읍청루에 거둥하여 수군 훈련을 행하다
별영(別營)으로 가서 읍청루(挹淸樓)에 거둥하여 수군(水軍) 훈련을 행하였다.
선전관(宣傳官)에게 명하여, 신전(信箭)을 가지고 가서 후위부대 마병(馬兵) 별장(別將)으로 하여금 갑사(甲士)을 이끌고 동구(洞口)에 작문(作門)117) 을 설치한 뒤 엄히 약속(約束)118) 을 밝혀 한 사람도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게끔 하였다. 그래서 대신(大臣) 이하 배종(陪從)한 신하들이 모두 들어가지 못한 가운데 오직 승지 두 사람과 사관(史官) 두 사람만 따라 들어갔다.
상이 읍청루에 올라갔다. 읍청루 앞 일대의 강 위에 집결된 공사(公私)의 선박 3백여 척을 나누어 선대(船隊)를 형성하였는데 다섯 척씩 연합하게 하였다. 악대(樂隊)를 나누어 싣고서 일제히 연주토록 명하였다. 수군 훈련을 끝낸 뒤에 별영(別營)의 직소(直所)로 돌아와 대신에게 입시(入侍)하라고 명하였다. 좌의정 유언호(兪彦鎬) 등이 앞으로 나아가 엎드려 문안을 여쭈었는데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상이 이르기를,
"오늘 이곳에 행차한 것은 참으로 이유가 있다. 그런데 경들이 차자를 올려 명령을 도로 취소하라고 하는 등 지나친 염려를 하는 듯하기에 차자에 대한 비답에서 또한 이미 자세히 유시했었다. 지금 비로소 관례대로 불러서 접견을 하고 바야흐로 환궁하려 한다. 그러니 경들이 염려한 것이 어찌 지나친 것이 아니겠는가.
옛사람은 말하기를 ‘병사(兵事)에서는 속이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임시방편으로 행하되 중도(中道)를 얻는다.’고 하였다. 그런데 비록 병사가 아닌 일이라 하더라도 더러는 속이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 법이다. 그리고 임시방편[權]이라는 한 글자야말로 성인이 아닌 한 무턱대고 의논할 수가 없는 법이다.
내가 감히 스스로 성인이라고 말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그야말로 소망하는 것은 성인을 배우는 것이다. 만약 임시방편을 행할 적에 상도(常道)에 어긋나지 않게만 한다면 권(權)이 경(經)과 합치되는 것이니 이 또한 하나의 방법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내가 강구해 온 것은 오로지 여기에 있다.
지금 경들을 대하여 이렇게 말을 했으니 경들이 어쩌면 나의 마음을 알아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만약 혹시라도 특별히 하교할 일이 있어서 들어오는 것을 허락치 말도록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이 또한 지나치게 염려한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은 일이 원만하게 타결되어 환궁하게 되었으니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언호가 아뢰기를,
"친히 타위(打圍)119) 를 행하시는 일이 《오례의(五禮儀)》에 실려있기는 합니다만 옛사람 중에는 또한 정지하기를 청한 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행차하신 일과 관련해서는 신들이 죽을 죄를 짓고 과연 함부로 헤아리며 지나치게 염려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제 실제로 차자를 올려 도로 명령을 취소하시라고 청했던 것인데, 지금 지나치게 염려할 것이 없다는 분부를 받들고 보니 아랫사람의 심정으로서 다행스럽게 여겨집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타위(打圍)란 바로 수렵을 일컫는 말이다. 고(故) 상(相) 남구만(南九萬)도 일찍이 타위를 정지하도록 청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수군 훈련을 친히 살펴보는 것은 타위와는 벌써 다른 점이 있다. 그렇다면 쟁집(爭執)할 단서가 뭐가 있겠는가. 더구나 내가 그동안 계속 마음 속에 두어온 일을 이제 일단 뜻대로 풀었는데, 나에게도 중도(中道)에 지나친 일이 없었고 조정의 입장에서도 소요를 일으킬 단서가 없었으니, 이 어찌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내가 경들을 속일 이야기를 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올해의 큰 경사는 나에게 있어서는 천 년에 한 번 기회를 맞게 되는 그런 경사라 할 것이다. 그런데 나의 속 마음을 감안해 본다면 경사스러운 해가 똑같이 이 해에 들어있게 된 것이 정말 다행스럽게만 여겨진다. 만약 경사스러운 해가 각기 다른 해로 되었다면 내 심정이 과연 어떠했겠는가.
