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수가 후주의 형세와 민호의 정황, 조치의 당부 등을 써서 올리다
함경도 어면진(魚面鎭) 파수장(把守將) 이건수(李健秀)가 후주(厚州)의 형편에 대하여 써서 비변사에 올리기를,
"백두산의 정맥(正脈)이 남쪽으로 뻗어내려 황초령(黃草嶺)에 이르러서 지령(支嶺) 하나가 방향을 돌려 서쪽으로 가다가, 다시 북쪽으로 가서 설한령(薛罕嶺)에 이르러서 압록강을 향하여 하나의 국지(局地)를 열었으며, 장진(長津)·갑산(甲山)·삼수(三水)·후주(厚州) 및 지금은 폐지된 네 군이 그 안에 있습니다.
압록강은 백두산 연지봉(臙脂峯) 아래에서 발원하여 서남쪽으로 흐르다가 갑산의 검천(劒川)에 이르러서 다시 방향을 돌려 서쪽으로 가다가 혜산진(惠山鎭) 앞에 이르러 오매강(烏梅江)과 합수하여 서쪽으로 내려갑니다.
허천강(虛川江)은 후치령(厚峙嶺) 아래에서 발원하여, 호린(呼麟)에 이르러 백계산(白堦山)의 물과 합류한 뒤에 갑산부(甲山府) 앞을 끼고서 서쪽으로 내려가다가, 다시 굽이굽이 북쪽으로 흘러 압록강으로 들어가는데, 위가 허천강이 되고 아래가 오매강이 됩니다.
장진강(長津江)은 황초령(黃草嶺)에서 발원하여 장진부(長津府)에 이르러 한태령(閑台嶺), 설한령(薛罕嶺)의 두 물과 합류하여 삼수(三水)와 후주의 사이를 가로질러서 압록강으로 들어갑니다.
후주강의 근원은 오만령(烏蔓嶺)과 희새봉(希塞峰) 사이에서 나와 후주와 강계(江界)의 경계를 통과하여 압록강으로 들어갑니다.
한 국면의 전체를 손바닥을 들여다 보듯이 한 뒤에라야 지세(地勢)의 형편과 방비의 긴요 정도와 산천의 갈래와 도로의 원근을 상세히 살필 수 있기 때문에 삼수와 갑산을 함께 그린 지도와 후주의 지도를 제작하여 올립니다.
대저 본 고을의 연지평(蓮池坪), 동대암(東臺巖)과 건너편의 고미동(古味洞)은 바로 저들이 왕래하는 요로입니다. 회령(會寧)에서부터 오랄(烏喇)까지의 거리는 10여 일의 노정(路程)에 지나지 않으니, 멀리서 지세를 요량컨대 후주에서 오랄까지는 회령에 비하여 반드시 더 멀지는 않을 듯합니다. 강물이 얼어붙을 때가 되어 적이 이 길을 통하여 침입할 경우 군사를 나누어 장진, 후주, 서강(西江)의 길로 동시에 진격한다면 하루 밤낮에 황초령과 부전령(赴戰嶺)의 남쪽까지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홍원(洪原) 이북은 우리의 소유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병법(兵法)에 ‘상대가 쳐들어오지 않을 것을 믿지 말고 자신의 방비를 믿고서 기다리라.’ 하였습니다. 이곳에다 웅대한 진영을 설치하여 저들로 하여금 감히 고미동(古味洞) 근처에 나타나지 못하게 한다면, 변경의 방비가 엄격해지고 백성들의 생활을 충실하게 하는 일 두 가지가 모두 마땅하게 될 것입니다.
삼수부(三水府)에서부터 시작하여 인차외(仁遮外)의 길을 통하여 강을 끼고 서쪽으로 내려가서 후주 경계의 마전(麻田)에 이르면 바로 충천령(衝天嶺) 밑이 됩니다. 산 뒤로 국면이 열리면서 좌우에 경작할 만한 음지 비탈이 있는데 그 둘레가 약 5리쯤 됩니다. 마전에서부터 돌아서 송전(松田)에 이르기까지가 5리쯤의 거리이며, 깎아지른 절벽 아래에 작은 벌판이 열리는데 가로 세로의 길이가 합쳐서 5리가 되는 곳이 모두 경작할 만한 땅입니다. 그리고 그 중간에 옛날의 진영터이던 자취가 있고 물도랑과 참호가 사방에 빙 둘러 있기에 지역 주민들에게 물어보니, 옛날에 이 지역에서 직접 쌓은 보루의 유지인데 언제 설치되고 폐지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송전에서 다시 길을 돌아 유방소(留防所)를 지나 동대암(東臺巖)에 이르면 그곳이 저들의 땅으로서 이른바 고미동(古味洞)이며,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 대하고 있습니다. 동대암의 안쪽은 곧 연지평(蓮池坪)인데, 강물이 안고 도는 곳에 평지가 펼쳐져서 마치 반달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폭과 길이를 합쳐 10여 리쯤 됩니다. 이곳은 비록 비옥하거나 척박한 정도가 조금씩 차이가 있기는 하나 거의 경작할 만한 땅입니다.
