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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 49권, 정조 22년 9월 14일 갑술 1번째기사 1798년 청 가경(嘉慶) 3년

능주 목사 이종섭이 대나무 진상의 고초에 대해 상소하다

능주 목사(綾州牧使) 이종섭(李宗燮)이 유지(有旨)에 응하여 상소하기를,

"지금 구제할 방도가 없이 갈수록 고질화되고 있는 폐단은 대나무에 관한 것인데, 진상하는 죽순(竹筍)과 청대죽(靑大竹) 및 연례적으로 복정(卜定)되는 부채용 대나무[扁竹]를 형세상 어찌할 수 없기에 민고(民庫)319) 로 돌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능주는 인구가 많지 않은 잔약한 고을인데도 대나무 때문에 백성에게 거두어 들이는 것이 1년에 천금(千金)을 넘고 있고 보면 다른 고을은 어떨지 자연히 미루어 알 수가 있습니다.

호남의 민고(民庫)의 폐단에 대해서 말하자니 통곡하고 싶은 심정일 뿐입니다. 결전(結田)에서 거두어 들이는 것도 부족해서 호구세(戶口稅)를 물리고야 마는데 기호(畿湖)320) 와 비교해 보면 한두 배 정도만 많을 뿐이 아닙니다. 그런데 죽전(竹錢)은 4, 5년 전에 처음으로 있게 된 것으로서 올해의 가격이 지난 해의 배나 뛰었는데 내년에는 가격이 또 얼마나 될지 모를 지경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걱정하면서 조석을 보전하지 못할 것처럼 여기고 있으니, 생각이 이에 미치면 또한 두려움이 앞섭니다.

신이 남쪽 지방으로 내려 온 뒤에 먼저 죽전(竹田)에서 당시 생산된 것을 재료로 하여 마디를 따라서 부채를 만들어 보았는데, 끄트머리를 편편하게 하니 손에도 편할 뿐더러 공역(工役)이 절약되었고, 변두리를 넓게 하니 기름칠을 하지 않아도 내구성(耐久性)이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게 되면 대나무 가격도 저렴해지고 부채의 제도도 완비될 것이니, 삼가 원하옵건대 먼저 내년부터 진상하는 부채는 모두 중화척(中和尺)321) 으로 7촌(寸)을 넘지 못하도록 제도를 마련토록 하소서. 그리하여 양남(兩南)에서 부채를 만드는 고을들로 하여금 감히 이를 뛰어넘지 못하게 해 주시면 실로 남쪽 백성들의 혜택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청대죽(靑大竹)의 경우 1간(幹)의 값이 거의 2천 전(錢)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연전에 서울 공인(貢人)들이 바치게 하자는 의논이 있었는데 그렇게 되면 하속(下屬)들이 이익을 잃기 때문에 결국에는 조가(朝家)의 덕의(德意)가 막혀서 통하지 못하게끔 만들고 말았으므로 남쪽 백성들이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한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본가(本價) 및 연로(沿路)의 태가(馱價)를 회감(會減)322) 해서 당초에 마련했던 것이 많지 않은 것이 아니니 이것을 가지고 공물로 바치게 하더라도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인데 가외로 값을 약간 더 쳐주는 것은 또 해당 군에서 각각 알아서 액수를 정하면 될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이것은 늘 쓰는 복령(茯苓)이나 창출(蒼朮) 같은 약재와는 다르니 비록 달마다 정해진 수량을 내지 않고 수시로 진배(進排)한다 하더라도 안될 것이 없을 것이고, 또 조각을 내어 죽력(竹瀝)323) 을 받는 자료로 삼는 데에 불과하고 보면 몸통이 크지 않아도 될 테니 대나무를 양 등분하여 수납케 할 경우 또한 힘을 줄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를 묘당에 자문하시어 처리케 하면 무척 다행이겠습니다.

