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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 49권, 정조 22년 9월 12일 임신 1번째기사 1798년 청 가경(嘉慶) 3년

공자의 제자인 유약을 문묘에 배향하라고 이르다

평음후(平陰侯) 유약(有若)을 성전(聖殿)에 올려 배향(配享)하라는 윤음(綸音)을 내리기를,

"문묘(文廟)는 예의(禮義)가 거기에서 나오고 사전(祀典)이 그로부터 말미암는 모범적인 곳이라 하겠다. 부자(夫子)를 중심으로 해서 유선(儒先)을 차례로 모셨으니, 덕을 본받고 공을 보답하는 것이 여기에 있고, 경모하며 실천에 옮기는 일이 여기에 있고, 학술을 바르게 하고 도법(道法)을 밝히는 일이 또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비록 오르내리고 읍(揖)하며 자신을 낮추는 등 의물(儀物)과 도수(度數) 가운데 미세한 표현이나 자질구레한 절차에 있어서도 오히려 옛 오류를 답습하면서 고식적으로 예(禮)를 삼는 일을 행해서는 안 될텐데, 더구나 위와 아래의 차례를 정하고 앞뒤로 향사(享祀)하는 일에 있어서 조금이라도 구차한 점이 있게 해서야 되겠는가.

나는 평음후 유자(有子) 약(若)을 무(廡)에서 제사드리는 것과 관련하여 마음 속으로 계속 의아하게 여기고 이상하게 생각해서 널리 자료를 상고해 보면서 늘 개탄해 왔다.

대체로 문묘의 철식(腏食)에는 무릇 세 단계의 등급이 있다. 정전(正殿)에 배향(配享)하는 것이 하나이니 안자·증자·자사·맹자 등 4성(聖)을 모시는 것이 그것이요, 동쪽과 서쪽의 서(序)에 종향(從享)하는 것이 하나이니 공문(孔門)의 10철(哲)과 송조(宋朝)의 6현(賢)을 모시는 것이 그것이요, 동쪽과 서쪽의 무(廡)에 종사(從祀)하는 것이 하나이니 공문의 제자(諸子)로부터 아래로 본조(本朝)의 유선(儒先)들을 모시는 것이 그것이다.

그런데 10철이라는 명목이 누구에 의해서 처음 만들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논어(論語)》를 통해 분류한 4과(科)308) 라는 말에 따라 거기에 나오는 사람들을 세어서 철(哲)이라고 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논어》의 이 이야기는 단지 진(陳)나라와 채(蔡)나라 사이에서 부자를 따른 사람들에 관한 감상을 말한 것일 뿐으로서, 이렇게 분류하여 4과에 소속시킨 것은 성문(聖門)의 인재가 성대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에 다름이 아니었다. 대저 증자는 도통을 전한 아성(亞聖)인데도 또한 거기에 참여되지 못하였고 보면, 그것을 가지고 성문의 현철을 총망라하려고 하는 것이야말로 고루한 일로서 너무도 좁은 생각이 아니겠는가.

그것은 어찌되었든지 이때로부터 문묘의 사전(祀典)에 또 10철을 모시는 것으로 확정되었는데, 공문(孔門)의 고제(高弟) 가운데 안자를 한 등급 올려 정전에 배향하자 그 자리를 증자로 보충하였고, 또 증자가 한 등급 올라가자 이번에는 자장(子張)으로 보충하는 등, 마치 관직의 후임자를 충원하는 듯한 인상마저 주게 되었다.

이에 후유(後儒)들의 호되게 비난하는 주장이 분분하게 다투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는데,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4과에 지목된 사람들은 바로 부자를 진나라와 채나라에서 따르던 자들일 뿐으로서 문인 가운데 훌륭한 이들이 진정 이 정도로 그치지는 않는다. 따라서 10철에 대한 이야기는 세속의 주장임을 알 수 있다.’고 하였고, 진정우(陳定宇)309) 는 말하기를 ‘유약 같이 어진 이도 그때 수행하지 않았었다는 이유로 10철의 대열에 끼이지 못하였다.’고 하였으며, 김인산(金仁山)310) 은 말하기를 ‘유약이 성인과 비슷하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안자가 한 등급 위로 올라갔을 때 증자로 보충한 것은 괜찮지만, 유자(有子)를 놔둔 채 자장을 뽑은 것은 옳다고 하겠는가.’ 하였다.

