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붕남이 사창제 설립, 경성에 본영만을 남겨 두는 문제 등을 상소하다
전 장령 오붕남(吳鵬南)이 상소하기를,
"사창(社倉)은 주 부자(朱夫子)042) 의 유제(遺制)인데, 선정신(先正臣) 송시열이 좋다고 하였고 고 정승 민정중(閔鼎重)이 국중(國中)에 반포하여 시행하자고 청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북관(北關)의 민속에 있어서는 자연 산물이 귀한 줄을 몰라서 풍년이 들어 곡물이 흔하면 흙처럼 보아 처음부터 아낄 줄을 모르므로 한번 흉년이 들면 곧장 남쪽에서 실어가야 하는 폐단이 생깁니다. 그래서 신이 일찍이 마을의 부로(父老)들과 사창을 세울 것을 논의하였더니, 모두들 좋다고 했습니다. 참으로 조정의 명령이 있다면 그 누가 기꺼이 하지 않겠습니까. 많이 저축하여 두었다가 흉년을 구제한다면 남쪽에서 실어오는 폐단을 없앨 수 있고 백성들의 이로움이 더욱 커질 것입니다.
북도의 행영(行營)은 곧 병사가 이주(移駐)하는 곳인데 6진(六鎭) 가운데 있으므로 사면으로부터 적의 공격을 받을 우려가 있습니다. 대체로 대장이란 중앙에서 통제를 하는 자인데 무엇 때문에 적이 쳐들어 오는 첫머리에 앉아서 먼저 적의 선봉을 맞아야 한단 말입니까. 처음에 군영을 설치한 것은 번호(蕃胡)가 도발해 오는 환란을 대비하기 위한 것이지만 현재의 입장에서 보면 남쪽 북쪽으로 괜히 번잡하게 왔다갔다하게만 되니, 실로 통제하는 데에 알맞은 계책이 아닙니다.
경성(鏡城)의 본영은 성지(城池)가 튼튼하고 인민(人民)이 많으며, 북쪽에는 가로막은 무령(茂嶺)이 있고 남쪽은 험한 귀문(鬼門)이 있습니다. 그리고 큰 바다가 동쪽을 감싸고 장백산(長白山)이 서쪽에 깎아지른 듯이 서 있으니, 참으로 사방이 막힌 요새입니다. 지금 남병영처럼 행영을 폐하고 본영만 남겨둘 경우 충분히 한 방면을 통제할 수 있는 훌륭한 계책이 될 것입니다만, 행영도 완전히 폐지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우후를 중군으로 삼아서 스스로 진압하도록 한다면 남북의 성세(聲勢)가 서로 호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소서.
종성부(鍾城府)는 강가에 치우쳐 있어서 큰 재가 첩첩이 가로막고 있는데 지금의 행영은 바로 옛날의 종성 고을입니다. 길이 사방으로 고르게 나 있고 성지가 완비되어 있으니, 본읍(本邑)을 행영으로 옮기고 종성에다 독진(獨鎭)을 설치한다면 읍이나 진으로서는 옛자리에 모두 그대로 있게 되는 편리함이 있고 변지에는 무장을 더욱 튼튼히 하는 좋은 점이 있습니다.
경성에서 6진으로 통하는 길은 둘이 있습니다. 하나는 무산 고갯길이고 하나는 갈파(葛坡) 고갯길입니다. 경원(慶源)에서 강을 따라 무산 고갯길을 거쳐 경성에 이르면 5일의 일정이 됩니다. 또 경원에서 종성의 경계를 넘어 갈파 고갯길을 거쳐서 경성에 이르면 3일 일정이 되는데, 모두 큰 길입니다. 그 수비하는 방법에는 서로간에 차이가 없어야 할 것입니다. 무산령(茂山嶺)은 남쪽에는 부령부(富寧府)가 있고 북쪽에는 회령부(會寧府)가 있으며 재 아래에는 또 풍산진(豊山鎭)이 있으니, 처음부터 설치한 방어가 아주 잘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갈파령(葛坡嶺)에 있어서는 남쪽으로 수성(輸城)까지가 70리이고 북쪽으로 경원 지경까지가 1백여 리로서 근 2백 리의 땅에 방어할 진이 하나도 없으니, 참으로 온당한 계책이 아닙니다.
