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정조실록43권, 정조 19년 8월 18일 병신 2번째기사 1795년 청 건륭(乾隆) 60년

수어경청을 혁파하고 광주부를 승격시켜 유수를 두다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수어경청(守禦京廳)을 혁파하고 광주부(廣州府)를 승격시켜 유수(留守)를 두었다. 상이 대신 및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국가에서 소중하게 여겨야 할 것은 융정(戎政)이 바로 그것이다. 재화를 넉넉하게 하고 양식을 풍족하게 하기 위해서는 쓸데없는 군사를 없애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내가 즉위한 초기인 무술년에 여섯 가지 조목으로 자문을 구했을 때에도 맨 먼저 군영(軍營)의 제도를 언급했던 것인데 인순 고식적으로 지금까지 내려오면서 말만 했지 실행을 하지 못하였다. 수어청을 그냥 두거나 혁파하거나 간에 일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내외(內外)가 모두 피곤하기만 하니 이제 와서는 변통하지 않을 수가 없다. 경들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니, 좌의정 유언호는 아뢰기를,

"우리 나라 군영(軍營)의 제도는 여러 갈래로 되어 있기 때문에 국가의 비용이 소모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령 수어청의 존폐(存廢) 문제에 대해서는 선배들도 많이 이야기를 했었는데, 지금 만약 수어사(守禦使)를 없애고 유수를 임명한다면, 쓸데없는 비용을 없애 양식을 풍족하게 하는 방도로 볼 때 어찌 크게 유익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우의정 채제공은 아뢰기를,

"우리 나라의 군제(軍制)를 보면 경군문(京軍門)의 명칭을 갖고 있는 것이 무려 5, 6개나 됩니다. 그중에서 수어사로 말하면 원래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절제(節制)할 임무를 띠고 나온 것인데, 지금은 그만 경청(京廳)을 설치하여 도성 안에 머물고 있으면서 제반(諸般)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그저 남한산성의 재화만 소모하고 있을 뿐 나라에 보탬이 되는 점이 없습니다. 이번에 밤낮으로 생각하시며 계속 헤아려 오신 끝에 경청(京廳)을 혁파하기로 하신 것이야말로 훌륭한 결단이라고 할 것인데, 신에게 어찌 다른 의견이 있겠습니까.

이렇게 할 경우에는 부윤(府尹)은 자연히 감하(減下)하는 조치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수어사를 혁파하고 유수를 차출한 뒤 부윤의 늠곡(廩穀)을 주고 부윤의 일을 행하게 하면서 전일 경청에서 소모하던 비용 일체를 없애버린다면 달이 가고 해가 갈수록 보탬이 되는 점이 필시 많아지게 될 것입니다. 이에 대해 묘당으로 하여금 절목(節目)을 작성해 내게 하소서."

하고, 수어사 심이지는 아뢰기를,

"수어사가 남한산성을 전적으로 관할하게 되어 있는 이상 경청(京廳)을 설치한 것 자체부터 의의가 없는 일입니다. 더구나 장수가 군사도 없이 그저 약간의 표하(標下)만 거느리고서 외람되게 5영(營)의 반열에 참여한다는 것은 더더욱 타당하지가 못합니다. 그리고 남한산성에 비록 유영 별장(留營別將)이 있다 하더라도 성안의 일을 광주 부윤이 전적으로 관할하고 있는 상황에서 수어사가 그 사이에서 책응(策應)한다는 것도 구애되고 난처한 일이 많습니다. 지금 만약 경청을 없애고 남한산성으로 진영을 내보낸다면 유익하게 될 듯합니다."

하고, 병조 판서 심환지는 아뢰기를,

"수어청의 사세로 볼 때 특별히 변통해주지 않는다면 지탱해 나갈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하교하기를,

"나도 일찍이 생각했었다마는 군영(軍營)의 제도를 백년토록 그냥 놔두지 말아야 나라가 부강해지고 군사가 정예로워지며 백성이 감당해 낼 수 있고 재화도 풍족하게 될 수가 있는 것이다. 옛날의 군제(軍制)를 보면 늘 예속되어 있는 진영이 없었고 진영도 일정하게 정해진 제도가 없었다. 사태가 발생하면 아장(牙璋)245) 으로 육사(六師)를 동원하고 사태가 진정되면 사졸(士卒)들을 기꺼이 농사에 종사하게 하였다. 이렇게 하였기 때문에 군량을 수송하는 사람들도 고달프지 않았고 성벽도 더욱 빛을 발했던 것이었다.

