 실용(實用)에 힘쓴 적당한 말들이다. 유사 당상(有司堂上)이 이미 전라 감사를 지낸 자인만큼 그를 불러다가 의견을 묻는 한편, 너의 말대로 시험해 볼 만한 남쪽 고을에서 시험해 볼 것이니, 뒷날 반드시 성과가 있을 것이다."

하고, 전교하기를,

"물어보는 것은 실제적인 것에 힘쓰기 위한 것이니 전지에 응하여 상소하는 것도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 근래에 올라온 여러 글들 가운데서 실속이 있는 것은 이 사람의 글에서 처음으로 보겠다. 좌상이 불러보고 등용하기에 합당할 것 같으면 초기(草記)를 올리라."

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정도성을 불러다가 내력을 물어보니, 살림살이가 웬만큼 넉넉하여 진구곡(賑救穀)을 내고 직첩(職帖)을 받는 은혜를 입었으며, 글을 잘 모르기 때문에 남에게 말을 해주고 대신 쓰게 하였다고 합니다. 사람이 착실하고 말 역시 믿을 만하나 등용하기에 합당한지의 여부는 감히 분명하게 말씀드리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김하련(金夏璉)의 상소에 아뢰기를,

"수차(水車)를 만드는 재목으로는 참나무와 박달나무만을 쓰는데 바닷가에 사는 백성들은 이를 마련할 길이 없습니다. 지금 자성(慈城)·우예(虞芮)·여연(閭延)·무창(茂昌) 등 사군에는 아름드리가 넘는 나무로서 수차 바퀴나 배의 돛대, 집의 대들보감으로 쓰기에 충분한 좋은 재목이 산과 들에 가득 차있습니다. 바닷가에 사는 백성으로서 그곳에 가서 수차와 배의 재목을 베어오기를 원하는 자에게는 공문을 내주어 각자 원하는 바에 따라 수차를 만들거나 배, 뗏목을 만들게 한 다음, 자성 부근에서부터 강물을 타고 내려오게 하면, 용천(龍川) 바다 어귀까지 3, 4일 정도면 도착하고, 용천서부터 경강(京江)이나 삼남 지방까지는 열흘을 넘지 않아서 도착할 수 있습니다.

수차를 만드는 법은 전 찰방 이우형(李宇烱) 외에는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우형을 특별히 자성에 보내어 수차를 많이 만들게 한 뒤 그것을 바닷가의 고을마다 1대씩 나누어 주어 각 고을의 농민들이 이를 본받게 하면 몇 해 안 가서 수차를 이용해 농사를 짓는 법이 온 나라에 두루 퍼질 것이고 어민들이 농민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도 반드시 적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의 내용은 모두 묘당으로 하여금 논의해본 뒤 품의하여 조처해서 농정에 도움이 되게 하겠다."

하였다. 이경오(李敬五)의 상소에 아뢰기를,

"우리 나라는 논밭이 많이 황폐해지고 베틀마저 텅 비어 있는데, 이것은 농서(農書)가 갖추어지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마땅히 먼저 손을 써야 할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한 사람이 농사짓지 않으면 천하 사람들이 굶주린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나라 백성들은 아전이나 하인들의 무리 속으로 함부로 의탁하고 저자거리의 거간꾼 무리를 쫓아다니며, 이보다 못한 무리들은 편한 길을 따라 장사를 배우거나 기회를 틈타 도적질을 하면서 모두들 놀고 먹으려고만 합니다. 이에 떠돌아다니는 자가 꼬리를 물고 호구수가 날로 줄어들어서 팔도의 백성들 가운데 농사를 짓지 않는 자가 거의 절반이나 됩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현재 농정에 있어서의 급선무는 놀고 먹는 백성들을 모조리 몰아다 농토로 돌아가 농사를 짓게 하는 것이며, 그런 다음에야 농서가 필요할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고, 이어 본부(本府)의 삼(蔘)을 캐는 폐단에 대해 논하면서 이를 중지시켜 주기를 요청하였다. 이에 비답을 내리기를,

"네가 이른바 백성들로 하여금 고향에서 농사짓게 한 뒤에야 농서가 필요한 것이라고 한 것은, 간략하면서도 할 말을 다한 것이라 하겠다. 오늘날의 잘못된 습속은 오로지 조그마한 이끗만 노릴 줄 아는 것인데, 이를 억제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 어떻게 근본으로 되돌아가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먼저 네가 살고 있는 고을의 노는 땅부터 시작하여 몸소 전준(田畯)이 되어 오늘 한 모퉁이를 개간하고 내일 한 고랑을 개간하여 날마다 개간하는 성과가 나타나게 한다면 너를 알아준 나의 뜻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감사에게 하유하여 앞으로 있을 여름과 겨울의 근무 평정때 해당 수령의 실적을 항목 아래에다가 주를 달아 기록하게 하겠다.

이른바 ‘삼 캐는 것을 권장하는 규정이 한갓 삼상(蔘商)들이 이끗을 노리는 길만 열어놓았고 온 도의 농사를 방해하는 해독을 빚어낼 뿐이다.’고 한 것은, 사리가 분명하다. 이미 그런 말을 들은 이상 어찌 그 폐단을 그대로 내버려둘 수 있겠는가. 감사에게 하유하여 이에 대해 속히 장계를 올리게 하겠다."

하였다. 김만(金萬)의 상소에 아뢰기를,

"천시(天時)를 따르고 지리(地利)를 이용하며 인사(人事)를 닦는 것이 농사를 짓는 데 있어서 본령(本領)이며, 수리 사업을 일으키고 토질에 알맞은 것을 살피며 농기구를 이용하는 것이 농사를 짓는 데 있어서 급선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즉 남쪽과 북쪽 지방에 잘 맞느냐 안 맞느냐 하는 것과 산골짜기와 들판을 좋아하고 안 좋아하느냐 하는 것 및 모를 붓고 씨를 심는 것의 이해(利害), 담배를 심고 화전(火田)을 일구는 것이 편리한지의 여부 등은 작은 절목에 해당되는 일들입니다. 우리 나라가 비록 작다고는 하지만 남북이 수천 리나 되니 풍토와 기후가 같지 않고 토질이 현저히 다른 것은 참으로 당연한 것입니다.

모를 붓는 것에 대한 득실 여부는 가장 신중하게 헤아려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물이 풍부한 경우에는 물씨뿌리기를 하는 것이 좋고 토질이 부드러울 경우에는 마른씨뿌리기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습하여도 비옥하지 않고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 곳이나 혹은 흙덩이가 단단하여 쟁기가 들어가지 않아 물을 대면 갈 수 있고 마른 채로 갈면 갈 수가 없는 땅이 곳곳마다 반반씩 뒤섞여 있으니, 모를 붓는 것은 농사에 게을러서 그런 것이 아니라 대개 토질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너무 지나친 것을 금지하는 경우에는 법으로 금하여야 하겠지만 신은 감히 반드시 그렇게 하여야 한다고는 하지 못하겠습니다. 화전을 일구는 이익 역시 큽니다. 명산(名山)을 벗겨내는 것이 과연 염려되기는 하지만 천백 년 동안 전해 내려온 폐단을 하루아침에 금지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통렬히 금지해야 할 것은 담배를 재배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재배하는 것을 금하자면 반드시 먼저 담배를 피우고 차를 마시는 것을 금지해야 합니다.

환곡에서 발생하는 허다한 폐단은 그 근본 원인이 뒤섞어 보관해두는 데 있으니, 그 폐단을 구제하자면 면(面)별로 창고를 만드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각 고을에 그 전에 있던 창고를 그대로 두고 그 안에다 그 고을의 면수에 따라서 벽을 쌓아 칸을 막되, 칸의 크기는 면의 대소에 따라 적당히 하며, 해당 면에서 바친 곡식은 다른 칸으로 옮겨 쌓는 것을 허락하지 말고 벽에다가는 해당 면의 이름을 써서 구별합니다. 그리고 곡식을 바칠 때에는 백성들로 하여금 스스로 창고에 바치게 하고 곡식을 내줄 때에도 그와 같이 하여 창고문에서 지급해 주도록 합니다. 그리고 위에다 자물쇠와 열쇠를 설치하여 아무때나 함부로 여닫지 못하게 합니다. 또 각영(各營)의 모곡(耗穀)과 관청에서 내려주는 잡역곡(雜役穀)은 수시로 출납하지 않을 수 없는 만큼 별도로 창고 하나를 세웁니다. 이상과 같이 할 경우 백성들이 관가의 창고를 보기를 개인의 창고 같이 보아 오로지 곡식이 깨끗하지 못할까만 걱정할 것입니다."

하니, 비답을 내리기를,

"네가 상소에서 진달한 바는 갑자기 구언 전지에 응하여 올린 것이라고 할 수가 없는바, 너의 정성이 몹시 가상하다. 묘당에서 논의해 본 다음 방안을 첨부하여 아뢰게 하겠다."

하였다. 비변사가 복주(覆奏)하기를,

"모내기는 토질에 따라서 하고 화전을 일구는 것은 금할 수 없으며 담배의 경작을 금하는 것과 제언을 수리하는 등의 일은 모두가 이미 전후로 올린 복계(覆啓)에서 이미 진달드린 것입니다. 환곡의 폐단을 구제하는 방법으로 있던 창고에다 면의 숫자에 따라 벽을 쌓아 칸을 막는 일은, 관고(官庫)에다 사창(社倉)의 뜻을 붙여 백성들로 하여금 자기 개인의 물품처럼 여겨 서로 자신을 위해 모의하게 하자는 것이니, 지금 논한 것이 채택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고을에는 크고 작음이 있고 면수는 많고 적음이 있는 만큼 일률적으로 시행하기에는 곤란한 점이 있습니다. 그러니 우선 언양(彦陽) 한 고을에서부터 백성들의 의견을 널리 물어보고 백성들의 힘을 번거롭히지 않으면서 그것이 편리한지의 여부를 시험해본 뒤에 과연 성과가 있을 것 같으면 여러 고을에서 이를 본받아 차례로 시행해 나가도록 해당 도에 분부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환곡의 폐단에 대해서는 해당 고을에서 먼저 시험해 보는 것이 매우 타당하다. 해당 수령에게 엄히 신칙해서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김양직(金養直)의 상소에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농가잡설(農家雜說)》에 말하기를 ‘부용꽃이 필 때 가장 먼저 핀 꽃 한 송이를 따가지고 그 무게를 달아보아 이듬해의 쌀값이 쌀지 비쌀지를 알 수 있다.’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다음해에 어떤 곡식이 풍년이 들 것인지를 알고자 하면 먼저 올해에 다섯 가지 나무 가운데 어느 것이 무성하게 자랐는가를 알아보고 그에 따른 곡식을 심는다. 벼는 대추나무나 버드나무에서, 기장은 느릅나무에서, 콩은 느티나무에서, 팥은 오얏나무에서, 삼은 버드나무나 가시나무에서 알아낸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보건대 작년에는 대추나무 잎이 무성하였고 늙은 버드나무가 무성하였는바, 금년에는 벼농사를 권장할만 하겠습니다.

사시입절가(四時立節歌)를 보건대, 거기에 ‘동짓날 날이 맑고 햇빛이 희미하면 이듬해에는 태평가가 울려 퍼진다.’고 하였고, 입춘시(立春詩)에는 ‘입춘날 하루만 맑게 개어라. 농부들이 농삿일에 힘들지 않으리.’라고 하였으며, 제석가(除夕歌)에는 ‘이날에 청명한 좋은 날씨 만났으니 농가에 분부하여 마음 기쁘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보건대 작년 동지에는 하늘빛이 과연 맑고 햇빛이 희미하였으며, 입춘날에도 또다시 맑게 개였으며 이날이 또 제일(除日)519) 을 겸하였습니다. 신이 이 세 구(句)의 시의 뜻을 미루어 생각해 보건대 이것은 모두 다 길한 징조입니다. 또 보건대 설날에는 서풍이 약하게 불고 동쪽에 누런 구름의 길한 기운이 있었는바, 올해 풍년이 들 것임을 점칠 수 있겠습니다.

《고방(古方)》을 보니, 거기에 이르기를 ‘정월 3일에 비가 내리면 4월달에 물이 풍부하고 4일에 비가 내리면 5월달에 물이 풍부하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보건대 금년 정월 3일에는 하늘에서 눈이 내렸고 4일날 저녁에는 비가 내렸으니 이것은 길한 징조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4월과 5월은 농가에서 가장 중요한 달로서 농민들이 이 두 달 동안에 제때 일찌감치 밭을 갈고 씨를 뿌려 시기를 놓치지 않는다면 그 뒤에 비록 작은 가뭄이 있더라도 크게 농사에 해가 되지는 않으리라고 여겨집니다. 신의 생각에는 금년에는 농사를 일찌감치 시작하도록 권장하는 것이 좋겠다고 여겨집니다."