고 정승 이종성(李宗城)과 고 참판 이이장(李彛章)이 본도의 안찰사가 되었을 때 두루 그 형편을 살펴보고 말하기를 ‘이곳은 참으로 적이 들어올 요충이다. 방어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미처 설치하지 못하고 그럭저럭 지금까지 미루어온 것입니다. 신이 생각하기에는 경성의 다섯 군데의 보(堡)를 장백산 밑에 설치한 것은 장백산 뒤에 있는 야인을 대비하기 위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지금은 야인이 없습니다. 그리고 무산에 읍을 설치한 뒤에 강을 따라 방어하면 다섯 보(堡)가 내지(內地)가 되어서 모두 쓸데없는 진이 되고 맙니다. 어리석은 신의 생각에는 이 중에 한두 개의 보를 갈령 밑 옛 성에 옮겨서 진을 설치한다면 반 정도의 일로 갑절의 효과를 얻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무산 남쪽에 있는 이른바 장파(長坡)란 곳은 백두산 밑에 있는데, 북쪽으로 무산부까지가 이틀 거리이고 서쪽으로 운룡보(雲龍堡)까지가 사흘 거리입니다. 그러므로 백두산 일대가 가장 요충 지대인데 강 연안 1백 리에 단 하나의 진이나 보의 방수도 없으므로 식자들이 염려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근년 이래로 백성들이 차츰 모여들어 토지를 더 개간하여 호구가 2백여 호나 되고 토지도 한두 곳의 보를 설치할 만하게 되었습니다. 강 연안 중요한 곳에 이처럼 백성들이 모여 사는데도 고을까지의 거리가 저처럼 머니, 변방에 대한 정사가 어찌 소홀하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경성의 한두 개의 보를 이곳에 옮겨 설치한다면 병기 등의 물자가 미비할까 걱정할 것이 없고 처음에 설시할 것은 성이나 하나 쌓는 데에 불과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사창의 제도는 주 부자에게서 비롯되었는데, 그대의 소에 인용한 송 선정(宋先正)과 민 고상(閔故相)이 반포하여 시행할 것을 청한 것은 그 또한 의도가 있는 것이다. 묘당으로 하여금 도신에게 편리의 여부를 문의하도록 하고 기타의 여러 조목에 대하여도 도신으로 하여금 지적하여 진달하게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6책 46권 22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11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군사(軍事) / 교통-육운(陸運) / 재정-창고(倉庫)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과학-지학(地學)
- [註 042]주 부자(朱夫子) : 주희(朱熹).
○前掌令吳鵬南上疏曰: "
社倉, 卽朱夫子遺制, 而先正臣宋時烈, 稱其美, 故相臣閔鼎重, 至請頒行國中。 至於北關民俗, 不知天物之爲貴, 歲登而穀賤, 則視之如土, 初不節用, 一有凶歉, 輒致南運之弊。 臣嘗與鄕中父老, 議建社倉, 則皆曰諾。 苟有朝令, 孰不樂爲? 若使廣儲而賑凶, 則南運之弊可除, 而生民之利益博矣。 北之行營, 卽兵使移駐之所, 而在六鎭之中, 有四面受敵之慮。 夫大將者, 所以居中節制, 則何必坐在賊路之初, 先受其鋒乎? 當初設營, 蓋備蕃胡竊發之患, 而以今觀之, 或南或北, 徒煩往來之屑屑, 實非專制之計也。 鏡城之本營, 城池固人民衆, 北有茂嶺之阻, 南有鬼門之險。 大海環其東, 長白截其西, 誠四塞之地也。 今若如南兵營之廢行營而在本營, 則亦足爲專制一方之長策, 而行營亦非謂全然廢之也。 虞候爲中軍, 而自鎭之, 則南北聲勢, 可以相應。 乞令廟堂議之。 鍾城府, 偏在江干, 大嶺重阻, 而今之行營, 卽古之鍾城邑也。 道里均適, 城池備完, 移本邑於行營, 設獨鎭於鍾城, 則在邑鎭, 俱有仍舊貫之便, 在邊地又有增武衛之美矣。 自鏡城通六鎭之路有二焉。 一則茂山嶺路也, 一則葛坡嶺路也。 自慶源沿江, 由茂嶺路而至鏡城, 則爲五日程。 自慶源犯鍾城境, 由葛嶺路而至鏡城, 則爲三日程, 而俱是大路也。 其備守之方, 宜無彼北之異。 而茂山嶺則南有富寧府, 北有會寧府, 嶺下又有豐山鎭, 自初設防, 可謂盡矣。 而至於葛坡嶺, 則南至輸城爲七十里, 北至慶源境爲百餘里, 近二百里之地, 無一鎭之防守, 誠非計也。 故相臣李宗城、故參判李彝章, 按節本道時, 皆巡審其形便曰: ‘此實賊路要衝。 不可不防云。’ 而未及設施, 因循至今。 臣念鏡城五堡之置於長白山下者, 以備野人之在於長白山後者, 而今無野人。 且茂山設邑之後, 沿江防守, 則五堡爲內地, 而俱屬冗鎭。 臣之愚意, 以此一二堡, 移設於葛嶺底古城以鎭之, 則事半功倍矣。 茂山之南, 所謂長坡地, 在於白頭山下, 北距茂山府爲二日程, 西距雲龍堡爲三日程。 白山一帶, 最爲要害處, 而沿江百里, 無一鎭堡之守, 識者之憂久矣。 近年以來, 人民漸聚, 土地增墾, 以戶則殆過二百餘家, 以地則可設一二鎭堡。 沿江重地, 有此民聚, 而距邑如彼之遠, 其在邊政, 豈不踈虞? 若移鏡城一二堡於此處, 則軍器諸物, 不患不備, 而初頭設施, 不過一築城而已。"
批曰: "社倉之制, 始於朱夫子, 爾疏所引宋先正、閔故相頒行之請, 亦有意。 令廟堂問其便否於道臣, 其他諸條, 亦令道臣指陳。"
- 【태백산사고본】 46책 46권 22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11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군사(軍事) / 교통-육운(陸運) / 재정-창고(倉庫)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과학-지학(地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