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변에 대해 이를 소멸시킬 방법을 논의하다
차대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번 무지개가 해를 꿴 변고는 바로 내가 등극한 이후에 처음 보기 때문에 배나 두려운데, 전(殿)에 임하여 묻는 것이 도리어 허식에 관계된다 하여 폐지할 수는 없으므로 아침을 기다려 옷을 찾아 입고 훌륭한 말을 들어보려고 생각하였다. 올봄에 기후가 어긋나서 겨울철 추위와 다름이 없었고, 또 꽃이란 천기(天機)를 발산하는 것인데 봄내 꽃이 없어 매우 상도에 어긋났었다. 경들은 각기 소멸시킬 방도를 진달하라."
하니, 영돈녕부사 김이소가 아뢰기를,
"어제 성교를 받들었는데 맨 먼저 언로가 막힌 것을 염려하셨습니다. 대저 언로란 나라의 혈맥이어서 언로가 막히고도 나라가 잘된 일은 있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조정 신하들이 비록 곧은 말과 훌륭한 논의로써 성의(聖意)의 만분지일도 선양하지 못했더라도 어찌 한두 가지 채택할 만한 말이야 없었겠습니까마는, 혹시라도 성상의 뜻에 맞지 않으면 허심 탄회하게 청납하시는 실제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비록 중대한 의리에 관계되고 공공한 극론이라 하더라도 문득 꺾어 억제하고, 금령까지 설치했으니, 거두어 받아들이는 본의가 어디에 있으며 비록 참으로 훌륭한 말이 있더라도 누가 기꺼이 전하를 위해서 말하겠습니까. 참으로 언로를 넓히고자 하신다면 반드시 먼저 금령을 환수해야 하니, 오늘날 재이를 소멸시키는 방도가 이보다 더 급한 것이 없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모두 좋으나 금령을 설치한 것에 이르러서는 내가 부득이 그렇게 한 것이다. 고금 이래로 언로가 막힌 것이 오늘날처럼 심한 적이 없었으며, 금령을 설치한 것도 진실로 옛날에는 있어 본 적이 없고 후일에는 폐단이 있을 줄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외에는 어찌 임금의 잘못과 당금의 정사에 대하여 말할 것이 없겠는가."
하였다. 이소가 아뢰기를
"전하께서 모든 관리 천거의 득실이나 언론의 시비 사이에서 혹시 미처 성찰하지 못하여 이처럼 빠뜨린 것이 있다면 오히려 일식·월식처럼 다시 밝아지는 아름다움이 있을 가망이 있으나, 이제 전하께서는 유독 이 일에 대해서는 구차하게 미봉만 하고 말의 실마리를 이해하여 따르지 않으시니, 신은 참으로 천지처럼 크신 전하께 유감이 없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수성하여 재이를 소멸시키는 방도는 풍속을 돈후하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데, 지금의 습속을 돌아다 보면 투박하기가 이와 같으니, 나라가 어찌 나라꼴이 되겠으며 사람이 어찌 사람꼴이 되겠는가. 방금의 급선무는 오륜의 차례를 도탑게 하여 남의 과실 말하기를 부끄럽게 여기어 순박한 정치를 하도록 기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 그런데 근일의 습속은 이와 상반되므로 이것이 내가 기어코 만회하고자 하여 마치 물불에서 사람을 구해내듯이 급하게 여기는 바이다. 요컨대 그 귀추는 세도(世道)를 안정시키고 세신(世臣)을 보호하는 데서 벗어나지 않는데, 매양 한번 직언을 구하고 나면 문득 한번 풍파가 일어난다. 그래서 내 생각에는 풍속이 돈후해진 다음에야 언로가 저절로 열리는 것이요, 풍속이 돈후하지 않으면 비록 상소문이 날로 쌓이더라도 의론이 바람처럼 일어나 그 흐름이 반드시 세도가 조용하지 못하고 세신을 보호하지 못하는 데에 이르리라고 여긴다. 그러니 참으로 이른바 이렇게 하기도 어렵고 이렇게 하지 않기도 어려운 것이다. 만약 야박한 풍속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순후한 풍속을 만회하지 않는다면 비록 아름다운 상서가 날로 이르고, 재이가 나타나지 않더라도 다행으로 여기기에 부족하다. 《서경(書經)》에 ‘나에게 3천 명의 신하가 있으나 오직 한 마음이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것이 주(周)나라의 기업(基業)이 된 것인데, 지금은 두 사람이 한 자리에 앉아도 그 마음이 각기 다르니, 이렇게 되면 비록 백성의 소망대로 다스리려고 한들 되겠는가."