경각사(京各司)의 노비로서 호남 고을에 산재되어 있는 자들이야말로 어디에도 의지할 곳이 없어 정말 불쌍한 정상이 사노(寺奴)와 똑같습니다. 대저 어리석은 백성이 한번 천적(賤籍)에 들어가게 되면 평민들 모두 자신이 더럽혀질 것처럼 여기기 때문에 혼인하는 길마저 끊어져버리고 맙니다. 그러므로 모두들 그 천적에서 벗어나기 위해 새처럼 자리를 옮기고 들짐승처럼 숨기 때문에 현재 장부에 기록된 것을 보건대 이미 죽어버린 사람의 명단이 아니면 임시로 지어낸 명목(名目)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당사자가 공포(貢布)를 바치는 경우는 열에 한둘도 안 되는데 그 족속을 찾아내 분담시켜 징수하는 일이 거의 전 지역에 걸쳐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노비나 양정(良丁)이나 똑같은 백성이고 공포나 신포(身布)나 부과된 역(役)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각사에 있는 원래의 노비의 명색(名色)을 개칭하되, 일체 ‘악공(樂工)의 보인(保人)과 선상(選上)되는 봉족(奉足)의 예(例)’처럼 하여 ‘모사(某司) 노(奴)의 보인’이라고 칭한 뒤 양정(良丁)에 뒤섞일 수 있게 해 준다면, 백성으로서는 연루(連累)되는 걱정이 없게 되고 공포 또한 총량이 감소되는 우려가 없어질 것이니, 이 점에 대해서도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稟處)케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경악(經幄) 출신으로 백성의 고통을 조목별로 진달하였는데 그것도 호남에서 남보다 먼저 제대로 하였으니 자못 가상하게 여기는 바이다. 모두 묘당으로 하여금 초기(草記)로 품처하게 해야 하겠다.

부채에 관한 일은, 듣자니 매우 놀랍고 가슴이 아프다. 연전에 묘당에서 그토록 귀찮을 정도로 관문(關文)을 보내 단속을 하였는데도 그 효과가 하나도 없다니 어쩌면 기강이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죽전(竹錢)으로 더 거두어 들이는 것은 더욱 형편없다 할 것이니 이것부터 먼저 혁파하고 이미 받아들인 것은 도로 내줄 것이며 다시 범할 경우에는 영읍의 신하를 중하게 죄 주도록 해야 하겠다. 그 밖에 부채 명목으로 열읍(列邑)에 복정(卜定)하는 일을 혁파해야 할 것인지의 여부에 대해서도 묘당으로 하여금 하나하나 지적하여 회계(回啓)토록 할 것이다.

청대죽(靑大竹)에 대한 일의 경우, 1간(幹)에 들어가는 비용이 거의 수천 전(錢) 가까이 된다 하니, 이를 듣고서 견제(蠲除)해 주고 싶은 생각이 어찌 없겠는가. 다만 죽력(竹瀝)을 받아 약에 섞어서 쓰면 실로 막힌 것을 뚫는 기막힌 효험을 발휘해 다방면으로 파급되고 있으므로 완전히 감해 주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어찌 방편적으로 처치할 길이 없기야 하겠는가. 이 일에 대해서도 잘 의논해 품처하게 해야겠다.

호남의 민고(民庫)에 대한 일은 조정에서도 알지 못하는 일이고 대사농(大司農)도 관계하지 않는 일인데 중간에서 사리(私利)를 도모하는 폐단 때문에 백성이 장차 죽을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듣지 않았다면 모르지만 여러 차례나 소장(疏章)에 오른 이상, 만약 진정으로 괄목할 만한 효과가 없게 된다면 어떻게 남쪽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해 줄 수 있겠는가.