우리 나라 초기의 병제(兵制) 역시 그러하였다. 3부(府)가 2사(司)로 되고 2사가 5위(衛)로 되었는데, 위에는 5부(部)를 두고 부에는 4통(統)을 두었으며 재추(宰樞) 10인이 도총관(都摠管)도 되고 부총관(副摠管)도 되었다가 1년이 되면 체차되었을 따름이었다. 그런데도 가령 하경복(河敬復)·황형(黃衡)·최윤덕(崔潤德)·어유소(魚有沼) 같은 사람들을 보면 제사드린 고기를 받고서 길을 떠나 멀리 사막 지방에 출전하여 한해(瀚海)246) 를 건너기도 하면서 중국으로부터 상을 받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맹부(盟府)247) 에 공이 기록되고 역사에 이름을 남긴 자를 보건대 어찌 근래 5영(營)에서 하는 것처럼 하면서 그렇게 될 수가 있었겠는가. 그래서 바로 즉위 초기에 조참(朝參)을 행하면서 쓸데없는 것을 없애고 식량을 풍족히 할 계책을 물어 보았을 때에 맨 먼저 5영을 언급하면서 수어청과 총융청(摠戎廳) 2영의 존폐 문제를 끄집어내어 조정 신하들에게 의논해 보도록 한 것이었다.

그런데 총융청의 중요함으로 말하면 훈련 도감이나 어영청에 버금간다고 하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 동안 20년 간에 걸쳐 대충 마음속으로 헤아려 보았다마는 총융청에 대해서는 우선 놔두고 신중하고도 치밀하게 처리해야 하겠다. 그러니 만약 먼저 시험삼아 조금 손을 써 보기로 한다면 수어청의 군영보다 앞설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지금부터 수어청을 폐지하도록 하라. 대저 수어사의 이름이 반쪽은 안에 있고 반쪽은 밖에 있게 된 것이나 군영의 관아가 나갔다 들어왔다 한 것은 조정에서 서로들 갑론을박한 데에 많은 이유가 있다. 이 뒤에 감히 확정된 의논에 대해 발언하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왕법(王法)으로 처리할 것이다."

하자, 좌의정 유언호가 아뢰기를,

"수어청을 일단 혁파하기로 한다면 수어사는 마땅히 유수로 교체시켜 진영에 내보내야 할 것이고 부윤도 감하(減下)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유수를 오늘의 정사에서 임명하여 비답을 내리시고 시행해야 할 규모에 대해서도 잇따라 절목을 작성하게 하여 계하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전후의 사례를 보면 본따 행할 만한 일들이 많습니다. 경청(京廳)을 없애고 아문을 폐지하는 문제는 소상하게 강구하여 정해야만 영구히 전해지면서 폐단이 없이 유익하게 될 것입니다. 전(前) 수신(帥臣)으로 하여금 서울과 지방의 문적(文蹟)을 뽑아내 본사의 등록과 비교 검토케 한 뒤 묘당에서 절목을 작성해 내게 함으로써 준행(遵行)할 소지를 마련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고, 하교하기를,

"수어청을 혁파하려고 하는 것은, 첫째 즉위 초기의 조참(朝參)하던 날 내렸던 윤음(綸音)을 실행에 옮기기 위함이요, 둘째 경기 백성들의 폐단을 줄여주고 병폐를 제거해 주기 위함이요, 셋째 경비에 보탬이 되게 하고 쓸데없는 비용을 없애기 위함이다. 그런데 제도를 처음 정할 때 만약 심사숙고해서 마련하지 않는다면 어찌 멀리 이어질 좋은 계책이 될 수 있겠는가.