하니, 비답을 내리기를,

"진달한 바에 모두 소견이 있다. 묘당으로 하여금 품의하여 조처하게 하겠다."

하였다. 이제화(李齊華)의 상소에 아뢰기를,

"《농정전서(農政全書)》는 예로부터 전해 내려온 좋은 농사법입니다. 이 책을 출간하여 중외에 널리 유포한다면 농사에 힘쓰도록 하는 데 한 가지 도움이 될 것입니다. 가난한 백성을 조사해내어 부잣집에 나누어 배정한 뒤 토지를 주고 종자와 식량을 주게 하면 그해 안으로 신역(身役)을 지거나 환곡을 갚지 못하는 어려움이 없을 것이고, 이를 몇 해 동안 시행하면 자립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라 안에는 제언이 없는 고을이 없지만 막히고 말라붙었습니다. 또 아랫보가 있으면 윗보를 만드는 것을 금하는 것이 이미 고질적인 폐단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보를 만들 만한 곳에 일체 보를 열게 한다면 실로 백성들과 나라에 있어서 다행이겠습니다. 고구마를 심는 것은 구황(救荒)하는 데 있어서 가장 알맞은 것입니다. 여러 도에 널리 유포한다면 실로 식량을 보충하는 데 한 가지 도움이 될 것입니다.

경진년부터 영남의 조세 곡식을 영남의 백성들이 영남의 배로 실어다가 바치기 때문에 60여 척이나 되는 배를 다시 만들고 고치는 일이 없는 해가 없으며 그 재목을 대느라 원래 정해준 그루 수 외에 함부로 더 베는 것이 3, 4배가 넘는 바람에 주위에 있는 봉산(封山)들이 지금은 모두 민둥산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1천여 석이나 실은 배의 선주와 사공이 모두 뱃일에 서투른 농사꾼들이기 때문에 배가 전복되는 걱정을 해마다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조창(漕倉)에다 예전대로 보관해 두고 경강(京江)의 뱃사람들로 하여금 각 조창으로 배를 끌고 내려가서 나누어 싣고 올라와 바치게 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럴 경우 전혀 뱃일에 서투른 사람들이 자주 파선시키는 걱정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60척의 배를 3대(隊)로 나누어 배정한 뒤, 그 대에서 각자 특별히 단속하게 하고 혹시라도 배가 전복되는 일이 있을 경우에는 해당 선대 20척의 배에서 힘을 합해 다시 마련해 바치게 합니다. 그러면 영남 지방의 백성들은 저절로 농삿일에 돌아가 안착할 수 있을 것이고, 봉산(封山)의 소나무를 함부로 베는 폐단과 해당 고을 백성들에게 세곡을 거듭 징수하는 폐단을 모두 제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비답을 내리기를,

"진달한 내용 중에 쓸 만한 말이 많았으니, 묘당으로 하여금 내용을 첨부하여 품의한 뒤 조처하게 하겠다."

하였다. 비변사가 복주하기를,

"《농정전서》를 중외에 널리 유포하는 일은, 농가류(農家類)의 저서 가운데에서 이 책이 가장 상세하게 쓰여져 있다고 칭해지고 있는바, 양남(兩南) 지방에 조금 풍년이 들기를 기다려서 간행하여 반포하게 하겠습니다. 가난한 백성을 뽑아내어 부잣집에 나누어 맡기는 문제는, 궁한 백성을 먼저 돌보아 주는 일로서, 바로 같은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서로 도와주는 의리입니다. 이는 마을에 좋은 풍속이 있으면 권면하지 않아도 나름대로 해나갈 것이며, 관가에서 명령을 내릴 경우에는 반드시 어거지로 배정할 염려가 있습니다. 신역을 옮겨 지우고 환곡을 대신 징수하는 것은 더더욱 백성들을 인도하고 풍속을 바로잡는 도리가 아닙니다. 내버려두소서.

제언에 대한 일은, 제언에 함부로 법을 어기고 경작하는 것을 금하는 법이 지극히 엄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제언을 수축하기를 신칙하는 때를 당해서 도리어 개간하는 것을 허락하라고 청한 것은 사체를 잘 모른 소치에서 나온 것인 듯합니다. 아울러 우선은 내버려두소서. 고구마를 심는 데 대한 일은, 고구마는 구황하는 데 있어서 실로 중요한 종자입니다. 남쪽 바닷가의 고을 가운데 심는 곳이 많이 있고 연전에도 이미 심도록 신칙하였는데, 실제적으로 효과가 있는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다시금 여러 도에 신칙하겠습니다. 영남 지방의 조운선에 대한 일은, 조운선은 실로 소나무를 해치는 좀벌레인바, 이 때문에 배 만드는 제도를 변경하자는 논의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경강(京江)의 뱃군들에게 나누어 실어오게 하자는 논의는 비록 나름대로 소견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조창을 설치하고 조졸(漕卒)을 단속하는 데 대해서는 이미 정해놓은 규례가 있으니 사소한 폐단으로 인해서 갑자기 뜯어고치자고 논의해서는 안 됩니다. 바라건대 우선은 내버려두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농정전서》를 중외에 널리 유포시키는 일은, 근래에 찍어낸 책이 있는 곳이 드무니, 이것이 어찌 편찬하도록 명하고 인쇄하도록 명한 본뜻이겠는가. 이번에 진달한 여러 설들 가운데 채용할 만한 설들을 종류별로 보충해 편찬하여 널리 배포할 바탕으로 삼도록 할 일을 주자소(鑄字所)에 분부하라. 고구마를 심는 일은, 그 효과가 콩이나 조와 거의 같은데 배를 채우고 위장을 기름지게 하며 맛 역시 좋다. 사다가 심는 방도에 대해서도 역시 별도로 새로운 영을 반포할 필요가 없다. 각 해당 도의 감사들로 하여금 각자 심어 먹을 방도를 생각하되, 혹시라도 으레 신칙하는 지시로 보아넘기지 말게 하라.

영남의 조운선을 다시 경강선(京江船)으로 바꾸고 조운선을 대(隊)로 편성하는 일은, 곡식을 배로 실어나르는 정사에 대해서 밤낮으로 고심하고 있는데, 이것은 배 만드는 숫자를 줄이고 병선(兵船)과 경선(京船)을 통용하여, 산에 나무가 헐벗지 않고 강물의 흐름이 막히지 않게 함으로써, 농정(農政)과 함께 다같이 이익을 보는 방도에 있다 하겠다. 전에 이미 이에 대하여 두루 물어보았으니 다만 한 차례 말한 것을 실천해 보는 것이 마땅할 뿐이다. 이 조항은 우선 내버려두라. 앞으로 여러 도에서 구언 전지에 응하여 올린 상소와 책자 및 묘당의 회계(回啓)와 비답(批答) 내용까지를 반드시 모두다 기록하여 해당 도에 내려보내서, 감사로 하여금 그 사람들을 관청으로 불러다 놓고 정복을 갖추어 입은 뒤 직접 전해주게 함으로써 한편으로는 조정의 명령을 미덥게 하고 한편으로는 체모를 높이도록 하라."

하였다.

이때 상소를 올린 사람들이 대부분 초야에 묻혀 있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상이 한결같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리고 묘당으로 하여금 품의하여 조처하게 하였다. 김천숙(金天肅)·윤보(尹溥)·염덕우(廉德隅)·강요신(康堯愼)·장지한(張志澣)·이상희(李尙熙)·이인영(李仁榮)·윤홍심(尹弘心)·정응삼(鄭應參)·김응린(金應麟)·최세택(崔世澤)·김치대(金致大) 등의 상소는 분명하게 건의한 바가 없었다. 김치대는 문장이 다른 사람에 비교하여 뛰어났으므로 특별히 주자서(朱子書) 한 질을 하사하였다. 장윤(張) 이하 농서(農書)를 바친 자에 대해서는 그때마다 묘당에 명하여 품의하여 조처하게 하였고, 조금이라도 취할 만한 좋은 점이 있으면 내각(內閣)에 명해서 새로 편찬하는 농서에 채택하여 넣게 하였다. 이만록(李晩祿)이문철(李文哲)은 가장 먼저 전지에 응하여 상소를 올렸으며, 이만록은 또 정치를 함에 있어서는 인재를 얻는 것보다 더 좋은 방도가 없다고 하였는데, 상이 근본을 제대로 알았다고 하면서 《대전통편(大典通編)》을 하사하였고, 이문철에게는 운서(韻書)를 하사하였다. 유진목(柳鎭穆)이 올린 상소는 전지의 내용에 가장 잘 맞았으므로 관직을 제수하였다.

유진목이 농서를 올렸는데, 그 내용에,

"신은 삼가 교서를 받들어 읽고서 감히 농사를 가르치는 것, 농삿일을 다스리는 것, 농사에 이로운 것, 농사에 해가 되는 것들을 조목별로 나열하여 15가지 항목을 만들었습니다.

1. 향약법(鄕約法)을 거듭 밝히고 농민들을 부지런히 힘쓰도록 권장하는 것입니다.

1. 토지를 3등급으로 나누고서 씨를 뿌리거나 모내기를 하는 것을 각각 그 토질에 맞게 하는 것입니다.

1. 바닷가나 평야지대 고을의 각 창고에 보관하는 잡곡을 종자곡으로 나누어주어 대신 파종할 수 있게 하는 일입니다.

1. 널리 제언을 쌓아서 물을 잘 이용하게 하는 것입니다.

1. 산의 나무를 베는 것을 엄히 금하여 수원(水源)을 풍부하게 하는 것입니다.

1. 수차의 제도를 반포하여서 물을 끌어대는 것을 편리하게 하는 것입니다.

1. 물을 균등하게 이용하게 하여 농민들이 혜택을 받도록 하는 것입니다.

1. 《농가집성(農家集成)》을 참고하여 오늘날의 실정에 맞는 농서를 만드는 것입니다.

1. 여름 농사철에 백성들을 소요시키지 않는 것입니다.

1. 목화밭에 대해 재결(災結)로 처리해 주어 목화 농사를 권장하는 것입니다.

1. 논에 가을 보리를 심도록 신칙해서 농사철의 식량을 넉넉하게 하는 것입니다.

1. 사창법(社倉法)을 모방하여 시행함으로써 농량(農粮)을 돕도록 하는 것입니다.

1. 봄과 여름에 밭갈고 김매는 것을 가난한 농부집부터 먼저하게 하는 것입니다.

1. 소의 돌림병에 대한 치료법을 널리 물어서 농서에 첨부하는 것입니다.

1. 농민을 귀하게 여기고 선비들을 권장하며 마을의 풍속을 바로잡는 것입니다."

하였다. 임박유(林博儒)도 농서를 진달하였는데, 유진목과 같은 마을 사람이었다. 유진목과 함께 책을 올렸는데, 그 내용에,

"1. 농사를 담당하는 관리를 잘 가려 임명하고 제대로 농사를 장려하였는가 하는 것을 근무평정에 반영하여 게으른 농민들을 권장하게 하는 것입니다.

1. 산의 벌채를 금지하여 나무를 길러서 수원(水源)을 풍부하게 하는 것입니다.

1. 냇가의 둑을 다시 수축하고 제언을 더 설치하여 수리(水利)를 통하게 하는 것입니다.

1. 둑을 수리하고 제언을 설치한 뒤 법조문을 엄하게 세워 관개를 균등히 하는 것입니다.

1. 수차(水車)의 제도를 반포하여 물을 이용하기에 편리하게 하는 것입니다.

1. 한전법(限田法)을 정립하여 게으른 농민을 진작시키는 것입니다.

1. 논을 세 등급으로 구분하여 모내기를 하거나, 씨뿌리기를 하거나, 다른 작물을 파종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1. 연해 고을의 각 창고의 곡식은 잡곡으로 바꾸어 보관해 두고 이를 환곡으로 나누어주어 벼 대신 파종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1. 환곡을 나누어 줌에 있어서는 반드시 농사철이 시작되기 전에 한 차례 넉넉하게 나누어주어 농사지을 동안의 양식을 마련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1. 향약법을 신명하여서 농사에 힘쓸 바탕을 마련해 주는 일입니다.

1. 농민을 귀하게 여겨 백성들로 하여금 농사지을 마음이 생기게 하는 일입니다.

1. 담배의 재배를 엄하게 금지시켜서 농사짓는 전지를 넓히는 일입니다.

1. 토질을 살피고 곡식의 성질을 잘 파악하여 밭을 갈고 씨를 뿌리게 하는 일입니다."