하였다. 판중추부사 이병모가 아뢰기를,
"지난 봄 이후에 사람들이 모두 모처럼의 청명해질 기회라고 말하였고, 조정에 있는 신하들 역시 이로써 바랐었는데, 지금의 세도와 조정의 기상을 보면 비단 크게 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혹은 도리어 미치지 못한 탄식이 없지 않으니, 신은 참으로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습니다. 대저 세도가 높아지고 낮아짐과 재변이 생기는 것은 사람을 쓰고 버리는 즈음보다 더 빠른 것이 없으니, 옛날 역사에서 분명하게 상고할 수가 있습니다. 충후한 선비가 나오면 풍속이 절로 충후한 데로 돌아가고, 부화한 사람이 나오면 풍속이 절로 부화한 데로 돌아가니, 이는 필연의 징험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사람을 쓰고 버리는 즈음에 아주 신중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은 참으로 식견이 있으니, 염두에 두겠다. 작년 봄에 권유(權𥙿)의 상소가 있은 후, 사람들이 모두 눈을 닦고 일변하는 효과가 있기를 바랐었는데 우물쭈물 하다가 지금까지 그전 꼴로 있는 것이 과연 경의 말과 같다."
하였다. 우의정 윤시동이 스스로 인책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세상을 구제하는 약으로는 실제에 힘쓰는 것보다 더할 것이 없는데, 내가 몇 년 동안 시행해 온 것은 스스로 돌아다 보아도 부끄러움이 많지만 경을 임용한 한 가지 일만은 스스로 제일 잘 된 실정(實政)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였다. 시동이 아뢰기를,
"세도를 만회시키는 데는 실제에 힘쓰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데, 근일에 습속이 효박한 것은 오로지 전날의 기상이 점차로 흘러온 데서 말미암은 것이니, 하나의 ‘실(實)’ 자야 말로 바로 지금의 증세에 맞는 약처방입니다. 지금의 시기에 지금의 풍속을 변화시키지 않으면 손 쓸 곳이 없다고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늘 소대한 것은 오로지 재이에 대하여 조언을 구하기 위한 것이니, 여러 재신들의 공사 아뢰는 일은 우선 천천히 하고, 삼사가 먼저 앞으로 나오라."
하였다. 장령 현중조(玄重祚)가 아뢰기를,
"심의지(沈儀之)가 나라를 위해 죽은 것은 참으로 초야의 의사(義士)였기에 충성된 뜻을 지닌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눈물을 머금고 있습니다. 세초의 빈연(賓筵)에서 대신이 건백하여 특별히 신설하라는 은전을 입었는데, 의지의 처 조씨(趙氏) 또한 하나의 절부(節婦)입니다. 그 남편의 죄에 연루되어 거제(巨濟)에서 귀양살이를 하였었는데 13년 동안을 하루같이 햇빛을 보지 않았고, 계묘년 초에 이르러 거제에 큰 기근이 든 때문에 그를 지도(智島)로 이배하라는 명이 있자, 의지의 처가 다시는 원통함을 품고 부끄러움을 참으면서 다른 고장을 전전하지 않으려고 마침내 8일 동안 먹지 않고 죽었습니다. 그런데 아직껏 그가 도류안(徒流案)에 들어있으니, 해부(該府)에 명하여 죄명을 씻어주게 해서 필부(匹婦)로 하여금 억울함이 없게 한다면 어찌 재이를 없애는 한 단서가 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씨는 누구 집안의 딸인가?"
하므로, 이조 판서 심환지가 아뢰기를,
"이는 선정신 조광조(趙光祖)의 방손(旁孫)입니다."
하니, 상이 금부당상에게 이르기를,
"여자의 이름은 더욱 남자와 다르니, 도류안에서 이미 지웠더라도 즉시 세초(洗草)해야 한다."
