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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48권, 정조 22년 3월 27일 신묘 2번째기사 1798년 청 가경(嘉慶) 3년

환곡의 폐단을 시정토록 하다

의주 부윤(義州府尹) 이기양(李基讓)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신이 작년 겨울 부임하는 도중에 경유했던 촌리(村里)들이 거개가 흩어져 적적하였으므로 그 까닭을 물으니, 대뜸 대답하기를 ‘거급(擧給)이 빌미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또 거급이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문득 대답하기를 ‘환곡이 점점 많아짐으로써 가호(家戶)마다 강제로 나누어주는 것을 거급이라 하는데, 해마다 이것이 증가됨으로써 백성들이 이를 감당하지 못하여 백성들이 하루에도 열 명, 백 명씩 떼를 지어 호소한다.’ 하고, 또 대뜸 말하기를 ‘거급을 제거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장차 다 흩어지게 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신이 삼가 곡식 장부를 가져다가 폐단의 근원을 거슬러 헤아려보니, 거급이 이루어진 까닭은 오로지 진분조(盡分條)가 너무 많은 데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대체로 본부(本府)의 곡식은 반은 유치하고 반은 나누어주는데, 이는 다만 군향(軍餉)과 상평곡(常平穀)뿐이고, 기타 각 아문의 곡식은 모두 진분조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그 처음에는 반분조(半分條)를 위주로 하였고, 이른바 진분조는 아주 소량(小量)이었습니다. 다만 그 후로 매년 본부의 응하조(應下條) 및 전후 정퇴(停退)·탕감(蕩減) 등의 곡식을 으레 모두 반분조로 계감(計減)하고 있기 때문에 반분조는 자연히 날로 점점 줄어들지 않을 수 없게 되고, 그 나머지 각 아문의 곡식은 해마다 불어나서 모(耗) 위에 모를 더하여 계속 증가하기만 하고 줄어들지는 않으므로, 이에 진분조는 날로 점점 불어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근래에는 또 무신년073) 에 처음으로 본주(本州)의 환곡미 8백 석을 장용영(壯勇營)에 옮겨 붙였고, 임자년 겨울에는 또 균역청(均役廳)의 쌀 4천 2백 석을 더 붙였으며, 갑인년 봄에는 또 균역청의 쌀 1천 9백 60여 석을 더 붙였는데, 이를 다 나누어주고 모곡을 받아들여 현재 당연히 나누어주어야 할 본영의 곡식이 이미 1만 3백 40여 석이나 됩니다.

그리고 본주의 곡식은 으레 많이 피곡(皮穀)으로 나누어주고 이를 찧은 쌀로 환산하여 쌀이라 일컫기 때문에 환곡의 이름을 총칭 절미(折米)라 하고 있으니, 이것으로 기준한다면, 나누어주어야 할 영곡(營穀)은 비록 1만 석이라 하지만 실수는 수만 석이 넘습니다. 이리하여 진분조는 또 대단히 증가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받기를 원하는 백성은 적은데 나누어주어야 할 곡식은 많기 때문에 강제로 분배하는 법이 생김으로써 거급의 병폐가 고질화되어 근래 3, 4년 동안에 흩어진 백성이 이미 10에 2, 3분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의 시급한 사정이 이러한데도 일체 유랑하여 흩어지도록 내버려두고 있는 것만도 이미 몹시 위태롭고 두려운 일입니다. 더구나 변방 지역에 저축을 중히 여기는 것은 뜻밖의 재난에 대비할 수 있어서인데, 진분곡이 이미 많기 때문에 창고에 유치된 것은 아주 소량이어서, 변방의 저축이 또한 공허한 실정입니다.

