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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 43권, 정조 19년 7월 24일 계유 1번째기사 1795년 청 건륭(乾隆) 60년

관학 유생 박영원 등이 천주교로 혹세무민하는 이가환 무리의 전형을 상소하다

관학(館學) 유생 박영원(朴盈源) 등이 상소하기를,

"아조(我朝)의 예악(禮樂) 문물(文物)은 중화(中華)와 같다고 불리워 왔습니다. 그런데 하나의 음험하고 사특한 무리가 서양(西洋)의 서적을 구입해 와 스스로 교주(敎主)가 된 뒤 이단(異端)의 학설을 주창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부자유친(父子有親)과 군신유의(君臣有義)의 의리를 끊어버리고 무시하는가 하면 남녀의 구별을 없애 부부의 윤리를 어지럽게 하고 있으며 상례(喪禮)와 제례(祭禮)도 모두 없애 귀신과 사람의 이치가 끊어지게 하고 말았습니다. 이와 함께 정욕(情慾)대로 누구나 행하게 하는 바람에 예악(禮樂)으로는 교화할 수가 없게 되었고 천당(天堂)과 지옥(地獄)의 설이 일어나면서 형정(刑政)으로도 제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예(禮)·의(義)·염(廉)·치(恥)야말로 인간의 품위를 유지하게 하는 큰 제방(堤防)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위와 아래를 뒤섞어 귀천(貴賤)을 구분하지 않는가 하면 벌거벗고 소리쳐도 조금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게 하고 보면 그 교설(敎說)이 행해지기가 쉽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재물과 이성(異性)이야말로 사람에게 있어 커다란 욕망의 대상이라 할 것인데 돈과 곡식을 서로 나누어 주어 빈한한 자와 구걸하는 자들이 생활할 수 있게 하는가 하면 내외(內外)의 구별을 없애 제멋대로 간음(姦淫)을 할 수 있게 하고 있으니 그 무리들이 쉽게 불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조금 재주와 지식이 있는 사부(士夫)가 이 교설을 빌려다가 우매한 대중을 현혹시키자 멍청하게 아무 식견도 없는 무리들이 그 도를 좋아해 신명(神明)처럼 떠받들면서 서로들 유혹해 백 명 천 명의 집단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황건적(黃巾賊)이나 백련교도(白蓮敎徒)가 일으킨 그런 변란이야 필시 없으리라는 것은 신이 알고 있습니다만, 그가 어버이를 버리고 벗을 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패거리를 불러모아 결탁한 다음 살기 싫은 세상을 떠나 빨리 저 세상으로 가자면서 유혹하고 선동한다면 어떤 변인들 일으키지 못하겠습니까.

몇 년 전 윤지충(尹持忠)의 변을 생각하면 뼛속까지 오싹해지는데, 경기와 호남 사이에 기맥을 서로 통한 결과 도성 안에서까지 패거리를 결성하는 등 매우 번성하여 올해에 또 인길(仁吉) 3적(賊)의 변이 발생하였습니다. 그런데 거괴(巨魁)가 아직도 목숨을 보전하고 있는가 하면 패거리들도 약간의 형륙(刑戮)만 받았을 뿐이니, 어찌 대간(大奸)에게 있어서는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생각건대 저 이가환이 당초에 깊이 빠져든 것에 대해서는 이미 확실한 증거가 있는데 끝에 가서 이단의 교설을 조금 물리쳤다고 하는 무슨 명백한 증거라도 있습니까. 그러나 그가 범한 죄를 논한다면 조정의 주벌(誅罰)을 어떻게 감히 피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가령 정약전(丁若銓)의 대책(對策)에 대해서는 이미 성상의 분부를 받든만큼 감히 다시 제기하지는 않겠습니다만, 그 형제가 본래 가환으로부터 법을 전해 받은 신도로서 사학(邪學)의 우익(羽翼)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만 사람의 입을 막기 어려울 것입니다. 또 이승훈(李承薰)이 요서(妖書)를 구입해 와서 그 흉악한 외삼촌을 학습시켰다고 한세상이 모두 전하고 있고 보면 그 패거리로서의 주벌을 어떻게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가 하면 경기 지방의 권일신(權日身)과 호서(湖西)의 이존창(李存昌) 같은 무리들로 말하면 전의 형옥(刑獄)에서 모두 자복(自服)했었는데 옥문(獄門)을 나오자마자 또 다시 예전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먼저 가환의 무리부터 전형(典刑)으로 분명히 바로 잡음으로써 그 패거리들이 단속할 줄을 알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너희들이 현관(賢關)221) 에 끼어 있으면서 정학(正學)을 밝히려 하는 그 말은 옳다. 그러니 어찌 가상하게 여겨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그런데 너희들은 저 거울이 밝게 비추고 저울대가 평평한 그 체성(體性)을 아는가. 그 본연(本然)의 체성을 온전히 보전하는 까닭은 바로 공정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공정하다고 하는 것은 생각마다 일마다 물건마다 말하는 것마다 한결같이 천리(天理)의 바름에서 나와 어긋나거나 불순한 것이 섞이지 않고 편파적인 요소도 없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요소가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더욱 힘쓰라는 훈계를 몸받아 치열하게 공부해 나가면서 공정한 안목으로 사물을 관찰한다면, 공의(公議)에는 누(累)를 끼치더라도 외부의 사특한 것을 배척하는 일에 대해, 그 누구라서 감히 모범을 보이고 언론(言論)이 나오는 곳인 성균관을 두고 딴 소리를 할 수가 있겠는가. 현관(賢關)이 존엄해지기만 한다면 정학(正學)에 대해서 진정 위청(衛靑)이나 곽거병(霍去病)과 같은 효과를 거둘 수 있게 될 것이다. 너희들은 나의 마음으로 마음을 삼아 물러가서 《중용(中庸)》 서문(序文)《맹자(孟子)》 호연장(浩然章)을 읽되 글자마다 그 글자의 뜻을 이 해하고 구절마다 그 구절의 뜻을 이 해하도록 노력하면서 침잠하여 음미하고 반복하여 연구해서 깊이 창명(倡明)할 방도를 강구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현관이 존엄해지지 못하는 것은 다사(多士)의 수치요, 사습(士習)이 옛스럽지 못한 것은 학관(學官)의 수치이다. 오늘 태학(太學)의 상소문을 보니 척사(斥邪)하는 내용으로서 근래 대각(臺閣)의 일을 떠맡아 행하는 잘못된 규례와는 같지 않기에 상소문을 보는 즉시로 비답을 내려 주었다.