자궁(慈宮)의 행차를 모시고 가서 술잔을 올리며 장수(長壽)하시기를 기원하였는데, 노인들을 우대하고 백성들을 구휼(救恤)해 준 모든 일이 기쁨을 장식하고 경축하는 마음을 표시하기 위한 것이었고 보면 초목(草木)과 금수(禽獸)까지 모두 같은 즐거움에 동참했다고 말해도 좋은 것이다.
그런데, 유독 저 심도(沁島)120) 에 유배되어 있는 자만은 일찍이 한 번도 연회에 참석해 본 적이 없다. 그에게 죄가 있고 없고는 우선 따질 것 없이 인정(人情)과 천리(天理)로 헤아려 본다면 내가 어떻게 심회(心懷)를 금할 수 있겠는가. 잔을 올리는 의식이 일곱 순배로 이루어졌는데 한 잔씩 올릴 때마다 안주 한 조각 입에 대지 않았었던 것은 바로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이 눈으로 확인한 바이다. 이는 경들을 대하고서 처음 하는 이야기가 아닌데 단지 술만 들고 안주는 입에 대지 않음으로써 내가 그를 생각하는 마음을 표시하고자 한 것일 따름이다.
이 때 이후로 밤이나 낮이나 기다려 온 것이 오늘이었다. 대체로 성인이야말로 인륜(人倫)의 최고 기준이라 할 것이다. 내가 비록 감히 스스로 성인이라고는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경들이 나에게 기대하는 것이야 어찌 인륜의 최고 기준을 행하게 하는 데에 있지 않겠는가. ‘실수를 보고서 그 사람의 인(仁)한 정도를 알 수 있다.’는 성인의 가르침도 있다. 그러니 주공(周公)께서 잘못하신 것이 또한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이미 나의 생각을 다 쏟아놓았으니 경들이 어찌 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겠는가."
하였다. 언호가 아뢰기를,
"일단 주공의 과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만, 성인에게 과오가 있는 것은 과오가 없는 것만은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주공의 경우를 보면 대체로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에게 형벌을 가하였습니다. 따라서 사적인 은혜를 돌아보아 공적인 법을 굽힌다면 어떻게 주공의 과오와 견줄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야말로 원칙에 입각한 정론(正論)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중도에 맞게만 한다면 원칙에 무슨 해가 되겠는가. 그리고 지금 위에서는 지나친 거조가 없고 아래에서는 지나친 걱정이 해소된 가운데 날이 채 저물지 않은 때에 좋은 분위기에서 행차를 돌리게 되었으니 쓸데없이 많은 말을 할 필요가 뭐가 또 있겠는가."
하였다. 언호가 아뢰기를,
"신들이 어제 청대(請對)했다가 윤허를 받지 못했는데 이제 일단 속 마음을 펼칠 여지가 마련되었으니 진달드리고 싶었던 일을 다 말씀드리게 해 주셨으면 합니다.
정치달(鄭致達)의 처를 지금까지 한 하늘 아래에서 살 수 있게끔 한 것이야말로 아랫사람들이 불충(不忠)한 죄라고 할 것인데, 중간에서 도망쳐 나온 변고를 이번의 사단(事端)을 통해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대간의 계사(啓辭)를 윤허하여 주셨기에 여정(輿情)을 펼 수 있게 되었다고 기대했었는데, 전지(傳旨)가 계하(啓下)된 지 지금 며칠이 지나도록 아직껏 죄인을 못잡고 지체시킴으로써 성명(成命)이 오랫동안 행해지지 못하게 되는 결과를 빚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거행을 지체시킨 죄를 유사(攸司)에게만 돌린다면 어찌 너무나도 불성실한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속히 분명하게 분부를 내리시어 그가 자수하게 해 주소서. 이것이 신들의 소망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는 여인의 몸인데 어떻게 조보(朝報)를 알겠는가. 그러니 자수시키려 한들 어떻게 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 일은 급하지가 않으니 지금은 우선 놔두도록 하라. 이 일이거나 다른 일이거나를 막론하고 조금 전에 ‘임시방편으로 행하여 중도(中道)를 얻는다.’라고 한 분부나 ‘과오를 보고서 인(仁)한 정도를 안다.’고 한 분부야말로 나의 고심(苦心)을 표현한 것이라고 하겠다."