옛적에 고(故) 정승 이종성(李宗城)이 관서(關西)에 있으면서 민고에 대한 절목을 엄히 세웠는데, 그때에 열읍(列邑)에서 공사(公事)를 핑계대고 이익을 취하며 절목대로 준행하지 않을 경우에는 그 수향(首鄕)324) 을 먼저 목벤 뒤에 아뢰는 것으로 규정을 세웠었다. 관서에서도 오히려 그러했는데 더구나 남중(南中)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연전에 우선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뜻으로 먼저 묘당으로 하여금 도신에게 엄히 신칙하여 각각 바로잡도록 했었는데, 모르겠다만 그 동안 이미 바로잡았는데 능주 한 고을만 유독 위급한 상황을 구제받는 혜택을 누리지 못했다는 말인가, 아니면 남도의 두 방백이 으레 내리는 단속행위라고 간주한 나머지 애당초 관심을 두어 손을 쓰지 않았고, 고을 수령들 역시 그다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일체 그 동안의 잘못을 답습만 하고 놔두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인가.

관서의 방백 한 사람이 위엄을 세우고 법대로 집행할 수 있었던 일을 묘당에서 금지시키고 단속하는 것이 뭐가 어렵겠는가. 묘당이 아무리 세월만 보내고 있다 하더라도 조정에는 기강이란 것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그렇다면 가르쳐 준 대로 따르지 않는 도백과 수령을 왕부(王府)에 잡아들여 해당되는 율을 적용하지도 않은 채 백성의 고통을 그냥 서서 바라다 보기만 하고, 그저 백성의 재물 약탈하는 것을 일삼는 수령에 대해 단지 장오율(贓汚律)만 적용하여 남간(南間)325) 에 엄히 가둔 채 달마다 세 번씩 형(刑)을 가하며 실정을 알아내려고만 할 경우, 그런 조정을 조정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 동안 어떻게 행해 왔는지의 여부에 대해서 조사해 알아보려면 묘당에 있는 사람으로서 어찌 방법이 없겠는가. 관서 역시 고 정승이 세운 절목을 다시 더 닦아 밝혀 규정을 어기는 일이 혹시라도 없게 하라고 도백에게 알려 주는 것이 좋겠다.

이번에 삼남(三南)의 시종(侍從) 출신 고을 수령들이 상소함에 있어, 먼저 이 한 조목과 관련하여 귀로 듣고 눈으로 본 것들을 위주로 하여 혹 널리 탐지하기도 하고 혹 자세히 묻기도 한 뒤 논리적으로 설명하며 진달하도록 해야 하겠다. 만일 안면을 돌아보고 사실 그대로 말하지 않는다면 그 얼마나 배반하는 행위라고 하겠는가. 정원으로 하여금 각도의 직질(職秩)이 높은 수령에게 하유하게 한 뒤 그 수령으로 하여금 도내의 여러 시종 출신 수령들에게 두루 보여주게 함으로써, 흉년이나 풍년을 막론하고 소민(小民)에 대해서는 동요되지 않도록 힘쓰게 하고 장리(長吏)에 대해서는 더욱 탐욕을 징계하게 하도록 해야 하겠다. 근래의 모양이 과연 이러한지 어떤지 모르겠다만 탐람한 관리 하나를 복주(伏誅)시키는 것이 배고픈 백성 1만 명을 진휼하는 것보다 나을 것이니 이 일을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사노비(寺奴婢)에 대한 일은 내가 꼭 고쳐 보려고 지금 고심하고 있는 중이다. 노비를 보인으로 바꿔주는 것이 어찌 온당치 않겠는가. 그런데 신해년에 특별히 자문을 구한 뒤로 잠정적으로나마 옛날 하던 방식대로 끌고 가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는데, 그러나 인순고식적으로 하려 한 것이 아니라 뜻은 어디까지나 한번 대대적으로 바로잡아 보는 데에 있었다.

그런데 금방 영남의 노비에 대해서 엄하게 신칙했었는데, 그 먹물이 마르기도 전에 그대가 호남 고을의 수령으로서 또 이렇게 폐단을 말해 왔다. 그러고 보면 노비가 가장 많은 서북 지방에서 얼마나 뼈에 사무치는 폐단이 많을지는 더욱 추측할 수 있는 일이다.

