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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48권, 정조 22년 2월 19일 계축 1번째기사 1798년 청 가경(嘉慶) 3년

동지 정사 김문순이 연경에 들어갔다 와, 거기서 듣고 본 사실들을 아뢰다

동지 정사(冬至正使) 김문순(金文淳), 부사(副使) 신기(申耆)가 연경(燕京)으로부터 출발하면서 다음과 같이 치계하였다.

"신들 일행 중에 김문순은 병이 나서 책내(柵內)에 임시 머물러 있었고, 신 신기가 서장관 홍낙유(洪樂遊)와 함께 표문(表文)·자문(咨文)을 받들고 먼저 출발하여 12월 18일에 북경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표문·자문을 받들고 예부(禮部)에 나아가 별 폐단 없이 정납(呈納)하였는데, 청나라 예부 시랑 다영무(多永武)가 여러 낭관들을 거느리고서 관례대로 영수(領受)하였습니다. 그 후 신들은 물러나 남소관(南小館)으로 돌아왔습니다.

21일에는 태상 황제(太上皇帝)가 빙희(氷戱)를 관람하였는데, 예부의 통지로 인하여 신 신기 및 서장관이 서화문(西華門) 밖으로 나아가 황제의 행차를 지영(祗迎)하였습니다. 이때 태상황제께서는 황옥 소교(黃屋小轎)를 타고 신들이 지영하고 있는 곳에 당도하여 각로(閣老) 화신(和珅)을 시켜 전지(傳旨)하기를 ‘국왕은 평안한가?’ 하므로, 신들이 ‘평안하십니다.’고 대답하니, 또 묻기를 ‘일국이 다 편안한가?’ 하기에, 또 ‘다 편안합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이때 태상 황제가 서원문(西苑門)으로 들어가면서 인하여 신들로 하여금 따라와 영대(瀛臺) 근처에서 기다리도록 하였습니다. 이윽고 식사를 내리라는 분부가 있더니, 신들 일행을 인도하여 전문(殿門)의 첨계(簷階) 위에 앉히고 똑같이 반탁(飯卓)을 내리고, 또 신들에게 어탁(御卓) 위에 있던 극식(克食)048) 을 내렸습니다. 조금 뒤에는 태상 황제가 나가서 양룡 설마(兩龍雪馬)를 타고 빙희를 베풀므로, 신들 또한 뒤에 따르면서 빙희를 관람하였습니다. 23일에는 신 신기 및 서장관에게 철갑상어 각각 한 마리씩을 내렸습니다.

김문순 일행은 12월 25일에야 연경에 뒤따라 당도하였습니다. 26일에는 신들과 서장관에게 회회국(回回國)의 포도를 담은 조그만 자루를 각각 하나씩 내렸습니다. 29일에는 황제가 태묘(太廟)에서 세모(歲暮)의 협제(袷祭)를 행하였는데, 예부의 통지를 인하여 신들은 오문(午門) 밖에서 등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황제는 황옥 소교를 탔고 시위(侍衛)는 매우 단촐했는데, 오문에서 나올 적에 신들이 지영하였습니다. 새벽에야 황제가 환궁하였는데, 한참 뒤에 대내로부터 신들에게 극식 및 녹육(鹿肉)과 녹미(鹿尾)를 내리고 인하여 신들을 처소로 돌아가도록 하였습니다.

30일에는 보화전(保和殿)에서 연종연(年終宴)을 베풀었는데, 신들 두 사람은 반탁 하나를 함께 하였습니다. 조금 뒤에 황제가 먼저 어전(御殿)으로 나가더니, 태상 황제가 어전탑(御殿榻)에 오르기를 기다려 황제는 별도로 소탑(小榻)을 베풀고 서쪽을 향하여 시좌(侍坐)하고서 풍악을 울리고 축배를 올렸는데, 이때 문무관 또한 모두가 배식(陪食)하였고, 또 신들에게는 낙다(酪茶) 한 잔씩을 돌렸습니다. 이때 예부 상서 덕명(德明)이 신들을 이끌고 어좌(御座) 앞에 나아가 꿇어앉게 하니, 태상 황제가 손수 어탁(御卓) 위에 있는 술잔을 들어 주면서 근시(近侍)로 하여금 신들에게 내리도록 하였습니다. 연종연이 끝나고 신들은 숙소로 돌아왔는데, 또 신들과 서장관에게 석류와 밀감 각 1통씩을 내렸습니다. 또 내무부(內務部)에서 연탁(宴卓) 2좌(坐)를 반송(頒送)해왔는데, 이는 곧 조연(朝宴) 때 신들이 받았던 반탁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광록시(光祿寺)에서는 신들 및 서장관에게 세찬탁(歲饌卓)을 수송해 왔습니다.