현재의 병폐를 바로잡는 방도는 다만 진분의 법을 통렬히 혁파하고, 여러 아문의 곡식들을 모두 가져다 일체 군향(軍餉)에 붙여 이 중에서 반은 유치하고 반은 나누어주도록 한다면 거급에 대한 걱정이 절로 제거되고 저환곡(儲還穀)이 절로 넉넉해질 것입니다. 그런데 혹자는 이르기를 ‘아문의 곡식을 서로 바꾸는 일은 조정의 금법(禁法)이 있고, 장영(壯營)의 곡식은 사체가 절로 중대하여 의당 감히 의논할 수 없는 일이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은 그렇지 않다고 여깁니다. 대체로 아문의 곡식을 서로 바꾸는 일에 대한 조정의 금법은 다만 곡식 장부에 농간을 부릴까 염려하는 뜻에서 설치한 것이니, 만일 일이 백성을 편리하게 하는 데에 관계된다면, 이는 의당 이 범주에 넣지 말아야 합니다. 더구나 장영을 설치한 것은 다만 숙위(宿衛)를 엄히 하고 국세(國勢)를 튼튼하게 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인데, 우리 전하의 지성으로 백성 위하시는 생각이 한번도 이 가운데에 선행(先行)되지 않은 적이 없었고 보면, 지금 이 본읍의 환곡 폐단이 이미 저와 같고 영곡(營穀)이 환곡 폐단을 가중시킨 것이 또 이와 같으니, 만일 이런 상황이 한번 전하께 보고가 된다면 우리 전하께서는 반드시 크게 경악하시어 즉시 폐단을 개혁하셔서, 차마 이 백성들로 하여금 하루라도 그 병폐를 받게 하지 않으시리라 생각합니다. 바라건대,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하소서. 그리하여 즉시 본주에 있는 각 아문의 진분곡을 모두 군향에 소속시켜 법에 따라 반은 나누어주고 반은 유치하며, 장영곡의 모곡(耗穀) 징수하는 명색에 대해서는, 본주의 경우 특별히 두터운 휼전을 내리시어 각읍에 나누어 유치하는 것을 면해주셔서, 변방 백성들로 하여금 유랑하는 걱정을 면하고 길이 적자(赤子)처럼 보호하시는 은택을 입도록 하여주시면 매우 큰 다행이겠습니다.

신이 또 삼가 보건대, 본주에 옛날에는 양하진(楊下鎭)이 있어 만호(萬戶)를 설치했었는데, 중간에 조폐(凋弊)로 인하여 대신이 연석에서 계품하여 혁파하고, 진(鎭)의 관속 및 진의 둔전(屯田)은 본부에 소속시키고서, 별장(別將)을 차출하여 그로 하여금 처리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때의 처분은 대체로 또한 본주를 위하고 변방의 일을 중히 여기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삼가 듣건대, 본 둔전을 경사(京司)에 이속(移屬)시키자는 의논이 있고, 또 본주에 장차 둑을 쌓고 둔전을 설치하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두말할 나위 없이 이 진과 이 둔전은 이미 본부에 딸린 것이고 보면 의당 본부에서 주관하여야 할 터인데, 떼어내는 것을 꺼리지 않고 편의의 여부도 묻지 않고서 지금 갑자기 경사로 이속시키는 것은 이미 변방 고을의 다행한 일이 아닙니다. 바라건대, 그 의논을 취소하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제로(諸路)의 백성들이 어느 누군들 보호할 백성이 아니겠는가마는 유독 서로(西路)에 뜻을 치중하는 것은 그곳이 피경(彼境)과 인접해 있기 때문이요, 그중에서도 본부에 더욱 뜻을 치중하는 것은 또한 그곳이 변방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그곳 백성들의 고통받는 일 중에 적폐(糴弊)가 가장 심하였으므로, 연전에 누차 칙교(勅敎)를 내려 평균하게 나누어 베풀도록 하였다. 그러고도 오히려 명령을 내린 지 오래되어 일이 해이해질까 염려하여, 도신(道臣)에게 분부해서 민호를 따져서 곡식 수량을 계산한 문안(文案)을 작성 계문하여 편람(便覽)에 대비하도록 했었다. 그리하여 내 생각에는, 영읍(營邑)에서는 내 뜻을 태만함이 없이 준수할 것이고, 백성들 또한 몸을 조금 편히 쉴 수 있게 되었으리라고 여겼다. 그런데 경의 상소문을 보니, 내가 헤아리던 것과 어쩌면 그리도 서로 어긋났단 말인가. 이른바 거급(擧給)이라는 잘못된 규정과 환곡에 첨가된 석수(石數)에 대해서는 묘당으로 하여금 도백에게 별도로 신칙하여 우선 영곡(營穀)부터 나누어주지 말도록 하고, 그 나머지 사항도 조속히 하나하나 시정하게 하도록 할 것이니, 시정이 된 다음에 다시 계문하라. 그리고 양하진 및 본부의 둑 쌓는 일을 본부로 환속시키는 일은 상소문의 말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8책 48권 32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75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군사-병참(兵站) / 군사-군정(軍政) / 재정-국용(國用)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義州府尹李基讓上疏曰:

"臣於昨冬赴任時, 所過村里, 率皆牢騷散落, 問其由則輒曰: ‘擧給爲之祟。’ 又問, 擧給爲何事, 則輒對: ‘以還穀漸多, 排戶勒分, 謂之擧給, 而逐年增加, 民不能堪, 民訴日至十百爲群。’ 輒曰: ‘擧給不祛, 民將盡散。’ 謹取穀簿, 溯究弊源, 則擧給之所以成, 專由於盡分條之太多也。 蓋本府穀半留半分, 只軍餉常平穀而已, 其餘各衙門穀, 皆係盡分。 然其始也, 半分條爲主, 而所謂盡分條, 不過零瑣。 但以後來每歲本府應下條及前後停退、蕩減等穀, 例皆以半分條計減, 故於是乎半分條, 自不得不日漸消縮, 其餘各衙門穀, 逐歲生殖, 耗上加耗, 有增無減, 故於是乎盡分條, 又不得不日漸增益。 近又於戊申年, 始以本州還米八百石, 移屬壯勇營, 壬子冬, 又以均廳四千二百石屬之, 甲寅春, 又以均廳米一千九百六十餘石屬之, 盡分取耗, 見今本營穀當分者, 已爲一萬三百四十餘石。 本州穀, 例多以皮穀俵散, 換折稱米, 故還穀之名, 摠稱折米, 以此準之營穀當分, 雖稱萬石, 實過數萬。 於是乎盡分條, 又阧增矣。 民之願受者少, 而穀之當分者多, 故抑配之法創, 而擧給之弊痼, 三數年間, 民散者已十二三矣。 民急如此, 一任其流散, 已是澟然。 況邊上之貴儲蓄, 可以備不虞也, 盡分者旣多, 故留庫者零星, 於是乎邊儲又空矣。 目今矯救之道, 只當痛革盡分之法, 悉取諸衙門穀, 一付之軍餉, 使之半留半分, 則擧給之患自祛, 而儲還之穀自裕矣。 人或謂: ‘衙門相換, 有朝禁, 壯營穀事體自重, 宜不敢議到。’ 臣則以謂不然矣。 夫衙門穀相換之禁, 只爲穀簿幻弄而設, 若事係便民, 宜不在此限。 況壯營設置, 亶出於嚴宿衛壯國勢之義, 而我殿下至誠爲民之念, 未嘗不先行於其中, 今此本邑還弊旣如彼, 營穀之助還弊又如此, 若使此狀一入於聖聰, 我殿下必將愕然而驚, 卽地釐改, 不忍使斯民一日受其弊矣。 乞令廟堂稟處。 卽以本府所在各衙門穀盡分條, 悉屬軍餉, 依法分留, 壯營穀取耗名色, 本州則特與優恤, 免其分置, 使邊民, 獲紓蕩柝之患, 永涵若保之澤, 甚大幸也。 臣又伏見本州舊有楊下鎭, 設置萬戶, 間因凋弊, 大臣筵稟革罷, 鎭屬及鎭屯, 仍屬本府, 差出別將, 使之照管。 伊時處分蓋亦出於爲本州重邊事之意也。 今伏見本屯, 有移屬京司之議, 又於本州將有築垌設屯之擧云。 無論是鎭是屯, 旣係本州所有, 則宜自本府主管, 而不嫌銷刻, 不問便否, 今忽移屬, 已非邊邑之幸。 乞令還寢其議。"

批曰: "諸路之民, 孰非懷保中物, 而致意於西路者, 以其隣於彼境也, 尤致意於本府者, 亦以其處在邊上也。 民之受困, 糴弊最甚, 年前屢勤飭敎, 使之平分均施。 猶慮夫令久事弛, 分付道伯, 修啓較戶量穀之案, 以備便覽。 竟謂營邑遵奉無惰, 民亦得以息肩歇脚。 見卿疏辭, 與所料何太相反? 所謂擧給之謬規, 添還之石數, 令廟堂, 另飭道伯, 先從營穀勿分, 餘, 亦斯速一一釐正後啓聞。 楊下鎭及本府垌還屬事, 依施。"


  • 【태백산사고본】 48책 48권 32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75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군사-병참(兵站) / 군사-군정(軍政) / 재정-국용(國用)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