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례합편》이 완성되었고, 다른 향례 관계 서적들도 유포시키도록 하다
《향례합편(鄕禮合編)》이 완성되었다. 이보다 앞서 을묘년094) 혜경궁(惠慶宮)의 환갑 경사 때에 윤음을 내려 서울과 지방으로 하여금 향음(鄕飮)하는 예(禮)를 바로 세우게 하고, 또 각신(閣臣)들에게 명하여 역대의 향음하는 의식을 책으로 만들어 장차 서울과 지방에 반포하려고 하였다. 마침 우의정 윤시동(尹蓍東)이 향약(鄕約)은 한 쪽도 폐지할 수 없다고 말하자, 상이 향약은 단지 한 고을에 시행할 만한데 만약 조정에서 법을 만들어 반행(頒行)하게 한다면 효과는 없고 폐단만 있다는 이유로 어렵게 여겼다. 시동이 시행하기를 극력 청하자 마침내 각신인 서유구(徐有榘)와 예조 당상 민종현(閔鍾顯) 등에게 편집하도록 명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향음의주(鄕飮儀注) 및 향약(鄕約)을 신의 부서에서 중앙과 지방에 반포하여 각각 준행하도록 할 일에 대하여 이미 성명(成命)을 받들었습니다. 신들이 삼가 향음하는 예를 상고하니 《의례(儀禮)》의 경문(經文)에 빠짐없이 기재되어 있어 그대로 행하면 의식은 빛날 것입니다. 그러나 역대의 사지(史志)를 고찰하면 덜고 뺀 것이 일정하지 않으니, 진실로 시대에 맞게 변통하는 뜻으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어서였습니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기재된 의주(儀注)는 고금의 전장(典章)에 비교해 보건대 참으로 잘 다스려진 세대에서 이룩된 법이니, 진실로 별도의 찬정(撰定)을 기다릴 것이 없습니다. 이번에 반행하는 책은 이미 역대의 의절(儀節)을 갖추어 기재하였으니, 진실로 학식이 넓고 성품이 우아하며 옛것을 좋아하는 선비가 있으면 스스로 여기에 나아가 절충하고 변통할 것입니다. 오직 중앙이나 지방의 유사(有司)인 신하가 받들어 시행하기를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향약의 법은 송(宋)나라의 유학자인 여대균(呂大勻)에서 시작되었는데, 주자(朱子)가 그 글을 가져다 보태기도 하고 줄이기도 하였으니, 참으로 만세에 통행하는 훌륭한 법입니다. 여씨의 전문은 오늘날에 전해지지 않지만 주자가 보태거나 줄인 본(本)은 문집 《주자대전》에 실려 있으니, 중묘(中廟) 14년과 선묘(宣廟) 6년에 반행한 향약은 이 본으로 만들었음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조종조의 고사를 준행하여 주자가 보태거나 줄인 여씨향약을 4도(都)와 8도(道)에 반포하되 그것이 간혹 풍속과 맞지 않아 미루어 시행하는 데 구애됨이 있으면, 단지 향음 행례(鄕飮行禮)하는 날에 삼대(三代)에 독법(讀法)하던 의식을 대략 모방하여 사정(司正)이 치사(致詞)한 뒤에 별도로 문사(文詞)가 있는 사람을 정하여 향약의 내용을 한 번 읽도록 해서 각기 엄숙하게 듣고서 물러나게 하소서. 그러면 그것도 한 가지를 들어 두 가지를 얻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여러 도신(道臣)과 수령으로 하여금 시무(時務)의 적절함을 참작하고 시행해야 할 방법을 강구하여 예(禮)와 교화로 인도하려는 조정의 본의를 저버리지 말게 하소서. 그리고 서울에는 법을 마련하여 시행할 수 없다는 것은 중묘조(中廟朝)의 성훈(聖訓)이 분명하게 《국조보감(國朝寶鑑)》에 게재되어 있으며,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 또한 서울에서는 향약이라는 제목이 걸맞지 않다는 말을 하였으나, 진실로 진신(搢紳)과 장보(章甫)로 하여금 서로 예로써 돕고 선으로 관찰하게 하여 이에 서민에게 파급시켜 본받게 한다면, 향약이라는 명칭은 없다 하더라도 향약의 실상은 있게 될 것입니다.