하였다. 언호가 아뢰기를,
"신이 늘 의지하며 임금을 섬기는 것은 오직 《명의록(明義錄)》 1부(部)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명의록》을 보건대 의리가 장차 무너질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침묵만 지킨 채 날을 보낼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늘 《명의록》에 의거하고 있다는 것을 나도 물론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정치달의 처를 처분한 것이 어찌 《명의록》에 비추어 볼 때 흠이 되는 일이겠는가. 이런 일들에 대해서 옛사람은 임금의 뜻을 받들어 따르는 것을 아름다움으로 삼았었다. 가령 송 선정(宋先正)121) 같은 경우야 오래된 일이라고 하겠지만 고(故) 상(相) 이경여(李敬輿) 역시 단연코 은혜를 온전히 해주는 것을 위주로 삼았었다. 이들과 같은 유명한 석학들이 어찌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미치지 못해서 그랬겠는가.
내가 이와 같이 처분한 것에 대해서는 스스로 후세에 할 말이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경이 나에게 기대하고 있는 것은 성인보다 한 등급 아래에 있다고 보지 않는 듯하다. 이 일에 대해서는 따질 것이 없다. 임시방편을 써서 중도에 맞게 한다는 말을 통해 대체로 나의 뜻을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지금은 이미 돌려보내었으니 더 이상 말할 것이 없다. 경들은 우선 물러가 있도록 하라. 그러면 장차 분부를 내려 나의 뜻을 보여줄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중외(中外)의 신하들에게 유시하였는데, 그 내용에 이르기를,
"이 해의 이 경사로 말하면 경사스러운 일이 한 해에 모여든 것이었다. 여드레동안 삼가 자궁(慈宮)의 행차를 모시고서 장수를 기원하는 성대한 예식을 대대적으로 거행하였다. 그리하여 하늘의 돌보심에 응답하고 나라의 행복을 크게 기렸다.
음식을 백관들에게 두루 대접해 주었음은 물론이요 삼군(三軍)에까지 꽃을 나누어 주었으며, 낙남헌(洛南軒)에서 주연(酒宴)을 베풀어 노인들을 취하도록 마시게 하였는가 하면 신풍루(新豊樓)에 미곡을 쌓아두고 사민(四民)을 배불리 먹였다.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에게는 솥에 죽을 쑤어 기아(飢餓)를 구제하였고 험한 파도를 헤치고 대규모 선단(船團)으로 쌀을 운반해 흉년이 든 지방을 구제하였다. 그리고 심지어는 배와 말을 동원하며 돈을 가득 싣고 가서 구원하게 함으로써 마침내 삼도(三都)로부터 팔로(八路)에 이르기까지 은혜가 미치게 하였으니, 이는 그야말로 초목과 금수가 모두 스스로 즐기게 되었다고 하는 것으로써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 동방이 온통 환희에 휩싸이게 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유독 저 강화도에 귀양가 있는 사람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끝내 자리에 한 구석이나마 참여하여 술잔 하나도 같이 나누게 할 수가 없단 말인가. 지팡이 짚은 시골 노인이나 백발이 성성한 마을의 하인들에 비교해 보아도 오히려 그보다 못하다 할 것이니, 내 마음에 어찌 섭섭하지 않을 것이며 허전하지 않을 것인가. 이에 그를 보고 싶은 생각에 취한 듯 깬 듯하여 음식을 대하다가 몇 번이나 젓가락을 놓곤 하였으며 밤중에 자다가 탑전(榻前) 주위를 돌아다닌 지가 여러 차례나 되었다. 그러나 한 번 그를 만나기만 하면 번번이 풍파(風波)가 일어나곤 하는데, 이렇듯 전에 없이 좋은 날을 맞이하여 만약 예전의 분위기처럼 되고 만다면 이 또한 대중과 더불어 즐거움을 같이 하려 했던 본래의 뜻이 못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병사(兵事)에는 속이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말과 ‘권도(權道)를 써서 중도(中道)에 맞게 한다.’는 말이 또한 있지 않던가. 속임수는 임금이 된 자로서 말할 성격의 것이 못되지만 권도는 그래도 혹 성인께서 쓰신 방편인데, 내가 소원하는 것은 성인의 언행을 배우는 것이다. 더구나 1년에 한 번씩 만나기로 한 약속을 이 때에 지키지 않고 장차 언제 실행에 옮길 것인가.
