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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 46권, 정조 21년 1월 29일 경오 2번째기사 1797년 청 가경(嘉慶) 2년

성을 순행하고 행궁에 돌아오다

상이 성을 순행하였다. 화양루(華陽樓) 북쪽에서 시작하여 화서루(華西樓)를 지나 공심돈(空心墩)에 이르러 각신(閣臣)과 승지에게 이르기를,

"공심돈은 우리 동국(東國)의 성제(城制)에서는 처음 있는 것이다. 여러 신하들은 마음껏 구경하라."

하였다. 장안문(長安門)을 지나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에 이르러 조그만 과녁을 설치하고 임금이 화살 삼순(三巡)을 쏘아 삼시(三矢)를 맞힌 뒤 각신(閣臣)과 장신(將臣)에게 짝지어 활을 쏘라고 명하였다.

상이 정자 아래에서 백성들이 꽉 둘러서서 구경하는 것을 보고 수원부 유수 조심태(趙心泰)에게 명하여 그중에 활을 잘 쏘는 자를 뽑아서 활쏘기를 시험하게 한 다음 1등을 한 1인에게 바로 전시(殿試)를 볼 수 있는 자격을 주고 풍악을 내려서 보내었다. 여러 신하들에게 술을 내리고 임금이 칠언 소시(七言小詩)를 지은 뒤 여러 신하들에게 화답하여 올리라고 명하였다.

광주 유수(廣州留守) 서유린(徐有隣)에게 이르기를,

"고 정승 유성룡(柳成龍)이 말하기를, ‘훈련 도감에서 경기 지방에 둔전(屯田)을 설치하고 훈국의 군사 1만 명 중 5천 명은 서울에서 조련하고 5천 명은 둔전에 나가 경작하게 하여 군대와 농사가 서로 의지하는 의의를 살려야 한다.’고 하였는데, 그 취지가 매우 좋았으나 중지되어 실행되지 못하였으니 진실로 애석한 일이다. 그래서 내가 장용영(壯勇營)에 대하여 이 제도를 대략 모방해 경기의 고을에 향군(鄕軍)을 설치하여 일영 오사(一營五司)의 제도를 마련하였는데, 이는 대개 서로 빙 둘러싸고 수레바퀴와 덧방이 서로 도와주는 것과 같이 하려는 취지에서 나왔던 것이다. 원소(園所)에 행차할 때 본부(本府)의 5개 초군(哨軍)만으로 돌아가며 어가를 따르게 할 경우 항오(行伍)가 단약(單弱)하고 군용(軍容)이 미비하다. 그래서 수어청의 출진(出鎭)하는 군제를 바로잡아 고칠 때 여정(餘丁) 8백여 인이 남기에 연(輦)이 지나가는 광주(廣州)·시흥·과천화성의 속읍(屬邑)인 용인(龍仁)·안산(安山) 등지의 길에 6개 초(哨)를 설치하였다가 어가가 지나갈 때 징발하여 수행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수어청의 소관으로 선혜청에 떼어 놔둔 쌀 1천 석과 돈 3천 냥을 본영(本營)에 갈라 주어 상번(上番)하는 군인의 급료에 쓰게 하고, 이어서 향군이 있는 각 고을에 둔전을 설치하여 그 세입(稅入)으로 군인들이 왕래할 때의 양식과 의복의 비용으로 삼으려 하였다. 먼저 산 토지에서의 소출이 군수(軍需)로 들어가는 비용에 맞먹는가?"

