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후를 문묘에 종사하는 의식을 행하면서 선포한 교서
문선 왕묘(文宣王廟)에 술잔을 올린 후에 문정공(文正公) 김인후(金麟厚)를 문묘에 종사하는 의식을 행하고, 교서를 선포하였다. 그 교서에,
"참된 유자(儒者)가 천년 후에 나왔으니 진정코 높이 보답하는 은전이 있어야 할 것인데, 공론이 백 년을 기다려 정해졌기에 이에 배향하는 의식을 거행하는 바이니, 표창하여 드러내는 것은 도를 지녔기 때문이다.
돌아보건대 덕이 부족한 내가 임금과 스승의 직책을 맡게 되면서부터 유학을 숭상하는 것을 지표로 삼아 왔다. 정학을 붙들어 유지시키고 사학을 억제하는 계책은 역대의 훌륭한 왕들을 본보기로 삼았으며, 과거를 계승하여 뒷사람을 인도하는 학문은 자나 깨나 전대의 현인들을 생각해 왔다. 유학을 크게 떨쳐서 온 나라 사람들을 모두 법에 이르도록 해야겠다는 일념뿐이었는데, 근래에 선비들의 취향이 옛날과 같지 않아서 우리 유학의 도통이 밝혀지지 못하고 있다. 세도(世道)의 낮고 높음이 이와 관계되는 것이니 만회할 방법을 서둘러야 할 텐데 옛날 현인들의 전형이 멀기는 해도 법으로 삼을 수 있을 듯하다.
경은 해동의 염계(濂溪)이자 호남(湖南)의 공자이다. 성명(性命)과 음양(陰陽)에 관한 깊은 식견은 아득히 태극도(太極圖)와 같은 수준에 이르렀고, 격물 치지(格物致知)와 성의 정심(誠意正心)의 요지는 먼저 《소학》에 힘을 쏟는 것이었다. 시를 지어 뜻을 말하는 데에 있어서는 천지 사이에서 두 사람만을 추대하였고, 이치를 연구하고 근원을 탐색하여 일찍이 《역상편(易象篇)》을 저술하였는데 여러 학설들이 탁월하였다. 홀로 대의(大意)를 보아 추구해 나감에 스스로 터득하게 되었으니, 도(道)와 기(氣)가 하나로 섞여 있다고 주장한 여러 학자들의 잘못된 논리를 단연코 내쳤고, 이(理)와 기(氣)의 사단 칠정(四端七情)에 관한 변론은 동지들의 의심을 후련하게 풀어 주었다. 내면에 쌓인 강건하고 곧고 단정한 성품은 엄동 설한의 송백(松栢)이었고, 밖으로 드러난 빛나고 온화하고 순수한 자태는 맑은 물위의 연꽃이었다. 거의 성인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삼대(三代)의 인물이라 할 수 있겠는데, 다행히 크게 해보고자 하던 효릉(孝陵) 시대를 만나 순수한 유신(儒臣)이 내면에 지닌 아름다운 덕을 펼치는 아름다움을 보게 되었다. 동궁이 깊이 신임하여 이미 그림에다 뜻을 담아서 주었고, 숙직하는 관서로 찾아와서 강론하는 이외에 특별히 마음을 털어놓곤 했었다. 보필하는 신하로서 은연중에 마음이 부합한 것은 은(殷)나라 고종(高宗)이 부열(傅說)을 얻은 것과도 같았고, 임금과 백성들에 관한 책임을 스스로 맡고 나선 것은 이윤(伊尹)이 성탕(成湯)을 만난 것과도 같았다.
아, 하늘이 아직 평안하게 다스려지기를 바라지 않아 대 현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내원(內院)의 의원과 약을 보내주자던 요청도 가슴 조이는 간절한 소망을 이루어주지는 못하여, 끝내 깊은 산속에 그를 묻는 슬픔으로 피눈물을 뿌렸었다.
생각건대 변함없는 충성과 곧은 절개 또한 학문에서 나온 것이었으며, 지극히 바르고 정밀한 출처(出處)는 의리에서 나온 것임을 더욱 징험할 수 있다. 스스로는 중대한 윤리를 몸소 맡고 나섰고 세상에서는 널리 배워 자신을 단속하는[博文約禮] 공부를 칭찬했었다. 비 개인 날의 맑은 달과 잔잔한 바람처럼 본래부터 도리를 터득한 사람의 기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순수하고 온화한 성품에 여사로 문장까지 겸비하고 있었다. 성대하게 많은 사람들의 명망을 두루 갖추었으니 여러 선비들의 본보기가 됨은 당연한 일이다.
