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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 43권, 정조 19년 10월 29일 병오 1번째기사 1795년 청 건륭(乾隆) 60년

좌의정 유언호에게 유시하다

좌의정 유언호(兪彦鎬)에게 유시하였다.

"경들이 소신대로 하는 것이나 임금에 따르는 것이나 모두 이 의리에 속하는 일이다. 옛날에 소신을 갖고 있지 않았던들 어찌 내가 즉위한 초기에 나를 따르는 일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일전에 올린 차자의 내용을 보니, 임금이 요(堯)·순(舜)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었는데, 작년 여름 재실(齋室)에 있으면서 내렸던 윤음(綸音)과 표리(表裏) 관계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선조의 아름다운 덕을 드날리는 것이야말로 자식된 직분상 당연한 일이요 임금의 아름다운 덕을 선양하는 것이야말로 신하된 직분상 당연한 일이다. 경의 말은 나의 말이요, 나의 마음은 곧 경의 마음이라 하겠다.

연전에 유성한(柳星漢)을 성토했던 대신과 여러 신하들의 충성심과 지려(智慮)가 어찌 혹시라도 경보다 못하겠는가마는, 저들은 그만 저런 식으로 운운하고 있는데 반하여 경만은 이런 방식으로 운운하고 있다. 그를 공격하고 있는 점에서는 똑같은 말이라 할지라도, 특히 경의 경우는 내 말이 도(道)에 가깝다는 것을 깨닫고 이치에 타당하게 하려는 나의 마음에 계합(契合)되고 있다. 죽이지 않는 것이 무(武)요, 노하지 않는 것이 용(勇)이다. 경이 평소 소신으로 삼는 바 하늘과 땅을 지탱시키는 진정한 대의리(大義理)가 조금이라도 흠이 생기거나 한 쪽으로 기울어지는 일이 없이 계속 나의 뜻에 합치시켜 나가면서 천 년 억 년토록 영원히 할 말이 있게 되기만을 바라고 싶다.

이렇든 저렇든 간에 경은 분명히 한 차원 높은 사람이기에 면대(面對)할 때까지 조금 기다렸다가 나름대로 한 번 터놓고 이야기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듣건대 경의 건강이 좋지 못해서 가까운 시일 안으로는 정무를 살피게 할 수 없겠다고 하기에 마침 병 문안하러 가는 사람편에 마음속에 있던 말을 우선 위에서 한 것처럼 털어놓았다.

전에 내린 비답 가운데 펼쳐 보이는[敷示] 일과 관련하여 끝내 파헤쳐 보이는 한 마디 말도 없다면, 증험(證驗)할 길이 막막해져 사람들의 의아심만 야기시킨 나머지 성한(星漢) 부자(父子)의 그 당시 죄안(罪案)과 같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니, 어떻게 오늘날 사람들의 마음을 복종시키며 후세의 비난을 막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그 상소 외에도 따로 죄를 지은 간악한 정상이 있어 사람들의 입에 파다하게 전해졌고 심지어는 공거(公車)304) 하기에까지 이르렀으니,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피를 머금을 정도로 통분함을 느꼈던 것은 그들의 분의(分義)로 볼 때 감히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한두 명의 문관과 음관 중신(重臣)들이 올린 소장이 계발(啓發)해 주는 것이 참으로 많았다.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인경(麟經)305) 의 사필(史筆)을 나름대로 본받아 《명의록(明義錄)》까지 편찬해 놓은 상황에서 20년을 지내오는 동안 말하고 싶어도 끝내 차마 하지 못했던 은미(隱微)하고 오묘한 뜻을 무슨 방법으로 드러낼 수 있었겠는가.

잠시 시끄러운 대로 놔두었던 것은 나의 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었고 곧바로 화란의 계제(階梯)를 방비한 것은 간악한 정상을 밝히기 위함이었다. 내가 강구해 밝힐 방도를 부지런히 생각하면서 나름대로 반복해 헤아리는 점이 있으니, 경은 이문원(摛文院)의 전석(前席)에서 내가 유시했던 내용을 잊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3책 43권 50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609면
  • 【분류】
    왕실(王室) / 인사(人事)

○丙午/諭左議政兪彦鎬曰: "卿等之秉執與遭逢, 皆在於此義理。 不有疇昔之秉執, 豈獲初元之遭逢? 日前箚辭, 恥其君不及, 當與昨夏齋居綸音, 表裏看。 揚先徽懿, 予職固然; 宣上德美, 臣分當耳。 卿言予言, 予心卿心。 往年聲討柳星漢之大臣、諸臣, 誠忠智慮, 豈或歇後於卿, 而彼乃如彼云云, 卿則如是云云。 攻之雖無異辭, 特卿則悟予言之近道, 契予心於當理。 不殺爲武, 不怒爲勇。 使卿素所秉執, 撑天亘地, 眞正大義理, 無一纖毫罅漏逼仄處, 欲望從來遭逢之永有辭於千禩億歲。 如是如彼之間, 卿果然高於人一等。 差待面對, 竊擬一攄, 聞卿愼節, 有非旬日可責視務, 適因問疾之行, 先布蘊中如右。 前批中敷示事, 終無一言之剖析, 則沒證蔑驗, 惹人疑晦, 將無同於星漢父子之伊時累案, 何以服今人之志, 而禦後世之譏乎? 其疏之外, 別有奸狀之媒孽, 播在人口, 至及公車, 大臣、諸臣之沫血飮泣, 義分之所不敢不然, 最是一二文蔭重臣之章, 啓發者孔多。 苟非然也, 竊取麟經之筆, 彙成《明義》之編, 而荏苒廾載, 欲言迄不忍之, 微旨奧意, 何由彰之? 暫任其紛然, 眎予心也, 旋防其厲階, 炳奸狀也。 予所惓惓於講明之方者, 自有反復斟量, 莫忘摛院前席之諭。"


  • 【태백산사고본】 43책 43권 50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609면
  • 【분류】
    왕실(王室) / 인사(人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