하였다. 현중조가 또 아뢰기를,
"근일에는 법이 엄하지 못하고, 관원의 법도가 문란합니다. 주서(注書) 유원명(柳遠鳴)은 바로 유경유(柳慶裕)의 현손인데 경유는 일찍이 목호룡(睦虎龍)의 초사에 나왔습니다."
하였는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원명이 나갔다. 상이 이르기를,
"이 일은 내가 잘 안다. 만약 경유가 흉역의 초사에서 나왔다면 참으로 역적이겠으나, 무고(誣告) 안에 들었으니 이는 충신이다. 경유가 찬축을 입은 것은 무고 때문이었지 초사 때문이 아니었으니, 충과 역이 여기에서 판가름된다. 더군다나 갑진년에 즉시 방면을 입은 자인 경우이겠는가. 설혹 비슷한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세대가 멀어졌으니, 한창 자라는 것을 꺾지 않는 뜻에 있어서 일부러 흠을 잡아낼 필요가 없다. 더구나 그 본디의 일이 대관의 말과 상반되는 것이겠는가. 남의 집 선대의 일을 논하여 벼슬길을 틔우고 막고 하려면 의당 자세히 알고 분명하게 고증한 다음에야 감히 입을 열 수 있는 것이다. 어찌 이런 도리가 있겠는가. 대신(臺臣)이 아뢴 말은 아주 그르다."
하고, 또 상이 이르기를,
"대저 이런 일을 만약 안에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 시기하여 모함한 것이 아니라면 서로 접촉이 없는 외인들이 어떻게 알겠는가. 이 역시 야박한 풍속의 일단으로 내가 매우 미워하는 바이다."
하였다. 사간 오정원(吳鼎源)이 아뢰기를,
"지난날 반사할 때에 두 흉적의 죄명을 지워 없애게 한 것은 실로 전에 없던 지나친 거조였습니다. 거조가 이러하고도 오히려 어찌 하늘의 마음이 기뻐하기를 바라겠습니까. 그 명을 취소하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금조(禁條)에 해당하니, 비답을 내릴 수 없다."
하였다. 정언 신귀조(申龜朝)가 아뢰기를,
"언로가 열리지 않은 것은 금령을 설치한 데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신이 작년 봄 이후로 매양 처분과 말씀이 과중한 것을 보았는데, 법이 이 때문에 엄하지 못하고 난적이 이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강화도의 방수(防守) 역시 허술하니, 지금의 수신(守臣)은 어찌 우리 나라의 신하가 아니란 말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금령에 관계된 일을 어찌 감히 스스럼없이 진달하는가. 행동이 해괴하다."
하였다. 응교 이명연(李明淵)이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정령과 거조에 있어 너무 지나치게 익숙하고 수단이 점차 매끄러워져서 모든 하고자 하는 일이면 반드시 이루고서야 그만두십니다. 《서경》에 이르기를, ‘임금 노릇 하기가 어렵다.’고 하였는데, 어렵게 여기는 도리에 있어 그렇게 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어찌 하고자 하는 일을 반드시 이루려 하겠는가."
하므로, 명연이 아뢰기를,
"심지어는 천지간에 용납될 수 없는 역적까지도 혹 살려주는 데만 뜻을 두시고 또 따라서 금령까지 엄하게 설시하여 여러 아랫사람들로 하여금 말을 하지 못하게 하시니, 이것이 하고자 하는 일을 반드시 이룬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모두 나의 부득이한 일이었다. 어찌 하기 좋아서 한 일이겠는가. 이것은 모두 나의 고심이 들어 있는 곳이다."