하니, 유린이 대답하기를,

"광주 둔전의 수입은 부족할 염려가 있으므로 어느 정도 더 사들여야만 수입과 쓰임이 비로소 같게 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본영(本營)에 향군(鄕軍)을 설치한 것은 그 의의가 있다. 최초에 양근(楊根)·가평(加平)·지평(砥平)에 먼저 2개의 초(哨)를 내었는데, 이는 둔전이 군인들의 문 앞에 있었기 때문에 충분히 군대와 농사가 서로 의지할 수 있다. 파주(坡州)에 또 1개의 초를 내었는데 양근 등 세 고을의 예를 적용하려 하였으나 토지가 너무 적고 군인들도 각처에 흩어져 있어서 가까이 있는 자는 스스로 농사를 지을 수 있지만 멀리 있는 자는 스스로 지을 수 없다. 이것은 벌써 세 고을의 예와는 좀 달라진 것이다. 그 뒤 또 양주(楊州)에 1개의 초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모든 일은 대뜸 세력이 있는 백성들에게 동요되고 만다. 양주에는 서울의 사대부 토지가 많아서 사들이기로 결정하여 값을 치르기도 전에 반드시 먼저 소란이 일어날 것이므로 부득이 우선 늦추면서 차츰 시작할 계획이다. 그리하여 경기 감영의 무조(貿租)할 것 중에서 약간의 돈을 떼어내어 경기 고을의 환모(還耗)를 바꾸어서 1개 초군(哨軍)을 먹일 방도로 삼았다. 그 뒤 고양(高陽)에 또 1개의 초를 두고 총융청의 법외(法外)의 보군(保軍)을 참작해 감한 뒤 거두어들인 신전(身錢)의 여분으로 먹일 방도를 삼았으며, 그 뒤 또 수원에 5개의 초를 설치하고 3만 냥의 공화(公貨)를 나누어주어 해도(該道)의 좁쌀 1만 석을 사들여서 모곡을 취하여 먹이도록 하였다.

대체로 양주·고양·수원의 군대를 먹이는 데에 쓰이는 군수(軍需)의 조달 방법은 그 명분이 나의 본래의 뜻이 아닐 뿐 아니라, 또한 최초에 양근 등의 고을에 설치하였던 규모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므로, 앞으로 바로잡아 고치지 않을 수 없다. 공사간(公私間)의 용도를 모곡으로 시작하는 것은 크게 좋지 않은 방법이다. 쥐나 새가 축낸 모곡을 관장(官長)이 주관하는 것도 이미 매우 구차한 일인데 하물며 나라이겠는가. 이것을 한번 바로잡아 고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동장대(東將臺)에 나아가 대에 올랐다. 상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우리 나라의 성제(城制)가 고루(固陋)하여 서울과 지방을 막론하고 본래부터 치첩(雉堞)의 제도가 없었다. 그런데 정승 김종서(金宗瑞)가 쌓은 종성(鍾城)의 성제가 유일하게 중국의 제도를 대충 모방하였는데, 그 형상이 규형(圭形) 같고 안이 상당히 넓고 위는 처마를 얹은 듯하여 내려다보기에 편리하다. 그러나 이 역시 치첩의 제도만은 못하다. 대개 옛날의 성 제도는 치첩으로 첫째를 삼았을 것인데, 우리 나라의 성은 전체가 둥글어서 모서리가 없다. 그래서 성 위에 담벼락처럼 죽 둘러서서 지켜야만 비로소 적을 방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새로 쌓은 성은 처음으로 치첩의 제도를 도입하여 거리를 계산하고 따로 모서리를 만들어 성 전체를 싸안았으므로, 매 치첩에 두서너 사람만 세우더라도 좌우를 살피기에 편리하여 적의 동태를 엿보기 쉽고, 밑에서 쳐다보면 도리어 치첩을 지키는 사람의 수를 분간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이제야 우리 나라도 성의 제도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다만 초루(譙樓)나 돈대(墩臺) 등속은 가끔 엉뚱한 모양만 낸 것 같아서 실용에 적합하지 않다. 이것은 유수(留守)와 도청(都廳) 이유경(李儒敬)이 다투어 논란하던 것으로 결국 도청의 주장에 따라 시행하게 되었지만 나의 본뜻은 아니다."

하였다.

각건대(角巾臺) 앞길을 거쳐서 창룡문(蒼龍門)의 곡성(曲城) 밖으로 나가 남수문(南水門)의 초돈(譙墩) 윗길을 지나 팔달문(八達門)에 이르러서 문루(門樓)에 올라 쉬고는 서장대(西將臺)에 이르러 대 뒷쪽의 소랑(小廊)에 들러서 신하들에게 식사를 베풀었다.