이런 여러 가지 설을 접해 보건대 본래 10철이라는 수에 꼭 구애받음이 없이 유자가 백세(百世)에 걸쳐 추중(推重)되어 왔다는 사실을 대개 알 수가 있다. 또 더구나 《논어》 첫째 편(篇)에 유자의 말을 기록한 것이 세 군데나 되는데 모두 증자와 함께 특별히 자(子)라고 칭했고 보면, 다른 문인들은 그에게 미칠 수 없었던 바라 하겠다. 그리고 《예기(禮記)》에 ‘애공(哀公)유약의 제문을 지어 주었다.’고 하였는데311) 다른 제자들의 경우에는 이런 일이 없었으니, 그렇다면 그가 노(魯)나라 사람들에게 얼마나 존경을 받았었는지를 또 이에 의거하여 알 수가 있다.

그런가 하면 맹자는 ‘유약공자와 비슷했다.’고 말하지 않고 ‘성인과 비슷했다.’고 말하였다. 그러고 보면 그의 언행이나 기상을 감히 부자와 동등하게 비교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성인의 경지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는 것만큼은 얼마나 환히 드러나고 있는가. 그런데도 그만 사마씨(司馬氏)312) 가 사리에 맞지 않는 설을 억지로 끌어다 붙여 ‘모습이 공자와 비슷했다.’313) 고 억단함으로써 함순(咸淳)314) 연간에 한 제주(祭洒)로 하여금 자장(子張)을 올리고 유자는 물리치는 결과를 빚게 하였다. 또 한편으로 육상산(陸象山) 같은 자는 돈오(頓悟) 법문에 입각하여 유자가 효제(孝齊)를 중시한 것을 지리(支離)하다고 강력히 배척하였는데, 심지어는 육상산을 떠받드는 무리들이 천년이 지난 뒤에까지 왕왕 새삼스럽게 공격한 나머지 지금껏 번수(樊須)315)무마시(巫馬施)316) 등의 무리와 함께 겨우 양무(兩廡) 사이에 배열되게 되었으니, 사전(祀典)이 잘못된 데 대한 사림의 탄식이 과연 어떻다 하겠는가.

아조(我朝)의 문묘는 한결같이 중국 조정의 위차(位次)를 따르고 있는데, 우리 숙묘(肅廟) 갑오년에 이르러 송조(宋朝)의 6현(賢)과 10철(哲)까지 아울러 위차에 동참시켰고 보면, 이것은 또 중국 조정에서 미처 행하지 못했던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근래 중국 조정의 《회전(會典)》을 열람해 보건대, 유자주자를 대성전(大成殿)에 승배(陞配)하여 2철(哲)이라 한 뒤, 유자는 선현(先賢) 복자(卜子)317) 다음에 두고, 주자는 선현 전손자(顓孫子)318) 의 다음에 두고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중국 조정에서도 미처 행하지 못했던 5현(賢)을 두루 거양(擧揚)한 우리 나라에서, 거꾸로 중국 조정에서 이미 행하고 있는 유자의 사전(祀典)만 유독 빠뜨리고 있으니, 이것을 도대체 무슨 말로 설명할 것인가.

혹자는 말하기를 ‘양서(兩序)에 종향(從享)하고 있는 이들을 보면 모두 공(公)의 봉작(封爵)을 받았고 양무(兩廡)에 종사(從祀)하고 있는 이들을 보면 모두 후(侯)나 백(伯)의 봉작을 받았다. 따라서 만약 유자를 서(序)로 올리려고 한다면 반드시 승격되어 공의 봉작을 받은 뒤에야 예에 합당하게 될 것이다.’고 하는데, 이는 또 그렇지가 않다. 전손자의 경우 여태 영천후(穎川侯)로 칭해지고 있는데도 서(序)에 올려졌다. 그렇다면 하필 유자의 경우에만 봉작이 바뀌어져야 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전기(傳記)를 상고해 보더라도 믿을 만한 덕행의 증거가 이와 같고, 성문(聖門)에 참구(參究)해 보더라도 그를 추중(推重)하는 의논이 이와 같고, 뒷 사람들이 평론한 이야기나 중국 조정에서 바로잡은 사전(祀典)을 보더라도 어느 것 하나 승배(陞配)해야 할 확실한 증거가 아닌 것 없음이 또 이와 같다. 이러한데도 오히려 다시 고식적으로 한다면 예의상으로 어떻다 할 것이며 또한 이것이 어찌 사전을 중하게 하는 방법이 된다고 하겠는가.