그런데 뒤에 가서 무슨 말 끝에 물어보니,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중에 행공(行公)하는 재임(齋任)이 없는 가운데 재유(齋儒)들이 제멋대로 상소문을 작성한 다음 상소 첫머리에 관학 유생이라고 썼다고 하는데, 이는 현관이 생긴 이후로 들어보지 못했던 일이다. 장의(掌議)222) 가 유생들을 통솔하는 체모로 말하면 총재(冢宰)가 백관을 총괄하는 것보다도 오히려 중한 점이 있으니, 장의의 위차(位次)가 미처 정돈되지 않았다면 태학의 질서가 정비되었다고 할 수가 없다. 더구나 상소를 올리는 일이라면 얼마나 중대한 일이라 하겠는가. 그리고 아뢰려고 하는 사안(事案)이 일단 그날 바로 결정을 내려 쟁집(爭執)할 성격의 것도 아니고 보면 장의가 행공(行公)할 때까지 조금 기다렸다가 봉장(封章)한다고 해서 안될 것이 뭐가 있기에 이런 식으로 예전에 없던 행동을 한단 말인가. 그러고 보면 일전에 비답을 내려 유시했던 뜻이 과연 어디에 있다고 하겠는가.

《중용》에 이르기를 ‘도(道)를 닦는 것을 교(敎)라 한다.’고 하였는데, 교라고 하는 것은 형정(刑政)이 바로 그것이다. 오늘날 제생(諸生)의 일이 교를 따른 것인가, 따르지 않은 것인가. 성묘(聖廟)의 성문법을 삼가 지킨 것인가, 그렇지 못한 것인가. 분명히 드리워 준 가르침을 아랑곳 하지도 않고 관원의 임무를 침해하는 데 따른 혐의도 거들떠보지 않은 채 앞장서서 장의(掌議)가 할 일을 대신 행한 재생(齋生)에 대해서 반장(泮長)223) 으로 하여금 엄히 벌을 주게 한 뒤 초기(草記)하도록 하라.

사유(師儒)의 우두머리인 신분으로 성균관에서 예전에 없던 일이 일어나는 것을 목도하고서도 사전에 제대로 금지하지 못했으니 직무 수행에 불성실한 죄가 작지 않다. 심지어는 하나의 일로 각자 소를 올리기까지 하였으니 또한 얼마나 심했다 하겠는가. 그런데 사세(事勢)를 보건대 그 동안 대신(臺臣)이 취했던 행동과는 다른 점이 있으니 그런 일에 비교하면 예사(例事)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앞에 한 일이건 뒤에 한 일이건 경책(警責)하는 일이 있어야 할 것이니, 당해(當該) 대사성을 중하게 추고(推考)하도록 하라. 그리고 이 뒤로 장의(掌議)가 없는 상태에서 상소를 올릴 경우, 유생에게는 태학의 성전(成典)에 기재되어 있는 벌 중에서 중전(重典)을 적용하고, 반당(泮堂)에게도 역시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을 적용하는 것으로 성전에 기재해 넣도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3책 43권 9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589면
  • 【분류】
    정론(政論) / 사상(思想)