대저 오늘날 변통하자는 주장에 대해서 주저하고 있는 자들은 ‘기성(箕聖)326) 이 남기신 제도 가운데 노비에 대한 일도 포함되니 이를 훼손하는 일을 섣불리 의논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결행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승역(僧役)과 관련하여 징수하는 번전(番錢)에 있어서도 고을마다 거두는 예를 각기 달리하는데 오히려 속인(俗人)으로 바꿔서 대우해주는 곳조차 있는 형편이다. 따라서 약간 조정하여 그들로 하여금 보살핌을 받고 있다는 뜻을 알게끔 하는 일 역시 영읍(營邑)의 신하들이 세상에 맞추어 얼마나 법을 잘 제정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할 것이다. 모르겠다만 그대의 고을에서도 보인의 이름으로 대신 받아들인 예가 있는가? 그런 예가 만약 있다면 그대로 하는 것도 좋겠다.

즉위 초에 영(令)을 반포하여 즉각 쇄관(刷官)을 없애도록 했었다마는 쇄관은 없어졌다 하더라도 간리(奸吏)들이 거꾸로 불어난 나머지 호소할 수 없는 피해를 받고 온갖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일단 듣고 난 뒤에 어떻게 관례적으로만 비답을 내릴 수 있겠는가. 묘당으로 하여금 먼저 엄히 삼남(三南)의 도신들을 신칙하여 특별히 두루 살피게 하되, 제대로 단속하지 못하는 수령에 대해서는 드러나는 대로 장계로 보고하게 하는 한편, 이와 함께 이 일을 도신이 성실하게 거행하고 있는지 안렴(按廉)토록 해야 하겠다. 그런데 내노(內奴)나 역노(驛奴)나 노비인 것은 마찬가지이니 그들에 대한 폐단을 똑같이 각별하게 구제하여 대 개혁 작업이 이루어지기 전이라도 조금이나마 실효를 거둘 수 있게끔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진상하는 부채와 관련해서는 원래 예로부터 내려오는 제도가 있으니, 중화척(中和尺) 운운한 것은 실언했다고 밖에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감영의 절선(節扇)327) 에 따른 폐단은 한 마디로 말해서 복정(卜定) 때문이라고 할 것인데 이는 대나무 한 종류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부채를 만들 때 소요되는 물건 일체에 대해 복정이라는 명분을 부치고 있는데, 이 모두 백성에게서 거두어들이기 위한 단계적 조치 아닌 것이 없습니다. 만약 면목이 일신되는 효과를 거두려면 발본 색원하는 정사를 펼치는 방법 이외에는 없는데, 그러면 어떤 도신이 여전히 예전대로 답습하는 일을 감히 하겠습니까. 복정에 대한 한 조목도 아마 묘당의 말을 기다릴 것 없이 자연히 모두 혁파되는 결과에 이를 것인데 감히 말을 늘어 놓으며 복주(覆奏)드리지 못할 점이 있다 하겠습니다.

청대죽(靑大竹)에 대한 일은 어공(御供)과 관련되어 있는 만큼 그 사체(事體)가 지극히 엄중합니다. 그리고 약의 효과가 얼마나 나느냐 하는 것 역시 대나무의 크기와 길이에 달려 있는 만큼 그것을 자른다는 것은 애초 논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서울의 공인이 바치게 하자는 것도 온당하지 못한 점이 많습니다. 그런데 여러모로 불필요한 비용이 많이 드는 중에서도 영문(營門)에서 품질 검사를 받을 때 가장 많은 폐단이 발생하고 있으니, 만약 각 해당 고을에서 직접 봉진(封進)케 한다면 중간에서 주구(誅求)하는 폐단을 거의 모두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