생각건대, 그 깊은 조예는 헤아릴 수조차 없는 것이었음에도 아직까지 표창하는 법을 제대로 거행하지 못하고 있었으니, 이것은 나라의 법전으로 보았을 때 결함이 되는 것이기에 번번이 나는 마음속으로 간절히 개탄하곤 했었다. 하늘이 분명 도와줄 생각을 가지고 있어 백 세를 뛰어넘은 느낌이 유달리 간절하니 지금 이때는 우연이 아닌 듯한데 어떻게 일통(一統)을 크게 여기는 규례를 늦출 수 있겠는가. 윤리를 지탱하여 풍속을 바로잡은 문장은 진실로 격렬하면서도 절실하게 부합됨이 있었고, 도리를 밝혀 뒷사람을 깨우치는 가르침은 밝게 융합되어 거리감이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나만큼 경을 아는 사람이 없었으니, 이런 경우를 두고 ‘마음에 둔 사람을 간택한다.’고 할 수 있겠다. 내 뜻을 먼저 결정하였으니 어찌 중언부언할 것이 있겠는가. 여러 사람들의 논의 또한 모두 일치되어 소를 올린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에 경을 문묘의 곁채에 종사하는 바이니, 이단을 물리치고 편파를 배척하는 것은 바로 백성들의 뜻을 안정시키는 때에 속하며, 문묘에 종사하여 봄가을로 제사를 올리는 것은 실로 선비들의 기풍을 격려하는 기회이다. 덕을 지닌 선대의 훌륭한 신하들과 함께 차례에 따라 배향했으니 주선하는 데에 거의 어김이 없을 것이며, 성사(聖師)의 신위(神位)와 함께 배향하였으니 우러러 존경하는 대상이 있게 될 것이다. 맑은 용모와 곧은 기상의 아름다운 영혼을 문묘에 봉안하며, 깨끗한 제수와 정결한 제사로 멀리서 술잔에 정성을 담아 올리는 바이다.
아, 당시에 뜻을 다 펴지 못했다고 말하지 말 것이니, 후세에 영원토록 명성을 남겨놓게 되었다. 선을 밝히고 정성을 다하였던 그의 행동을 후세에 본받도록 해야 할 것인바, 공을 살펴보고 덕을 헤아려 볼 때 전대의 성인에게 물어본들 무엇을 의심하겠는가. 그러므로 이에 교시하는 바이니, 이런 뜻을 잘 알리라고 믿는다."
하였다.
다음날 인정전(仁政殿)에서 교서를 반포하였는데, 그 내용에 이르기를,
"하늘이 참된 유신(儒臣)을 내려 문명의 운을 크게 열어주었으니 그 은덕을 크게 보답해야 하겠기에 배향하는 의식을 거행하는 바이다. 이는 사람들의 뜻에 부응하는 것이지만 그보다 먼저 나의 뜻이 정해졌었다. 생각건대 문묘에 훌륭한 유신을 배향하는 의식은 실로 유학을 위하여 도통을 밝히는 요지이니, 성스러운 덕을 지닌 자가 아니고서야 저렇게 높은 공자의 담장 안에 어떻게 들어갈 수 있겠는가. 후학의 모범이 여기에 있으므로 바른 길을 잃지 않을 것이다. 나는 조종(祖宗)의 큰 터전을 이어받은 이후로 임금과 스승으로서의 큰 책임을 저버릴까봐 늘 염려해 왔다. 그러나 말세의 세태는 너무도 고루하여 추구하는 바가 갈라지는 것을 어찌하지 못하였고, 선대 철인들의 경지는 엿보기 어려워서 논의가 잘못되기 쉬운 형편이었다. 큰 도(道)로 함께 귀의하는 교화를 기약하면서 한 치의 오차도 없게 하는 방도에 더욱 마음을 기울여 왔었다.
