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정조실록 42권, 정조 19년 5월 22일 임신 1번째기사 1795년 청 건륭(乾隆) 60년

호남 어사 이희갑이 나주목의 아사 사건과 익산군의 창고 곡식을 판 사건을 아뢰다

호남 어사(湖南御史) 이희갑(李羲甲)이 복명(復命)하고 서계(書啓)를 올리기를,

"나주목(羅州牧)에서 기민(飢民)이 목숨을 잃은 사건과 관련하여 조사관을 별도로 정한 뒤 입회하여 사실을 규명하게 하였더니, 본주(本州)의 동문(東門) 밖에 매장한 곳이라는 데가 바로 하나의 논두렁으로서 이리저리 넘어져 있는 시체 위에 흙도 덮지 않았는데 그 숫자가 도합 26구(軀)였으며, 그 밖에 뼈가 드러나 있는 곳이 아홉 곳이었고, 남문(南門) 밖에 쓰러져 죽은 시체가 4구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즉시 직접 감독하여 다시 묻어주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외창(外倉)에 속한 각 면리(面里)에서 전후에 걸쳐 죽은 기민의 숫자가 또한 64명이었는데 이들은 진휼(賑恤)을 시작한 초기에 이렇게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진휼하는 일에 전혀 힘을 쏟지 않았을 뿐더러 시체도 일체 그냥 내버려 두었으니 이는 정말로 차마 못할 일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곡물을 마련했다고 하는 일도 스스로 마련했다고 칭한 것일 뿐 사실은 본읍(本邑)에서 진휼용으로 내놓은 사곡(私穀)을 가져다가 쓴 것인데, 이를 가지고 상(賞)을 청하는 소지로 삼았으니, 이 역시 불법(不法)에 관계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해당 목사 조시순(趙時淳)을 우선 봉고 파출(封庫罷黜)시켰습니다.

익산군(益山郡)에서 창고에 남겨둔 곡식을 꺼내어 판 사건과 관련하여 조사관을 정해 사실을 규명해 본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전 군수가 재임할 당시에 지난해의 환곡(還穀)을 전혀 독촉하지 않은 채 받지도 않은 것을 받았다고 하면서 어물어물 마감(磨勘)해 버리기까지 하였고, 그 뒤 영문(營門)에서 획급(劃給)해 보내준 각종 곡물을 돈으로 환산해낼 때에도 미처 상쇄(相殺)시키지 못한 것이 1천 7백 석이나 되었습니다.

이에 현재의 군수가 부임하고나서 돈으로 바치기가 어렵자 가분(加分)154) 의 명색(名色)을 청하여 허락을 받고는 창고에 남겨 두었던 곡물 가운데에서 벼 1천 석과 미곡 4백 석을 꺼내어 창고 담당 아전에게 준 뒤 그것을 돈으로 바꾸어 그만한 액수를 채우게 하였습니다. 사세(事勢)를 논한다면 부득이한 처지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겠지만 가분을 얻어내고 창고 곡식을 꺼내어 파는 등 서로 바꿔치기한 것은 역시 법의 뜻에 어긋난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순영(巡營)에 낱낱이 보고할 수도 없는 일이겠기에 그냥 놔두고 논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희갑에게 입시(入侍)하라고 명하고, 하교하기를,

"익산의 환곡 사건은 과연 어떻게 된 것인가?"

하니, 희갑이 아뢰기를,

"당시의 수령이 영문에 보고하고 가분(加分)해 달라고 청하였는데도 지난해에 받아들이지 못한 환곡을 지금 여전히 독촉하며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명색이 환곡인데 지금도 여전히 독촉하며 받아들이고 있다니 정말 놀랍기만 하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암행 어사가 출도(出道)도 하지 않은 채 남몰래 갔다가 남몰래 돌아왔다는 것은 예전에 듣지 못하였다. 시체가 구렁에 뒹굴고 있는 것을 눈으로 보고도 출도를 하지 않은 탓으로 다시금 가서 조사를 벌이는 일이 있게까지 하였다. 물론 생소한 탓도 있겠지만 그지없이 경솔하게 행동했다고 하겠다. 처음과 두 번째 올린 계사(啓辭)의 체례(體例)도 모두 착오를 범했는데, 그 잘못된 것이 임금의 명만 욕되게 했다고 말할 수가 없다. 해당 어사 이희갑에게 서용(叙用)하지 않는 처벌을 시행토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2책 42권 69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575면
  • 【분류】
    행정(行政) / 구휼(救恤) / 인사(人事) / 사법(司法)

  • [註 154]
    가분(加分) : 정수(定數) 이상의 대출(貸出) 행위.

○壬申/湖南御史李羲甲復命, 進書啓曰:

羅州牧飢民致命事, 別定査官, 眼同究覈, 則本州東門外埋瘞之處, 卽一溝塍, 縱橫枕藉, 腹不掩土, 而其數合爲二十六, 其他露骨爲九處, 南門外僵屍爲四名, 故臣卽親監改瘞。 外倉屬各面里飢民之前後物故者, 亦爲六十四名, 自設賑之初, 有此致命云。 賑事之全不致力, 又一任其暴露者, 事極不忍。 自備穀事, 稱以自備, 取用本邑私賑穀, 以爲請賞之地。 事係不法, 該牧使趙時淳爲先封庫罷黜。 益山郡留庫穀發賣事, 定査官究覈, 則前郡守在任時, 昨年還穀, 全不催督, 以未捧爲已捧, 至於漫漶磨勘矣。 及夫營門劃送各樣作錢也, 未及收殺者爲一千七百石零。 時郡守到任後, 難於捧錢, 請得加分名色, 而就於留庫中, 租一千石零及米四百石零, 出給倉吏, 使之作錢, 以充其數。 論其事勢, 雖出於不獲已, 加分發賣之互相移易, 亦乖法意, 不可以枚報巡營, 置而不論。

上命羲甲入侍, 敎曰: "益山還穀事果何如?" 羲甲曰: "時倅報營, 請得加分, 而昨年未捧之還, 今尙督捧矣。" 上曰: "名以還穀, 今尙督捧云者, 萬萬駭然。" 又敎曰: "繡衣之不出道, 潛往潛來, 事未前聞。 目擊塡壑, 而不爲出道, 以致更往行査之擧者, 生踈之外, 輕率莫甚。 初再啓體, 亦皆做錯, 其爲僨誤, 不可但以辱命言, 當該御史李羲甲施以不敍之典。"


  • 【태백산사고본】 42책 42권 69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575면
  • 【분류】
    행정(行政) / 구휼(救恤) / 인사(人事) / 사법(司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