하였다. 이에 대하여 비변사가 복계(覆啓)하기를,

"유진목이 올린 책자를 가져다가 보니, 그 조목이 문란하지 않았고 그 내용이 근거할 만하였는데, 필경에는 그 요지가 향약법을 시행하는 데로 귀결되었습니다. 다만 농정이 점차 성과가 있는가를 살펴보아 한(漢)나라에서 시행하였던 법과 똑같이 별도로 효제(孝悌)와 역전(力田)의 과목(科目)을 세워도 늦지 않을 것이니, 우선은 내버려두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일찍이 선정신(先正臣) 송 문정공(宋文正公)520) 이 공주 목사(公州牧使) 신숙(申洬)이 편찬한 《농가집성(農家集成)》의 서문을 쓴 것을 보았는데, 거기에 말하기를 ‘주자가 쓴 책 가운데 권농문(權農文) 몇 조목은 참으로 뭇 백성들이 일용(日用)으로 할 것들이다. 효제(孝悌)니 예의니 하는 것이 일찍이 제언을 수축하고 토지를 일구는 것에 대한 방문(榜文)과 아울러 언급되지 않은 적이 없었은즉, 다른 데서 구하지 않더라도 그 힘을 쏟아야 할 곳을 알 수 있다.’고 하였는바, 그 말뜻이 절실하기도 하다. 참으로 농가(農家)의 지침이 되는 것이며, 풍속을 교화시키는 근원이 되는 것이다. 근래에 날마다 올라와 쌓이는 상소문을 보건대 여기에 대해 언급한 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오로지 공주 생원 유진목만이 능히 말하였다. 이 책을 편찬한 자가 바로 공주 목사였는데, 지금 1백 46년이 지난 뒤에 그 말이 또 공주에 사는 선비에게서 나왔으니, 기이하다고 할 만하다.

진달한 15조항은 모두 주자가 남강(南康)에서 내린 방문과 비슷한 종류의 것이다. 이른바 향약법을 거듭 밝혀 농민들을 격려해야 한다고 한 것은, 바로 주부자가 2월에 술과 음식을 싸가지고 교외로 나가 부호들을 만나보고서 농상(農桑)에 힘쓸 것과 효제(孝悌)를 돈독히 할 방도를 일러준다는 것이다. 이른바 씨를 심거나 모를 내는 것을 각각 토질에 맞게 한다고 한 것은, 바로 주자가 말한 씨를 물에 담궈두었다가 모를 부으며 깊게 갈고 얕게 김매라고 한 뜻이다. 이른바 잡곡을 대신 파종하라고 한 것은, 바로 주부자가 말한 제때에 논을 갈아엎고 밀과 보리를 많이 심는다는 법이다. 이른바 수레의 제도를 널리 반포하라고 한 것은, 바로 주부자가 말한 숙(塾)이 있는 자는 수레와 두레박의 힘을 힘입는다는 방법이다. 이른바 수리(水利)를 균등히 나눈다고 한 것은, 바로 주부자가 말한 못과 연못이 얕거나 샐 경우에는 힘을 합쳐서 파낸다는 방책이다. 이른바 농사철에 백성들을 소란스럽게 하지 말라고 한 것은, 바로 주부자가 빈민이나 하호(下戶)가 억울하게 불려나간다는 깨우침이다. 이른바 목화농사를 장려하라고 한 것은, 바로 주부자가 성자현 지사(星子縣知事) 왕문림(王文林)의 뽕나무를 심는 방법 등을 알아내어 세 현(縣)에 내려보낸 규례이다. 이른바 사창제도(社倉制度)를 모방하여 시행하라고 한 것은, 바로 주부자제갈가(諸葛家)천능가(千能家) 등 집안의 쌀을 창고에 쌓아두었다가 대신 나누어주자고 한 논의이다. 이른바 갈고 김매는 데 있어서는 반드시 가난한 농민의 집부터 먼저 하게 하라고 한 것은, 바로 주부자가 말한 빈궁한 농민을 기쁘게 하는 근본이라고 한 것이다. 이른바 소의 돌림병을 고치는 방법을 두루 물어보라고 한 것은, 바로 주부자가 말한 농사짓는 품은 전적으로 소의 힘에 의지하는바 제때에 잘 먹여 기르고 잡아먹지 못하게 하라는 훈계이다. 이른바 농민을 귀하게 여기고 선비들을 권면하라고 한 것은, 바로 주부자가 말한 도를 배우고 몸을 닦아 민호(民戶)를 흥기시킨다고 한 뜻인 것이다. 이른바 산을 벌채하는 것을 엄하게 금지시키라고 한 것과 같은 것은 주부자가 언급하지 않은 것인데, 이것은 주부자가 있던 남방 지방에는 물이 많고 산이 적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은 이미 예전에 시험해 본 것들로서, 오로지 수령들이 어떻게 독려하고 신칙하는가에 달려 있다. 그러나 묘당에서 그가 진달한 책자 가운데 있는 여러 조항들을 문서 뒤에다 기록하여 본도 이외의 7도 및 화성부(華城府)에 내려보내라. 그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각자 상세히 살펴본 다음 관하의 수령들을 잘 신칙해서, 본받을 만한 조항들을 관심을 두고 채택해 시행해서 기어이 실효가 있게 하라.

그 가운데서도 밭에 거름을 주는 것은 농사짓는 데 있어서 더욱 요긴한 것이다. 버들가지를 밭에 펴고, 개흙을 재[灰]에 섞고, 지붕의 짚을 썩히고, 짠물을 흙에 붓는 등의 방법을 써서, 땅이 비옥해지면 갈나무 잎을 펴서 지력이 떨어지는 것을 막고, 흙이 부풀어 오르면 가는 모래를 고르게 섞어서 소출을 배로 거두는 것은, 그 나름대로 묘리가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이를 시행하지 않고 있으니, 이는 사람들이 부지런하냐 게으르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난번에 내린 교서에서 ‘근(勤)’이라는 한 자를 뽑아내어 교서문의 핵심 글자로 삼았는데, 지금 이 글에서 조목조목 분석하면서 능히 ‘근’ 자에다 귀결시켰으니, 몹시 가상하다. 이 비답 내용을 해당 도에 내려보내어 그로 하여금 유진목에게 등사해서 주게 하라."

하였다. 비변사가 또 아뢰기를,

"임박유(林博儒)가 진달한 14개 조목 가운데 10개 조목은 유진목이 진달한 것과 내용이 같습니다. 그 가운데 한전제도(限田制度)를 정하자는 것과 몇 기분의 환곡을 합하여 나누어 주자는 것, 담배의 재배를 엄히 금지시키라는 것, 백성들에게 절약하도록 장려하라는 것은 유진목이 말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한전제도를 시행하자는 것은 말은 그르지 않지만 갑자기 논의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담배의 재배를 금지하는 것은, 금지시키기는 참으로 쉬우나 역시 효과와 피해가 서로 엇비슷할 것입니다. 어공(御供)은 빠뜨릴 수 없다고 운운한 것에 이르러서는 그 말이 극히 외람스럽습니다. 시골 유생이 비록 사체를 제대로 몰랐다고 하더라도 감사가 어찌 살펴보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해당 감사를 추고하소서. 그 가운데 환곡을 나누어주는 한 가지 일은 채용할 만한 점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니 감사로 하여금 영하(營下)의 고을 백성들에게 시행해보게 하고, 편리하다고 여겨지면 여러 고을에 시행하는 것 역시 안 될 것이 없겠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한전제도에 대한 일은 말인즉 좋으나 형세상 용이하게 논의하기가 어렵다. 비록 성세였던 하·은·주 삼대 때를 두고 말하더라도, 한 사람이 받는 전지가 하나라에서는 50묘(畝)였고 은나라에서는 70묘였으며, 주나라에서는 1백 묘였었으니, 백성들이 일상적으로 쓰는 비용이 점점 불어남에 따라 전지 역시 늘려주었다는 것을 대개 알 수가 있다. 진(晋)나라 태강(泰康)521) 때에는 한 사람당 70묘를 받는 제도가 있었지만 토지를 주고 받는 제도가 역사책에 쓰여져 있지 않다. 위(魏)나라 효문제(孝文帝)가 비로소 균전제도를 시행하였는데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전지를 균등히 나눈 데 지나지 않았다. 당 태종(唐太宗)이 시행한 호구별로 나누어서 대대로 이어가게 한 규정 역시 이것을 모방한 것이었는데, 영휘(永徽) 연간에 토지의 겸병(兼並)이 옛날과 같게 되었다. 대개 진(秦)나라에서 부터 지금까지의 기간이 1천 6백 년이 되었는데 능히 전지를 나누어주고 토지를 균등하게 하는 법을 시행한 기간은 2백 년에 불과하였으니, 저절로 혁파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형세가 그러하였던 것이다.

우리 나라 6도(道)의 토지 대장에 등재되어 있는 전지의 총수를 경외의 사람 숫자에 비교해 보면 문무관(文武官) 3천여 명을 제외하고 사람마다 1결(結)씩만 나누어준다고 할 때 6백 63만 6천여 결이 부족하게 된다. 조정에서는 내가 즉위한 초기부터 가장 먼저 전정(田政)을 바로잡는 데 유의하여, 매번 이에 생각이 미칠 때마다 밤까지 평상을 빙빙돌면서 생각해 보았으나 그 요점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 바로 이 문제이다.

몇 기분의 환곡을 합하여 나누어 주는 일은, 양반이라는 명색만 있고 거느리고 부리는 사람이 없는 자들은 이웃 사람들에게 구걸하여서 환곡을 받아가는데, 늘상 이들에게 뜯겨서 잃어버리는 것이 원래부터의 공통된 폐단이었다. 그리하여 비록 몇 말의 환곡을 받아갈 때에도 오히려 관속들의 침탈과 점주(店主)들의 비용으로 뜯기는 것을 면치 못하고 있는 실정인데, 더구나 몇 섬을 한꺼번에 아울러서 받아갈 경우, 능히 종자곡과 농사지을 양식으로 쓸 수 있을지 장담할 수가 없다. 그러니 우선은 한두 고을에서만 시험해 보는 것도 안 될 것은 없다.

담배의 재배를 금지하는 일은, 이로운 점과 해로운 점이 엇비슷하여 술을 빚는 것과 같은 점이 있는바, 가볍게 논의해서는 안 된다. 이는 신풍 장공(新風張公)522) 의 말에서 충분히 근거삼을 수 있는 것이다.

백성들에게 절약하도록 장려하는 일은, 오히려 조정에서 어떻게 이끌어 나가느냐에 달려 있는 문제이다. 어찌 백성들에게 책할 문제이겠는가. 경들부터 참으로 검소한 생활에 솔선수범하기로 마음먹는다면 자연히 우역(郵驛)으로 명을 전하는 것처럼 빠르게 확산될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이점에 대하여 스스로를 반성하겠다."

하였다. 그리고는 장윤(張)안성탁(安聖鐸)이 또 유진목에 다음간다고 칭찬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장윤이 올린 농서(農書)에 대한 견해는 다음과 같습니다.

1. 토질을 잘 살펴보고 거기에 맞는 곡식을 심는 일에 대해서입니다. 토질을 잘 살펴보고 거기에 맞는 곡식을 심는 것에 대해서는 지난번에 내린 교서에서 유시한 바가 있으니 대소의 백성들 가운데 이를 환히 아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분발하여서 성과를 거두고자 할 것입니다. 그러니 우선은 어떤 땅에는 어떤 곡식을 심으라고 말하여 마치 규정을 정해놓는 것처럼 하기는 어렵습니다. 내버려두소서.

1. 농기구 가운데에서 수차(水車)와 역거(役車)가 농삿일에 있어서 더욱더 긴요한데, 그 가운데서도 역거는 외바퀴수레를 쓸 수 있다는 일에 대해서입니다.

수차의 제도는 일리가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그 효과가 없다고 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그 법이 없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생각건대, 그 만드는 법이 교묘하고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일반 장인(匠人)들이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일반 민호(民戶)에서 마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점이 바로 우리 나라가 수차 만드는 제도를 잘 몰랐던 것이 아니면서도 그것을 편리하게 이용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말하는 자들은 ‘중국에서 쓰는 것을 어느 곳에서인들 쓰지 못하겠는가.’라고 합니다. 그러나 중국의 장인은 솜씨가 뛰어나고 중국의 재물은 풍족합니다. 그리하여 아주 가난한 자를 놓고 본다면 우리 나라의 가난한 백성들과 다름이 없지만, 조금 부유한 자를 놓고 본다면 그 재산이 우리 나라의 부유한 자들보다 천만 배도 넘습니다. 그러므로 수차 한 대가 만들어지면 뭇 공장들이 이를 본따고 한 동네가 만들면 모든 사람들이 다 이에 응합니다. 이 때문에 만들기가 쉽고 광범위하게 시행되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 도에서 이를 시험해 보고자 할 경우 반드시 영읍(營邑)이 힘을 합친 다음에야 한두 대의 수차를 만들 수 있을 것이며, 일반 백성들이 서로 모방한다는 것은 결코 그럴 리가 만무합니다. 역거에 이르러서는, 각도의 습속이 서로 다른바, 역시 영을 내려서 시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버려두소서.