지금 문묘에 일이 있는 기회에 속히 의조(儀曹)로 하여금 평음후 유자 을 성전에 승배시키는 예를 아울러 거행하게 하되, 승배하는 위차(位次)에 대해서는 그 기일에 앞서 고유(告由)토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팔도(八道)와 사도(四都)에서 시행해야 할 사항을 알려주는 절목(節目) 등에 대해서는 담당 관사에서 고사(故事)를 상고한 뒤 자세히 내용을 갖추어 보고토록 하라.

기억하건대 옛날 송조의 6현을 무(廡)에서 서(序)로 올릴 때 지금 종백(宗伯)의 증조(曾祖)가 되는 고(故) 판서 민진후(閔鎭厚)가 종백으로 있으면서 실로 그 일을 담당했었다. 그런데 이렇듯 성대한 일을 당하여 지금의 종백이 마침 이 책임을 맡게 되었으니, 일이 우연치 않은 것만 같다. 아, 그대 종백으로 있는 신하여. 그대의 직무를 공경히 수행하여 의식(儀式)을 조리있게 함으로써 시대를 빛내는 헌장(憲章)을 크게 꾸미고 그대 선조의 업적에 누가 되지 않도록 하라. 힘쓸지어다. 어찌 노력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는데, 윤음이 반포되었어도 그 일은 끝내 시행되지 못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9책 49권 34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110면
  • 【분류】
    인물(人物) / 왕실-종사(宗社) / 사상-유학(儒學)

  • [註 308]
    4과(科) : 덕행(德行)·언어(言語)·정사(政事)·문학(文學)을 말함. 《논어(論語)》 선진(先進)에 "공자가 말하기를 ‘진(陳)나라와 채(蔡)나라 사이에서 〈곤욕을 당할 때〉 나를 따르던 자들이 〈지금은〉 모두 문하에 있지 않구나. 덕행엔 안연(顔淵)·민자건(閔子騫)·염백우(冉伯牛)·중궁(仲弓)이었고, 언어엔 재아(宰我)·자공(子貢)이었고, 정사엔 염유(冉有)·계로(季路)였고, 문학엔 자유(子游)·자하(子夏)였다.’ 하였다." 하였음.
  • [註 309]
    진정우(陳定宇) : 원(元)나라 진력(陳櫟).
  • [註 310]
    김인산(金仁山) : 원나라 김이상(金履祥).
  • [註 311]
    《예기(禮記)》에 ‘애공(哀公)이 유약의 제문을 지어 주었다.’고 하였는데 : 본 인용문은 《예기》에 보이지 않고 다만 《예기(禮記)》 단궁 하(檀弓下)에 "유약의 상(喪)에 도공(悼公)이 조문하였다."고 하였음. 그런데 도공은 애공의 아들임.
  • [註 312]
    사마씨(司馬氏) : 사마천(司馬遷)임.
  • [註 313]
    ‘모습이 공자와 비슷했다.’ : 《사기(史記)》 권67 중니 제자 열전(仲尼弟子列傳)에 "유약은 모습이 공자와 비슷했다.[有若狀似孔子]"고 하였음.
  • [註 314]
    함순(咸淳) : 남송(南宋) 도종(度宗)의 연호.
  • [註 315]
    번수(樊須) : 공자의 제자.
  • [註 316]
    무마시(巫馬施) : 공자의 제자.
  • [註 317]
    복자(卜子) : 자하(子夏).
  • [註 318]
    전손자(顓孫子) : 자장(子張).