이에 어제 저녁에 그를 도성 안으로 들어오게 한 뒤 그의 집에서 밤을 보내고 아침에 강루(江樓)에 나오게 되었다. 이제야 비로소 회포를 풀게 되었는데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여 어떻게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5강(江)의 선박을 집결시키고 8영(營)의 악대를 모이게 하였으며, 내부(內府)에서 음식을 대접하고 액원(掖垣)에서 장막을 설치하였으며, 악공은 연주하고 기녀(妓女)는 춤을 추면서 앞뒤로 화답하고 아름다운 비단옷 차림이 좌우로 교차해 비치는 가운데, 전날의 즐거움을 계속하고 이 밤의 환락을 길이 간직할 수가 있게 되었다. 바람은 끊임없이 불어와 물결을 일으키는데 돌려보낸 자가 온 것만 같아 섭섭했던 마음이 채워지고 허전했던 심정이 기뻐지기만 한다.
돌이켜 생각건대 지난 겨울 이곳에서 만났을 때는 그 어렵고 고달픈 상황이 과연 어떠했던가. 《시경》의 ‘옛날 내가 떠난 때는 흰 눈이 펑펑 내렸는데 이제 내가 돌아오니 버들가지 휘휘 늘어졌구나.’라는 시는 바로 오늘을 두고 한 말인 듯하다. 지금은 일이 다 원만하게 이루어져 장차 환궁하려 한다.
그런데 대신(大臣) 이하를 부처(付處)하고 파직·삭직시키는 일이 연례 행사처럼 되어 왔는데 이 일만은 결코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더군다나 올해로 말하면 어떤 해라고 할 것인가. 아무리 아래에서 궂은 일을 하는 미천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털끝 하나 다치게 하고 싶지가 않은데 더더구나 예우해야 할 신하들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래서 신하들을 관례처럼 불러들여 접견하면서 특별히 이런 모임을 마련한 것이다. 중외(中外)에서 이 조지(朝紙)를 볼 경우 만약 안목이 갖추어진 자라면 내 마음을 이해하리라 생각한다. 각자 잘 알아듣도록 하라."
하니, 신하들이 이 유시를 반절도 채 보지 않아서 번갈아가며 아뢰기를,
"이것이 얼마나 지나친 거조이십니까. 신들은 자신도 모르게 모골(毛骨)이 송연(竦然)해지면서 가슴이 답답하게 막혀옵니다. 오늘 행차하신 데 대해 신들이 실제로 의혹을 가졌습니다만 조금 전에 연석(筵席)에서 하교하셨기 때문에 그저 금석(金石)처럼 믿을 작정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와서 전교를 보고서야 전하께서 이토록 지나친 거조를 취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어찌된 일입니까. 이것이 어찌된 일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까 연석에서 내린 분부와 전교를 통해서 이미 말하였다. 올해처럼 전에 없던 경사스러운 기회를 당하여 행차를 수행(隨行)하는 군병으로부터 유리 걸식(流離乞食)하는 무리에 이르기까지 모두 은혜를 입어 취하도록 마시고 배불리 먹었다. 그런데 유독 저 강화도에 유배된 자만은 좌석에 참여하여 술 한 잔을 들지도 못하였다. 내가 비록 소중한 경사를 기리기 위해 애써 감정을 억누르기는 하였다마는 일곱 차례나 술잔을 드는 동안 안주를 한 번도 입에 대지 않았던 것은 바로 제신(諸臣)이 눈으로 본 사실이다. 오늘 취한 거조에 대해서 나는 지나친 행동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은 바로 권도(權道)를 써서 중도(中道)를 얻은 것이라 할 것인데 이렇게라도 해야만 내 뜻을 표시할 수 있었고 내 심회를 풀 수가 있었다."
하였다. 언호가 아뢰기를,
"신들은 역적이 올라온 것을 눈으로 보았으면서도 까마득히 알지 못했고 지금 일단 알고 나서도 곧바로 죽지를 못했습니다. 전하의 궁궐에 올곧은 충신이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전하께서 어찌 혹시라도 이런 지나친 거조를 취하실 수 있었겠습니까."