금년 1월 1일에는 예부의 통지로 인하여 신들이 서장관 및 정관(正官)들과 함께 오문 앞에 나아가 기다렸는데, 황제가 황옥 소교를 타고 당자(堂子)049) 에 행행하였습니다. 조금 뒤 환궁할 적에는 정편(靜鞭)과 풍악을 울렸습니다. 이어 태상 황제가 태화전(太和殿)에 임어하자, 황제는 전내(殿內)에서 서쪽으로 향하여 시좌하였고, 문무관들은 순서대로 따라 들어갔는데, 이때 신들도 전정(殿庭)으로 따라 들어가 서반(西班)의 맨 끝 유구국(琉球國) 사신의 오른쪽에 서서 삼궤 구고례(三跪九叩禮)를 행하였습니다. 태상황제가 이내 내전으로 돌아가자 또 정편과 풍악을 울렸습니다. 이어 황제가 태화전에 임어하자, 문무관 및 신들의 행례(行禮)를 일체 처음 의식과 같이 하고, 예가 끝나자 물러나왔습니다.

5일에는 황제가 천단(天壇)에 행행하여 기곡 대제(祈穀大祭)를 행하였으므로, 신들은 오문 앞에 나아가 지송(祗送)하였습니다. 6일의 환궁 때에는 의당 지영(祗迎)해야 했으나, 이날은 태상황제가 황제와 함께 원명원(圓明園)을 행행하게 되었으므로, 두 곳의 영송(迎送)을 겸행하기가 어렵다 하여, 예부에서 태상 황제의 동가(動駕) 때에만 지영하라는 뜻으로 통지를 해왔기 때문에 신들이 서장관과 더불어 함께 삼좌문(三座門) 밖에 나아가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해가 뜬 뒤에 태상 황제가 황옥 소교를 타고서 신들의 지영하는 곳에 이르러 한번 돌아보고 지나갔습니다. 잠깐 뒤에 황제는 말을 타고 나왔는데, 황제가 탄 안구(鞍具)는 모두 황색(黃色)을 썼고, 좌우에는 약간의 관기(官騎)가 시위하였습니다. 10일에는 신이 부사와 함께 원명원에 가서 한 여사(廬舍)에 머물러 있었는데, 들으니 전에 이미 산고수장각(山高水長閣) 앞에 몽고(蒙古)의 장막을 설치했다고 하였습니다.

11일에는 통역관이 신들을 이끌고 반차(班次)로 들어갔는데, 태상황제가 황옥 소교를 타고 나오므로 신들이 지영하였습니다. 이어서 태상 황제가 몽고의 대막(大幕)으로 들어가 좌정하자, 황제는 서쪽으로 향하여 시좌하고서 풍악을 울리고 잡희(雜戱)를 베풀면서 친왕(親王) 및 몽고왕(蒙古王) 이하에게 모두 연탁(宴卓)을 내렸습니다. 신들 두 사람은 한 연탁에 함께 앉히고, 낙다(酪茶) 한 잔씩을 주었습니다. 이때 예부 상서 덕명(德明)이 신들을 이끌고 어좌 앞에 나아가 꿇어앉게 하니, 태상 황제가 손수 어탁 위의 술잔을 들어 주면서 근시로 하여금 신들에게 내리도록 하였습니다. 잔치가 끝나자 태상 황제는 소교를 타고 내전으로 돌아갔고, 황제는 그 뒤를 따라 도보로 환궁하였습니다.

내무부(內務部)에서는 미리 장막 앞 좌우에 상사(賞賜)의 탁자를 설치해 두었다가 친왕 이하 및 각국 사신에게 상을 반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신 김문순에게는 금(錦) 3필, 장융(漳絨) 3필, 대권 팔사단(大卷八絲緞) 4필, 대권 오사단(大卷五絲緞) 4필, 대하포(大荷包) 1대(對), 소하포(小荷包) 4개를 내리었고, 신 신기에게는 금 2필, 장융 2필, 대궐 팔사단 3필, 대권 오사단 3필, 대하포 1대, 소하포 4개를 내리었습니다. 그런데 매양 연초(年初)마다 자광각(紫光閣)에서 잔치를 베풀고 으레 이 상사가 있었는데, 금년에는 자광각 잔치를 베풀지 않았기 때문에 몽고막(蒙古幕)의 잔치로 옮겨서 상사를 하였는 바, 유구국의 사신에 대한 상사도 신들에게와 똑같이 하였습니다.