1. 호남 지방에 오랫동안 양전(量田)을 하지 않아서 전지(田地)가 균등치 않고 부세(賦稅)가 공평치 않다는 데 대해서입니다.

토지를 다시 양전하는 일에 대해서는 이미 다른 복계(覆啓)에서 진달드렸습니다. 풍년을 기다려서 품정(稟定)하여 거행하겠습니다.

1. 무주(茂州)와 순천(順天) 사이에는 사금(沙金)을 캐는 자가 줄을 잇고 농부가 아주 드물게 있는바, 이를 일체 금지시킬 경우 놀고먹는 무리들이 저절로 돌아가 농사지을 것이라는 데 대해서입니다.

금의 채취를 금하는 것은 원래 법전에 엄격히 실려 있고 농사를 해치는 일로도 이것보다 더 심한 것이 없습니다. 각별히 엄하게 금지시키라는 뜻으로 감사들을 엄하게 신칙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전교하기를,

"그 가운데에서도 농사철에 대해 상세히 진달한 것은 모두 일리가 있는 것들이다. 거기에서 말한 ‘우수(雨水)에는 삼밭을 갈고, 경칩(驚蟄)에는 농기구를 정비하며, 춘분(春分)에는 올벼를 심고 청명(淸明)에는 올기장을 심으며, 곡우(穀雨)에는 호미질하러 나가고 입하(立夏)에는 들깨를 심으며, 망종(芒種)에는 모시와 삼을 거두고 하지(夏至)에는 가을보리를 거두며, 입추(立秋)에는 메밀을 심고 처서(處暑)에는 올벼를 수확한다. 반드시 절기에 앞서 갈고 심으며 절기에 앞서 물을 가두며, 또한 제때에 모를 내고 제때에 김을 매준다. 모를 낸 지 20일 뒤에 초벌김을 매며, 초벌김을 맨 지 13일이 지난 뒤에 두벌김을 매며, 두벌김을 맨 지 15일이 지난 뒤에 세벌김을 매면 곧바로 추수할 때가 된다. 만약 제때를 어긴다면 곡식이 잘 자라나게 하려 해도 될 수 있겠는가.’라고 한 것은, 말한 바가 형식적인 것을 벗어던지고 실제적인 것이었으니 기쁘다. 또 김을 매는 과정도 일일이 조목조목 진술하였다. 그러니 해당 고을의 수령으로 하여금 그를 특별히 권농관의 직임에 차임하고 가을 추수 뒤에 부지런함과 태만함을 고과한 뒤 감영에 보고하게 하고, 그런 뒤에 감사가 장계를 올리라고 해당 도의 감사에게 분부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0책 50권 16장 B면【국편영인본】 47책 138면
  • 【분류】
    금융(金融) / 상업(商業) / 출판-서책(書冊) / 식생활(食生活) / 인물(人物) / 군사-부방(赴防) / 군사-군역(軍役) / 과학(科學) / 재정(財政) / 구휼(救恤) / 향촌(鄕村) / 왕실-사급(賜給) / 향촌(鄕村) / 교통-육운(陸運) / 인사-선발(選拔)

  • [註 510]
    태세성(泰歲星) : 목성을 말함.
  • [註 511]
    공류(公劉) : 후직(后稷)의 증손.
  • [註 512]
    태왕(太王) : 고공단보(古公亶父). 주 문왕의 조부로 처음 주나라를 세웠음.
  • [註 513]
    원성(元聖) : 이윤(伊尹).
  • [註 514]
    진(秦)나라에는 정국(鄭國)의 도랑 : 전국(戰國) 시대에 한(韓)나라가 진나라의 강성함을 두려워하여 수공(水工) 정국(鄭國)을 시켜서 진(秦)나라에 가서 대대적인 수리(水利) 사업을 일으키게 하여 진나라를 피폐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결국 진은 이 관개사업으로 관중(關中)이 비옥해져서 막대한 국력을 양성할 수 있었다. 《사기(史記)》 권29 하거서(河渠書).
  • [註 515]
    구공(九功) : 구공은 육부(六府)와 삼사(三事)를 가리키는데, 육부는 수(水)·화(火)·금(金)·목(木)·토(土)·곡(穀)을 맡은 곳이며, 삼사는 정덕(正德)·이용(利用)·후생(厚生)을 말한다.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
  • [註 516]
    축월(丑月) : 음력 12월.
  • [註 517]
    미월(未月) : 음력 6월.
  • [註 518]
    수령 칠사(守令七事) : 고려 때부터 지방관의 행정 지침이었던 일곱 가지 조목. 농상을 장려하는 일[農桑盛], 호구를 증가시키는 일[戶口增], 학교를 흥기시키는 일[學校興], 군정을 정비하는 일[軍政修], 부역을 고르게 하는 일[賦役均], 송사를 처리하는 일[詞訟簡], 간활한 짓을 종식시키는 일[姦滑息] 등인데 고과에 반영되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 이전(吏典) 고과조(考課條).
  • [註 519]
    제일(除日) : 섣달 그믐날.
  • [註 520]
    송 문정공(宋文正公) : 송시열(宋時烈)을 말함.
  • [註 521]
    태강(泰康) : 무제(武帝)의 연호.
  • [註 522]
    신풍 장공(新風張公) : 장유(張維)를 가리킴.

○己丑/下勸農政, 求農書綸音曰: "明年己未, 卽我先王親耕耤田之年也。 五紀光御, 八方涵育, 蓋以勤民重農, 爲治敎之原, 而基壽考之功。 豐功巍烈, 誕造無彊, 太歲星周, 舊甲嚴臨, 予小子其敢不欽承前寧人遺志, 以對揚耿光之萬一也哉? 國以民爲本, 民以農爲生。 農不殖則民不穀, 民不穀則國何乂? 予食雖可減, 民不可以闕食也, 民食之闕, 其責在農。 農若不勤, 曷云有秋? 民之爲農也, 雖因天時, 而當盡其地利也, 雖資地利, 而當修其人事也。 撫五行之交運, 體四季之寄旺, 土爰稼穡, 爲民司命, 而服田之勞, 勞亦多矣。 曰糞壤之勞也, 曰引水之勞也, 曰鋤鉫之勞也, 曰耕耨之勞也, 曰播植之勞也, 曰耘耔之勞也, 曰饁嗿之勞也, 曰飼牧之勞也。 自冬徂春, 恰爲百日之勞, 及夫秋熟, 又有刈穫之勞, 場圃之勞。 而勞之淺深, 年分豐歉, 嗟! 我農人, 曷敢言勞? 昔朱夫子, 爲吏於, 勞農山間, 對新釀而有銍艾中熟之詩, 蓋所以勞之也。 勞者民也, 勞之者吏也。 民之勞矣, 吏焉敢逸? 顧我國被山帶海, 野多膏腴, 素稱衣食之鄕。 而興作昧方, 惰敖成習, 田畯失其職, 保介違其時。 一有水旱, 杼軸俱空, 玆曷故焉? 蔽一言曰, 人事之不能修, 而地利之不能盡也。 農之本, 在乎勤與勞, 而其要則亦惟曰興水功也, 相土宜也, 利農器也。 三者爲要, 水功居先。 在《易》水地爲《比》, 地水爲《師》, 此井田之所由法耳。 欲相土宜, 捨水功奚爲哉? 故公劉荒居, 皇澗是夾, (大)〔太〕 王胥宇, 西滸是率。 且以元聖之明, 農先立匠人, 以制溝洫, 而載之《周官》李悝之河, 鄭國之渠, 於漢文翁之溲, 於 韋丹之陂, 導之貯之, 以滀以漑。 雖時雨不降, 六七月之間, 其苗勃興。 而今也隄政久抛, 冒耕相續。 如湖南之碧骨, 湖西之合德, 嶺南之恭儉, 關北之七里, 關東之蓴池, 海西之南池, 關西之潢池, 號稱國中大堤, 而疏處不疏, 停時不停, 行潦其涸, 歲比不登。 爲當今之碩畫, 莫先乎已有之大堤而着手, 推而及於均舍百事。 使諸路各就掌內, 咸效其能, 誠力所到, 其應如響。 且水功之於土宜, 相須而行。 畇隰畛甽之異等, 穜稑秠糜之殊性, 滮池則浸稻, 疆埸則有瓜。 人新畬而來牟, 人載芟而耘耦, 人重麥, 人重禾, 卽《詩》書之所詠歌者也。 禾藝高燥, 稷播衍沃, 美壤率歸於烟茶, 而農則爲厲, 名山多入於火粟, 而穀不加賤。 宜南者不宜於北, 喜峽者不喜於野。 而雲夢均業, 原隰無別, 從以注秧盛而付種者罕, 則世稱利害相半, 而畢竟害二而利一。 愆雨則歉, 在在皆然。 至於農器之便利, 東俗尤昧昧, 無異於 以前, 乃庤斯趙固尙矣。 只言其緊且要者, 水車者, 所以備旱也, 役車者, 所以兼人也, 篝(窶)簍者, 所以貯穀也, 碓確者, 所以舂糧也。 自古及今, 行者無聞。 顧不能修其事而盡其利, 尙曰農也不熟, 耕也其餒云爾, 則不其近於倒植而求茂乎? 董之以九功, 勸之以九歌, 俾緣畝襏襫之民, 靡不極其功而竭其智, 田無不闢, 闢無不種, 種無不食, 則《管》書所謂: ‘人生在勤, 勤則不匱,’ 《魏志》所謂: ‘人皆力勤, 歲數豊穰’ 是耳。 竊嘗有意於敦本務實之政, 命編農書, 欲頒州郡。 而古今之各異也, 風土之不幷也, 貧富之難齊也, 事力之未逮也, 不可以硬定而膠守。 階庭萬里, 人人各進良策。 我則受之, 折衷而用之, 可謂農家之大全。 夫農作之工, 仰屬中星, 旁叶氣運。 丑之半大寒之節, 土運始生, 未之半大暑之節, 太陰濕土之氣始生, 丑與未相對, 而土始用事。 則慨已往之難追, 擬方來之資益, 以興嗣歲, 以勖農夫。 所貴乎孔夙, 奚待春元之發綸? 今日丑日也, 明日丑月也。 未刻之正, 節侯交至, 土牛祈年, 此政其時。 況丕圖前功, 日月依辰, 寔予仰述之一端乎? 咨! 爾京外小大臣庶, 咸須聽悉。 如有己見, 可以有裨於三農者, 或以章疏, 或以簿冊, 京而呈于廟堂, 外而納于監司。 而毋泥乎異俗, 毋拘乎古方, 山沿饒瘠, 各陳其當。 人謀允臧, 克享于天。 天以康年, 貽我十千, 粒我烝黎, 同我太平, 則斯可以仰副我寧考康功田功之盛德至善, 而又可以助予小子肯播肯穫之至誠苦心。 起我農政, 絿我農書, 不翅如農夫之望秋。 予卽阼二十二年建丑月前一日己丑未正。" 於是應旨陳疏者, 二十七人, 忠義衛裵宜洪州幼學申在亨、前同知金天肅大邱幼學柳東範、副護軍卜台鎭、靈巖幼學鄭始元、前監察李宇炯、守衛官尹溥、前令廉德隅、守衛官劉宗燮、前察訪康堯愼、前忠義張志瀚、前純陵參奉李尙熙、副司果李仁榮、前郡守尹弘心新溪儒生鄭錫猷、巡將鄭道星全羅都事金夏璉寧越府使李敬五三嘉幼學鄭應參彦陽幼學全萬、厚陵令金應麟、前同知金養直崔世澤尙州幼學李齊華順安進士金致大也。 前持平尹在陽, 亦因時務疏, 附陳農政焉。 進農書者四十人, 南原幼學 許顥許耋盧翼遠, 公州生員柳鎭穆, 公州幼學林博儒, 楊州幼學安聖鐸, 京居庶民李必忠, 洪川幼學李光漢, 高城幼學權炫盧再煌, 歙谷幼學趙之榮鄭致一表憲正, 報恩幼學李東膺, 德山幼學李宜璹, 水原折衝元在夏, 定山幼學金勳, 京居幼學李晩祿, 交河幼學李文晢, 羅州幼學羅敏徽羅學愼, 淳昌幼學申輔權, 靈光進士李大圭, 全州幼學金尙直李汝孝宋相彙李章烈, 鎭安幼學朴宗赫, 古阜幼學朴道欽, 綾州進士南熤, 光州進士李宜 、幼學朴文燦鄭潤國, 茂長幼學康錫運康洵, 南原前縣監張顯慶, 長連進士朴載卨, 海州幼學金皓李薰也。

裵宜疏曰:

"農事有三。 其一, 古者落種於穀雨, 移秧於夏至, 則農時尙早。 而今則種與秧, 先時於兩節候, 而不然則爲晩。 是知種之移之以早爲務可也。 其二, 麥之有補於人, 不下於稻, 而民知其種田之爲好, 不知其種水田之亦好。 夫水田秋穫之後, 便作空地, 當其空地之時, 決水作乾坪, 萬頃千畦, 悉以種麥, 刈麥之後, 乃揷秧之始設。 或稻未秋稔, 足可麥以免饑也。 其三, 貧富相資也。 民之窮者, 當耕播之時, 無牛無種, 失農者多。 欲捄此病, 郡縣之官, 選面里之父老, 爲勸農之任, 訪其面里之富戶貧戶, 錄成冊子, 使富者出種糧, 貸其貧者。 若里無富戶, 自官出貸, 待秋還納。 此法若行, 富者無損, 而貧者有所賴。 牛禁之令不弛, 牛蓄自賤。 使民安業, 係於守宰, 倘守宰得其人, 則懋農自在其中也。"

批曰: "思聞裨益於農政之事, 別下十行, 辛勤求助。 莫謂予言之近於迂遠而無當。 目下先務, 豈有過此? 令下多日, 公車未聞投匭。 爾以勳裔, 應旨條陳, 皆適實用。 其云種之移之必早, 稻或未秋, 麥足免饑, 富出種與糧, 秋卽還償, 又於面里父老中一人爲勸農, 凡此云云, 必有的見熟料而然者。 其在買馬骨之義, 先從登聞人, 當施嘉奬, 或恐欲言者之嫌於如何, 反又却步, 姑不下敎。 爾其退待廟堂之招, 叩其實。" 申在亨疏曰:

"戊己, 天干之土也, 丑未, 地支之土也。 干支合而爲己未, 則已與未, 皆屬於土, 而土爲農之本, 農爲食之本, 食爲民之本。 導民以農, 務農以時者, 其惟在明年乎。 蓋修人事以盡地利, 盡地利以竢天時。 而水功之興也, 土宜之相也, 農器之利也, 無非人事所當爲者。 天時三年旱三年水, 十年一大旱, 十年一大水。 然而旱害甚於水之害, 而我國多水田者也, 而一遇亢旱, 農民束手。 此曷故焉? 有注秧移種之法而然也。 自箕聖之始敎井田, 高燥處乾付種, 卑濕處水付種, 我國承之, 謂之乾播、水播。 而自中年始有移秧之法。 諺傳自龍蛇之變, 始有此法, 此法一行, 民之廢農者多矣。 時當穀雨, 始爲注秧, 而若遇流行之災, 則雖勤農者, 每瞻雲漢, 節晩之後, 始得注秧。 夏至之節, 可以移秧, 而天於此時, 陽亢用事, 每患靳霈, 一失其時, 則稼穡之事廢矣。 至於付種, 則冬雪之所瀜, 春雨之所霑, 早稻早播, 晩稻晩播, 乾處乾播, 水處水播, 種生苗立, 旱與水不能爲損。 而但春以種夏以耘, 移種者則鋤不過數次, 付種者不下三四次。 而富民務其兼幷, 貪於多作, 小而三四石, 大而六七石, 一時注秧, 以省其力。 一時移種, 以除其勞。 雖或遇旱, 多有美田, 所收夥然。 貧殘之民, 注秧移種, 最爲居後, 遇旱値歉, 糊口無路。 以臣愚見, 自明年爲始, 廢注秧爲付種, 則雖有一時之勞, 可裕一歲之食。 小民惟知姑息之爲好, 而不知永久之爲計。 殿下苟欲務三農之業, 立萬世之法。 若夫興水功, 則殿下敎之曰: ‘因其已有之大堤而着手。’ 蓋近於山而有堤以貯水也, 近於野而有洑以引水也, 近於海而有堰以防水也。 堤洑堰三者, 所以興水功備旱災者也。 我國山野之郡, 如繡錯, 湖海之縣, 如碁布, 昔人所築, 無處無之。 但沙堤之淤塞, 石洑之衝破, 潮堰之壞圮, 而爲農者不得修治。 若自堤堰司, 申飭道伯守宰, 小者借民之力, 大者致官之力, 春初始役, 引水貯水, 苟或不勤, 懲以殿最。 若又有可以新築處, 捐廩出力, 以始其役, 亦又不足, 出此國穀, 以完其役。 若有富民, 出財施力, 民被其利, 特施賞典, 以爲興起他民之道。 則山沿之邑, 豈如今年之大歉耶? 若夫相土宜, 則殿下敎之曰: ‘宜南者, 不宜於北, 喜峽者不喜於野。’ 然而土地非不欲相矣。 蓋尺地寸土, 盡入於量案。 而膴膴之原, 今或陳荒, 畇畇之隰, 今或廢棄, 孰不欲起墾, 而今春纔起來秋執卜。 如此而責之曰: ‘土地闢人民衆乎。’ 以臣愚見, 可起之土, 勸民起之, 可耕之土, 使民耕之, 隨土肥瘠, 定稅多少, 限六七年或四五年, 使吾民之無衣無食者, 得以飽煖於博施之下, 則相土之宜, 不外乎此矣。"

批曰: ‘戊己, 天干之土也, 丑未, 地支之土也, 干支合而爲己未, 則己與未, 皆屬於土。 而土爲農之本, 農爲食之本, 食爲民之本, 民爲國之本。 爾所敷衍爲說者, 識解誠可取。 而其云: ‘自箕聖之始敎井田, 燥處, 乾付種, 濕處, 水付種, 我國所謂乾播水播者是也。 移秧之法行, 而廢農者多。 自明年己未, 廢注秧爲付種, 其利博哉者。’ 卽近日廟堂講究之策也。 然民可使由之, 不可使知之, 治民如烹鮮羹, 擾之則雖師古之美制, 未必有立效, 去泰去甚之道, 在方伯守令矣。 其云: ‘近於山有堤, 堤所以貯水, 近於野有洑, 洑所以引水, 近於海有堰, 堰所以防水。 山野繡錯, 湖海碁布, 昔人所築, 無處無之, 而流沙塞堤, 轉石衝洑, 驅潮壞堰。 小者借民力, 大者致官力, 自春初始役, 修治考勤慢, 爲殿最之高下。 古未築而今可築者, 又出國穀完役。 或有出財蒙利之人, 特施賞典者。’ 亦可謂切實。 令廟堂, 指一草記, 以爲未墾前措處之地也。 其云: ‘陳荒廢棄, 孰不欲起墾? 而今(秋)〔春〕 纔起, 來秋執卜。 如此而責之曰, 土地闢人民衆乎? 勸起勸耕, 隨土定稅, 限以六七年, 或四五年, 使吾民之無衣無食者, 得以煖飽者,’ 此三年勸耕, 次等降續之意也。 年前嶺南有所知委, 近果有效乎否? 與尾陳條件, 亦令廟堂稟處。" 備邊司覆啓言: "堤洑堰申飭事, 其所謂: ‘借民力致官力, 考勤慢爲殿最者,’ 卽不可緩者也。 然於借民力致官力之中, 又自有多少層節。 如小小役處作者, 例必運力, 年年修治。 先就各邑堤洑堰之蒙利廣而壞塞甚者, 名定其幾處, 而用民之當以千萬計者, 以所劃賑資中劃出幾石, 作爲糧資, 量其日字, 期於竣役。 則此實合於荒年興作之政, 而丁取雇食, 賑口必減, 穀散閭里, 亦有餘效。 爲先以此分付三南道臣, 面議守令後, 以其可合修築之處, 竝卽令狀聞, 而必趁氷解之後, 農殷之前, 一齊訖役, 以其形止馳報本司。 自本司稟旨, 另擇識農務解水利者, 分行考察。 至於古未築, 今可築者, 除非十分無疑, 不必一時發令, 以致煩擾。 此則毋論大小民人, 若有相形便而就功役者, 其爲可尙, 豈止捐財補賑之功乎? 道臣狀聞, 拔例論賞。 守令考績, 本不出於七事, 而農爲七事之首, 則以課農爲殿最, 卽是法意也。 此後則先書農政優劣, 次及他政之意, 定式知委。 蓋此修築之政, 不但三南爲然, 諸路亦當一體擧行。 而畿甸東西北事情稍異, 就此覆啓中辭意, 節略行會。" 允之。 柳東範疏曰:

"臣只以嶺南一路所見聞者陳之。 凡菑於稼者非一, 而惟旱爲最, 重於農者非一, 而惟牛爲大。 還穀不均, 貧富失業, 簽丁多匿, 而孱農莫支, 新田執卜, 而墾闢不廣。 至於稌宜濕而黍宜燥, 綿喜暘而麻喜雨, 皆農者之習焉者也。 最其大要有六, 曰深濬堤澤也, 曰用水有節也, 曰繁殖畜産也, 曰糴均貧富也, 曰役蒐漏丁也, 曰勿稅新田也。 近來歲比旱暵, 人則委之於天, 臣則曰人自旱。 夫夏必有雨, 而有時而旱, 冬必有雪, 而有時而旱, 又或有冬旣雪, 而春又雨者。 雪之所瀜, 雨之所渟, 無費一勺, 俱滀細流, 則冬春五六朔之所得, 足以禦夏三朔之乾。 故古之堤澤, 其深不測, 深也故貯水也多, 多也故禦旱也優。 今則不然, 堆阜之捎囓, 流沙之積聚, 凡幾千百斛, 而十年之內, 不一疏鑿。 恭儉池, 自古極無之歲, 未見其涸, 今則旱未數月, 水已告竭。 此無他, 只築其外, 不濬其內也。 濬之當如何? 一堤仰漑之戶, 力或不給, 則官調他堤之民, 合力共濬。 此堤旣濬, 他堤又濬, 歲必一濬, 以深爲準, 所濬之土, 增築其防, 則堤安得不深, 水安得不多, 旱安得爲災乎? 所謂深濬堤澤者此也。 凡民慮不及遠, 旱之時, 一勺莫得而纔得小雨, 更無所恡曰, ‘苟已浸矣, 貯之何爲?’ 夫田旣獲而水有餘, 則以其及春翻耕之急也, 雖不得不以次瀉去。 而堤築則固當修其缺而貯之也。 至於當夏浸秧之時, 一日受灌, 足支四五日之旱, 則朝決暮塞, 更待四五日而決之。 以此爲率, 不當(不)〔一〕 向洞瀉, 有賸水於彼, 而無餘者於此。 所謂用水有節者此也。 夫農貴深耕, 耕深在牛。 故牛禁, 著之金石也。 貧民坐無牛, 失耕者十之五六。 且捧糴之時, 必先籍有牛者, 督使賣牛納穀。 臣之愚計, 申明五家作統之法, 一統之內, 合財備牛, 三四年聽其一改, 且當捧糴之時, 勿令賣牛納穀, 則將見人皆有牛, 人皆深耕。 所謂繁殖畜産者此也。 有水有牛矣, 而尙不得耕者, 無農糧也。 糴法本欲富貧均食, 春頒也均, 故秋斂也易。 而今則富民, 無一受糴, 貧民之偏受勢也。 偏食則受困勢也, 受困則廢農亦勢也。 非獨戶還, 又有結還, 貧者無結, 理當無還。 而間多養戶之奸民, 貧民之多結還此也。 且有停捧之宿還, 則雖蒙一年之豐, 難償屢年之還矣。 臣之愚計, 痛革養戶富拔之習, 則貧民少還, 且無(懲)〔徵〕 隣賣牛之弊。 所謂糴均貧富者此也。 古之二疋, 今爲一疋, 民宜益饒而反益貧者何也? 軍丁不能蒐匿也。 把摠哨宮, 皆庇一門, 風憲、約長, 亦護一室。 臣謂嚴飭守宰之臣, 所謂把、哨、風、約之類, 只渠一身外, 一幷充役, 其他掩覆者, 嚴明査櫛, 則丁口十倍於前, 良丁富實, 擧入編戶之役。 所謂役蒐漏丁者此也。 夫茭牧廢壖之可墾者多矣。 貧民無土者, 不敢起墾者何也? 纔已起墾而便皆執卜, 新墾者或不足以當其卜。 則民何以願耕乎? 臣謂起廢之田, 限十年勿稅, 雖十年後, 切勿高等執卜, 則民必願耕。 所謂勿稅取用者此也。"

批曰: "爾以嶺外之人, 見求農書之綸音, 有此應旨對章, 其所陳皆有所據, 益知人才之無隔遠邇。 嘉乃嘉乃。 所謂: ‘菑於稼者非一, 旱爲最, 而重於農者非一, 牛惟大。 貧農失業於還穀, 孱農莫支於簽丁。 古之堤澤其深不測, 魚龍窟而艇艓泛。 今則恭儉大堰, 旱卽告竭, 竝與一過之流, 用水無節。 茭牧廢壖之民, 不敢起墾, 利未及而害先及’ 云云者, 爾言是矣。 使人人服力勤作, 因天時而興地利, 流行之災, 豈至於艱食? 而替人之功, 助人之力, 有則墾, 無則荒, 一牛之力, 當百人之力。 所以殺牛之禁, 比殺越之律減二等, 著在典憲, 近因大臣之言申禁矣。 還穀簽丁之弊, 疏淪與勸起, 付之廟堂, 與諸疏參看, 使之從長稟處。"