○癸酉/館學儒生朴盈源等上疏曰:

我朝禮樂、文物, 號稱中華, 而一種陰邪之徒, 購來西洋之書, 自作敎主, 倡爲異學, 絶父子之親, 蔑君臣之義。 男女相瀆, 而夫婦之倫亂; 喪祭竝廢, 而神人之理絶。 情慾之私熾, 而禮樂之所不能化; 堂獄之說興, 而刑政之所不能威。 禮義、廉恥, 人之大防, 而冠屨混雜, 不卞貴賤, 裸裎胡叫, 少無羞惡, 則其敎易行; 貨財、男女, 人之大慾, 而金穀相資, 貧丐得生, 內外無別, 姦淫得肆, 其徒易聚也。 士夫之稍有才智者, 假是說而誑惑愚俗, 衆庶之懜無知識者, 樂其道而奉若神明, 轉相敎誘, 千百爲群。 黃巾白蓮之變, 臣雖知其必無此事, 而彼以遺親重友之心, 嘯聚朋結, 以樂死惡生之心, 誑誘煽動, 則何變不作? 往年持忠之變, 思之骨驚, 而畿湖之間, 聲氣相應, 闉闍之內, 徒黨寔繁。 今年仁吉三賊之變又出, 而巨魁尙保首領, 黨與略被刑戮, 此豈非大奸之幸耶? 惟彼李家煥, 當初沈惑, 旣是眞贓, 末稍辭闢, 有何明證? 論其負犯, 則兩觀之誅, 焉敢逃乎? 至若丁若銓之對策, 旣承聖敎, 不敢更提, 而渠之兄弟, 本以家煥之傳法沙門, 羽翼邪學, 萬口難掩。 李承薰之購得妖書, 學習凶舅, 一世皆傳, 則黨與之誅, 安得免乎? 畿縣之日身, 湖西之存昌, 年前刑獄, 渠皆自服, 而纔出獄門, 又復如前。 伏願先從家煥輩, 明正典刑, 使其黨有所知戢焉。

批曰: "爾等廁在賢關, 欲明正學, 言則是矣, 豈不嘉納? 然爾等觀夫鑑空衡平之體乎? 所以全其本然之體者, 卽惟曰公也。 公也則念念事事, 物物言言, 一出於天理之正, 不忮不雜, 無偏無陂之謂也。 猛下工程於有改無勉之戒, 公眼察物, 累公議斥外邪, 孰敢有異辭於首善之地, 言論所自出處乎? 賢關尊, 則於正學, 眞箇有〔霍〕 之效。 爾等以予心爲心, 退讀《中庸》 《序文》《孟子》 《浩然章》, 字會字義, 句會句義, 沈潛咀嚼, 反復玩繹, 深講倡明之道。" 敎曰: "賢關不尊, 多士之恥; 士習不古, 學官之羞。 今日太學之疏, 其言則斥邪, 不似近來替行臺閣事之謬規, 覽卽賜批。 追因言端問之, 東西齋中, 無行公齋任, 而齋儒輩, 擅自治呈, 疏之頭辭, 書之以館學儒生云者, 此自有賢關以來所未有者。 掌議之領多士, 體貌反有重於冡宰之摠百官, 掌議不押班, 無得爲太學之班。 況疏擧何等重大, 而所言之事, 旣非時日是爭, 則差待行公後封章, 有何不可, 爲此無於前之擧? 日前批諭之意, 果安在哉? 《中庸》曰: ‘修道之謂敎。’ 敎者刑政是也。 今日諸生之事, 率敎乎? 不率敎乎? 謹守聖廟之成憲乎? 否乎? 不有昭垂之訓飭, 不顧侵官之嫌貳, 而挺身代行, 掌議之齋生, 令泮長, 嚴加施罰後草記。 身爲師儒之長, 目見館中創有之事, 不能先事禁止, 溺職非細, 至於一事各疏, 亦甚如何, 而事勢有異於向來臺臣所爲。 比之本事, 可謂例事, 而由前由後, 當有警責, 當該大司成從重推考。 此後無掌議而封章者, 儒生施以太學成典所載之重典, 泮堂亦用制書有違之律事, 載之成典。"


  • 【태백산사고본】 43책 43권 9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589면
  • 【분류】
    정론(政論) / 사상(思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