하였다. 현중조가 아뢰기를,
"대계(臺啓)를 정지시키거나 계속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중대합니까. 그러므로 공의가 이미 일어나 죄명이 한번 가해지면 쉽게 죄를 올리거나 내려서는 안 되며, 설혹 공의를 거치지 않고 죄를 용서할 만한 자가 있다 하더라도 의당 그 사실을 조사하여 무죄인가 유죄인가를 변석하여 여러 사람의 마음에 의심이 없게 한 다음에야 그 계사를 정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사실이 규명되지 않은 채로 두고 억지로 정지하게 해놓고서 정계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번 유사문(柳師文)의 죄명은 바로 신하로서의 제일 큰 죄안인데, 발론한 사람이 지금까지 있으니, 대신(臺臣)이 조사하기를, 청하여 아뢴 것은 사헌부의 체모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한번 문계(問啓)한 것을 길에서 들은 말처럼 여기고 문득 ‘다시 물을 만한 것이 없다.’고 하여 버려 두게 하였으며, 한 대신이 거조를 잘못 한 것 때문에 문득 ‘전계를 이미 정지했다.’고 하여 결말을 내버렸으니, 나라의 형정(刑政)이 어찌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정계한 까닭없이 철저히 조사하기도 전에 갑자기 정계한 것이니, 대신의 체모를 훼손한 것으로만 말할 수 없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이복윤(李福潤)에게는 특별히 간개(刊改)하는 법을 시행하고, 유사문에 대한 일로 헌부에 정계하라고 한 명을 속히 환수하고서 인하여 당초에 발론한 사람을 엄히 끝까지 조사하여 인심이 복종하고 공의가 펴지게 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대신의 사체는 비록 생소한 데서 말미암은 것이나, 이미 정계하였으니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오늘날의 시속은 하나의 투식이 되어서 깨뜨릴 수가 없는데 온 세상이 모두 그러합니다. 그런데 온 세상만 그러할 뿐 아니라 우리 전하의 정령과 처사 역시 이런 투식을 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하께서 사치를 억제하고자 하나 사치하는 투식을 깨뜨리지 못하기 때문에 억제하지 못하고, 전하께서 인재를 얻고자 하시나 사람을 임용하는 투식을 깨뜨리지 못하기 때문에 얻지 못하는 것이며, 전하께서 생민을 구제하고자 하시나 백성을 다스리는 투식을 깨뜨리지 못하기 때문에 구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대저 오늘날의 시폐를 바로잡으려면 오늘날의 습속을 깨뜨리고 옛 도를 회복한 다음에야 폐단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말이 매우 옳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선비란 나라의 원기입니다. 우리 조종조에서 인재를 부식하고 배양한 것이 과연 어떠하였습니까. 그런데 지난번 별시(別試) 때에는 단속이 너무 지나쳐서 파장(罷場)하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별시는 대비과(大比科)인데 바야흐로 경향(京鄕)에서 모두 모일 때에 갑자기 파장하여 선비들이 모두 사기가 꺾이었으니, 이는 참으로 지나친 일이었습니다. 또 문에 들어가는 즈음에 칼을 씌우는 것으로도 부족하여 새끼줄로 매기까지 하였으므로 그 광경이 선비들의 기를 꺾어 버리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앞으로는 사습을 바로잡고 과장을 엄히 하는 도리로써 규정만 분명하게 세울 것이요 지나치게 단속을 가하지 말아야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본디 과거의 규정이 있는데 어찌 별도로 규정을 세우겠는가."
하였다. 정원(鼎源)이 아뢰기를,
"전년에 여러 금부 당상들이 죄명을 지워버리라고 거듭 당부한 처분에 대해서 충분(忠憤)이 격발하여 받들어 거행하지 않은 것은 신하의 분의에 있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때에 상소하여 시행하기 어려운 뜻을 거듭 진달한 것은 실로 까닭없이 덮어 둔 것과는 크게 차이가 있으니, 신의 생각에는 지난번 여러 금부 당상들을 안치시킨 처분을 특명으로 환수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니, 윤허하지 않는다고 비답하였다. 또 아뢰기를,