卜台鎭疏曰:

"農功之所先務, 莫要於興水利, 水利之效, 莫要於堤也。 臣嘗讀故處士柳馨遠 《隨錄》曰: ‘扶安訥堤臨陂碧骨堤萬頃黃藤堤, 是謂湖南三大堤。 當其始築之際, 竭一國之力以成者, 而中間毁棄。 不過動數郡之力, 依舊葺成, 則蘆嶺以北, 永無凶荒之年, 湖南沿海之郡, 可比於。’ 近世經綸之士, 柳馨遠爲最, 而其言如是, 則三堤之利, 不言可知。 伏望明揀廷臣之習於此術者, 待春興役, 精抄飢民, 使之赴其役而食於官, 以至麥秋之時。 則此隄纔成, 民食將裕矣。 烟茶之糜穀, 其害孔甚。 臣謂元帳之田, 勿許種茶。 又禁劚山燒林之習, 其爲不作無益, 害有益者, 莫此爲要也。 牛酒松三禁, 實爲國家金石之典也。 近年以來, 禁酒弛太。 酒流生禍, 糜穀之害, 的然甚明。 而祭祀之需, 賓客之供, 不可盡禁, 臣謂勿禁其私釀, 但禁其買賣, 則民食之所補益, 決有顯效也。 牛禁則恐不可一定也。 泛駕僨轅之犢, 老敗無用之牸, 周處無路, 立而飼養。 且百日之勞, 一日之樂, 在於歲時, 莫不屈指顒望, 伐牛釃酒, 朋集燕飮。 臣謂私屠之令, 不可不嚴而至於歲時一屠, 特許寬假。 吾東四民之中, 農者甚少, 官吏之害於農者酷矣。 臣謂定其額數, 大邑不過四五十, 小邑亦減其半, 其餘皆驅之歸農。 則通計八路, 當添累十萬墾土之民矣。"

批曰: "三日莅政之餘, 如物在喉者, 湖西之爾, 與湖南之張顯慶, 欲爲收用, 而特除之繁絮, 或近渴縵未果焉。 爾與顯慶, 皆多年兼史, 而爾則甄復後滿瓜陞資, 未爲實職, 顯慶壬申年登科, 明年爲七十, 猶在角圈之列也。 際見爾疏, 盛陳經綸, 殊可嘉也。 許令廟堂稟處。" 鄭始元疏曰:

"我東沃野數千里, 間多空地之棄, 以其灌漑之無計也。 今臣別有設筒引水之法。 自高而流, 從地形而下者, 水之本性也。 作田處雖在水下, 然間阻邱陵, 及有深壑, 則引水中斷, 難以踰越。 故雖有沃野, 廢棄者以此也。 臣所謂設筒之法, 陶甄瓦筒, 而中通外圓, 自上流鱗次埋之於土中, 導水於筒中。 而若逢川壑, 則隨地形埋筒於水底, 越其低, 若阻高岸, 則從地勢而立筒於岸邊, 踰其高者。 無他理也。 源流自高而入于筒中, 則水積中而流不息, 故陞高而踰者也。 如是引水, 則不計高低遠近, 灌水作田, 奚特築堰防洑之利乎?"

批曰: "爾旣別有設筒引水之法, 發前人所未發, 質言於章奏。 仍言其制之陶甄瓦筒, 中通外圓, 壑則埋而越其低, 岸則立而踰其高。 試之則可知其利用與否, 卽令戶惠堂, 取考論理草記。" 戶曹判書趙鎭寬啓言: "臣與惠廳堂上鄭民始, 招問鄭始元, 則其言以爲: ‘水之趨下, 其性然也。 若夫設機激巧以行之, 終非水之性, 故可暫而不可久, 可少而不可多也。 今所陳設筒引水, 亦似乎激而行之。 其實則上流受處, 高於下流, 洩處雖引之, 數百步之遠, 紆回曲折, 或起或伏, 畢竟噴起處, 較之筒口, 蓋落下幾許。 此無他。 水之性, 終必趨下故也。 嘗裁竹筒試之鄕中, 明知其無疑。 若以陶瓦爲筒, 其交接處, 兩口相銜, 外設小圍, 間實油灰, 可免滲漏之患云。’ 臣等依其言, 以竹筒試之, 則數轉起伏, 如山字形, 而亦果引起吐噴如法。 且見其所爲書等, 不過兩葉, 只論此法, 別無他制之旁及矣。 大抵從古水器如龍骨王衡之類, 皆是卽地引水, 激而高起, 終非水性之自然, 故不能久行無弊。 至若農書中連筒法, 特推而大之耳, 比他取水之器, 似可易行, 然而夏則沙或遇潦而中壅, 冬則水未盡洩而內凍, 春秋修補, 勢所必至。 雖以瓦陶爲之, 引之數百步或幾許里, 則費用多少, 特其餘事, 其所燔成者, 能不苦窳而合於用, 有未可必。 但其所言, 不爲無理。 渠是南土之人, 地形水勢之可設處, 想必稔知。 令本道知委地方官, 使之依其言擇地設施, 待其事功之成就然後, 頒示諸道。" 從之。 李宇烱疏曰:

"臣於水利之說, 粗有講究, 曾以造輪灌漑之論, 陳疏蒙批, 一則令度支詰造, 一則令道伯驗試。 事鉅力綿, 荏苒至此。 而臣前疏所未及陳者。 卽(伏)〔洑〕 堰之法也。 今世築洑者甚多, 而皆不得其法, 枉費財力, 不見成效。 臣竊以爲築堰亦有道。 多燔方甓, 稍大於瓦, 而廣各數尺許, 鱗次作溝, 自下漸上。 欲其蓄水則閉塞之, 欲其泄水則開導之, 比之疊石扃木之法, 尤爲便利, 而所築自堅確。 臣嘗於《農政全書》, 攷其圖譜, 而得水柵之法, 始知築洑之妙方。 何者, 有衍平沮洳之地在於川邊, 可作澤農者, 就其上流之多灘處五里十里之間, 有石岸盤結, 合作洑口者, 設柱施杙, 而其間架, 必如長廊之制, 橫截一川之廣。 而柵之上下兩傍, 植以編木, 使大石不漏, 而石則不計巨細, 雜聚而亂庤之, 以其所編之木爲界限。 則其柵一成, 隱然若石巒, 橫亘防水甚鞏, 而用木至少, 築石實多, 則泥沙凝合其間, 雖有潦不少撼, 其策可以萬全。 若於沙川, 則用藁葦等物, 周遮于水柵之旁, 而塡土石其中, 使不得滲漏, 則所築亦堅矣。 過此以往, 其岸若高於川, 至一丈二丈, 必有軸有輪而後, 可以貯水而灌漑之。 水車之制甚夥, 惟龍尾爲最。 其器以圓木爲軸, 而上下均之, 其溝作螺旋之斜勢, 而隔以編墻, 圍以薄板, 用柒灰與瀝靑而塗之, 使之無罅。 作鐵樞兩端, 倣句股而竪之, 隨所處而作八齒。 次以臥軸之立輪, 其齒相接, 其旁一輪, 附以受水箑, 則三輪相應, 不用人力, 隨湍勢而自轉。 其水沛然, 由墻溝而湧上, 則其制視他車尤妙矣。 此外有高轉筒車者, 亦可用於流水。 視其岸而作大輪, 順流而架設之。 其輞則橫繫以板, 使之激水而轉之, 縱懸以筒, 使之挹水而瀉之。 則其功不下龍尾, 而得水差少矣。 至於陂澤井泉處, 地稍深卑者, 可以恒升車挈水。 其筒之長, 與岸均齊, 下端以薄板隔之, 隨其方圓而作孔, 鍛鐵爲舌, 以爲開闔之具, 別植長竿于板而上下之。 則此如皷爐鞴而風生, 水從筒中出, 而滾滾不撤。 若夫玉衡之盤壺雙筒, 與夫虹吸之法, 皆以銅錫作之, 臣不能試之。 此其車制之大略也。 臣竊謂三南畿甸, 可以興水功者, 邑邑有之, 或爲新築, 或因舊址, 爲洑爲堰, 其利甚博。 然平郊廣陸, 旁帶大川, 不可築洑者, 水車不可無也。"

批曰: "飽聞爾孜孜於水利, 嘉乃誠力, 所以有造試之命。 而尙未爲焉云者, 近來事皆如此。 爾疏下廟堂, 此後籌坐時, 招爾細叩, 必令一試之。" 廉德隅疏曰:

"臣聞善敎不如躬行。 伏願殿下, 遵先大王已行之規, 行耕蠶之禮。 則此國家勸農之大政, 不勸而自勸矣。 農政, 一曰不擾民不奪時, 二曰助農種給農糧, 三曰豫則立勤則得, 四曰均田政闢土地, 五曰敎以義懲以刑。 何者, 民惟邦本, 本擾則難立, 時有農節, 節違則無成。 助農種給農糧云者, 孟子所謂: ‘春省耕而補不足, 秋省歛而助不給’ 之意。 今也則不然, 嗟我農民, 終歲作苦, 及其秋熟, 盡輸官府。 而實穀則盡歸於營府, 耗穀姦吏囊橐, 而農民受食之還, 不過皮穀而已。 年分告歉, 則或蕩減或停退, 或代穀許捧, 而貪墨姦猾之輩, 掩其行關, 鞭扑督捧。 至於無田土無族隣, 難捧者然後, 開示關文。 所謂蕩減與停退之實效, 盡入於中間弄幻, 實爲農民之大瘼。 而此弊最甚於北路者, 無他, 自癸甲以後, 罷暗行繡衣之故也。 豫則立, 勤則得云者, 春不早耕, 秋無所獲。 凡我農民, 胡不蚤蚤乎? 襏襫三農, 銍刈三秋者, 此《七月篇》所謂無非豫也。 且夫田政, 亦農政也。 北道量田在丙午, 而自戊己以後, 水道變易, 而田稅則一從丙午量案田稅。 若是不均, 而農政何以勸哉? 另擇道守臣, 均田政然後農可以穫也。 至若闢土地云者, 我國之廢四郡, 久廢不闢。 曾於甲寅, 西之慈城, 北之厚州, 兩鎭之地, 有許民闢菜之敎矣。 厚州設鎭三載, 民戶至八百之多, 而拘於邦禁, 不敢加闢。 許闢四郡, 使日聚之民, 入此作農, 則此實勸農之一大政也。 敎以義懲以刑者, 何也? 闢土作農, 飽食逸居, 而不以義敎之, 則民彝斁矣。 敎之而若有犯科之人, 則刑以治之, 然後人倫可明, 王章可擧矣。"

批曰: "親耕親蠶, 卽我列朝已行之典禮。 而顧今治敎政謨, 萬萬不及於列朝, 何敢先從儀節間事爲而修述乎? 修述之實, 在於丑月頒綸之有一分實效也。 北關之姑未差遣繡衣, 非未遑也。 前此旣言於臺臣之批, 而行將觀勢下送。 外此所陳, 當留意。" 劉宗爕疏曰:

"爲治之道, 責不專則事不一。 依《周官》司徒之職, 別立勸農司, 有土均之官, 有均水之職, 有簡器之吏, 俾令各自董飭於列州列邑, 一聽其便宜, 稟咨以行, 而以時巡審方伯守宰之勤慢虛實, 皆有以論啓。 則方伯守宰, 必有所勸, 而知所以蕫力矣。 農夫所患, 在於地征之不均, 水功之難力, 器械之不備。 若使地征均水功興器械備, 則天地人之時與力, 自然沕合, 亦豈待自上命令之一一提飭者耶?"