하고, 영돈녕부사 김이소(金履素)와 판중추부사 김희(金憙)가 아뢰기를,
"전하께서 신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고서 이렇게 비상(非常)한 거조를 취하시다니, 임금의 말은 반드시 믿음성이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볼 때 이렇게 하셔서는 안될 듯합니다."
하였다. 언호가 아뢰기를,
"죄인이 지금 어느 곳에 있습니까?"
하니, 상이 채찍으로 가리키면서 이르기를,
"저 배 위의 군막(軍幕)에 있다."
하였다. 김이소(金履素)가 아뢰기를,
"신들이 차마 역적과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고 있는 죄를 지고 있는데, 지금 또 악대를 강 복판에 띄우고 기녀(妓女)와 악공을 가득 실은 광경을 보고도 당장 죽지를 못하였으니, 모두가 신들의 죄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올해는 다른 해와 다른데 이것이 무슨 거조인가. 내가 지난해부터 영돈녕의 이런 꼴을 보아왔는데 나도 모르게 심화가 다시 치밀어 오른다. 경들은 빨리 물러들 가라."
하였다. 대신이 부득이 물러나온 뒤 승지로 하여금 들어가 품(稟)하게 하기를,
"신들이 너무도 놀랍고 통분스러워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는데 방금 금오(金吾)로 하여금 죄인을 압송(押送)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단 이 품계(稟啓)를 들인 이상 제멋대로 처리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오늘날의 신하된 자로서 다시 감히 이런 발언을 하며 이런 품계를 들이는 자가 있단 말인가. 경들이 이런 품계를 올리다니 장차 천하 후세에 왕망(王莽)·조조(曹操)·사마의(司馬懿)·환온(桓溫) 같은 자들의 길을 틔워주려 하는 것인가. 생각건대 저 사흉(四凶)들도 감히 이런 마음을 품고 이런 발언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고, 이어 행군(行軍)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말을 타고서 대신에게 앞으로 나아오도록 다시 명한 뒤 하교하기를,
"아까 이미 말했다마는 내가 이번에 취한 거조에 대해서 나 자신은 권도(權道)에 알맞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내가 성인의 경지에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경들의 입장에서야 요(堯)·순(舜)과 같은 임금을 만들려고 목표해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지극히 개탄하는 바이다. 요즘 들어 강화에 유배된 자의 일을 가지고 제신(諸臣)이 하나의 기가 막힌 아첨용 자료를 삼고 있다. 그리하여 한 번 사단이 일어나기만 하면 분의(分義)나 예절을 범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미친듯 부르짖고 소란을 떠는데 이것이 어떻게 된 도리인가."
하니, 언호가 아뢰기를,