이어서 통역관이 태상 황제의 특지에 따라 신들을 인도하여 정대광명전(正大光明殿)으로 나아가서 좌우의 오산(鰲山)을 구경하게 하였는데, 이때 일행 중 역원(譯員)으로서 흑단령(黑團領)을 입은 자는 모두 따라 들어왔습니다. 유구국의 사신에게도 관광을 허락하였는데, 이는 근년에 없던 일이었습니다. 전각 안으로부터 난간 밖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꽃무늬의 옥석(玉石)을 깔았습니다. 그리고 오산의 제양(製樣)을 말하자면, 정대광명전 안의 동서벽에 모두 층탁(層卓)이 있고, 탁 위에는 오색이 찬란한 봉래산(蓬萊山)의 모양을 만들어 놓았는데, 암학(巖壑)이 높고 널찍하고 누각이 층층이 겹쳐 있으며, 진금(珍禽)·기수(奇獸)·기수(琪樹)·요화(瑤花)가 여기저기 널려서 휘황찬란하여 그 형상을 어떻다고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안에는 기관(機關)을 설치하여 밖에서 노끈만 잡아당기면 선관(仙官)·미녀(美女)가 골짜기에서 나오고 수당(繡幢)·보개(寶蓋)가 하늘에서 내려오며, 닫혀진 문이 절로 열리는데 그 안에는 사람이 들어 있고, 내리쏟듯한 급한 여울에는 돛대와 노가 일제히 움직였으며, 탁 아래는 작은 장막을 둘러치고 장막 안에 악기(樂器)를 설치했는데, 기괄(機栝)이 잠깐 요동하면 법칙대로 작동하고 그치고 하되, 그 소리는 모두가 생(笙)·관(管)·사(絲)·종(鍾)의 소리였습니다. 신들이 구경을 마치고 물러나온 뒤에는 예부에서 ‘상원사연관등(上元賜宴觀燈)’을 시제(詩題)로 하여 관등시(觀燈詩)를 찬진(撰進)하라고 통지해왔으므로, 신들이 각각 칠언 율시(七言律詩) 1수씩을 지어 올렸습니다. 그런데 12일 아침에 예부에서 전날 지어 올린 시를 되돌려주고 또 ‘승은연뢰관등공기(承恩宴賚觀燈恭紀)’라는 시제를 보내왔는데, 이는 곧 전날 지어 올린 시를 미처 황제께 올리지 못하여 이내 다시 출제(出題)를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신들이 또 칠언 율시 1수씩을 지어 올렸는데, 유구국의 사신도 응제(應製)하였습니다.

14일에는 산고수장각에서 등희(燈戱)를 베풀려고 했으나, 풍세(風勢)가 너무 급한 때문에 우선 정지하였습니다. 15일 아침에는 먼저 방생희(放生戱)를 베풀고, 또 정대광명전에서 잔치를 내렸습니다. 이때 통역관이 신들을 인도하여 전함(殿檻) 밖으로 들어가니, 태상 황제는 전각 위에 올라 좌정하였고 황제는 서쪽으로 향하여 시좌하였는데, 풍악을 울리고 놀이를 베풀면서 신들에게 각각 찬탁(饌卓) 및 낙다(酪茶) 한 잔씩을 내렸습니다. 또 예부 상서 덕명이 신들을 인도하여 어좌 앞에 이르니, 태상 황제가 손수 어탁 위의 술잔을 들어 주면서 근시로 하여금 신들의 본반(本班)에 내리게 하고, 또 어탁에 있는 꽃무늬가 찍힌 장병(長餠) 한 그릇과 저양(豬羊) 한 쟁반을 내렸습니다. 그리고는 잠깐 뒤에 태상 황제가 내전으로 돌아가고 황제도 따라 들어갔습니다. 잔치가 끝난 뒤 통역관이 와서 예부의 말을 전하기를 ‘시를 지어 올린 사신은 지금 상을 받게 될 것이니, 머물러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 하기에, 신들은 정대광명전 외문(外門)으로 물러와 기다렸습니다. 이때 신들은 동편에 있었고 유구국 사신은 서편에 있었습니다. 이때 예부 시랑 다영무가 전하께 상사하는 망단(蟒緞) 2필, 크고 작은 견지(絹紙) 4권, 복자방전(福字方箋) 1백 폭, 필(筆) 4갑, 묵(墨) 4갑, 연(硯) 2방(方), 피려기(玻瓈器) 4건(件), 조칠기(雕漆器) 4건을 신들에게 전해 주고, 신들에게는 각각 대단(大緞) 1필, 견지 2권, 필 2갑, 묵 2갑씩을 상사하였는데, 유구국왕 및 사신에게 상사한 것도 우리와 같았습니다.