옛날의 큰 유학자인 하서(河西)는 해동의 우뚝한 정학(正學)이었다. 천성적으로 타고난 시로 단풍나무를 노래하여 일편 단심을 담았고, 성인에 가까운 자질에다 근원을 파고들어 오묘한 이치를 탐구하였다. 평생 동안 마음에 맞아 추대한 자는 천지간에 오직 두 사람뿐이었으며, 본원적인 공부는 전적으로 《대학》과 《소학》 두 책에 있었다. 이(理)와 기(氣)가 서로 발현한다는 변론은 대현(大賢)의 학설을 절충한 것이었고, 도(道)와 기(氣)가 하나라고 주장하는 여러 사람들의 잘못된 논의를 분석해 내었다. 윤리를 자신의 책임으로 여겨 지극히 공명정대한 입장을 지켜나갔으며, 법규만을 따라 하학 상달(下學上達)을 실천하였으므로 ‘백세의 스승’이라는 평이 이미 한 시대의 공론으로 되어 있었다. 그 도는 뒷사람에게 길을 열어준 염(濂)·락(洛)의 공적을 계승하였으며, 시대는 태평의 치적을 크게 이루었던 효릉(孝陵) 때였다. 임금과 신하로서 뜻이 이미 합치되어 동궁에 있을 때부터 신임을 받았고, 은연중에 기약이 이루어져 뜻을 담은 묵화를 직접 하사하였다. 다행히도 왕의 교화를 보필하는 적임자가 있어 크게 빛나는 아름다운 정사를 당시에 보게 되리라고 기대했었는데, 하늘이 도와주지 않아 마침내 지방에서 영영 세상을 떠나고 말 줄이야 어찌 알았겠는가. 7월 깊은 산중에서 창오(蒼梧)의 원통한 눈물을 부렸고, 한 조각 붉은 깃발에 옥과 현령(玉果縣令)의 옛 직함을 그대로 썼었다.
아, 당시에 미처 사업을 펴지는 못했으나 공로와 교화는 아직도 후학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성대하게 겸비한 도덕과 절개는 분명 삼대(三代) 때의 전형이었고, 임금과 신하, 아비와 아들의 윤리를 밝힌 것은 진실로 천년 동안 이어갈 표준이 되었다. 하늘을 떠받치는 큰 강령을 길이 수립했기에 바로 어제의 일처럼 큰 감동을 주고 있는데, 상서로운 기린이나 봉황새와 같은 위의는 같은 시대에 살지 못한 것에 대한 깊은 한을 갖게 하며, 순수하고 온화한 자질은 실로 알아주는 자가 적은 것에 대한 탄식을 자아내게 한다.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감에 있어서는 시종일관 오직 의리만을 보았으며, 세상에 나가거나 들어앉는 때에는 온화한 태도로 일관하여 흔적을 남겨놓지 않았다. 그리하여 맹자(孟子)의 학통이 전해지고 자사(子思)의 공이 크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지팡이를 짚고 돌아다녔던 오산(鰲山)048) 을 바라보면 영혼을 봉안한 사당이 없지는 않지만, 성균관에서 제사를 지내는 반열을 돌아보자니 종사하는 예를 갖추어야만 하겠다. 일이 우연치 않아 다행히 여러 사람들의 논의가 일치되었으니, 드러내어 표창하는 것은 하늘이 도와주려는 의사가 있는 듯하다.
이에 이달 8일에 증 영의정 문정공 김인후를 문묘에 종사하는 바이니, 나라 사람들이 본보기로 삼고 선비들이 모두 귀의할 곳이 생겼다. 공자·정자·주자의 도통을 접하여 그 연원이 멀기에 정암(靜庵)·퇴계(退溪)·우계(牛溪)·율곡(栗谷)의 반열에 올려서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도록 하는 바이다. 아, 문(文)이 여기에서 충분히 징험되고, 도가 이로 말미암아 추락하지 않게 되었다. 선비들을 양성하는 데에 있어서는 진작시키는 아름다움을 보게 될 것이며, 벼슬아치를 고무시키는 데에 있어서는 감동하지 않을 자가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교시하는 바이니, 이런 뜻을 잘 알리라고 믿는다."
하였다. 【모두 예문관 제학 구상(具庠)이 지은 것이다.】
- 【태백산사고본】 45책 45권 37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677면
- 【분류】사상(思想)
- [註 048]오산(鰲山) : 김인후의 고향 장성(長城)을 말함.