"신들이 만약 옛날의 대신과 같은 기절(氣節)을 갖고 있었다면 필시 전하로 하여금 오늘날처럼 지나친 거조를 취하게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마침내 환궁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2책 42권 55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568면
- 【분류】왕실(王室) / 군사(軍事) / 사법(司法)
- [註 117]작문(作門) : 출입을 통제하는 군영의 문.
- [註 118]
약속(約束) : 군령.- [註 119]
○己巳/詣別營, 御挹淸樓, 行水操。 命宣傳官持信箭, 令後廂馬兵別將率甲士, 作門於洞口, 嚴明約束, 毋得一人攔入。 大臣以下陪從諸臣, 皆不得入, 惟承旨二人、史官二人隨入。 上登挹淸樓, 樓前一帶江上, 聚公私船隻三百餘艘, 結船分隊, 合爲五船。 命分載皷樂, 一齊動樂, 行水操訖, 還御別營直所, 命大臣入侍。 左議政兪彦鎬等進伏問候, 未及畢辭, 上曰: "今日駕臨此地, 固有以也, 而卿等之箚請還寢, 似不無過慮, 故箚批亦已詳諭矣。 今始如例召接, 方且還宮, 卿等之慮, 豈非過慮乎? 古人云 ‘兵不厭詐。’ 又云: ‘權而得中。’ 雖非兵事, 容或有不厭詐之道。 且權之一字, 非聖人不可遽議。 予雖不敢自謂聖人, 而乃所願, 則學聖人也。 若於用權處, 不反于常, 則權而合經, 亦或一道, 予所講究者, 亶在於此。 今對卿等而言之, 卿等庶或知予心矣。 若或認以有別般下敎, 使勿許入, 則此亦非過慮乎? 今則事歸妥帖, 行將還宮, 可謂順便。" 彦鎬曰: "親行打圍, 雖載於《五禮儀》, 而古人亦有請寢者矣。 至於今日動駕, 臣等死罪, 果有妄度之過慮。 昨果箚請還寢, 今承無過慮之敎, 下情欣幸矣。" 上曰: "打圍卽蒐獵之名也。 故相南九萬亦嘗請寢, 而親閱水操, 旣與打圍有異, 則有何爭執之端乎? 況且予之積費商量者, 今旣遂意, 使予無過中之擧, 使朝廷無騷撓之端, 豈非幸耶? 予於卿等, 豈有可諱之說乎? 今年大慶, 在予爲千載之慶會, 而惟予情事, 則適幸慶年之同在是年也。 若是各年之慶, 則予當作何如懷耶? 陪奉慈駕, 稱觴長樂。 凡係優老之典, 恤民之擧, 皆所以飾喜識慶之道, 則雖謂之草木鳥獸, 咸與同樂可也, 而獨彼沁島謫居者, 未嘗一番參宴。 渠之有罪無罪, 姑無論, 揆以人情天理, 予懷豈可堪乎? 進爵之禮, 成於七巡, 而每進一爵, 未嘗以一片按酒近口者, 卽在筵者所目覩也。 非爲對卿等而創說也, 只以有酒無肴, 欲表予之懷思而已。 自是以後, 夙宵所企者, 今日也。 大抵聖人, 人倫之至也。 予雖不敢自謂聖人, 而卿等之望予, 豈不在於人倫之至乎? 觀過知仁, 聖訓攸在, 周公之過, 不亦宜乎? 予旣罄說予懷, 卿等豈不諒予之心乎?" 彦鎬曰: "旣云周公之過, 則聖人之有過, 猶不如無過, 且周公則蓋已致辟於管、蔡矣。 若欲顧私恩, 而屈公法, 則其可比擬於周公之過乎?" 上曰: "卿言固是正經之論, 而得中則何害於經乎? 且今上而無過擧, 下而釋過慮, 日未向暮, 好好回鑾, 亦何必多費辭敎乎?" 彦鎬曰: "臣等昨日請對, 未蒙允兪, 今旣得方寸之地, 請得畢奏所欲陳之事矣。 鄭妻之至今共戴一天, 實是群下不忠之罪, 而中間跳出之變, 始因今番事端而知之。 幸因臺啓之允從, 庶幾輿情之得伸, 而傳旨啓下, 今幾日矣。 尙遲罪人之斯得, 以致成命之久淹, 只以擧行稽緩, 歸罪於攸司者, 豈不萬萬不誠乎? 亟下明旨, 使之自現, 是臣等之望也。" 上曰: "彼乃女人, 豈知朝報? 雖欲自現, 其可得乎? 且此事則不急, 今姑置之, 無論此事他事, 俄者權而得中, 觀過知仁之敎, 卽予苦心也。" 彦鎬曰: "臣之藉手事君, 惟《明義》一部, 今見《明義錄》, 義理將至隳壞, 豈可伈默而度日乎?" 上曰: "卿之藉手於《明義錄》, 予固稔知, 而今此鄭妻事, 處分豈有損於《明義錄》乎? 凡此等處, 古人則將順其美。 如宋先正則尙矣, 至於故相李敬輿, 斷然以全恩爲主。 此等名碩, 豈不及於今人而然? 予之似此處分, 自以爲有辭於後世, 則卿之望予, 似不在於下聖人一等矣。 