○壬申/下平陰侯 有若陞配聖殿綸音。 王若曰: "文廟者, 禮義之所從出, 而祀典之所由楷範也。 臨以夫子, 第以儒先, 象德報功之在玆, 高山景行之在玆, 正學術明道法之亦在玆。 雖於登降揖遜儀物度數之微文瑣節, 猶不當循舊襲謬, 姑息以爲禮, 況於位序之上下, 享祀之先後, 其可一毫苟然已乎? 予以平陰侯有子之祀于廡也, 心積疑異, 博考而常有慨焉者。 蓋文廟腏食, 凡有三等。 正殿配享一也, 四聖是也, 東西序從享一也, 孔門十哲朝六賢是也, 東西廡從祀一也, 孔門諸子以下, 至本朝諸儒先是也。 十哲之目, 不知創自何人, 而特因《論語》中四科之語, 數其人而謂之哲。 然《論語》此說, 只就從於之人, 而爲此分屬之科, 以見聖門人才之盛而已。 夫以曾子, 傳道統之亞聖, 而亦不與焉, 則欲以此蔽聖門之賢哲, 固矣哉, 不綦陋乎? 自是以來, 文廟祀典, 又以十哲硬定, 孔門之高弟, 顔子升侑, 則以曾子補之, 曾子升侑, 則以子張補之, 殆若官職之充代。 而後儒譏切之論, 不得不紛然競起, 程子曰: ‘四科乃從夫子於者, 門人之賢者, 固不止此。 故知十哲, 世俗論也。’ 陳定宇曰: ‘如有若之賢, 亦以不從此行而不在列焉。’ 金仁山曰: ‘有若似聖人。 則升而補可也, 舍有子而取子張可乎?’ 卽此諸說, 十哲之本, 不必拘於數, 而有子之爲百世所推重, 槪可見矣。 又況《論語》篇首, 記有子之言者三, 皆與曾子特稱爲子, 則他門人之所不能及也。 《記》云: ‘哀公有若。’ 而餘子不聞焉, 則其爲魯人之尊禮之者, 又可據也。 且孟子不曰: ‘有若孔子,’ 而曰: ‘似聖人。’ 則其言行氣像, 雖不敢比倫於夫子, 而其不遠於聖域, 則何如其較著也? 乃司馬氏, 以傅會不經之說, 臆斷以 ‘貌肖孔子’, 致使咸淳間一祭酒, 進子張而絀有子。 若陸象山以頓悟法門, 力排有子孝悌之行爲支離, 甚至宗之徒, 往往創攻於千載之下, 而秪今與樊須巫馬施輩, 僅列於兩廡之間, 其爲祀典之欠缺, 士林之歎惜, 果如何哉? 我朝文廟, 一遵中朝位次, 而逮我肅廟甲午, 竝陞朝六賢與十哲同位, 則又中朝之所未遑者也。 近閱中朝《會典》, 陞配有子朱子於大成殿, 爲二哲, 有子在先賢卜子之次, 朱子在先賢顓孫子之次。 則今以中朝之所未遑者, 遍擧五賢, 而至若中朝之所已行者, 反遺有子, 抑獨何說? 或曰: ‘兩序從享, 皆封公爵, 兩廡從祀, 皆封侯伯。 如陞有子於序, 則必陞封公然後爲叶禮,’ 此又不然。 顓孫子尙稱穎川侯, 而亦陞於序。 則何必至於有子而改封云爾乎? 稽之傳記, 德行之徵信也如此, 參之聖門, 議論之推重也如此, 以及乎後人尙論之說, 中朝釐正之典, 而無往非可陞之的證也又如此。 如此而猶復姑息, 禮義之云何, 而亦豈所以重祀典也哉? 今因有事文廟, 亟令儀曹, 竝擧平陰侯 有子 , 陞配聖殿之禮, 其所陞位次, 前期告由。 八道四都, 應行知委等節, 所司取考故事, 詳具以聞。 記昔朝六賢之自廡陞序也, 今之宗伯之曾祖故判書閔鎭厚以宗伯, 實典其事。 當此盛擧, 今之宗伯, 適叨是任, 事若有不偶然者。 咨! 爾宗伯之臣, 其欽乃職事, 條厥儀式, 以丕飾昭代之憲章, 以無忝乃祖之績庸。 勖哉。 可不懋乎?" 綸音旣頒, 而事竟未施行。


  • 【태백산사고본】 49책 49권 34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110면
  • 【분류】
    인물(人物) / 왕실-종사(宗社) / 사상-유학(儒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