산고수장각에서 등희(燈戱)를 베풀었는데, 통역관이 신들을 인도하여 화장자(花障子) 안의 반열로 나아가니, 태상 황제가 산고수장각에 나와 좌정하고 황제는 전과 같이 시좌하여 각저희(角觝戱)를 베풀면서 낙다 한 잔씩을 내리고, 과합(果盒) 및 저양육(猪羊肉)과 녹미(鹿尾)를 담은 쟁반을 내렸으며, 또 원소병(元宵餠) 각 한 그릇씩을 신들 및 종인(從人)들에게 두루 내렸습니다. 그리고는 등화(燈火)의 잡희(雜戱)와 서양(西洋)의 그네뛰기를 차례로 베풀었는데, 매화(埋火)의 폭발하는 소리는 매우 굉렬하여 마치 천둥소리 같았고 연기와 화염이 창공에 그득하였습니다.

16일에는 관소(館所)로 돌아와 있었습니다. 19일에는 다시 원명원에 갔는데, 식사가 끝난 뒤에 통역관이 신들을 인도하여 산고수장정 아래에 이르니, 태상 황제는 어좌에 좌정하였고 황제는 시좌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예부 상서 덕명이 특지(特旨)에 따라 즉시 신들을 인도하여 어좌 앞에 이르니, 태상 황제가 화신(和珅)을 시켜 말을 전하기를 ‘너희들이 귀국하거든 내가 평안히 지내고 있다는 뜻을 국왕에게 전해야 할 것이다.’고 하므로, 신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반차(班次)로 물러나왔습니다. 이어 신들에게 낙다 한 잔씩과 과합(菓盒)과 떡, 고기를 내려 주고, 등희(燈戱)·포구(砲具) 등을 베푸는 것은 일체 상원일(上元日)처럼 하였습니다. 잔치가 거의 끝날 무렵에 황제가 먼저 들어갔고, 잔치가 다 끝난 뒤에야 태상 황제는 내전으로 들어가고 예부의 관원들도 모두 물러갔습니다.

이때 환시(宦侍)가 손짓으로 통역관을 부르므로, 통역관이 신들을 인도하여 산고수장각 안으로 따라들어가 후문(後門)을 따라 나가서 구불구불 돌아 2, 30보쯤을 가니, 태상 황제가 타는 황옥 소교가 작은 배에 실려 있는데, 배 위의 종관(從官)들은 4, 5인에 불과하였습니다. 이때에 날은 이미 어두워졌는데, 촛불이나 횃불도 없이 다만 한 사람이 화통(火筒)을 가지고 언덕을 따라 전도(前導)하면서 좌우를 밝게 비추었습니다. 그 화통의 제작 양식을 말하자면, 흙으로 통형(筒形)을 만든 다음 겉에는 채색을 칠하고 안에는 화약(火藥)을 장치하여 차례로 불을 대면 광염(光焰)이 땅을 환히 비추었습니다. 이는 아마 화금(火禁)이 매우 엄격함으로 인하여 촛불을 쓰지 않은 때문인 듯하였습니다.