민고(民庫)에 대한 일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대저 대동법(大同法)이 일단 확립되어 결전(結田)에서 거두는 부세의 액수가 크게 정해졌으니 이외에 더 거둔다면 모두 법의 본뜻이 못된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다만 잡역조(雜役條)의 경계를 분명히 설정해놓지 않았기 때문에 뜻하지 않은 수요를 책임져야 하는 경우가 갖가지로 나오고 있습니다. 예컨대 서울 관아로부터의 각종 요구라든가 영문에서 수시로 복정하는 것이라든가 서울 영저리(營邸吏)의 역가(役價)를 덧붙여주는 것이라든가 공곡(公穀)을 회감(會減)할 때 부족분을 보충해주는 것이라든가 하는 것이 그것으로서 각종 명색(名色)을 이루 거론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런데 관청에서는 피부에 와 닿는 고통을 느끼지 않고 관리들은 그런 기회에 이익을 챙기려고 한 나머지 결전에 부과하는 것으로부터 호구세로 거두는 것에 이르기까지 별별 수단을 동원하여 거듭거듭 폐단을 일으키면서도 조금도 괴이하게 여기지 않고 으레 그렇게 해 온 것처럼 간주하고 있으니, 반드시 한 번 대대적으로 정돈을 한 다음에야 비로소 효과를 기대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가령 사실을 참작하여 어떤 조목을 놔두고 어떤 조목을 뺄 것인지에 대한 문제는 반드시 도신이 꽤 상세하게 논열(論列)해 온 뒤에야 상호간에 가부를 결정하여 가능한 한 정당하게 귀결시킬 수가 있을 것이니, 먼저 다시 더 다그치며 신칙하여 도신으로 하여금 기일을 약정해서 그 일을 거행토록 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지난번 북관(北關)의 노비 공포(貢布)에 대한 일과 관련, 아주 중대하게 취급해야 할 공포에 대해 어려워하는 점들이 없기에 다방면으로 폐단을 없애도록 한 일이 있었다. 그 뒤에 열읍(列邑)이 거행하면서 과연 일일이 준수하여 관외(關外) 남북(南北) 바닷가 노비들로 하여금 찌푸리고 신음하다가 다시 환호하며 웃게끔 해 주었는가. 북관에서 어사(御史)를 보지 못한 지가 오래 되었으니 먼저 묘당으로 하여금 몇 사람을 뽑아 아뢰게 하는 한편, 우선 이러한 뜻을 도백에게 알려 주어 두루 열읍을 단속하게 하라. 그리하여 과오를 범한 자는 허물을 보완하고 태만한 자는 각성시킴으로써 혹시라도 부월(斧鉞)을 지니고 가는 행차에 걸려드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9책 49권 35장 B면【국편영인본】 47책 111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재정-진상(進上) / 재정-창고(倉庫) / 공업-수공업품(手工業品) / 신분-천인(賤人) / 금융-화폐(貨幣)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註 319]
    민고(民庫) : 관청에서 비상금으로 쓰기 위해 백성들에게 돈이나 곡식을 받아들이는 것 혹은 그 창고.
  • [註 320]
    기호(畿湖) : 경기·황해·충청 지역.
  • [註 321]
    중화척(中和尺) : 정조가 2월 초하루 중화절에 신하들에게 내려준 자.
  • [註 322]
    회감(會減) : 상쇄(相殺)하여 계산하는 것.
  • [註 323]
    죽력(竹瀝) : 푸른 대쪽을 불에 구워서 받은 진액(津液).
  • [註 324]
    수향(首鄕) : 향리(鄕吏)의 우두머리, 즉 호장(戶長).
  • [註 325]
    남간(南間) : 의금부 남쪽의 감옥.
  • [註 326]
    기성(箕聖) : 기자(箕子).
  • [註 327]
    절선(節扇) : 단오절 진상 부채.