此事勿論, 權而得中, 槪示予意。 今旣還送, 更無可言。 卿等姑退, 則將有頒示之敎矣。" 諭中外諸臣曰: "是歲是慶, 慶與歲會。 恭陪八日之慈駕, 誕擧三嵩之盛禮。 庸答天眷, 丕飾邦庥。 宣饌旣遍於百僚, 頒花至及於三軍, 酒闌洛南而群老醉矣; 米坻新豊, 而四民飽矣。 鵠面鶉衣, 釜饘而濟飢; 龍舳鯨濤, 船粟而救荒。 以至紅帕千騎, 滿載靑銅; 遂自三都, 爰曁八路, 則眞所謂草木鳥獸, 皆有以自樂, 而環海以東, 都在歡聲喜氣中矣。 獨奈沁謫, 彼何人斯, 竟未得參一席, 而共一觴, 比之杖鳩之村叟, 披鶴之坊伶, 反不若焉, 於予心寧不觖然矣乎 惄如矣乎? 於是乎鬱陶之思, 若醉若醒, 對食而停箸者屢矣, 當寢而繞榻者數矣。 第有一番擧措, 輒致一番風波, 際此曠前之良辰, 若如向來之景色, 則亦非與衆同樂之本意。 語不云乎? 兵不厭詐, 權而得中。 詐非王者之所言, 權或爲聖人用焉。 予所願者, 學聖人也。 況有一年一度之約, 不於此時, 而將何踐哉? 廼於昨暮, 俾入城中, 經夜渠家, 朝日江樓。 始乃握敍, 欣與悵竝, 無以爲緖。 然會五江之舟楫, 聚八營之簫皷, 內府給饌, 掖垣供帳, 工歌妓舞, 後先互答, 錦蘂綺餐, 左右交暎。 于以續前日之樂, 永今夕之歡, 而長風破浪, 其歸如來, 觖然者充然, 惄如者躍如。 回想前冬此地之逢場, 其辛苦果何如? ‘昔我往矣, 雨雪霏霏, 今我來思, 楊柳依依。’ 今日之謂歟! 今則事歸妥帖, 將爲還宮, 大臣以下之付處罷削, 作一歲課, 決是行不得之事。 況今年何年, 則雖輿儓賊微, 不欲損一毛, 且況禮遇之臣隣乎? 以是諸臣若例延接, 而別設此會。 中外見此朝紙者, 如有具眼, 想有以恕予心矣, 其各知悉。" 諸臣覽未半, 迭聲仰奏曰: "此何過擧? 臣等不覺毛骨戰慄, 心胸抑塞, 而今日動駕, 臣等果有疑惑者, 而以有俄筵下敎之故, 只當信如金石矣。 今見傳敎, 始知殿下有此過擧, 此何事也, 此何事也?" 上曰: "俄筵及傳敎已言之, 而當今年無前之慶會, 自隨駕軍兵, 以至流丐之屬, 皆得蒙恩醉飽, 而獨彼沁謫, 未得叨席而沾觴, 予雖爲所重之飾慶, 强抑情懷, 而七爵之未嘗進一肴品, 卽諸臣之所目覩也。 今日之擧, 予則以爲非過擧也, 卽權而得中也。 如是然後, 予意可表, 予心可舒矣。" 彦鎬曰: "臣等目見讎賊之上來, 而漠然不知, 今旣知之, 亦未得卽地溘然, 殿下之庭, 若有一介忠臣, 殿下豈或有此過擧耶?" 領敦寧府事金履素、判中樞府事金憙曰: "殿下不使臣等知之, 作此非常之擧。 王言之必信, 恐不當如此矣。" 彦鎬曰: "罪人今在何處乎?" 上以鞭指之曰: "在彼船上之軍幕矣。" 履素曰: "臣等忍戴一天之罪, 今又見簫皷中流, 滿載妓樂之事, 而不能卽地溘然, 莫非臣等之罪也。" 上曰: "今年異於他年, 此何擧措? 予自昨年見領敦寧之如此貌樣, 不覺膈火復上矣。 卿等速爲退出也。" 大臣不得已退出, 使承旨入稟曰: "臣等震剝驚憤, 計無所出, 方使金吾, 押送罪人。 旣入此稟, 則不可謂之擅便矣。" 上下敎于政院曰: "今日北面者, 更有敢發此言, 而入此稟乎? 卿等此稟, 將欲啓天下後世之莽、操、懿、溫乎? 惟彼四凶, 亦應不敢萠此心, 發此語矣。" 仍命三嚴乘馬。 復命大臣進前, 敎曰: "俄已言之, 而予之此擧, 自謂合於權道。 予雖不及聖人, 卿等獨不以致君堯、舜爲期乎? 予甚慨然矣。 近來沁謫事, 諸臣作一諂諛之欛柄, 若有一番事端, 不顧犯分凌節, 而狂叫亂嚷, 此何道理?" 彦鎬曰: "臣等若有古大臣氣節, 則必不使殿下有今日之過擧也。" 上遂還宮。
- 【태백산사고본】 42책 42권 55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568면
- 【분류】왕실(王室) / 군사(軍事) / 사법(司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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