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충신인 김주·김제에게 시호를 내리게 하다
하교하였다.
"지난번 영남 유생의 말에 따라 고려(高麗) 충신(忠臣) 황명(皇明) 예부 상서(禮部尙書) 김주(金澍)에게 충정(忠貞)이라는 시호를 내렸었다. 그런데 지금 장차 관원을 시켜 제사드리게 하려는 차에 듣건대 ‘그의 형은 이름이 김제(金濟)이고 호는 백암(白巖)으로서 평해 지군(平海知郡)으로 있다가 벽에 시를 써놓고 바다로 갔는데 어떻게 생을 마쳤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의 이름을 바꿔 제해(齊海)라고 했으니, 이는 대체로 노중련(魯仲連)이 바다에 빠져 죽겠다고 한 것처럼 하려고 생각해서 그런 것일 것이다.’고 하였다.
우리 동방은 풍속이 미개한 상태로 있다가 기사(箕師)291) 께서 오신 뒤로 인륜(人倫)에 관한 일을 얻어 듣게 되었었다. 그러다가 정 문충(鄭文忠)292) 등 제현(諸賢)에 이르러 제대로 그 뜻이 밝혀졌는데, 그들 모두 은(隱)이라는 글자를 가지고 호를 삼았으니 이들이 이른바 9은(隱)으로 불리워지는 분들로서 바로 포은(圃隱)·목은(牧隱)·도은(陶隱)·야은(冶隱)이라고 하는 이들이 그들이다. 이 밖에 72인이 산골짜기에 함께 들어가 그곳을 두문동(杜門洞)이라고 이름하였으며, 또 전서(典書) 윤황(尹璜)같은 이는 스스로 후송(後松)이라고 호를 하였고, 장령(掌令) 서견(徐甄)은 송경(松京)을 바라보며 감회 어린 시를 지었는데, 이렇듯 뇌락(磊落)한 기상을 보여주는 일들이 전후로 줄을 이어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귀와 눈을 번쩍 뜨이게 하고 있다.
그런데 생각건대 백암은 충정을 아우로 두어 두 사람 모두 절의를 이루었으니 고죽군(孤竹君)의 두 아들293) 에 비해 부끄러울 것이 없는데도 여태 자취 없이 사라져 일컬어지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바닷가 뱃사공이나 어부들만 그 유허(遺墟)를 가리키면서 가끔 눈물을 흘릴 따름인 것이다.
대저 일에는 밝게 드러나고 어두워 안 보이는 경우가 있으며 이치 역시 펴지고 막히는 때가 있는데 이것은 즉 모두가 그 시대와 명운(命運)에 관계된 일이라 하겠다. 내가 이렇게 늦게야 들어 알게 되다니 애석한 일이다. 홍문관으로 하여금 역명(易名)294) 의 의전(儀典)을 의논하게 하라. 그리고 이와 같은 사람에게는 동해(東海)의 물을 길어 오고 서산(西山)의 고사리를 캐어서, 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혼령을 불러들여야 마땅하니, 시호를 내리는 날 해상(海上)에 제단을 설치함으로써 세상에 유례가 없이 생각하는 조정의 감회를 부치도록 하라."
- 【태백산사고본】 49책 49권 30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108면
- 【분류】왕실-사급(賜給) / 인사-관리(管理)
- [註 291]기사(箕師) : 은(殷)나라 기자(箕子)를 말함.
- [註 292]
그러다가 정 문충(鄭文忠) : 문충은 정몽주(鄭夢周)의 시호임.- [註 293]
고죽군(孤竹君)의 두 아들 :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임.- [註 294]
역명(易名) : 시호(諡號).○丙寅/敎曰: "向因嶺儒言, 諡高麗忠臣皇明禮尙書金澍曰忠貞。 而今將伻官宣侑際, 聞其兄名濟號白巖, 以平海知郡, 題詩璧間, 浮海而去, 不知所終。 而變其名曰齊海, 蓋欲思齊於仲連之蹈海云爾。 東俗蚩蚩, 自箕師以后, 得聞彝倫之敍。 及至鄭文忠諸賢, 乃能倡明之, 皆以隱爲號, 號稱九隱, 卽圃、牧、陶、治是耳。 外此七十有二人, 同入山谷, 而名曰杜門, 又如典書尹潢之自號以後松, 掌令徐甄之起感於望京, 前後磊落相望, 至于今輝人耳目。 惟白巖, 以忠貞爲弟, 節義雙成, 無愧孤竹君之二子, 而尙湮沒不稱, 海上之估師漁父, 指點其遺墟, 往往有流涕者。 夫事有顯晦而理有詘信, 卽莫不有時與命存焉。 惜乎, 入聞之晩也。 今弘文館, 議易名之典。 似此之人, 宜乎酌東海之水, 採西山之薇, 以招其有往無返之魂, 宣諡日, 設祭海上, 以寓朝家曠感之思。"
- 【태백산사고본】 49책 49권 30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108면
- 【분류】왕실-사급(賜給) / 인사-관리(管理)
- [註 2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