"말을 하지 못하도록 금령을 설시한 것은 전에 없던 지나친 처사입니다. 대궐문에 법을 게시해 놓고서 수문장이 물리치고 조리(曹吏)가 손을 내저으며 사알(司謁)이 물리쳐서 말하는 자로 하여금 감히 손을 쓰지 못하게 하였으니, 사책(史冊)에 이 일을 써놓으면 장차 어떤 세상이라고 하겠으며, 또 어찌 천만 년 후손에게 물려줄 모책이 되겠습니까. 작년 겨울에 우레의 이변이 경계를 알리자 한두 대신(臺臣)이 분부에 응하여 상소한 일로 이내 죄벌을 받았는데, 이제 사유의 은전을 내리는 때를 당해서도 사유를 받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당초에 직언을 구한 뜻이겠습니까. 지금의 급선무는 언로를 넓히는 한 가지 일보다 더 급한 것이 없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지난번에 설치한 금령을 속히 환수하도록 명하고, 작년 겨울 직언을 구한 이후로 말 때문에 죄를 입은 사람들을 우선 사유해서 돌아오게 하여 와서 간하는 길을 열어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금령을 설치한 일에 대해서는 윤허하지 않는다. 작년 겨울에 한두 대신(臺臣)을 처벌한 것은 바로 풍속을 돈독하게 변화시키기 위해서였다. 직언을 구한 것은 절로 직언을 구한 것일 뿐인데, 어찌 잠깐 죄를 주었다가 이내 사유해서 조정의 기상을 날로 더욱 무너뜨리고 세도를 갈수록 더욱 분란해지게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또 생각하고 있는 것을 가지고 아뢰기를,
"지금 천심이 편치 못해서 작년 겨울 이래로 이미 삼백(三白)의 조짐이 없었고, 삼춘(三春)의 날씨가 또 어긋나는 현상이 많아 꽃이 피지 않은 것으로써 보리가 되지 않을 것을 추측할 수 있는 것이 참으로 성교와 같습니다. 근래에 듣건대 양남 지방의 보리는 비록 조금 나아질 조짐이 있으나 기호 지방의 가을 보리는 이미 큰 흉작으로 판가름났다고 합니다. 신의 생각에는 화성(華城)의 토목 역사를 우선 정지하였다가 보리가 나오고 가을 농사가 잘 되기를 기다려서 다시 시작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묘당에 자문하여 나라의 비용을 저축해서 뜻밖의 일에 대비하고, 백성들의 힘을 늦춰주어서 농상에 전념하게 하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말이 매우 옳다. 요컨대 올가을에 완성할 수 있다고 하는 바, 워낙 중대한 일이기 때문에 남들은 감히 말을 하지 못하는데, 네가 있는 생각을 숨김 없이 말하였다. 일을 감독하는 신하로 하여금 이런 뜻을 알게 하여 정지할 만한 곳은 정지하게 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대신(臺臣)의 이 말은 참으로 귀하다. 화성의 성역(城域)은 본디 중한 바가 있지만 이런 큰일에 어찌 찬반의 말이 없을 수 있겠는가. 옛날 조 풍원 부원군(趙豊原府院君)025) 이 전주성(全州城)을 쌓을 때에 원망을 무릅쓰고 쌓았으므로 사람들이 못할 말이 없었으나, 선조에서 위임하여 완성하기를 책임지웠기 때문에 전주부의 성문에 ‘명견문(明見門)’이란 편액을 달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재작년에 임제원(林濟遠)이 말을 잘했는데, 이제 또 이 대신의 말이 있으니 내가 가상하게 여기는 것이 이 때문이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사학(邪學)이 날로 기승을 부려 영남·호남 사이에 점차로 더욱 치성해지고 있으니, 청컨대 물든 자들을 한결같이 모두 사형에 처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학이 점차로 치성해지는 것은 정학(正學)이 밝지 못한 데서 말미암은 것이다. 내가 금지하는 데에 최선을 다하고 있기는 하나, 요컨대 교인(敎人)을 올바른 사람으로 만들고 그 책을 불태우는 것이 곧 이단(異端)을 토벌하는 방도이다. 어찌 한결같이 사형에 처할 수 있겠는가. 만약 윤상(倫常)을 무너뜨리는 무리가 있으면 적발되는 대로 이미 사형을 시행했으니, 연전의 일이 이것이다. 이제 대신의 말이 이와 같은데, 근래에는 과연 어떻다고 보는가?"
하므로, 김이소 등이 아뢰기를,
"신들이 비록 자세히 알지는 못하나 어리석은 백성들 사이에 서로 전해서 만연되고 있으므로 심히 우려됩니다."
하였다. 장령 박서원(朴瑞源)이 아뢰기를,
"근래에 금령을 설시하였기 때문에 소위 대간의 상소라는 것은 말의 시비와 일의 곡직을 막론하고 문 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으니, 한심한 일치고 이보다 심한 것이 없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병조의 당상과 낭관에게 분부하여 대간의 상소를 막지 말게 해서 언로를 열어 성총을 넓히는 것이 타당하다고 여깁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옳은 말과 곧은 일이 모두 궁문에서 저지된다면 도리어 금령을 설치한 뜻이 아니니, 이는 병조에 신칙하겠다."