관례(冠禮)와 혼례(婚禮) 두 예에 이르러서는 처음을 시작하는 의식으로 성왕(聖王)이 소중하게 여겼던 바인데, 요즈음에 와서는 고을에서 예를 갖추는 자가 드무니, 그것이 비록 속습이 점차로 낮아진 데 연유하기는 하지만 역시 문견(聞見)이 고루한 데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삼가 상의 재가를 따라 《사마씨서의(司馬氏書儀)》·《주자가례(朱子家禮)》·《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편(編) 아래에다 덧붙여 실어 먼 고을과 궁벽한 마을에서도 모두 얻어다 강독하여 밝히게 하였으니, 이에 향례(鄕禮)의 규모가 모두 갖추어지고 절문(節文)이 모두 질서가 잡힐 것입니다. 그리하여 효제(孝悌)가 일어나고 예양(禮讓)이 일어나 크게 풍속이 바뀔 날을 손꼽아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니, 주자소(鑄字所)로 하여금 즉시 인쇄하도록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6책 46권 47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24면
- 【분류】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출판-서책(書冊) / 향촌(鄕村) / 사상-유학(儒學)
- [註 094]을묘년 : 1795 정조 19년.
○辛未/《鄕禮合編》成。 先是, 乙卯惠慶宮週甲慶辰, 下綸音, 令京外修明鄕飮之禮, 又命閣臣等, 裒集歷代鄕飮之儀, 將頒之中外。 會, 右議政尹蓍東言, 鄕約不可偏廢, 上, 以鄕約但可行之於一鄕, 若自朝家, 立法頒行, 則易致蔑效而有弊, 難之。 蓍東力請行之, 遂命閣臣徐有榘、禮堂閔鍾顯等彙輯。 禮曹啓言: "《鄕飮儀注》及《鄕約》, 自臣曹, 頒之中外, 俾各遵行事, 旣承成命矣。 臣等竊稽鄕飮之禮, 具載《儀禮》經文, 按而行之, 儀則燦然。 而夷考歷代史志, 損益不一者, 誠以時措通變之義, 不得不然也。 《國朝五禮儀》所載儀注, 參互古今之典章, 允爲昭代之成法, 則固無待乎別爲撰定。 而今此頒行之書, 旣已備載歷代儀節, 苟有博雅好古之士, 自當就此, 而折衷闊狹。 惟在於中外有司之臣, 對揚之如何。 至若鄕約之法, 昉於宋儒呂大勻, 而朱子取其文增損之, 誠萬歲通行之良法也。 呂氏全文, 不傳於今, 而惟朱子增損之本, 載在《大全》集中, 則中廟十四年, 宣廟六年所頒鄕約之爲此本, 可推而知。 今遵祖宗朝故事, 以朱子增損《呂氏鄕約》, 頒布於四都八道, 而厥或風俗異宜, 推行有礙, 則只於鄕飮行禮之日, 略倣三代讀法之儀, 司正致詞後, 別定有文詞者, 讀約文一遍, 俾各肅聽而退。 則亦可爲一擧兩得之道。 令諸道臣守宰, 使之參酌時務之宜, 彌綸可行之方, 無負朝家導禮迪敎之本意。 若夫京城之不可設法行之, 中廟朝聖訓, 昭揭《寶鑑》, 先正臣宋時烈, 亦有輦轂之下, 鄕約不着題之言, 誠使搢紳章甫, 相勖以禮, 相觀以善, 爰及庶民, 是則是傚, 雖無鄕約之名, 自有鄕約之實矣。 至於冠婚二禮, 造端托始, 爲聖王所重, 而邇來鄕曲之中, 鮮有備禮者, 雖緣俗習之漸降, 亦由聞見之固陋。 謹遵睿裁, 附載《司馬氏書儀》、《朱子家禮》、《國朝五禮儀》于編下, 俾遐邑僻里, 皆得以講而明之, 於是乎鄕禮之規模悉備, 節文咸秩。 于以孝悌興而禮讓作, 丕變之風, 指日可待, 請令鑄字所, 卽爲開印。" 允之。
- 【태백산사고본】 46책 46권 47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24면
- 【분류】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출판-서책(書冊) / 향촌(鄕村) / 사상-유학(儒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