송전(松田)에서 연지평까지의 거리가 25리이며, 그 사이에는 깎아지른 절벽에 아슬아슬한 잔도(棧道)가 나 있어 낭떠러지를 따라 통하게 됩니다. 그리고 연지평에서 장항(獐項)을 넘어 5리를 가면 곧 상패평(祥覇坪)이 나오는데, 토지가 비옥하여 곡식을 심기에 적합하니 참으로 낙토(樂土)라 이를 만합니다. 강계(江界)와 상패평은 하나의 큰 하천을 사이에 두고 있는데, 넓은 평지가 서로 마주 대하고 있고 두 평지의 둘레는 거의 20리쯤 됩니다. 만약 뒷편을 떼내어 이곳에 붙이게 된다면 협곡 속의 큰 평야라고 이를 만합니다.
후주의 옛 진영의 터는 강변의 가파른 언덕 위에 위치하여 지형이 사방으로 휑하게 노출되었으니 방수하는 진지로 삼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듯합니다.
대소도야(大小都野)는 상패평에서 20리의 거리에 있는데, 강물이 빙둘러 흐르고 첩첩의 산봉우리가 서로 엉기어 뻗고 강계(江界)의 산록이 간간이 가로놓여 있습니다. 그곳의 지세(地勢)를 관찰하면 동쪽은 절벽이 험준하고 서쪽은 조금 평탄한데, 동서로 경계가 구분된 점에 구애되어 서쪽으로 길을 내지 못하고 동쪽의 산을 깎아 길을 내었습니다. 이 때문에 절벽에 의지하여 구비구비 돌아 나무를 잡고 그 길을 넘어서 소도야(小都野) 동구에 이르게 됩니다. 이곳은 길을 튼 지가 2년밖에 되지 않았고 좌우의 높은 산에 삼나무와 소나무가 삼[麻]처럼 빽빽하게 들어서서 음침한 그늘이 많아 햇빛이 들지 못하기 때문에 당연히 일찍 서리가 내릴 우려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불에 타다 남은 나무들이 즐비한 사이에서 베어낸 밑둥을 살피고, 그 다음에 밖에 쌓아 놓은 조[粟] 묶음을 취하여 결실한 정도를 자세히 살펴보니, 산 밖 평지의 곡식과 품질에서 별로 손색이 없었습니다. 산간에 동떨어지고 북향(北向)을 한 지역에서 이맥(耳麥)을 갈지 않고 오로지 서속(黍粟)을 갈고 있는데도 이토록 알차게 결실하니, 지세(地勢)가 낮고 토질이 곡식 재배에 알맞음을 알 수 있습니다.
대소도야(大小都野)는 길이가 7, 8리, 넓이가 1백여 보나 혹은 수백여 보가 됩니다. 대저 마전과 송전은 거의 다 개간되었으나 아직 거주민의 수가 적고, 연지평·상패평·대소도야 등지는 지금에 개간이 시작되어 백성들이 이제 막 와서 자리를 잡고 있는 중입니다. 여기서부터는 모두 아직 개간되지 않은 지역입니다.
금신거리(金申巨里)를 거쳐 동곡(東谷)을 지나 대호지(大好地) 등처에 이르는 곳은 넓이와 길이는 가지런하지 않지만 토질은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이곳에서 오만령(烏蔓嶺) 북쪽까지는 4, 5십 리의 거리이고, 상패평의 동구로 후주의 강이 합류하는 곳에서부터는 1백 4, 5십리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어서 강서쪽 강계 지방의 산 밖으로 판막동(板幕洞) 이하 문주(文柱)·비회동(非灰洞)·상패평(祥覇坪)·박철(朴鐵)·구비(仇非)·나신동(羅信洞) 등처로 향하면 소도야(小都野)의 동구이며 자지령(紫芝嶺)의 길이 나옵니다. 이 고개 30리는 매우 험하고 가파른데 이곳이 바로 후주의 중심 산맥입니다.