이전에 혹 내보내기도 하고 혹 들여오기도 한 것이나 반 쪽은 지방에 있고 반 쪽은 서울에 있게 된 그 폐단의 원인을 따져보면 전적으로 경청을 혁파하지 않고 그냥 둘 것인지 없앨 것인지에 대해 특별한 조치를 내리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이다. 이번에는 진영으로 내보내는 것이 아니라 바로 경청 자체를 없애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폐단을 바로잡는 요결(要訣)이라 할 것이니, 사목(事目)의 조항들도 이에 의거해서 마련하도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3책 43권 19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594면
  • 【분류】
    왕실(王室) / 행정(行政) / 군사(軍事)

○次對。 罷守禦京廳, 陞廣州府爲留守。 上謂大臣、諸臣曰: "有國所重, 戎政是也。 裕財足食, 當自汰冗兵始。 戊戌初元六條之詢, 先及軍營之制, 而因循至今, 徒言未行矣。 守禦廳因革無常, 內外俱疲, 不可不及今變通。 卿等之意何如?" 左議政兪彦鎬曰: "我朝軍制多門, 國用秏竭。 至如守禦廳之仍革當否, 先輩亦多言之。 今若罷守使而差留守, 則其於汰冗足食之方, 豈不大有益哉?" 右議政蔡濟恭曰: "我國軍制, 以京軍門爲名者, 多至五六。 其中守禦使, 自是節制南城之任, 而今乃設置京廳, 留在輦轂, 諸般需用, 只是秏損南城之財, 而無益於國矣。 今者宵旰心籌, 積費商度, 以革罷京廳, 聖斷赫然, 臣豈有他見乎? 若此則府尹自當減下。 罷守使而差出留守, 食府尹之廩, 行府尹之事, 而凡係前日京廳秏費, 一竝掃除, 則月計歲計, 補益必多。 請以此, 令廟堂成出節目。" 守禦使沈頣之曰: "守使專管南城, 則設置京廳, 已是無義, 況以無軍之將, 只率如干標下, 猥參於五營之列者, 尤爲不當。 且南城雖有留營別將, 城內之事, 尹專管, 守使策應其間, 亦多牴牾難處之端。 今若罷京廳, 而出鎭南城, 則似有益矣。" 兵曹判書沈煥之曰: "守禦廳事勢, 苟無別般變通, 則不可支矣。" 廼敎曰: "予嘗以爲, 軍營無百年之制。 國可富而兵可精, 民可支而財可足。 古者軍無常隷之營, 營無恒定之制。 有事則牙璋發六師, 事已則士卒樂耕稼。 如是故, 芻輓不勞, 壁壘增彩。 國初兵制亦然。 三府爲二司, 二司爲五衛, 衛有五部, 部有四統, 而宰樞十人爲摠管都副, 分釐之, 歲周則遞而已。 如河敬復黃衡崔潤德魚有沼諸人之受脤啓行, 遠出沙漠, 梁瀚海而銘燕然。 功在盟府, 名留簡編者, 何常髣髴於近日五營之爲, 而有是哉? 此所以初元朝參, 問汰冗足食之策也, 首及於五營, 拈出守摠二營之存罷, 而雜議於廷臣者也。 摠戎緊關, 亞於訓御, 不須說。 邇來卄載之間, 略有心籌之揣摩, 姑舍鄭重縝密, 而苟欲先嘗而小試之, 孰先於守禦之爲營乎? 自今罷守禦廳。 大抵使名之半內半外, 營府之乍出乍入, 多係朝論之彼此甲乙。 後敢有發言於刻印者, 勻石在王府。" 左議政兪彦鎬啓言: "守廳旣罷, 則守禦使, 當以留守出鎭, 而府尹在所當減。 留守今日政下批, 而合行規模, 續當成出啓下矣。 前後事例, 多有倣行者, 而至於京廳拔本之道, 衙門存減之宜, 消詳講定, 然後可使傳之永久, 有益無弊。 請令前帥臣, 抄出京外文蹟, 參互本司謄錄, 自廟堂, 成出節目, 以爲遵行之地。" 允之。 敎曰: "守禦廳之革罷, 一則踐言於初元朝參日綸音, 一則爲民省弊祛瘼, 一則裨經用而汰冗費。 然而定制之初, 若不磨礪百錬, 則是豈悠久經遠之謨乎? 前此或出或入, 半鄕半京, 究厥弊源, 專在於不罷京廳, 沿革無別而然。 今番則非出鎭, 卽罷營, 此其釐弊之頭腦。 事目條件, 依此磨錬。"


  • 【태백산사고본】 43책 43권 19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594면
  • 【분류】
    왕실(王室) / 행정(行政) / 군사(軍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