밤에는 장대(將臺)에 올라 연거(演炬)를 관람하였다. 선전관이 꿇어 엎드려서 아뢰고 나서 신포(信炮) 세 발을 터뜨리고 횃불 세 개를 붙여서 올리자 대 위에서 네 개의 횃불을 올리면서 모든 성가퀴에서 일제히 횃불을 올렸다. 호포(號炮)를 한 방 터뜨리고 천아성(天鵝聲)을 불고는 횃불을 점검하며 납함(吶喊)하기를 세 차례 하였다. 그리고는 지금(止金)으로 일호(一號)를 장(掌)하고 이호를 장한 뒤 연거가 끝났다.

행궁에 돌아와서 하교하기를,

"화성 서장대에서 오늘 밤 훈련은 생략하고 연거(演炬)별로 호령만 실시하였지만 응접(應接)함이 격식에 맞고 구율(彀率)025) 에 차착(差錯)이 없었다. 더구나 이들은 모두 이 성의 정군(丁軍)으로 단속이 잘 된 입방군(入防軍)과는 더욱 다르다. 그런데도 이처럼 잘 익숙히 훈련되었으니, 장수에 적임자를 얻은 효과를 보게 되어 매우 가상하나 이것은 오히려 여사(餘事)이다. 그리고 조련이 있기 전에 새 성을 두루 둘러보았는데 공로가 크고 많다. 어찌 말을 달려 전쟁한 공로에 뒤지겠는가. 화성 유수 조심태(趙心泰)에게 특별히 전지와 백성을 떼어준다. 성첩이 완성되었으므로 지금 제일 급한 것은 ‘집집마다 부유하게 하고 사람마다 화락하게 하는 것[戶戶富實 人人和樂]’의 여덟 글자이다. 잘살도록 하는 방법을 지금 묘당의 여러 신하들과 강구하여 마련하는 중이다. 그리고 부담을 덜어주는 방법 또한 사람을 화락하게 하는 한 방법이니, 성 안팎에 거주하는 백성들에게 당년의 군향곡(軍餉穀)과 환곡(還穀)에 대한 모곡(耗穀)을 특별히 면제해 주어 그들의 기대하는 마음에 부응토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6책 46권 11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6면
  • 【분류】
    왕실-행행(行幸) / 왕실-국왕(國王) / 왕실-사급(賜給) / 재정-국용(國用) / 재정-전세(田稅) / 군사-병법(兵法) / 군사-부방(赴防) / 군사-병참(兵站) / 군사-관방(關防) / 군사-군정(軍政) / 군사-지방군(地方軍) / 인사-선발(選拔) / 농업-전제(田制) / 건설(建設)

  • [註 025]
    구율(彀率) : 알맞은 절차와 법도.