○甲戌/綾州牧使李宗爕, 應旨上疏曰:

"凡今莫可救止, 愈往愈痼者, 竹之弊也。 進上竹筍靑大竹及年例卜定扇竹, 勢不獲已, 歸之民庫。 是十室之殘, 而以竹斂民者, 歲過千金, 則他邑自可推知也。 湖南民庫之弊, 言之痛哭。 結收之不足, 戶斂而後已, 比之畿湖, 不啻倍蓰。 而竹錢四五年以來創有之事也, 今年之直倍於去年, 明年之價, 又不知至於幾何。 故民情憂懼, 若不保朝夕, 思之及此, 亦足可畏。 臣則南來之後, 先以竹田時産, 隨節造扇, 而平其頭則便於手而省工, 廣其邊則不屑油而耐久。 如此則竹價廉而扇製完矣, 伏乞先自明年進上扇子, 皆用中和尺七寸之制。 使兩南扇邑, 無敢踰此, 則實爲南民之惠。 至如靑大竹一幹之費, 幾至二千錢。 年前京貢之議, 因下屬之失利, 竟使朝家之德意, 閼而不通, 南民之茹悢, 久而益甚。 臣意則會減本價及沿路駄價, 當初磨鍊, 不爲不多, 以此作貢, 足以當之, 若干添價, 又自該郡, 各定其數。 而此異於恒用苓朮之材, 雖非月令, 隨時進排, 無所不可, 又不過作片取瀝之資, 則雖不體大, 兩截輸納, 亦可以省力矣。 下詢廟堂而處之幸甚。 京各司奴之散在湖邑者, 其所最無告切可矜之狀, 與寺奴等。 大抵愚氓, 一入賤籍, 平民無不若浼, 婚嫁因而路絶。 故皆去其籍, 鳥駭獸竄, 卽今案付, 除非百年枯骨, 則不過假作名目。 由是而當身納貢, 十無一二, 査族分徵, 殆遍闔境。 奴與良丁, 等是民也, 貢與身布, 均是役也。 若改各司元奴婢名色, 而一如 ‘樂工保人選上奉足之例’, 稱之曰 ‘某司奴保人’, 而雜以良丁, 則民無連累之憂, 貢無減摠之慮, 亦令廟堂稟處焉。"