하고 또 상이 이르기를,
"직언을 구한 것은 직언을 구한 것이고 거조는 거조일 뿐이다. 대신 신귀조는 체차하고, 현중조 역시 유경유(柳慶裕)의 일을 번거롭게 아뢰었으니 체직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4책 44권 36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640면
- 【분류】왕실(王室) / 과학(科學) / 정론(政論)
- [註 025]조 풍원 부원군(趙豊原府院君) : 조현명(趙顯命).
○次對。 上曰: "今此虹貫之變, 卽御極後初見, 故一倍澟惕。 不可以臨殿詢咨之反涉文具而廢之, 待朝求衣, 思聞昌言矣。 今春乖候, 無異冬冱。 且花者, 所以發宣天機, 而一春無花, 甚乖常。 卿等各陳消弭之方。" 領敦寧府事金履素曰: "昨奉聖敎, 首以言路之杜塞爲憂。 夫言路者, 有國之血脈也。 言路閉而能爲國者, 未之有也。 今日廷臣, 雖無以讜言昌論, 對揚聖意之萬一, 然亦豈無一二可採之言, 而若或不槪於聖意, 則未見虛心聽納之實。 雖係義理之重, 國論之公, 輒加摧抑, 至設禁令, 烏在其翕受之本意, 而雖有眞箇昌言, 誰肯爲殿下道哉? 苟欲恢張言路, 必宜先收禁令。 今日消災之方, 恐無急於此矣。" 上曰: "卿言皆好, 而至於設禁, 予之不得已而然也。 往古來今, 言路之閉塞, 未有若今之甚者。 禁令之設, 固知在古無稽, 於後有弊, 而禁令之外, 亦豈無袞闕時政之可言者乎?" 履素曰: " 殿下凡於政注得失、言議是非之間, 若或未及省察, 而有此闕遺, 則猶可望如更日月之美, 而今殿下, 獨於此事, 苟且彌綸, 繹而不從, 臣誠不能無憾於天地之大也。" 上曰: "修省消弭之方, 無出於敦風厚俗, 而顧今習俗渝薄如此, 而國豈得爲國, 人豈得爲人乎? 方今急先之務, 莫若敦敍五倫, 恥言人過, 期做淳厖之治, 而近日俗習, 相反於是, 此予所以期欲挽回, 而有如救焚拯溺者也。 要其歸, 則無出於靖世道、保世臣, 而每有一番求言, 輒生一番風波。 予則以爲風俗敦然後, 言路自開。 風俗不敦, 則(難)〔雖〕 公車日積, 言議風生, 而其流必至於世道不靖, 世臣難保, 眞所謂如是難, 不如是亦難者也。 若使薄俗未變, 淳風未回, 則雖使休祥日臻, 災異未現, 不足以爲幸。 《書》不云乎? 予有臣三千, 惟一心。 此所以爲成周基業, 而今則二人同坐, 其心各異。 如是而雖欲, 從欲得乎?" 判中樞府事李秉模曰: "昨春以後, 人皆曰: "一初淸明之會, 在廷之臣, 亦以此望焉, 而顧今世道朝象, 不但不能丕變, 或不無反不及之歎。’ 臣誠未曉其由, 而大抵世道之汚隆, 咎徵之孚應, 莫捷於用舍之際, 考之往牒, 班班可考。 忠厚之士進, 則風俗自歸於忠厚, 浮華之士進, 則風俗自歸於浮華, 此必然之驗也。 伏願殿下, 克愼於用捨之際焉。" 上曰: "卿言誠有見識, 當體念, 而昨春權𥙿疏後, 人皆拭目, 擧望一變之效, 而伈泄至今, 依舊樣子, 果如卿言矣。" 右議政尹蓍東引咎, 上曰: "方今救藥, 莫過於懋實。 予之年來注措, 自顧多愧, 而至於枚卜卿一事, 自以爲最是實政矣。" 蓍東曰: "挽回世道, 莫過於懋實, 而近日俗習之淆, 專由於前日時象之所以馴致者, 則一實字, 正是對症投劑。 當今之時, 無變今之俗, 可謂着手無處矣。" 