신들은 작은 배를 타고 따라갔고, 유구국 사신도 따라 들어왔는데, 그 곳의 주위를 살펴보니 극히 깊고 엄하였습니다. 양쪽 언덕에는 모두 산을 만들고 간혹 돌로 가산(假山)을 쌓은 것도 있었으며, 산정(山亭)과 수각(水閣)은 도합 여섯 군데였습니다. 배로 1리(里)쯤 가서야 비로소 언덕에 대어 내렸는데, 여기에 바로 경풍도(慶豊圖)050) 가 있었습니다. 황제는 먼저 이미 와서 여기서 기다리고 있다가 태상 황제를 맞이하여 의식대로 시좌하였는데, 어병(御屛)은 종이를 바르고 그 안을 누렇게 하였습니다. 층(層)마다 시렁을 설치하고 촛불을 환히 밝혔는데, 앞에 등가(燈架)를 설치한 것은 마치 어병의 모양과 같이 하였으되, 높이와 넓이는 몇 갑절이나 되었습니다. 등가의 좌우에는 모두 등붕(燈棚)을 설치하였는데, 그것은 마치 백탑(白塔)의 모양과 같아서 아래는 넓고 위는 뽀족하였고, 면(面)마다 켜져 있는 등영(燈影)은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이어서 각로(閣老) 이하 및 신들에게 낙다 한 잔씩을 내리고 정전(庭前)에 잡희(雜戱)를 베풀었습니다. 조금 뒤에 잔치를 파했는데, 따라 들어가는 조관(朝官)은 수십 인에 불과하였습니다. 신들은 물러나온 뒤에 또 작은 배를 타고 물을 따라 내려가 언덕에 올라서 한 후장(帿場)을 걸어서 갔는데, 이곳이 바로 정대광명전의 뒤편이었습니다. 인하여 그곳을 나왔습니다.

24일에는 예부의 통지를 인하여 신들이 서장관 및 정관들과 함께 오문 앞에 나아가 상사를 받았는데, 어전께 연례로 회송(回送)하는 예단(禮單) 외에 만수성절표단(萬壽聖節表緞) 4필, 이주(裡紬) 4필, 장단(粧緞) 3필, 운단(雲緞) 3필, 표피(豹皮) 70장(張), 마(馬) 1필, 영롱 안접(玲瓏鞍䩞) 전부를 일체로 지수(祗受)하여 상통사(上通事)에게 주어 그로 하여금 신들이 복명하는 날 일시에 정납하도록 하였습니다. 유구국 사신은 25일에 따로 상사를 받았습니다."


  • 【태백산사고본】 48책 48권 20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69면
  • 【분류】
    외교-야(野) / 어문학(語文學)

  • [註 048]
    극식(克食) : 만주어(滿洲語)로서 천자(天子)의 식선(食膳)을 내려주는 것을 이른 말이다.
  • [註 049]
    당자(堂子) : 청(淸)나라 때에 천자(天子)가 토곡(土穀)을 제(祭)하면서 제신(諸神)을 부제(袝祭)하던 곳이다.
  • [註 050]
    경풍도(慶豊圖) : 정재(呈才)에 경풍도무(慶豊圖舞)를 출 때 쓰는 그림. 내용은 즉 풍년의 경사를 그린 것으로서 높이가 7, 8길이나 되었다고 한다.