형편을 따져보고 사정을 참작할 때 어면진(魚面鎭)을 옛날의 규모대로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상패평으로 옮기게 되면, 본 고을은 본래 삼수 지방이 아니어서 지형이 반쪽의 형국을 면치 못하고 도로가 매우 험악하여 백성들이 그 폐단을 받을 형편이니, 후주의 강 서쪽, 강계 지역의 산 뒤에 있는 경작할 만한 땅을 적당량 떼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백성과 토지를 모두 전적으로 주관하게 하고, 백성들을 잘 위무하여 차분하게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하는 책임을 다하게 하며, 모든 행정의 규모와 제도는 읍(邑)의 관례에 따르고, 옥송(獄訟)에 관한 일도 모두 직접 처단하게 해야 합니다. 그런 뒤에 천천히 백성들이 모이는 정도를 보아 차례차례 읍으로 승격시키게 되면 일과 노력이 번거롭지도 않고 유민(流民)들이 안주할 수 있으며 후주에 있어서도 실로 만전(萬全)의 기반이 될 것입니다.
다만 삼수부(三水府)가 세 통로의 요충지에 위치하여 방비를 등한히 할 수 없는 곳인데, 지금은 형편없이 피폐하여 수습할 방법이 없습니다. 이곳에 현재 살고 있는 백성이 4, 5백 호에 불과하며 그나마 다투어 편한 지역을 찾아서 하나둘씩 후주로 유입하고 있으니, 이대로라면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남은 호구가 거의 없게 될 것입니다.
가령 후주에 읍을 설치하고 옛 관청자리에 진영을 설치할 경우, 원하지 않는 토졸(土卒)의 부류들도 뒤따라서 거주지를 옮겨갈테니 그 지역을 만드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갑산부(甲山府)의 넓이가 삼수에 비하여 매우 넓고 백성들의 숫자도 3천 명 정도는 더 많습니다. 따라서 오매강(烏梅江) 서쪽의 길이 30리 정도 넓이 8, 9리의 토지와 호구를 분할하여 삼수에 소속시키면, 갑산으로서는 별로 많은 감소가 없으면서도 삼수로서는 적지 않은 보조가 되니, 경계를 나누고 백성을 다스리는 도리에서 볼 때 매우 타당할 듯합니다.
삼수에서 관장하는 별해진(別害鎭)은 장진강(長津江) 상류의 서안(西岸)과 오만령(烏蔓嶺) 뒷산의 남쪽 산록에 위치하여 후주와 서로 표리(表裏)가 되고 있기 때문에, 방어의 중요도는 실로 평범할 수 없는 곳입니다. 그리고 진영의 관사가 본부(本府)와 4백 리나 떨어져 있고 그 사이에 험준한 산과 강이 가로막혀 있어,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백성들의 폐해는 이미 말할 수 없거니와 혹시라도 비상사태가 일어난다면 어떻게 그 사실을 알릴 수 있겠습니까.
본 진(鎭)은 장진(長津)과의 거리가 1백여 리에 불과하고 거주민들도 소속되기를 원한 지도 오래되었습니다. 그 토지와 민호(民戶)를 떼어내어 장진에 통합함으로써 한편으로는 성세(聲勢)를 올리고 한편으로는 폐단을 혁신한다면 어느 정도 둘 다 완전하게 되는 계책이 될 것입니다.
또 마전(麻田)과 송전(松田) 두 곳의 개척은 혹은 무신년부터 혹은 임자년부터 시작되었으며, 거주민 수십여 호는 태반이 신구(新舊) 갈파지(乫坡知)의 토졸(土卒)입니다. 연지평과 상패평은 갑인년에 개척되기 시작했고 대소도야는 을묘년에 개척되기 시작하였는데, 들어가 거주하는 자들이 수백여 호의 많은 수에 이르지만 대충 가옥이라도 지은 자는 4, 5십여 호일 뿐이며, 그 나머지는 모두 막사를 지어놓고 생활하고 있습니다. 이 중에서 농사를 짓지 않는 자들이 더 많은 숫자를 차지하며 몸에 지니고 있는 기물이라곤 오직 한 자루의 도끼일 뿐입니다.
