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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46권, 정조 21년 6월 21일 경인 2번째기사 1797년 청 가경(嘉慶) 2년

정약용이 상소하여, 서양의 사설에 빠져들었던 일 때문에 체임을 청하다

승지 정약용(丁若鏞)이 상소하기를,

"신이 이른바 서양의 사설(邪說)에 대하여 일찍이 그 글을 보고 기뻐하면서 사모하였고 거론하며 여러 사람에게 자랑하였으니, 그 본원인 심술(心術)의 바탕에 있어서는 대체로 기름이 퍼짐에 물이 오염되고 부리가 견고함에 가지가 얽히는 것과 같은데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대저 이미 한번 이와 같이 되었으니 이는 바로 맹자(孟子) 문하에 묵자(墨者)인 격이며 정자(程子) 문하에 선파(禪派)인 격으로 큰 바탕이 이지러졌으며 본령이 그릇된 것으로, 그 빠졌던 정도의 천심이나 변했던 정도의 지속은 논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증자(曾子)가 이르기를 ‘내가 올바른 것을 얻고서 죽겠다.’고 하였으니, 신 또한 올바른 것을 얻고서 죽으려 합니다.

신이 이 책을 얻어다 본 것은 대체로 약관의 초기였습니다. 이때에는 원래 일종의 풍기(風氣)가 있었는데, 천문(天文)·역상(曆象) 분야, 농정(農政)·수리(水利)에 관한 기구, 측량하고 실험하는 방법 등에 대하여 잘 말하는 자가 있었으며, 유속(流俗)에서 서로 전하면서 해박하다고 했으므로 신이 어린 나이에 마음속으로 이를 사모하였습니다. 그러나 성질이 조급하고 경솔하여 무릇 어렵고 교묘한 데 속하는 글들을 세심하게 연구하고 탐색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찌꺼기나 비슷한 것마저 얻은 바가 없이, 도리어 생사(生死)에 관한 설에 얽히고 남을 이기려 하거나 자랑하지 말라는 경계에 쏠리고 지리·기이·달변·해박한 글에 미혹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것을 유문(儒門)의 별파(別派)나 되는 것으로 인식하고 문원(文垣)의 기이한 구경거리나 되는 것으로 보아 다른 사람과 담론하면서 꺼리지 않았고 다른 사람의 비난이나 배격을 당하면 그의 문견(聞見)이 적고 비루한가 의심하였으니, 그 근본 뜻을 캐어보면 대체로 이문(異聞)을 넓히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이 본래 지업(志業)으로 삼은 것은 단지 영달하는 데 있었습니다. 상상(上庠)에 오르면서부터 오로지 정밀하게 한결같이 뜻을 두었던 것은 바로 공령(功令)의 학문이었으니, 더욱 어떻게 방외(方外)에다 마음을 놀릴 수 있었겠습니까. 어떻게 뜻이 확립되었음을 표방하여 경위를 구별하지 않은 채 지금까지 벗어나지 않겠습니까. 그 글 가운데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설은 신이 옛날에 보았던 책에서는 못 본 것이니, 이는 제사를 지내지 않았던 갈백(葛伯)이 다시 태어난 것으로 조상을 알아차리는 승냥이와 수달도 놀랍게 여길 것인데 진실로 사람으로서의 도리가 약간이라도 있는 자라면 어찌 마음이 무너지고 뼛골이 떨려 그 어지러운 싹을 끊어버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불행하게도 신해년097) 의 변고가 발생했으니, 신은 이때부터 화가 나고 서글퍼 마음속으로 맹서하여 미워하기를 원수처럼 하였으며 성토하기를 흉악한 역적같이 하였습니다. 양심이 이미 회복되자 이치를 보는 것이 스스로 분명해져 지난날에 일찍이 좋아하고 사모했던 것을 돌이켜 생각하니 허황되고 괴이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지리·기이·달변·해박한 글도 패가 소품(稗家小品)의 지류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이밖의 것들은 하늘을 거스르고 귀신을 업신여겨서 그 죄가 죽어도 용납되지 않는 것들이었기 때문에 중국의 문인인 전겸익(錢謙益)·담원춘(譚元春)·고염무(顧炎武)·장정옥(張廷玉)과 같은 무리들은 일찍이 벌써 그 거짓됨을 환하게 알고 그 핵심을 깨뜨렸습니다. 그러나 신은 멍청하게도 미혹되었으니, 이는 유년기에 고루하고 식견이 적어서 그렇게 되었던 것으로 몸을 어루만지며 부끄러워하고 후회한들 어찌 돌이킬 수 있겠습니까.