○癸丑/冬至正使金文淳、副使申耆, 自燕京離發馳啓曰: "臣等一行, 文淳病留柵內, 臣與書狀官洪樂游, 奉表、咨文, 先爲離發, 十二月十八日入北京。 陪表、咨文, 詣禮部, 無弊呈納, 侍郞多永武, 率諸郞官, 依例領受。 後, 臣等退歸南小館。 二十一日, 太上皇帝, 觀氷戲, 因禮部知會, 臣及書狀官, 詣西華門外祗迎。 太上皇帝, 乘黃屋小轎, 到臣等祗迎處, 使閣老和珅傳旨曰: ‘國王平安乎?’ 臣等對曰: ‘平安矣。’ 又問曰: ‘一國安乎?’ 又對曰: ‘安矣。’ 太上皇帝入西苑門, 仍令臣等隨來伺候於瀛臺近處。 有旨賜食, 引臣等一行, 坐於殿門簷階上, 俱賜飯卓, 又賜臣等御卓上克食。 少頃, 太上皇帝出御兩龍雪馬, 設氷戲, 臣等亦隨後觀戲。 二十三日, 賜臣及書狀官, 鱘鰉魚各一尾。 臣文淳一行, 則十二月二十五日, 追到燕京。 二十六日, 賜臣等書狀官, 回回葡萄各一小帒。 二十九日, 皇帝行太廟歲暮祫祭, 因禮部知會, 臣等等待於午門外。 皇帝乘黃屋小轎, 侍衛甚簡, 出自午門, 臣等祗迎。 黎明皇帝還宮, 良久自內賜臣等克食及鹿肉鹿尾, 仍令退歸。 三十日, 設年終宴於保和殿, 臣等兩人, 共一卓。 少頃, 皇帝先出御殿, 候太上皇帝陞殿御榻, 皇帝別設小榻, 西向侍坐, 樂作進爵, 文武官亦皆陪食, 又饋臣等酪茶一巡。 禮部尙書德明, 引臣等進御座前跪, 太上皇帝手擧御卓上酒盞, 使近侍賜臣等。 宴罷, 臣等退歸, 又賜臣等及書狀官榴柑各一桶。 又自內務府, 頒送宴卓二坐, 此則朝宴所受之卓云。 又自光祿寺, 輸送歲饌卓於臣等及書狀官。 今年正月初一日, 因禮部知會, 臣等與書狀官及正官等, 詣午門前何候, 皇帝乘黃屋小轎, 幸堂子。 少頃, 回鑾鳴鞭動樂。 太上皇帝御太和殿, 皇帝在殿內西向侍坐, 文武官循序趨入, 臣等隨入殿庭, 立於西班末琉球使臣之右, 行三跪九叩禮。 太上皇帝, 旋卽還內, 又鳴鞭動樂。 皇帝御太和殿, 文武官及臣等行禮, 一如初儀, 禮畢退出。 初五日, 皇帝幸天壇, 行祈穀大祭, 臣等詣午門前祗送。 初六日回鑾時, 當爲祗迎, 而是日太上皇帝, 與皇帝幸圓明園, 兩處迎送, 謂難兼行, 自禮部, 只以太上皇帝動駕時祗迎之意知會, 故臣等與書狀官, 俱詣三座門外伺候。 日出後, 太上皇帝, 乘黃屋小轎, 到臣等祗迎處, 顧眄而過。 須臾皇帝坐馬而出, 御乘鞍具, 皆用黃色, 左右若干官騎馬侍衛。 初十日, 臣與副使, 同往圓明(圓)園, 住接閭舍, 則聞已前期設蒙古帳幕於山高水長之前云。 十一日, 通官引臣等入就班次, 太上皇帝乘黃屋小轎而出, 臣等祗迎。 後, 太上皇帝入御蒙古大幕, 皇帝西向侍坐, 動樂設雜戲, 親王及蒙古王以下, 俱賜宴卓。 臣等兩人, 共一卓, 饋酪茶一巡。 禮部尙書德明, 引臣等詣御坐前跪, 太上皇帝手擧御卓上酒盞, 使近侍, 賜臣等。 宴訖, 太上皇帝乘轎還內, 皇帝跟後步還。 內務府預設賞賜卓於帳前左右, 頒賜親王以下及各國使臣。 文淳錦三疋、漳絨三疋、大卷八絲緞四疋、大卷五絲緞四疋、大荷包一對、小荷包四箇, 臣錦二疋、漳絨二疋、大卷八絲緞三疋、大卷五絲緞三疋、大荷包一對、小荷包四箇。 歲初設宴於紫光閣, 例有此賞賜, 而今年則不設紫光閣宴, 故移給於蒙古幕宴, 而琉球使臣賞賜, 亦如臣等。 通官, 以太上皇帝特旨, 引臣等, 進詣正大光明殿內, 俾觀左右鰲山, 行中譯員之黑團領者, 俱爲隨入。 琉球使臣, 亦許觀光, 此則近年未有之事。 自殿內至檻外, 皆鋪花紋玉石。 鰲山製樣, 則正大光明殿內東西壁, 俱有層卓, 卓上作五采蓬萊山之形, 巖壑高闊, 樓閣層疊, 珍禽、奇獸、琪樹、瑤花, 雜遝焜煌, 不可名狀。 