각처의 인물들이 오합지졸로 모여 무리를 지었고 습속이 제각기 다르기 때문에, 당분간 내륙 민간의 의리로 질책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을 모아놓고 소망과 고통을 물어보니, 그들은 모두 고하기를 ‘본 고을은 폐지된 군의 한쪽 모퉁이에 위치하였고, 3면이 산으로 막혀 있고 북쪽으로 압록강에 접하여 있어 외따로 떨어진 지역이 됨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만 자지령(紫芝嶺)과 충천령(衝天嶺)이라는 두 큰 령(嶺)에 겨우 다닐 수 있는 길이 트여 있으며 어염(魚鹽)의 거래는 오직 충천령의 한 길을 통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곳에서 북청(北靑)까지의 거리가 거의 7백여 리에 가까운데, 그 사이에는 가파른 잔도(棧道)와 낭떠러지가 셀 수 없을 정도이고 다섯 개의 큰 영(嶺)과 세 개의 산계곡의 강이 그 사이에 있어, 한 번 갔다가 돌아오는 데에 걸핏하면 20여 일의 시일을 소비하게 됩니다. 게다가 장마가 지거나 눈이 쌓이는 때엔 사람이 통행할 수 없고, 또 상인의 출입은 더욱이 길이 없게 됩니다.
민간에서 현재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서 전화(錢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는데, 서관(西關)의 강계(江界)와 북관(北關)의 장진(長津)이 삼수의 접경에 위치해 있으면서 이미 모두 전(錢)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유독 그들만은 아직까지 동일시하는 은택을 입지 못하고 함북(咸北) 상인들의 조종에 내맡겨 놓고 있으니, 이는 실로 그들의 삶에 있어서 가장 관건이 되는 문제입니다. 본주의 경계인 금신거리(金申巨里)에서 별해진(別害鎭)까지는 1백 45리의 거리이고 옛날에 길이 났던 자취가 있으며, 또 오만령(烏蔓嶺) 내외의 지대는 형세가 평탄하니, 지금에 만약 이곳에 도로를 내 사람들이 왕래할 수 있게 하고 전화(錢貨)를 사용하도록 허락하여 물자를 유통시키게 한다면, 함흥(咸興)과의 거리가 5백 리에 불과하고 사이에 황초령(黃草嶺)·장진강(長津江)이 있으나 도로가 모두 평탄하여 출입에 장애가 없기 때문에 함흥의 어염을 앉아서 공급받을 수 있고 서관(西關)의 목면도 무역할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유민(流民)들이 간절히 소망하는 것은 강계와 상패의 산허리 아래뿐만이 아니라, 소도야(小都野)는 바로 상패의 관문으로서 도로가 위험하여 인마(人馬)가 통행할 수 없기 때문에 강계 지역으로 도로를 뚫어 왕래에 편하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강계의 산 밖의 지역은 박철(朴鐵)·구비(仇非)·입석(立石) 이상에서부터 판막동(板幕洞) 이하에 이르기까지 산허리를 한계로 하여 떼어내어 넘겨주되, 다만 산허리 이하에는 농사를 짓도록 해야 됩니다. 그리고 골짜기가 조금 깊은 곳에는 엄금(嚴禁)하는 표지를 세워 삼장(蔘場)으로 한 걸음도 범하지 못하게 하면, 강계로서는 삼을 보호하는 울타리를 얻게 되고 후주로서는 경작할 수 있는 토지를 얻게 되니 이쪽이나 저쪽이나 모두 편리하고 바람직하게 됩니다."