○上巡城。 自華陽樓北, 巡歷華西樓, 至空心墩, 謂閣臣承旨曰: "空心墩, 卽我東城制之初有者。 諸臣可縱觀之。" 歷長安門訪花隨柳亭, 設小的, 御射三巡, 獲三矢, 命閣臣將臣耦射。 上, 見亭下民庶環擁瞻旄, 命水原府留守趙心泰, 選其能射者試射, 取居魁一人, 許赴殿試, 賜樂出送。 宣醞于諸臣, 御製七言小詩, 命諸臣賡進。 謂廣州留守徐有隣曰: "故相柳成龍謂: ‘訓鍊都監, 宜開屯於京畿地方, 而訓局軍萬名中五千名, 在京操鍊, 五千名赴屯耕作, 以爲兵農相寓之義。’ 其意甚好, 而寢不行, 誠可惜也。 予於壯勇營, 略倣此規, 設置鄕軍於畿邑, 爲一營五司之制, 蓋出於環連拱抱輔車相須之意也。 園幸時, 只以本府五哨軍, 輪回隨駕, 則行伍單弱, 軍容未備。 守禦廳出鎭軍制釐正時, 有餘丁八百餘名, 故設六哨於輦路所經廣州始興果川華城屬邑龍仁安山等地, 駕過時使之徵發陪扈。 仍以守廳所管惠廳除留米一千石, 錢二千兩, 劃屬本營, 以爲上番軍支放之需, 仍設置屯田於鄕軍所在之各邑, 以其稅入, 爲其軍來往時糧饌及服色之費矣。 先買土地, 所出果與軍需容入, 相當乎?" 有隣曰: "廣州屯田所(需)〔收〕 , 有不足之慮, 如干加買, 然後所收與容入, 始可相當矣。" 上曰: "本營鄕軍之設施, 意義有在。 最初楊根加平砥平, 先出二哨, 而此則屯田在於渠輩門前, 故足爲兵農相寓。 坡州又出一哨, 欲用楊根等三邑之例, 則土地甚少, 且軍人散在各處, 近者雖自治田, 遠者不能自作。 此則已稍異於三邑之例矣。 其後又置楊州一哨。 而我國凡事, 輒爲大民所撓。 楊州則多有京華士夫之土地, 決買給價之前, 必先紛撓, 不得已姑徐之, 以爲漸次經始之計。 而就畿營貿租條中, 劃出若干錢, 貿取畿邑還耗, 以爲一哨軍接濟之道。 其後又置高陽一哨, 以摠戎廳法外保軍量減後, 所收之身錢餘者, 爲接濟之道, 其後又置水原五哨, 劃給三萬兩公貨, 貿取該道小米萬石取耗, 而使之接濟。 大抵楊州高陽水原軍接濟之需, 其名色非但非予之本意, 亦不及於最初楊根等邑設施之規, 容俟來頭, 不可不釐正。 而凡公私需用之必着手於耗穀者, 大非好道理。 雀鼠之耗, 官長之主管, 已極苟且, 況朝家乎? 此不可不一番釐正矣。" 詣東將臺, 御臺。 上, 謂諸臣曰: "我國城制固陋, 勿論京外, 元無雉堞之制。 獨故相金宗瑞所築鍾城城制, 略倣華制, 其形如圭, 內頗空闊, 上如加簷, 便於頫視。 而猶不如雉之爲制。 蓋古之城制, 當以雉堞爲第一, 而我國之城, 則全體周圓, 無模稜。 故垜垜堞堞, 環立守之, 然後始可禦賊。 而今此新城, 創爲雉制, 計以步數, 別成廉角, 環包體城, 每雉雖立數三人, 便於左右望, 而易以覘賊, 自下視之, 亦不分守堞人之多少。 今而後, 我國始可曰有城制。 但譙樓墩臺之屬, 往往有近於奇巧, 不適實用。 此則留守與都廳李儒敬爭難, 畢境都廳之說得行, 非予之本意也。" 由角巾臺前路, 出蒼龍門曲城外, 歷南水門譙墩上路, 至八達門, 御門樓暫憩, 至西將臺, 御臺後小廊, 宣飯于諸臣。 夜御將臺, 觀演炬。 宣傳官跪啓稟, 放信炮三聲, 擧起火三枝, 臺上燃四炬, 各垜一時燃炬。 擧號炮一聲, 吹天鵝聲, 點炬吶喊, 共三次。 止金掌一號, 掌二號演炬畢。 還行宮, 敎曰: "華城 西將臺, 今日夜操, 爲其省略, 只行演炬別號令, 而應接若式, 彀率不差。 況此類皆是城丁軍, 尤異於入防軍。 團束其能如是, 錬熟可見, 將得其人之效, 雖甚可嘉, 猶屬餘事。 且於操前, 遍觀新城, 勞多功鉅。 豈讓汗馬? 華城留守趙心泰, 特賜田民。 城堞旣完, 目今第一義, 卽戶戶富實, 人人和樂八箇字。 富之之術, 方與廟堂諸臣講磨。 而蠲惠之方, 亦屬人和中一事, 城內外居民, 當年餉與還, 特竝除耗, 以副渠輩望幸之情。"


  • 【태백산사고본】 46책 46권 11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6면
  • 【분류】
    왕실-행행(行幸) / 왕실-국왕(國王) / 왕실-사급(賜給) / 재정-국용(國用) / 재정-전세(田稅) / 군사-병법(兵法) / 군사-부방(赴防) / 군사-병참(兵站) / 군사-관방(關防) / 군사-군정(軍政) / 군사-지방군(地方軍) / 인사-선발(選拔) / 농업-전제(田制) / 건설(建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