內設機關, 而外牽繩索, 則仙官、奼女, 自谷而出, 繡憧、寶蓋, 從天而降, 扃戶自開, 人在其中, 急灘如瀉, 帆檣齊動, 卓下圍以小帳, 帳內設樂器, 而機栝乍搖, 止作如法, 其聲則俱是笙、管、絲、鐘。 臣等退出後, 自禮部知會, 撰進觀燈詩, 而以上元賜宴觀燈爲題, 故臣等各製七言律詩一首以進。 十二日朝, 自禮部還給前詩, 又送他題, 而以承恩宴賚觀燈恭紀爲題, 此則昨日製進之詩, 未及登徹, 旋更出題云。 故臣等又製七言律詩一首以進, 琉球使臣, 亦爲應製。 十四日擬設燈戲於山高水長, 而以風勢之太緊, 姑爲停止。 十五日朝, 先設放生戲, 又賜宴於正大光明。 通官引臣等, 入詣殿檻外, 太上皇帝(陛)陞殿, 皇帝西向侍坐, 動樂設戲, 各賜饌卓及酪茶一巡。 禮部尙書德明, 引臣等至御座前, 太上皇帝手擧御卓止酒盞, 使近侍, 賜臣等本班, 又賜御卓一器印花長餠及一盤猪羊。 須臾, 太上皇帝還內, 皇帝隨入。 罷宴, 通官來傳禮部言: ‘進詩使臣, 今當受賞, 留待爲可’, 臣等退待正大光明外門。 臣等在東, 琉球使臣在西。 禮部侍郞多永武, 傳授御前加賞蟒緞二疋, 大小絹紙四卷, 福字方箋一百幅, 筆四匣, 墨四匣, 硯二方, 玻瓈器四件, 雕柒器四件, 臣等處, 各賞大緞一疋, 絹紙二卷, 筆二匣, 墨二匣, 而琉球國王及使臣賞賜, 亦如之。 又設燈戲於山高水長, 通官引臣等, 進詣花障子內班, 太上皇帝, 出御山高水長, 皇帝如前侍坐, 設角觝戲, 賜酪茶一巡, 饋果盒及猪羊肉鹿尾盤, 又以元宵餠各一器, 遍及於臣等及從人。 燈火雜戲, 西洋鞦韆, 次第設行, 砲𤍤埋火, 尤爲轟烈, 聲響如雷, 烟焰漲空。 十六日還歸館所。 十九日更詣圓明園, 飯後, 通官引臣等山高水長亭下, 太上皇帝出座, 皇帝侍坐。 德明以特旨, 卽引臣等, 至御座前, 太上皇帝使和珅傳言曰: ‘儞們還歸, 以平安以過之意, 傳于國王可也。’ 臣等叩頭退出班次。 各賜酪茶一巡, 菓盒餠肉之饋, 燈戲、砲具之設, 一如上元日。 宴幾畢, 皇帝先入, 宴畢後, 太上皇帝入內, 禮部官皆退去。 宦侍手招通官, 引臣等隨入山高水長閤之內, 從後門出, 逶迤數三十步, 太上皇帝所乘黃屋小轎, 載于小船, 船上從官, 不過四五人。 此時日已昏黑, 而無燭炬火, 但有一人, 以火筒從岸前導, 明照左右。 火筒製樣, 以土作筒形, 外施繪綵, 內(粧)〔裝〕 火藥, 節次衝火, 光焰燭地。 似因火禁甚嚴, 不用燃燭之故。 臣等乘小舟從行, 琉球使臣, 亦爲隨入, 觀其處地, 極爲深嚴。 兩岸皆夾造山, 間或有石築假山, 山亭、水閣, 合爲六所。 舟行幾一里, 始泊岸而下, 卽慶豐圖也。 皇帝先已來候於此, 侍坐如儀, 御屛則紙塗而黃。 其中每層安架, 燃燭晃朗, 前設燈架, 如御屛樣, 而高廣倍蓰。 燈架左右俱設燈棚, 如白塔形, 下廣而上尖, 面面燈影, 不可數計。 仍賜閣老以下及臣等酪茶一巡, 設雜戲於庭前。 少頃罷宴, 隨入朝官, 不過數十人。 臣等退出後, 又乘小舟, 順流而下登岸, 步行一帿場, 此是正大光明之後也。 仍爲出來。 二十四日, 因禮部知會, 臣等與書狀官及正官等, 詣午門前領賞, 御前年例回送禮單外, 萬壽聖節表緞四疋, 裏紬四疋, 粧緞三疋, 雲緞三疋, 豹皮七十張, 馬一疋, 玲瓏鞍䩞全部, 一體祗受, 逢授於上通事處, 使之一時呈納于臣等復命之日。 琉球使臣, 二十五曰另爲領賞。"


  • 【태백산사고본】 48책 48권 20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69면
  • 【분류】
    외교-야(野) / 어문학(語文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