批曰: "出自經幄, 條陳民隱, 在湖南, 又能先於人, 殊可嘉也。 幷令廟堂, 草記稟處。 扇事, 聞甚痛駭。 年前至煩廟堂之關飭, 而其效蔑如, 寧有如許紀綱? 加斂之竹錢, 尤爲無狀, 爲先革罷, 己捧者還給, 更犯者營邑之臣重繩。 其外以扇爲名, 卜定列邑之弊革罷當否, 亦令廟堂, 指一回啓。 至於靑大竹事, 一幹之費, 殆近數千, 豈不欲聞當蠲除? 而取瀝和藥, 實爲開鎖之奇効, 自多波及, 雖難全減, 亦豈無方便處置之道? 亦令爛商稟處。 湖南民庫事, 朝廷之所不知, 大農之所不管, 而中間營私之弊, 民將盡瘁。 不聞則已, 登於疏章者屢矣, 若無眞箇刮目之效, 則何以慰南民乎? 昔者故相李宗城, 於關西嚴立民庫節目, 而列邑之托公染指, 不爲遵行者, 其首鄕先斬後啓爲式。 關西猶然, 況南中乎? 姑以不屑之意, 年前先使廟堂, 嚴飭道臣, 俾各釐正, 未知其間, 已爲釐正, 而綾州一邑, 獨未被救焚之惠乎? 抑兩南伯, 看作例飭, 初不留意下手, 邑宰亦無股栗竦息, 一任其襲謬而然乎? 關西一方伯, 所能立威守法之事, 廟堂何難禁戢? 廟堂雖(玩揭)〔玩愒〕 , 朝廷有紀綱。 則不率敎之道伯守令, 若不拿致王府, 勘以當律, 而立視民瘼, 徒事剝割之守令, 直以贓汚律, 嚴囚南間, 月三嚴刑, 期於得其情實, 則其朝廷其可曰朝廷乎? 其間何以擧行與否, 居廟堂之人, 豈無査知之道乎? 關西亦以故相節目, 更加修明, 無或干科之意, 宜使該伯知之。 今番三南侍從邑倅諸人上疏, 先從此一款之耳剽目擊者, 或廣探或詳問, 論理敷陳。 萬一顧見顔面, 言不直實者, 其爲辜負當如何? 令政院, 下諭于各其道秩高守令, 使之遍示道內諸侍從, 無論歉歲豐年, 於小民務當不撓, 於長吏宜益懲貪。 近來貌樣果如此乎否乎, 誅一貪婪之吏, 勝於賑濟萬口飢民, 其可忽諸? 寺奴婢事, 必欲矯改, 卽予苦心。 換奴爲保, 豈不便當? 然而辛亥特詢之後, 姑未免依舊牽架, 非欲因循, 意在一番大釐正。 才於嶺奴, 有嚴飭, 飭墨未乾, 爾以湖南之邑宰, 說弊又如此。 則最多之西北切骨之瘼, 尤可反隅。 大抵今之持疑於通變之論者, 以 ‘箕聖遺制, 奴婢居一, 不可輕議毁畫’ 爲言, 所以至今未決者此也。 僧役番錢, 邑各異例, 猶有俗人之替當處。 略加闊狹, 俾知咸恤之義, 惟在營邑之臣, 因俗制法之如何。 未知爾邑, 以保名代捧之例有之乎? 若有其例, 仍之亦可。 初元頒令, 卽罷刷官, 而刷官雖無, 吏奸反滋, 無告之害, 備受困督, 如在目中。 旣聞之後, 何可循例賜批? 令廟堂, 先爲嚴飭三南道臣, 拔例周察, 其不能束濕之守令, 隨現狀聞, 續當按廉道臣擧行之勤慢。 而內奴、驛奴, 奴則一也, 一體各別救瘼, 俾有大釐正前絲毫實效。" 備邊司啓言: "進上扇子, 自有舊制, 中和尺云云, 未免失言。 而至於監營節扇之弊, 蔽一言曰卜定, 不但竹之一種而已。 凡係屬於造扇之物, 名以卜定者, 莫非斂民之階。 倘求改觀之益, 只在塞源之政, 焉有道臣而猶敢循襲? 卜定一款, 恐不(侍)〔待〕 廟堂之言, 而自歸竝革, 有不敢費辭覆奏。 靑大竹事, 御供事體, 至爲謹嚴。 藥力淺深, 亦在其體之大小長短, 裁截初非可論。 京貢又多難便。 而蓋其煩費之多端, 最在營門之看品, 若自各該邑, 直爲封進, 則中間誅求之弊, 庶可盡祛。 民庫事, 大抵大同之法旣立, 結賦之數大定, 外此加斂, 皆非法意。 而只緣雜役條之界限不明, 不時需之責應多門。 如京司之各樣求請也, 營門之隨時卜定也, 京營邸吏之添役價也, 公穀會減之補不足也, 種種名色, 難以枚擧。 而官無切膚之苦, 吏有乘機之利, 自結斂而至於戶斂, 旁竇別岐, 疊出層生, 恬不爲怪, 視若應例, 必有一番大整頓, 然後始可責效。 而若其參量事實, 存減窠目, 必待道臣消詳論列, 然後可以互相可否, 務歸停當, 爲先更加督飭, 使之剋期擧行。" 敎曰: "向於北關奴貢事, 不以應貢之用於莫重爲持難, 有所多般除弊者。 其後列邑擧行, 果能一一遵守, 使關外南北海奴嚬呻, 改爲歡笑乎? 北關之不見繡衣久矣, 爲先令廟堂, 抄啓數人, 先以此意, 知委道伯, 遍飭犯過者補愆, 怠忽者警勵, 莫或干於持斧之行。"


  • 【태백산사고본】 49책 49권 35장 B면【국편영인본】 47책 111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재정-진상(進上) / 재정-창고(倉庫) / 공업-수공업품(手工業品) / 신분-천인(賤人) / 금융-화폐(貨幣)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