上曰: "今日召接, 專爲求助, 諸宰奏事姑徐之, 三司先爲進前。" 掌令玄重祚曰: "沈儀之之爲國辦死, 眞草野義士, 忠志之人, 至今飮泣。 歲初賓筵, 大僚建白, 特蒙伸雪之典, 而至於儀之之妻趙氏, 亦一節婦也。 坐於其夫之累, 謫在巨濟, 不見天日者, 十三年如一日, 及夫癸卯初, 以巨濟之大飢, 有移配智島之令。 於是乎儀之之妻, 更不欲含冤忍恥, 再轉之他, 遂乃不食八日, 竟就一死, 而尙在徒流案。 請命該府, 蕩滌罪名, 使匹婦無冤, 則豈不爲消弭之一端乎?" 上曰: "趙氏, 誰家女?" 吏曺判書沈煥之曰: "此是先正臣趙光祖之旁孫也。" 上謂禁堂曰: "女子之名, 尤異男子, 徒流案雖已爻周, 卽爲洗草可也。" 重祚又曰: "近日隄防不嚴, 官方淆雜。 注書柳遠鳴, 卽柳慶裕之玄孫, 而慶裕曾出於虎龍之招。" 語未畢, 遠鳴逬出。 上曰: "此事予所詳知。 若使慶裕出於凶逆之招, 則誠逆也, 入於誣告之中, 則便是忠也。 慶裕之被竄, 是告非招, 則忠逆斯判, 而況於甲辰, 卽爲蒙放者乎? 設或事有近似, 世級稍遠, 其在方長不折之義, 不必吹覓。 況其本事, 相反於臺言乎? 欲論人家先故, 朝籍通塞, 則當知之詳而證之明, 然後乃敢發口。 寧有如許道理? 臺臣所奏, 極非矣。" 上曰: "大抵此等事, 若非自中人傾軋擠陷, 則聲氣不相及之人, 安得以知之? 此亦薄俗之一端, 予所深惡者也。" 司諫吳鼎源曰: "頃日頒赦時, 兩凶賊罪名之割下, 實是無前之過擧。 施措如此, 尙何望天心之悅豫乎? 還寢宜矣。" 上曰: "係是涉禁, 不可賜批。" 正言申龜朝曰: "言路之不開, 由於設禁。 臣於昨春以後, 每見處分過中, 辭敎過中。 隄防由是而不嚴, 亂賊由是而不懼。 甚至沁都防守, 亦甚踈虞。 今之守臣。 亦豈非我國臣子乎?" 上曰: "涉禁之語, 何敢無難陳達乎? 擧措駭然矣。" 應敎李明淵曰: "殿下於政令施措, 閑習太過, 手段漸滑, 凡有所欲爲, 必遂乃已。 《書》云: ‘克艱厥后。’ 克艱之道, 恐不宜如是矣。" 上曰: "予安得所欲必遂乎?" 明淵曰: "甚至逆賊, 天地之所不容, 而亦或有惟意傅生, 又從以嚴設禁令, 使群下, 不得容喙, 此非所以所欲必遂乎?" 上曰: "此皆予不得已也。 豈樂爲者乎? 是皆予之苦心所在也。" 重祚啓言: "臺啓停連, 何等重大? 公議旣發, 罪名一加, 則有不可輕易低昻, 設或有不由公議, 罪有可赦者, 惟當覈其事實, 卞其人鬼, 使群心無疑, 然後其啓可以停矣。 豈有置諸䵝昧, 强之使停, 而曰停啓也哉? 今者柳師文罪名, 卽是人臣之極案, 而發論之人, 至今尙在, 則臺臣請覈之啓, 臺體卽然, 而以一次問啓之歸於塗聽, 便謂之無復可問而抛置之, 以一箇臺臣之失其擧措, 便謂之前啓已停而收殺之, 國家刑政, 寧有是哉? 至於停啓臺臣, 則莫重臺啓, 無端遽停於未窮覈之前者, 不可但以虧損臺體言。 臣謂持平李福潤, 特施刊改之典, 亟收柳師文憲府停啓之命, 而仍爲嚴加究覈於當初發論之人, 使群心服而公議伸焉。" 批曰: "臺體雖由於生踈, 旣停, 不允。" 又啓言: "今日時俗, 打成一套, 莫可破了, 一世皆然, 而不惟一世, 我殿下政令注措, 亦不免行於此套之中。 是故殿下欲抑奢侈, 而奢侈之套不破, 故不能抑之; 殿下欲得人才, 而用人之套不破, 故不能得矣; 殿下欲捄生民, 而治民之套不破, 故不能救矣。 