하였다. 우의정 윤시동이 복계하기를,
"지도와 책자를 보니, 후주·장진·삼수·갑산의 산천 형세와 민호(民戶)의 정황과 조치의 당부(當否) 등 모든 문제에 대하여 남김없이 상세하게 논계하였습니다. 그 중에서 갑산 오매강(烏梅江)에서 서쪽의 땅을 떼어내어 삼수에 소속시키고 삼수의 별해진(別害鎭)을 떼어내어 장진에 소속시켜야 한다고 한 것은, 토지를 분할하는 일은 신중하게 결정해야 하는 사안이니, 그가 진술한 여러 가지 조목을 가지고 해도의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에게 공문을 보내 문의하고 삼수·갑산·장진 세 고을에 충분히 상의하여 계품케 한 뒤에 처리하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44책 44권 53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649면
- 【분류】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壬子/咸鏡道 魚面鎭把守將李健秀, 以厚州形便, 書陳于備邊司曰:
白頭山正脈南馳, 至于黃草嶺, 一枝轉而西, 又北至于薛罕嶺, 而向鴨綠江, 開一局, 長津、甲山、三水、厚州及廢四郡在其內。 鴨綠江發源於白頭之臙脂峰下, 西南流而至甲山之劎川, 轉而西, 至于惠山鎭前, 與烏梅江合水而西下。 虛川江發源於厚峙嶺下, 至于呼麟, 與白堦山水合流, 橫帶甲山府前而西下, 屈曲北流, 入于鴨綠江, 而上爲虛川江, 下爲烏梅江。 長津江發源於黃草嶺, 至于長津府, 與閑台嶺、薛罕嶺二水合流, 而北至于別害鎭, 與東門川合水, 又北至江口堡前, 與咸興 屛風坡水合流, 橫截三水、厚州之間, 入于鴨綠。 厚州江, 源出於烏蔓嶺、希塞峰之間, 貫流於厚州、江界境之間, 入于鴨綠江。 一局全面, 如指諸掌, 然後地勢形便, 關防緊歇, 山川去來, 道里遠近, 可以詳察, 故三ㆍ甲合圖、厚州單圖修上。 大抵本州蓮池坪 東臺巖越邊古味洞, 卽彼人去來之要路, 而自會寧, 距烏喇, 不過爲十餘日程, 則遙度地勢, 厚州至烏喇, 比會寧必有遜無加矣。 正當合氷之時, 賊若從此路入寇, 分兵幷進於長津、厚州、西江之路, 則一日一夜, 可達黃草、赴戰之南。 然則洪原以北, 不爲我有矣。 兵法曰: "無恃其不來, 恃吾有以待之。" 設雄鎭於此, 使彼人, 不敢現形於古味洞近處, 則嚴邊實民之策, 兩得其宜。 自三水府, 從仁遮外路, 沿江而西下, 到于厚州境麻田, 則乃衝天嶺底也。 山後開面, 而左右陰坂之可耕者, 周回爲五里許。 自麻田, 轉至松田, 相距爲五里, 削璧之下, 開得小坪, 縱橫合五里地, 無非可耕之地, 而中有鎭基舊跡, 溝塹四圍, 故問諸土人, 則云是古之自作堡遺址, 而其設其廢, 不知在於何年。 自松田, 又轉而過留防所, 至于東臺巖, 則彼地所謂古味洞, 隔江相對。 東臺巖之內, 卽蓮池坪, 而抱流平鋪, 形如半月, 長廣合十餘里許。 雖有沃瘠之差殊, 亦是可耕之土, 而松田至蓮池坪, 相距爲二十五里, 危棧石壁, 緣崖通路。 自蓮池坪, 踰獐項, 行五里, 則乃祥覇坪也。 土地肥饒, 宜於生穀, 可謂樂土, 而江界 祥覇坪, 隔一大川, 平鋪相對, 合兩坪周回, 殆爲二十里許。 若割後而屬此, 可謂峽中大野。至於厚州舊鎭基, 壓臨江邊, 地形淺露, 恐非防守之地矣。 大小都野, 自祥覇爲二十里, 而江水彎環屈曲, 疊嶂縈回盤錯, 江界山脚, 間間橫截, 而見其地勢, 東則絶險, 西則稍夷, 拘於東西分界, 不敢開路於西, 鑿山於東。 由此而憑崖轉曲, 攀木以行, 至於小都野洞口, 則開拓不過二年, 左右高山, 杉松如麻, 陰翳尙多, 容光未周, 宜有早霜之患。 故先察刈根於燼木鱗鱗之間, 次取粟束之間間外積者, 細觀結實, 則與山外穀品, 別無所遜。 絶域面北之地, 不耕耳麥, 專向黍粟, 而成熟如此, 地勢之低下, 土品之宜穀, 可知矣。 大小都野, 長爲七八里, 廣則或百餘步, 或數百餘步, 而大抵麻田、松田, 幾乎盡闢, 而居民數少, 蓮池坪、祥覇坪、大小都野等地, 則始闢而民方來接。 