애당초 그것에 물이 들었던 것은 아이들의 장난과 같은 일이었으며 지식이 조금 성장해서는 문득 적이나 원수로 여겨, 알기를 이미 분명하게 하고 분변하기를 더욱 엄중히 하여 심장을 쪼개고 창자를 뒤져도 실로 남은 찌꺼기가 없습니다. 그런데 위로는 군부(君父)에게 의심을 받고 아래로는 당세에 나무람을 당하여 입신한 것이 한번 무너짐에 모든 일이 기와장처럼 깨졌으니, 살아서 무엇을 하겠으며 죽어서는 장차 어디로 돌아가겠습니까. 신의 직임을 체임하시고 이어서 내쫓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선(善)의 싹이 봄바람에 만물이 싹트듯하고 종이에 가득 열거한 말은 듣는 사람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다.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6책 46권 51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26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역사-고사(故事) / 인사(人事) / 사법(司法) / 사상-서학(西學)

○承旨丁若鏞上疏曰:

臣於所謂西洋邪說, 嘗觀其書矣, 嘗欣然悅慕矣, 嘗擧而夸諸人矣, 其於本源心術之地, 蓋嘗如膏潰水染, 根據枝縈, 而不自覺矣。 夫旣一番如是, 此卽門之墨者也, 門之禪泒也, 大質虧矣, 本領誤矣, 其沈惑之淺深, 遷改之遲速, 有不足論。 雖然, 曾子曰: ‘吾得正而斃。’ 臣亦欲得正而斃矣。 臣之得見是書, 蓋在弱冠之初。 而此時原有一種風氣, 有能說天文、曆象之家, 農政、水利之器, 測量其推驗之法者, 流俗相傳, 指爲該洽, 臣方幼眇, 竊獨慕此。 然其性力躁率, 凡屬艱深巧密之文, 不能細心究索, 故其糟粕影響, 卒無所得, 而乃反線繞於死生之說, 傾嚮於克伐之誡, 惶惑於離奇辨博之文。 認作儒門別泒, 看作文垣奇賞, 與人談論, 無所忌諱, 見人詆排, 疑其寡陋, 原其本意, 蓋欲博異聞也。 然臣自來志業, 只在榮達。 自登上庠, 所專精壹意者, 卽功令之學, 尤何能游心方外? 奈其標榜一立, 涇渭無別, 斷斷至今, 掉脫不得? 其書中廢祭之說, 臣之舊所見書, 亦所未見, 葛伯復生, 豺獺亦驚, 苟有一分人理者, 豈不崩心顫骨, 斥絶亂萠? 而辛亥之變, 不幸近出, 臣自玆以來, 憤恚傷痛, 誓心盟志, 疾之如私仇, 討之如凶逆。 而良心旣復, 見理自明, 前日之所嘗欣慕者, 反而思之, 無非謊虛怪誕, 離奇辨博之文, 不過稗家小品之支流餘裔也。 外此則逆天慢神, 罪不容誅, 故中國文人, 如錢謙益譚元春顧炎武張廷玉之徒, 早已燭其虛僞, 劈其頭䐉。 而蒙然不知, 枉受迷惑, 莫非幼年孤陋寡聞之致, 撫躬慙忿, 何嗟及矣? 當初染跡, 有同兒戲, 而知識稍長, 便爲敵讎, 知之旣明, 卞之愈嚴, 剔心七竅, 實無餘翳, 搜腸九曲, 實無遺瀋。 而上而受疑於君父, 下而遭謫於當世, 立身一敗, 萬事瓦裂, 生亦何爲, 死將安歸? 乞遞臣職, 仍賜斥黜焉。"

批曰: "善端之萠, 春噓物茁, 滿紙自列, 言足感聽。 勿辭。"


  • 【태백산사고본】 46책 46권 51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26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역사-고사(故事) / 인사(人事) / 사법(司法) / 사상-서학(西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