批曰: "地征與水功與器械三者敷陳, 爾說極有理。 勸農之宜有所掌之司, 爾言亦然。 竝許廟堂稟處。" 尹在陽疏曰:

"當今之世, 所當變通之時急, 若有八焉。 一曰均倂作, 二曰蠲白徵, 三曰禁南草, 四曰許民耕, 五曰充良役, 六曰矯糴法, 七曰減吏額, 八曰革科弊。 均倂作者, 實爲無土者之有土也。 蠲白徵者, 水田則有初不落種, 未移秧等災, 特許無稅, 獨於旱田, 雖有今陳舊陳, 樹木成林之地, 亦皆納稅。 目今民情, 皆願査陳, 俾無把束白徵之弊。 禁南草者, 生穀之土漸縮, 民財之艱益甚, 南草之害至此而極, 可不禁哉? 許民耕者, 毋論五軍門、各宮房、忠勳府、勢家田可耕處, 陳棄者多, 而居民起耕, 則本主還奪, 故永棄而不耕。 如此之地, 許與民耕食, 則民有生穀之利, 國有收稅之利矣。 充良役者, 良丁無實之弊, 去而益甚, 凡有除番軍官及除役村里者, 一倂革罷, 則可以充死者之番矣。 矯糴法者, 自今爲始, 糴穀與餉米, 皆折半留庫, 折半分給, 春間作錢, 一依京司發賣例, 乃於時準價之內, 減價許賣, 秋後從時直, 以其錢貿置新穀, 明春則以前春折半留庫者發賣。 凡於春秋市直之間, 雖有貴賤懸殊者, 減價之中, 每斗必取三錢之剩, 其餘盡歸之民。 則官無督捧之苦, 民免族隣之徵矣。 減吏額者, 毋論大小邑, 害及生民, 計其邑之大小, 稱其額之多寡宜矣。 革科弊者, 爲今之計, 京儒等四學敎授, 受五部擧案, 出各體科文之題, 試取其入格者, 各以其榜, 呈于太學, 則大司成以四學榜中人, 試于前, 呈于禮曹。 鄕儒則各其本官, 受各面單子, 出題試取, 一如四學之例, 各呈于禮曹。 大小科設行時, 照驗於禮曹所在, 則永無一人之蹂傷, 亦無一人之倖占矣。"

批曰: "爾因農務, 而敷陳諸條, 殊可嘉也。 竝作之均, 井田限田以外, 最好之規。 而綱擧然後目張。 雖以朱夫子通才達識, 亦於令行規制, 每致鄭重, 未嘗言其一朝卽改, 則此亦類是矣。 白徵之蠲, 爾言固是。 容俟稍熟之年, 擬試査陳之擧矣。 南草之禁, 禁之非難, 意或有窒礙處矣。 許民耕食於官田富民田, 陳棄處事, 此在於道伯矣。 良役黃白之弊, 可勝言哉? 除番除役之革與不革, 亦非朝家之更煩辭敎者。 但當以此考察列邑擧行之勤慢矣。 糶弊之半留事, 卽近所講究者矣。 大小邑吏減額事, 曾因他疏, 廟堂屢有覆奏矣。 科弊釐革, 卽初元詢諮中一條, 而荏苒至今者, 非謂無可施之良法, 法不能徒行。 鄕擧里選, 與孝悌力田等項名目, 施之於今, 萬有一有其名而無實, 則莫若初不輕施之爲合謀始之體也。 近予所以百里則必施於三司, 用人則必求諸牧民者, 欲使所用如所求也。 然而歷詢然後可決矣。"

鄭錫猷疏曰:

"臣請先論我國之地利田土農器, 後論不失時之義不失所之方。 沃沮, 山多而濱海, 帶方, 峽窮而川深, 樂浪, 西北背山, 東南開野。 三南, 水深土饒, 海西畿甸, 土薄而山峻, 瀕海多斥鹵, 近海多沙石。 臣嘗於圭竇之中, 有所揣摩者, 可以遍用於一國, 而宜於燥濕高下者, 惟田車是已。 蓋其利有五。 春則有糞車, 一車之運, 當五牛之載, 一人用一車, 減四牛四人, 牛力紓而人力寬, 其利一也。 方農之時, 糞田尤急, 先一時則穀倍, 後一時則穀減。 若用糞車, 則敏事而及時, 其利二也。 秋則有役車, 方其收穫之時, 有牛有餘力, 無牛亦無任負之勞, 其利三也。 郡縣捧糴之時, 氷雪塞塗, 牛足怯滑, 人肩將穿, 若用役車, 則大者駕之, 小者推之, 其利四也。 且夫牛馬之病, 常在於背足, 由於駄重而力竭。 若用車, 則牛馬竝全, 其利五也。 臣聞祖宗朝, 欲行錢貨, 而民不悅, 時則有若故相臣金堉, 請行之自站舍。 始站舍者, 行路之所共由也, 耳目之所共慣也。 今車制亦自站舍始, 則必漸效而民不撓矣。 凡八路貢賦之輸, 例皆貰馬, 計千里而償二千錢, 一駄之貰, 殆當一馬之價。 若自郡縣凡駄運之物, 皆以車輸, 則站舍之貰馬者, 亦將以車代馬, 不失生涯, 轉轉相效, 將遍於國也。 (失其所則器不足賴也。)" 又曰: "當今之急務, 莫如祛二害興四利。 何謂二害, 曰冗官也, 冗兵也。 何謂四利, 曰擇賢材也, 均田制也, 闢閑土也, 和糶糴也。"

批曰: "還弊, 旣發策以問之, 寧或爲無用之空言? 數十年前營閫之臣, 捐俸防役等瑣屑名色, 幾皆罷其券而停其債, 畢竟卽不過容手於取耗之穀, 內而京司亦然。 江蔘也, 婢貢也, 特其大者, 餘不可殫擧。 夫法也者, 如器之置於地, 惟在用之之如何。 還穀之爲小民切痼之瘼, 非不知也。 外此減貢而給代, 被惠而息肩者, 又不啻幾十萬。 則若不從他, 別般講究於行之兩便之道, 徒然發令曰, 云云, 豈可乎哉? 附陳經綸, 下廟堂, 看詳措處。" 鄭道星疏曰:

"凡稻種, 有强者有柔者, 柔者遇旱則難茁而易枯, 强者於水於旱, 竝無害焉。 蓋稻種之强者有三, 天上稻, 斗於羅山稻, 淳昌稻是也。 三稻之種, 其性最强, 故小畬則注秧, 乾田則付種, 而二月翻耕, 三月付種, 則晩秧移揷之時, 此三色苗, 半已成長, 而結實亦早, 雖遇水旱, 少無所損者也。 三南多水田, 五道多旱田, 若使種三稻之法施行, 則於三南其利尤博矣。 春窮之時, 貧難辦種, 易致失時, 特貸還穀, 俾免失時。 又自官分付里民, 使之起墾, 則野無陳荒之弊矣。 凡民惰其四肢, 不歸於農者, 別遣繡衣, 廉探遊衣食之民, 則民皆力穡矣。"

批曰: "爾疏不過十許行, 而三稻之種法, 牛禁之敷陳, 皆懋實適用之言。 有司堂上, 旣經完伯, 招問意見, 一以爾說, 試之於南邑可試處, 向後食效必也。" 敎曰: "所以問之者, 懋其實也, 應旨亦當然。 近來諸疏中質實, 初見於此人。 左相招見, 如可合用, 草記。" 備邊司啓言: "鄭道星招問來歷, 則渠以家計稍饒, 補賑蒙帖加之恩, 其不頗解文字, 故意授搆呈云矣。 人旣務實, 言亦近質, 而合用與否, 有不敢質言。" 金夏璉疏曰:

"水車之材, 專用眞檀兩木, 沿海之民, 辦得無路。 今夫慈城虞芮閭延茂昌四郡, 連抱之木, 可作車輪舟楫棟樑之美材, 彌滿山野。 沿海之民, 自願往取水車舟楫之材者, 成給公文, 各從所願, 或作水車, 或造船筏, 自慈城界順流而下, 則至龍川海口三四日程, 自龍川達于京江及三南, 不過一旬之間。 水車制作之法, 前察訪李宇烱外, 無人知者。 特送李宇烱慈城, 多作水車, 沿海邊每州各賜一乘, 使每邑農民效之, 未滿數年, 水車利農之法, 遍行國中, 而舟楫之相資於農民者, 必不少矣。"

批曰: "疏辭竝令廟堂, 論理稟處, 俾益農政。" 李敬五疏曰:

"我東之田疇多荒, 杼軸俱空, 非由乎農書之不備。 自有其本之當先者。 傳曰: ‘一人不耕, 天下有飢。’ 我國之民, 冒托於吏胥輿儓之藪, 追逐於廛市駔儈之叢, 下於此則乘便學商, 闖機爲盜, 皆欲不勞而食。 流亡相續, 戶口日縮, 而八域黎庶, 不耕者殆過半矣。 臣愚竊以爲, 當今農政, 先務在於盡驅遊食之民, 緣南畝而歸於農, 而後農書可用也。"

仍論本府採蔘之弊, 乞賜停罷。 批曰: "爾所謂使民緣南畝, 歸於農然後農書可用, 爾說約而盡。 今之弊俗, 惟知趨錐利, 任他不抑, 何望反本? 先從爾邑之曠土, 躬作田畯, 今日闢一隅, 明日墾一頃, 能有日闢之效, 則可謂不負知爾。 下諭道臣, 來頭夏冬殿最時, 該倅實績, 措語懸註於題目之下。 所謂 ‘勸採之規, 徒開蔘商牟利之路, 釀成一道妨農之害’ 云者, 事理皎然。 旣聞之後, 何可任其爲弊? 下諭道臣, 斯速狀聞。" 金萬疏曰:

"因天時資地利修人事, 爲農之本領, 興水功相土宜利農器, 爲農之先務。 則南北之宜不宜, 峽野之喜不喜, 注秧付種之利害, 烟茶火粟之便否, 此乃節目間事。 而我東雖小, 南北爲數千里, 風氣之不竝, 土性之逈殊, 固其理也。 注秧得失, 此最可商。 水根源源, 則水付可矣, 土性柔細, 則乾付可矣。 濕不沃旱不乾, 或土塊頑硬, 鍬犂不入, 水治則成, 旱治則不成者, 在在參半, 注秧非嬾農之爲, 蓋土品之使然。 禁其太過則可用法禁之, 臣不敢謂必爾也。 火粟之利亦大矣, 名山陊剝, 果有其慮, 而千百年流來之弊, 恐非一朝之可禁也。 所可痛禁者, 烟茶也。 欲禁其種, 必也先禁其吸。 糶糴之許多奸弊, 其本在於混置, 欲捄其弊, 莫若面庫之爲得也。 臣以爲各於其邑, 仍舊倉舍, 就其中隨面數立壁隔間, 而間之闊狹, 視面大小, 該面所納, 不許越間推移, 而壁揭面名, 區以別之。 糴時令民自納于庫, 糶亦如之, 庫門上下。 上設鎖鑰, 不許無時開閉。 各營耗穀及官下雜役穀, 不得不以時出納者, 別立一庫。 則民視官庫如私藏, 惟恐穀之不精矣。"

批曰: "爾疏所陳, 不可以草草應旨言, 爾誠可嘉。 廟堂論理粘啓。" 備邊司覆奏曰: "移秧隨土宜, 火粟不可禁, 禁烟茶修堤堰等事, 此皆已陳於前後覆啓。 糶糴仍其倉舍, 隨面數立壁隔間事, 如欲以官庫而寓社倉之意, 使民視同己物, 相爲自謀, 則今此所論, 非無可採。 而邑有大小, 面有多寡, 有難一例施行。 先從彦陽一邑, 使之博詢民情, 無煩民力, 試其便否, 如果有效, 則列邑視傚, 以爲次第推行之地事, 分付該道。" 敎曰: "還弊先試該邑甚當。 嚴飭該倅擧行。" 金養直疏曰:

"臣聞《農家雜說》曰: ‘芙蓉花開之時, 取其第一朶, 秤其輕重, 以知來年米價之貴賤。’ 又曰: ‘欲知來年某穀之爲豐, 先看今年五木茂盛, 種之。 禾生於棗或楊, 黍生於楡, 大荳生於槐, 小荳生於李, 麻生於楊或荊。’ 臣見昨年棗葉盛而老楊茂, 今歲禾農可勸。 又見《四時立節歌》曰: ‘冬至天晴無日色, 來年正唱太平歌。’ 立春詩曰: ‘但得立春晴一日。 農夫不用力耕田。’ 《除夕歌》曰: ‘但逢此日淸明好, 分付農家好做懷。’ 臣見昨年冬至, 天色果晴, 而日光依微, 立春又復淸明, 兼是除日。 臣以三句詩意推之, 皆是吉兆。 又見正朝, 微有西風, 東方有黃雲吉氣, 今歲之豐穰可占。 又見《古方》云: ‘正月初三日雨, 四月水多, 四日雨, 五月水多。’ 臣見今年正月初三日, 天有雪, 初四日夕雨, 是爲吉兆。 臣以爲四月五月, 卽農家最緊之月, 農民趁早耕種, 及是兩月, 無失其務, 則其後雖有小旱, 不甚爲害。 臣以爲, 今年勸稼, 以早爲可。"

批曰: "所陳儘有意見。 許令廟堂稟處。" 李齊華疏曰:

"《農政全書》, 自古傳授良法。 刊出此書, 廣布中外, 則爲務農之一助矣。 抄出貧民, 分授富戶, 授田土助種糧, 則當年內已無身役還上之難, 而行之數年, 能自樹立矣。 國內堤堰, 無邑無之, 而堙塞乾涸。 且不洑之禁上洑, 已成痼弊。 可合開洑處, 一幷開洑, 則實爲民國之幸。 甘藷之種, 最宜救荒。 廣布諸道, 實爲補穀之一助矣。 一自庚辰年, 嶺南稅穀, 以嶺民嶺船運納, 六十餘船之改造改槊, 無年無之, 元定株數之外濫斫, 不啻爲三四倍, 故左右沿封山, 今焉童濯。 且下餘石船主沙格, 俱是農民生手之故, 臭載之患, 歲所不免。 無寧漕倉依舊仍置, 只使京江船人, 曳船下來於各漕倉, 分載以納。 則判異生手可免頻頻致敗之患。 六十船隻, 分定三隊, 各自其隊, 另加檢飭, 亦或有臭載, 則令當該隊二十船, 幷力備納。 則嶺民自歸安業, 封山松濫所之弊, 該邑民再徵之患, 可竝除矣。"

批曰: "所陳多有可用之語, 許令廟堂, 粘啓稟處。" 備邊司覆奏曰: "《農政全書》, 廣布中外事, 農家者流, 此書最稱詳備, 兩南中稍待年豐, 使之刊布。 抄貧民授富戶事, 先恤窮農, 卽同井相助之義。 鄕有善俗, 自可不勸, 而能自官發令, 則必有抑配之慮。 至於身還移徵, 尤非導民成俗之意。 置之。 堤堰事, 堤堰冒耕, 法禁至嚴。 當此申飭修築之時, 反請許墾, 似由於未諳事體之致, 竝姑置之。 甘藷事, 甘藷實爲救荒之要種。 南沿諸邑, 間多有之, 年前亦已申飭培養, 而實效有無, 姑未可知。 更爲另飭諸道。 嶺南漕船事, 漕船實爲松田之耗蠧, 此所以有船制變通之議也。 今此京江分載之論, 雖不無意見。 漕倉設置, 漕卒團束, 已有定制, 不可以些少弊端, 遽議更張。 請姑置之。" 敎曰: "《農政全書》, 廣布中外事, 近來印本, 在處稀闊, 是豈命撰命印之本意乎? 今番所陳諸說中, 有可採用者, 就類補輯, 以爲廣頒之地事, 分付鑄字所。 甘藷取種事, 其功之幾與菽粟等, 充腸潤胃, 味亦悅口。 所以購貿栽植之方, 亦不必別頒新令。 令各該道臣, 各思食效之道, 無或看作例飭。 嶺漕船更作京作隊船事船粟轉運之政, 夙宵苦心, 在於減其造船, 通用兵船京船, 使山木不濯, 江流不塞, 竝與農政, 爲俱益之道。 前旣歷詢, 第當一番踐言而已。 此條姑置之。 以待來頭諸道應旨之疏與冊, 廟堂回啓與批旨, 必皆錄送該道, 使道臣, 招致其人於公堂, 具公服面傳, 一以信朝令, 一以尊體貌。"

時投疏者多草野, 而上一例優批, 令廟堂稟處。 金天肅尹溥廉德隅康堯愼張志瀚李尙熙李仁榮尹弘心鄭應參金應麟崔世澤金致大等疏, 無所建明。 致大文辭, 視諸人較長, 特賜《朱子書》一部。 以下, 進農書者, 輒命廟堂稟處, 有寸善可取, 令內閣, 採入於新編農書。 李晩祿李文哲首先應旨, 晩祿又言, 爲治莫尙於得人, 上, 以爲知所本, 賜《大典通編》, 文哲賜韻書。 柳鎭穆最稱旨, 除官。 鎭穆農書曰: "臣伏奉綸音, 敢將訓農治農利農害農者, 條列爲十五目。 一曰申明鄕約法, 蕫勸農民也。 一曰分田三等而付種移秧, 各隨其宜也。 一曰沿野邑各倉儲置雜穀, 種還以備代播也。 一曰廣開隄堰, 以通水利也。 一曰嚴山禁以厚水源也。 一曰頒下水車之制, 以利引水也。 一曰均平水利, 以惠小民也。 一曰參考《農家集成》, 成爲今農書也。 一曰夏月農時之不擾民也。 一曰綿田給災, 以勸綿農也。 一曰水田飭種秋牟, 以裕農食也。 一曰倣行社倉法, 以助農糧也。 一曰春夏耕耘, 必先窮農也。 一曰博訪治牛疫法, 附之農書也。 一曰貴農勸士, 化成鄕俗也。" 林博儒亦進農書, 鎭穆鄕人也。 與鎭穆同進書曰: "一, 擇立農官, 以勸課勤慢, 付之殿最, 蕫勸惰農也。 一, 禁山養木, 以厚水源也。 一, 改修川防, 增置堤堰, 以通水利也。 一, 修防置堰之後, 嚴立科條, 以均灌漑也。 一, 頒行水車制度, 以利水功也。 一, 定立限田法, 以起惰農也。 一, 畓分三等, 以爲移秧付種代播也。 一, 沿邑各倉, 換置雜穀還, 以備代播也。 一, 還餉分給, 必於當農前。 一次優給, 以備農糧也。 一, 申明鄕約法, 以爲資力務農也。 一, 貴重農夫, 使民趨農也。 一, 嚴禁烟茶, 以廣農田也。 一, 相土品卞穀性, 以備耕種也。" 備邊司覆啓言: "取見柳鎭穆冊子, 其條不紊, 其說有據, 畢竟以鄕約之講行爲歸趣。 第觀農政之漸有成效, 一依法, 別立孝悌力田之科, 亦未爲晩, 請今姑置之。" 敎曰: "嘗見先正 文正公州牧使申渢所編《農家集成》曰: ‘朱子書中勸農文數條, 固群黎百姓之所日用者。 其曰孝悌, 其曰禮義, 未嘗不竝及於修堤翻土之榜, 則不待他求而知所以用其力矣,’ 旨哉言乎。 可以爲農家之指南, 化俗之源委。 而近見公車日堆之章, 未有說及此者。 惟公州生員柳鎭穆能言之。 編是書者, 卽牧也, 今於一百四十有六年之後, 其言又出於之士者, 可謂奇哉。 所陳十五條, 皆是南康榜文之支流也。 其所謂申明鄕約, 蕫勸農民者, 卽朱夫子中春之月, 載酒食出郊, 延見父老, 以告農桑之務, 孝悌之方也。 其所謂付種移秧, 各隨其宜者, 卽朱夫子浸種下秧深耕淺耨之意也。 其所謂雜穀代播者, 卽朱夫子趁時犂翻, 多種二麥之法也。 其所謂頒下車制者, 卽朱夫子有塾者賴車戽之術也。 其所謂均分水利者, 卽朱夫子陂塘淺漏, 合力開掘之策也。 其所謂農時不撓者, 卽朱夫子貧民下戶, 枉被追呼之諭也。 其所謂綿田勸農者, 卽朱夫子星子知縣王文林種桑等法, 發下三縣之規也。 其所謂倣行社倉者, 卽朱夫子諸葛千能等家米, 置倉給代之論也。 其所謂耕耘必先窮農者, 卽朱夫子窮民歡喜之本也。 其所謂訪治牛病者, 卽朱夫子耘犂之功, 全藉牛力, 及時餧飼, 不得宰殺之訓也。 其所謂貴農勸士者, 卽朱夫子學道修身, 興起民戶之旨也。 若其嚴山禁者, 卽朱夫子所不言, 而以其南方多水而少山也。 此固已試於古昔者, 專係於守令蕫飭之如何。 自廟堂, 以所進冊子中條件, 關後錄, 行會於本道外七道及華城府, 俾各看詳, 勸飭管下守令, 可以效倣者, 着意採施, 期有實效。 其中糞田之利, 尤爲要切於作農。 柳條之排田也, 浦泥之和灰也, 蓋屋之朽藁也, 醎水之澆土也, 以至地肥, 則鋪檟葉而防蹲縮, 土浮則均細沙而收倍利, 自有妙方。 惟人不行, 此在勤與惰之間耳。 故向於綸音, 拈出勤之一字, 以爲一篇之字眼, 今此敷析, 能以勤爲歸, 亦甚嘉。 乃以此批旨, 下送該道, 使之謄給於柳鎭穆處。" 備邊司又啓言: "林博儒所陳十四條中, 十條, 與柳鎭穆所陳同。 其中定之限田也, 分還合等也, 嚴禁烟茶也, 勸民節用也, 乃是鎭穆所不言。 而限田則言非不是, 有難遽議。 烟茶則禁之固易, 亦不無效害之相參。 至若御供不可闕云云, 其說極爲猥屑。 鄕儒雖不識事體, 道臣豈可不察? 該道臣推考。 惟是分還一事, 不無可採。 令道臣試之營下邑民, 若爲便, 行之列邑, 亦無不可。" 敎曰: "限田事, 言非不好, 勢難容議。 雖以三代盛時言之, 一夫受田, 爲五十畝, 爲七十畝, 爲百畝, 民生日用之繁, 田亦加畝, 蓋可知也。 太康時, 雖有一夫七十畝之制, 而其還其受, 史不傳法。 孝文始令均田, 而不過因田之在民者而均之。 太宗口分世業之規, 亦倣於此, 及至永徽間, 兼竝如故。 蓋自至今千六百年, 能行授田均田者, 不過二百載, 自不得不罷, 其勢然也。 以我國六路帳付之田, 摠較之京外人口, 除文武官三千餘人, 雖人給一結, 不足爲六百六十三萬六千餘結。 朝家自御極之初, 首先留意於經界之政, 每一念至, 夜輒繞榻, 而未得其要者此也。 分還合等事, 有班名而無率丁者, 借乞隣里而受還也, 每每閪失, 自是通患。 而雖於數三斗受去之時, 猶不免官屬之侵漁, 店主之費用, 況其數三包竝受, 其能專一於種資農糧, 有未可必。 姑爲試可於一二邑, 亦未爲不可。 烟茶事利害相半, 有如禁釀, 不可輕議。 新豐 張公之言, 足爲可據。 勸民節用事, 惟在朝廷導率之如何。 何責乎民? 自卿等苟存心於(師)帥儉, 自可如置郵。 予亦以此自省矣。" 安聖鐸, 又稱亞於鎭穆。 備邊司啓言: " 農書, 其一, 相土宜播其種事也。 相土播種, 向下綸音, 有所提諭, 大小民人中, 如有通曉之人, 則可以興起慕効。 姑難以某土某種爲言, 有若條令者然, 置之。 其一, 農器中水車役車, 尤緊於農功, 而其中役車則可用獨輪車事也。 水車之制, 非謂無其理也, 非謂無其效也, 亦非謂無其法也。 第念其制巧而其費多, 故有非庸匠之可造, 凡戶之可辦。 此我東所以未嘗昧其制而不能興其利也。 說者以爲: ‘中國之所用者, 何處不可云?’ 而中國之匠巧而工, 中國之財豐而裕。 自其至貧而觀之, 則無異我國之貧民, 自其稍饒者觀之, 其爲資産, 不啻千萬於我國之饒戶。 故一車成而衆匠效, 一村成而萬戶應。 此所以造之易而行之廣也。 今欲試之於諸道, 則必也營邑合力, 然後可造一二車, 而小民人之轉相模倣, 萬無其道。 至於役車, 土俗各異, 亦非可以發令而行之者, 置之。 其一, 湖南改量久曠, 田地不均, 賦稅不平事也。 改量之政, 已陳於他覆啓。 待年豐稟定擧行。 其一, 茂朱順天之間, 淘金者絡繹, 農夫益鮮, 一切禁斷, 則游食之徒, 自然歸農事也。 採金之禁, 法典本嚴, 害農之事, 亦莫甚於此。 各別痛禁之意, 嚴飭道臣。" 允之。 敎曰: "其中農時之詳陳, 儘有意見。 其云: ‘雨水翻麻田, 驚蟄備農器, 春分耕早稻, 淸明耕早黍, 穀雨造鋤, 立夏耕水荏, 芒重收苧麻, 夏至收秋牟, 立秋耕蕎麥, 處署穫早稻。 必先時翻耕, 先時蓄水, 亦趁時移秧, 趁時耘耔。 移秧之過二十日後, 卽初耘, 初耘之過十三日後再耘, 再耘之過十五日後三耘, 則奄觀銍艾矣。 若違此時, 則欲助苗長, 其可得乎?’ 云者, 其所爲說, 擺脫科臼, 質實可喜。 且以鋤耞耘耔之經歷, 一一條陳。 令該邑倅, 別差保介之任, 考其秋成後, 勤慢報營後狀聞事, 分付道臣。"


  • 【태백산사고본】 50책 50권 16장 B면【국편영인본】 47책 138면
  • 【분류】
    금융(金融) / 상업(商業) / 출판-서책(書冊) / 식생활(食生活) / 인물(人物) / 군사-부방(赴防) / 군사-군역(軍役) / 과학(科學) / 재정(財政) / 구휼(救恤) / 향촌(鄕村) / 왕실-사급(賜給) / 향촌(鄕村) / 교통-육운(陸運) / 인사-선발(選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