自此以往, 則乃是未闢之地也。 由金申巨里, 過東谷至大好地等處, 則廣狹長短, 雖或不齊, 土品則別無異同。 距烏蔓嶺北, 爲四五十里, 而自祥覇洞口厚州江合流處, 不過爲一百四五十里矣。 仍向江西邊江界地方, 山外板幕洞以下, 文柱、非灰洞、祥覇、朴鐵、仇非、羅信洞等處, 則小都野洞口, 卽紫芝嶺路, 而嶺內三十里, 崎嶇峻急, 此是爲厚州主脈也。 論以形便, 參以事勢, 魚面鎭旣不能仍舊貫, 移設於祥覇, 則本州元非三水地方, 而地形未免半面隻局, 且道路危險, 民受其弊, 許割厚州江西邊、江界山後可耕之地, 量宜劃付。 凡其人民土地, 皆使專屬主管, 俾盡安集撫摩之責, 規模制置, 一依邑例, 而訟獄等事, 亦一倂自斷。 徐觀成聚, 次第陞邑, 則事力不煩, 流民可奠, 在厚州, 實爲萬全。 但三水府處在三路要衝, 亦非等閒關防, 而凋弊特甚, 莫可收拾。 時存府民, 不過四五百戶, 而爭趨樂土, 次第流入於厚州。 然則不數年內, 餘戶無幾。 假使設邑於厚州, 置鎭於舊治, 不願土卒之類, 亦當隨後撤移, 墟其地則一也。 第甲山府幅員, 比三水最大, 民摠加三水數三千許。 割烏梅江以西長數三十里、廣八九里土地民戶, 屬之三水, 則在甲山, 所損無多, 在三水, 所補不少, 其在分境治民之道, 恐合便宜。 三水所管別害鎭, 處在長津江上流之西岸、烏蔓嶺後嶂之南要, 與厚州, 相爲表裏, 則關防緊重, 實非尋常。 且鎭治距本府爲四百里, 而隔之以峻嶺險江, 其間民弊, 已無可言, 而脫有緩急, 何能報警乎? 本鎭之拒長津, 不過爲百餘里, 而居民之願屬久矣。 以其土地、民戶, 劃付長津, 一以爲聲勢, 一以爲革弊, 則庶爲兩全之策。 且麻田、松田之兩處開拓, 或自戊申或壬子, 而居民數十餘戶, 太半是新舊乫坡知土卒。 蓮池坪、祥覇坪, 則始於甲寅, 大小都野, 則始於乙卯, 而入居者多至數百餘戶, 而粗成家舍者, 只是四五十戶, 其餘則或皆結幕經過, 而未農者居多, 隨身長物, 惟一斧子而已。 各處人物, 烏合成群, 習尙各異, 姑難責之以閭井之義, 而聚會民人, 採問情願疾苦, 則各人等所告以爲: "本州處在廢郡境一隅, 三面阻山, 北臨鴨綠江, 未免絶地, 而只有紫芝、衝天二大嶺, 僅通鳥道, 魚鹽去來, 惟衝天一路而已。 自此距北靑, 殆近七百里, 而危棧峻崖, 不知其數, 五大嶺、三峽江, 間於其間, 一番往還, 動費二十餘日。 若當潦水積雪之時, 人不能通, 商賈出入, 尤無其路。 且民間行用, 莫要於錢貨, 而西關之江界、北關之長津, 處在三水之接界, 而已皆行錢。 獨渠等, 尙未蒙一視之澤, 一任咸北商賈之操縱, 此實渠等生理之大關捩。 自本州境金申巨里, 至別害鎭, 爲一百四五十里, 而有古道痕, 且烏蔓嶺內外, 地勢坦夷, 今若開路於此, 以通往來, 又許行錢, 以通物貨, 則距咸興不過爲五百餘里, 而雖有黃草嶺、長津江, 路皆平坦, 出人無阻。 然則咸興魚鹽, 可以坐致, 西關木綿, 亦可貿遷" 云。 流民等所切望者, 不但江界、祥霸山腰以下而已, 小都野, 卽祥霸之咽喉, 而道路危險, 人馬難通, 不得不許令開路於江界地, 以便去來。 江界山外地, 自朴鐵、仇非、立石以上, 至于板幕洞以下, 限以山脊, 姑先劃付, 而只山腰以下, 許令耕食。 洞口稍深處, 則立標嚴禁, 使不敢犯蔘場一步地, 則在江界, 爲護蔘之藩籬, 在厚州, 得可耕之土地, 於此於彼, 俱爲便好。
右議政尹蓍東覆啓言: "見其圖本及冊子, 則無論厚州與長津、三甲, 山川形便, 民戶事情, 措處當否, 皆詳悉論列, 無餘蘊, 而其中甲山 烏梅江以西之割屬三水, 三水 別害鎭之割屬長津, 係是土地分劃, 其在審愼之道, 有難遽爾許施。 請以其所陳諸條, 關問于該道道、帥臣, 與三ㆍ甲、長津三邑, 爛漫商確, 具意見論理狀聞後, 更爲稟處。" 從之。
- 【태백산사고본】 44책 44권 53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649면
- 【분류】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