夫欲矯今時之弊, 則破今俗而復古道, 然後弊可得以矯矣。" 上曰: "言甚是矣。" 又啓言: "士者, 國之元氣也。 惟我祖宗朝扶植而培養之者, 果何如, 而向於別試時, 操切太過, 至有罷場之擧? 別試, 大比科也。 方當京鄕咸會之時, 忽地罷場, 士皆挫氣, 是誠過擧也。 且入門之際, 枷之不足, 繼之以索, 其爲景色, 足可以摧沮士氣。 自今以後, 正士習嚴科場之道, 但明立規模而已, 勿爲過加操束焉。" 批曰: "自有科規, 何可別立規模乎?" 鼎源啓言: "前年諸禁堂之於復申罪名, 抹下之處分, 忠憤所激, 不得奉行, 臣分當然。 伊時陳疏覆難, 實與無端掩置, 大有間焉。 臣以爲頃日諸禁堂安置之處分, 特命收還。" 批曰: "不允。" 又啓言: "設法禁言, 無前之過擧也。 象魏懸法, 門將斥之, 曹史揮之, 司謁却之, 使言者, 莫敢措手。 書之史冊, 當以爲何等世, 而亦豈可爲千億貽燕之謨哉? 昨冬雷異之告警也, 一二臺臣應旨言事, 旋被罪罰, 今當赦典, 亦未蒙宥, 是豈當初求言之意哉? 在今急務, 無過於開言路一事。 臣以爲向前設禁之令, 亟命還收, 昨冬求言以後, 以言獲罪之人, 爲先宥還, 以開來諫之路。" 批曰: "設禁事, 不允。 昨冬譴勘之一二臺臣, 政爲敦俗移風。 求言自求言, 豈可作罪旋宥, 以致朝象之日益壞亂, 世道之去愈紛亂乎。" 又所懷: "今天心不豫, 昨冬以來, 旣無三白之兆, 三春日候, 又多乖沴之象, 無花之可推無麥, 誠如聖敎。 近聞兩南牟麥, 雖有差勝之漸, 畿湖秋牟, 已判大歉云。 臣以爲華城土木之役, 姑爲停止, 以待牟麥登場, 秋農得稔, 更始未晩。 伏願下詢廟堂, 以爲儲國用以備不虞, 紓民力以專農桑, 似爲得宜。" 批曰: "言甚是矣。 要之, 今秋可以告成云, 而以其有所重, 人莫敢言, 爾能有懷無隱。 其令董事之臣, 知此意, 可停處姑停。" 又敎曰: "臺臣之有是言, 誠貴矣。 華城城役, 固有所重, 而如此大事, 烏可得無異同之言也? 記昔趙豐原之築全州城也, 任怨爲之, 人言靡所不有, 而先朝委任而責成之, 故完府城門, 至以明見爲扁云矣。 再昨年林濟遠能言之, 今又有此臺臣之言, 予所嘉者此也。" 又啓言: "邪學日肆, 嶺湖之間, 轉益熾蔓。 請染習者, 一皆施以大辟。" 上曰: "邪學之轉熾, 由於正學之不明。 予所禁止, 靡不用極, 而人其人火其書, 卽力攻異端之要道也。 豈可一以大辟從事乎? 若有斁倫悖常之類, 則從現發已施大辟, 年前之事是也。 今臺臣之言如此, 近來果何如云耶?" 履素等曰: "臣等雖未詳知, 而以愚民之轉相滋蔓, 多有深憂遠慮矣。" 掌令朴瑞源啓言: "近以設禁之故, 名以臺疏, 無論言之是非, 事之曲直, 不得入門, 事之寒心, 莫此爲甚。 臣謂分付兵曺堂郞, 勿阻臺疏, 以開言路, 以達聖聰宜矣。" 批曰: "言之是者, 事之直者, 竝在阻閽之科, 反非設禁之意, 此則申飭兵曹。" 上曰: "求言自求言, 擧措自擧措。 臺臣申龜朝遞差, 玄重祚亦以柳慶裕事, 煩奏, 遞。"
- 【태백산사고본】 44책 44권 36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64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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