○己酉/行酌獻于文宣王廟, 從祀文正公 金麟厚于聖廡。 宣敎書曰:
眞儒後千載生, 政合崇報之典; 公議待百年定, 爰擧躋享之儀。 表而出之, 道所存也。 顧寡德任君師之責, 伊崇儒爲表準之方。 扶正抑邪之謨, 憲章列聖; 繼往開來之學, 寤寐前賢。 惟一念大闡斯文, 庶八方咸歸有極。 第近日士趨之不古, 逌吾儒道統之未明。 世道之汚隆斯關, 政急挽回之術; 前哲之典型已遠, 若爲矜式之圖。 惟卿, 海東濂溪, 湖南洙泗。 性命陰陽之奧, 沕乎《太極圖》同歸; 格致誠正之要, 先於《小學》書着力。 賦詩言志, 獨推天地間二人; 玩理窮源, 嘗著《易象篇》諸說。 卓然獨見大意, 求之自有餘師。 道器混一之論, 斷然黜諸家之謬; 理氣四七之辨, 沛乎釋同志之疑。 剛毅直方之蘊于中, 則大冬松柏; 光明溫粹之發於外, 則淸水芙蓉。 綽乎九分地頭, 展也三代人物。 幸値孝陵大有爲之際, 佇見醇儒展所蘊之休。 受知邸宮, 固已盡圖中寓意; 賜臨直署, 別是講論外輸心。 鹽梅之契暗符, 若殷宗之得傅說; 君民之責自任, 類伊尹之遇成湯。 嗟! 皇天未欲平治, 而大賢遽決斂退。 內院醫藥之請, 無賴叩心之忱; 深山奉諱之恫, 幾灑化血之淚。 惟終始孤忠直節, 亦自學問中推來; 而出處大正至精, 益驗義理上做去。 身自許綱常之重, 世皆稱博約之工。 霽月光風, 自是有道氣像; 精金美玉, 兼以餘事文章。 蔚然衆望之俱該, 允矣多士之攸則。 惟其造詣之妙, 有難測知; 尙此表章之方, 未遑克擧。 寔爲邦典之欠闕, 每切予心之慨嘆。 天意殆有相焉, 偏多曠百世之感; 今時若不偶爾, 詎緩大一統之規? 扶倫正俗之章, 固激切而有契; 明理覺後之訓, 亦昭融而無間。 竊幸知卿莫如, 是謂在心惟簡。 予志先蔽, 奚趐重言複言; 僉議攸同, 非止一疏再疏。 玆以卿從祀于文廟之廡。 闢異端而斥偏詖, 政屬定民志之時; 從聖廡而享春秋, 實爲勵士風之會。 次聯隣德之先正, 庶周旋而無違; 配侑在座之聖師, 尙瞻仰之有所。 淸標直氣, 妥英靈於文牀; 明薦精禋, 齋虔誠於泂酌。 於戲! 莫謂當時志業之未究, 可使來世風聲之永垂。 明善誠身, 詔後昆而斯範, 考功度德, 質前聖而奚疑? 故玆敎示, 想宜知悉。
明日頒敎于仁政殿。
王若曰, 天降眞儒, 丕闡文明之運; 德合崇報, 聿擧躋享之儀。 庸副群情, 先蔽予志。 言念聖廡配儒賢之典, 實爲斯文明道統之要。 夫子之宮墻斯尊, 非聖德而孰與; 後學之模範攸在, 庶正路之不迷。 肆予自承祖宗洪基, 恐負君師丕責。 末俗之習尙已痼, 奈趨向之或岐; 先哲之閫域難窺, 恐議論之易繆。 佇期皇道同歸之化, 益軫金秤稱來之方。 緬昔河西大儒, 蔚爲海東正學。 詩出天性, 詠楓樹而寓丹心; 姿近生知, 劈蔥根而探玄理。 平生心契, 獨推天地間二人; 本原工夫, 專在《大》、《小學》兩部。 理氣互發之辨, 折衷大賢; 道器一物之非, 剖析諸說。 綱常自任, 秉執則至正大中; 矩規是循, 踐履則下學上達。 是以百世師表之評, 已爲一時公共之論。 其道也繼濂、洛開後人之功, 于時則際孝陵賁太平之治。 魚水之契已合, 自靑邸而受知; 風雲之期暗親, 錫墨畫而寓意。 黼黻協贊之化, 幸有其人; 笙鏞賁飾之休, 佇見當世。 那意上天之不弔, 遂自下邑而永歸? 七月窮山, 幾灑蒼梧之冤淚; 一片丹旐, 不改玉果之舊銜。 嗟! 事業未展於當時, 而功化尙賴於末學。 備道德節義之盛, 宛然三代上典型; 明君臣父子之倫, 允矣千載下標準。 撑天之大綱永樹, 隔展之曠感冞深。 祥麟瑞鳳之儀, 幾切時不同之恨; 良金溫玉之質, 實有知者希之歎。 終始進退之間, 惟義是視; 雍容出處之際, 無跡可尋。 於是孟氏之統有傳, 始知子思之功爲大。 瞻鰲山杖屨之所, 非無妥靈之祠; 顧芹宮籩豆之班, 宜備腏食之禮。 事不偶爾, 幸群議之僉同; 表而出之, 若天意之有相。 玆於本月初八日, 以贈領議政文正公 金麟厚, 從祀于文廟之廡, 國人賴以矜式, 多士擧有依歸。 接洙、泗、洛、閩之流, 淵源遠矣; 躋靜、退、牛、栗之列, 春秋饗之。 於戲! 文在玆足徵, 道自此不墜。 菁莪樂育, 佇見作興之休; 衿紳聳聽, 孰無觀感之效? 故玆敎示, 想宜知悉。 【竝藝文提學具庠撰。】
- 【태백산사고본】 45책 45권 37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677면
- 【분류】사상(思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