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훈을 예산현으로 정배하다
이승훈(李承薰)을 예산현(禮山縣)으로 정배(定配)하였다. 하교하였다.
"상을 주고 벌을 주는 것이야말로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사람을 고무시키고 사람을 단속시키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할 것이니 어찌 상만 주고 벌은 안줄 수가 있겠는가. 그렇게 되면 바른 이를 들어 쓰기만 하고 잘못된 이를 내치지 않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 도리에 대해서 우상이 일찍이 연석(筵席)에서 아뢰었는데 그래서 지금 이를 기꺼이 듣고 조치하는 즈음에 짐작해서 행하는 것이다.
현재 소란스럽게 된 사태에 대해서 말하더라도 그렇다. 서양의 서적이 우리 나라에 출현한 지가 벌써 수백 년도 더 된다. 그런 관계로 사고(史庫)와 옥당에 예전부터 소장해 오던 것 속에도 모두 들어 있었는데 그 숫자가 몇 십 편질(編帙) 정도만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연전에 특명으로 이것들을 모두 거두어서 내다 버리라고 하였는데 이것만 보아도 서양의 책을 구입해 온 것이 오늘날에 비로소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고(故) 상(相) 충문공(忠文公)의 문집 속에도 서양인 소림대(蘇霖戴)와 왕복하면서 그 법서(法書)를 구해 본 일이 적혀 있는데, 이에 대해서 말하기를 ‘상제(上帝)와 대면한 가운데 자신의 온전한 성품을 회복하려 하는 점에서는 애당초 우리 유학과 다를 것이 없는 것같다. 그러니 청정(淸淨)을 주장하는 황(黃)·로(老)228) 나 적멸(寂滅)을 주장하는 구담(瞿曇)229) 과 같은 차원에서 논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익만을 꾀하는 삶을 방불케 하고 보응(報應)에 관한 주장을 거꾸로 취하고 있는데 이런 식으로 천하를 바꾼다는 것은 어려운 것이다.’ 하였으니, 고 상의 말이 그 이면까지 상세히 변론했다고 할 만하다. 그런데 간혹 순전히 공격하며 배척한 경우도 있었는데, 고(故) 찰방 이서(李溆)의 시를 보면 심지어 ‘야만인이 전한 이상한 학술 도덕을 해칠까 두려워지네.[夷人傳異學恐爲道德寇]’라고까지 하였다.
대저 근일 이전에도 박아(博雅)한 인사들이 미상불 한 마디씩 평가하는 말을 하였지만 완만하게 하든 준열하게 하든 간에 그 당시에는 별로 영향을 주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정학(正學)이 밝혀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 폐해가 사설(邪說)보다도 심하고 맹수보다도 더 커지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오늘날 폐단을 바로잡는 방도에 있어서는 정학을 더욱 밝히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에 대해서도 특별히 착한 일을 표창하고 악한 일을 징계하는 정사를 펼친 뒤에야 그런대로 효과를 거둘 수 있게 될 것이다. 습속을 바로잡는 데에 형륙(刑戮)의 방법을 쓰는 것은 가장 차원이 낮은 것인데, 더구나 그 학술에 대해서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런데 어제 이미 최헌중(崔獻重)을 발탁해 임용하면서 정도(正道)를 일으켜 세우고 사도(邪道)를 물리치도록 하였다. 그렇게 한 뒤이고 보면 연전에 서양의 책을 구입해 온 이승훈에 대해서 그가 의식적으로 그렇게 했건 무의식적으로 했건 따질 것 없이 그를 털끝 하나 다치지 않게 하면서 감히 그의 집에서 편안히 있게 해서야 되겠는가. 이는 형정(刑政)에 관계되는 일이다. 승훈의 아비가 책을 불사른 증거와 그 뒤 승훈이 글을 작성하여 자기 죄를 털어놓은 사실이 또한 공가(公家)의 문서에 드러나 있기는 하다마는, 마음을 고쳐 먹은 것은 고쳐 먹은 것이고 그런 짓을 저지른 것은 저지른 것인만큼 일단 그의 이름이 공거(公車)230) 에 올라와 있는 상황에서 즉시 처분을 내려주지 않는다면 역시 그 사람을 그 사람답게 대우해 주는 의리가 되지 못한다고 할 것이다. 전 현감 이승훈을 예산현으로 정배하라. 이 밖에 민간의 서민들 가운데 상을 주고 벌을 주어야 할 일이 있다면 이는 바로 유사가 처리할 문제이니 묘당에서 유사를 신칙하도록 하라. 진정 성심으로 권면시키고 징계시키되 들쑤시지도 말고 따라가기만 하지도 말며 잊지도 말고 조장하지도 않는다면 그 효과를 가까운 시일 내에 볼 수 있게 될 것이니, 이런 내용으로 분부토록 하라. 이와 같이 펼쳐 보여줬는데도 뒤에 다시 그 학술에 대한 문제로 수응(酬應)하는 일이 있게 된다면 그런 조정을 조정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 【태백산사고본】 43책 43권 12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590면
- 【분류】사법(司法) / 사상(思想)
- [註 228]
○乙亥/配李承薰于禮山縣。 敎曰: "賞罰, 爲有國聳人勵人之端焉。 有賞無罰, 何異於擧直而不錯枉乎? 此箇事理, 右相曾有筵奏。 此所以樂聞, 而默運於施措之際者也。 以目下鬧端言之, 西洋之書, 出來於東國者, 已爲數百餘年, 史庫、玉堂之舊藏, 亦皆有之, 不啻幾十編帙之多。 年前特命收取出置, 卽此可知購來之非今斯今, 而故相忠文公文集, 亦有與西洋人蘇霖戴往復, 求見其法書, 而其言以爲: ‘對越復性, 初似與吾儒無異, 不可與黃ㆍ老之淸淨, 瞿曇之寂滅, 同日而論。 然彷彿牟利之生, 反取報應之論, 以此易天下, 則難矣’ 云云。 故相之言, 可謂詳卞其衷面, 而亦或純然攻斥者有之, 故察訪李漵詩, 則至以爲: ‘夷人傳異學, 恐爲道德寇。’ 大抵近日以前, 博雅之士, 未嘗不立言評騭, 而其緩其峻, 無足有無於其時, 而今也正學不明也, 故其爲弊害, 甚於邪說, 浮於猛獸, 爲今日捄弊之道, 莫過於益明正學。 且就世人, 另行彰善癉惡之政, 然後庶可責其功。 刑戮之於矯俗, 末也, 況厥學乎? 昨旣擢用崔獻重, 以扶正斥邪之後, 年前購來之李承薰, 無論有情無情, 其可不損一毫, 敢使息偃渠家? 有關於刑政者。 承薰之父焚書之證, 其後承薰著文訟罪一款, 亦發於公家文蹟, 而革心自革心, 犯手自犯手。 名旣登於公車, 則不卽處分, 亦非人其人之義。 前縣監李承薰, 投之禮山縣。 外此下里編戶, 有可賞可罰之類, 此卽有司存, 廟堂提飭有司。 苟能誠心勸懲, 而不激不隨, 勿忘勿助, 則其效可以時日期待, 以此分付。 如是敷示之後, 更以厥學事有酬應, 則其可曰有朝廷乎?"
- 【태백산사고본】 43책 43권 12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590면
- 【분류】사법(司法) / 사상(思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