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원에서 꽃구경을 하고 낚시질을 하다
내원(內苑)에서 꽃구경을 하고 낚시질을 하였다. 여러 각신(閣臣)의 아들·조카·형제들도 참여하였는데 모두 54인이었다. 또 특별히 영의정 홍낙성(洪樂性)과 직부(直赴) 이시원(李始源)을 불렀는데, 영상은 연치(年齒)나 덕망(德望)에 있어 모두 높기 때문에 매년 이 모임에 번번이 불러들여 참여시켰으며, 시원은 인망을 쌓아 규장각의 관리로 뽑혔기 때문이었다. 상이 이르기를,
"올해야말로 천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경사스러운 해이다. 그러니 이런 기쁜 경사를 빛내고 기념하는 일을 나의 심정상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매년 꽃구경하고 낚시질하는 놀이에 초청된 각신의 자질(子姪)이 아들이나 아우나 조카에만 한정되다가 올해에 들어와 재종(再從)과 삼종(三從)으로까지 그 대상이 확대된 것 역시 대체로 많은 사람들과 함께 즐거움을 나누려는 뜻에서이다."
하였다. 조금 있다가 상이 말을 타고 나가면서 신하들에게 말을 타고 따라 오도록 허락하였다. 어수당(魚水堂) 앞에 이르러 신하들에게 말에서 내리라고 명하였다. 천향각(天香閣)에 어좌(御座)를 설치하였다. 대신과 각신(閣臣)에게 술병과 안주 그릇을 하사하면서 각자 마음대로 경치 좋은 곳에서 놀며 쉬게 하였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 상이 다시 존덕정(尊德亭)의 서쪽 태청문(太淸門) 안의 막차(幕次)로 거둥하여 대신에게 이르기를,
"예로부터 내원(內苑)의 놀이에는 척리(戚里)가 아니고서는 들어와 참여할 수가 없었으니 외신(外臣)을 내연(內宴)에 참여시킨 것은 특별한 은전이라 하겠다.
옛날 장릉(長陵)109) 계해년110) 이후로 훈신(勳臣)을 보살펴주어 곡연(曲宴)에서 모시고 노닐게 하며 가족처럼 예우해 주었었다. 그러다가 효묘(孝廟)께서 즉위한 초기에 훈귀(勳貴)의 폐단을 통렬히 개혁하며 사림(士林)의 인사를 초빙한 뒤 합심하여 군국(軍國)의 기무(機務)를 의논하였는데, 어수당과 천향각에는 아직도 송 문정(宋文正)111) 이 등대(登對)했던 고사가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조정이 분열되는 환란이 또 일어났으므로 숙묘조(肅廟朝)로부터 선조(先朝)에 이르기까지는 척련(戚聯)의 신하에게 속마음을 의탁하지 않을 수 없게 되면서 궁중의 출입이 외조(外朝)에 비할 바가 아니게 되었는데 이는 단지 그 때의 상황이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일 따름이었다.
나는 춘저(春邸)112) 때부터 어진 신하를 내 편으로 하고 척리(戚里)는 배척해야 한다는 의리를 깊이 알고 있었다. 그래서 즉위 초에 맨 먼저 내각(內閣)을 세웠던 것이니, 이는 문치(文治) 위주로 장식하려 해서가 아니라, 대체로 아침 저녁으로 가까이 있게 함으로써 나를 계발하고 좋은 말을 듣게 되는 유익함이 있게끔 하려는 뜻에서였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좋은 작위(爵位)로 잡아매두고 예우하여 대접하면서 심지어는 한가로이 꽃구경하고 낚시질할 때까지도 각신(閣臣)과 함께 즐거움을 같이 하고 그들의 아들·조카·형제 역시 모두 연회에 참석하도록 허락하였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예법을 간소화하여 은혜로 접하고 한데 어울려 기뻐하고 즐기는 것을 매년 정례화하고 있으니 이런 대우와 사랑이야말로 예로부터 인신(人臣)으로서는 얻기 힘든 것이었다고 하겠다.
그런데 필경 귀근(貴近)의 폐단이 일어나더니 요즘에 이르러서는 그 극(極)에 달하고 있는 느낌이다. 나아오면 물러가게 되고 느슨해지면 펼쳐지게 되는 것이야말로 정상적인 이치라고 할 것이니, 척신(戚臣)이 이 뒤를 이어 나아오지 않으리라고 어떻게 보장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사대부를 가까이 하려는 것이야말로 나의 평소의 성격인 동시에 내가 고심하는 것이니, 수십 년 동안 행해 온 일을 지금 중도에 그만둘 수는 없는 일이다. 이에 특별히 경들을 불러 나의 속마음을 펼쳐 보여주게 되었으니,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 신하들은 각자 두려운 마음을 갖고 경계하여 오늘 내가 유시한 것을 잊지 말도록 하라."
하니, 유언호(兪彦鎬)가 아뢰기를,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훌륭한 사대부를 만나는 것이야말로 임금이 좋은 정치를 펼치는 요체이다.’고 하였습니다. 근신(近臣)이 죄를 지은 것은 그들 자신이 나라를 저버렸기 때문일 뿐이니, 우리 성상께서 인재를 쓰시는 정사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이겠습니까. 신들이 알아주는 임금을 만나 은혜를 받고 있는 것이야말로 세상에서 보기 드문 영광이라 할 것인데, 더구나 오늘 은혜로운 유시를 받들기까지 하였으니, 어찌 감히 서로들 권장하며 조금이라도 성상의 뜻을 선양할 방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채제공(蔡濟恭)이 아뢰기를,
"한(漢) 문제(文帝)는 바로 삼대(三代) 이후에 볼 수 있었던 밝은 임금이었다고 할 것인데 후세에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자들은 늘 두광국(竇廣國)을 제후로 삼지 않은 한 가지 일을 입이 마르게 칭찬하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제갈량(諸葛亮)의 출사표(出師表)야말로 《서경(書經)》의 이훈(伊訓)이나 열명(說命)과 서로 표리관계를 이루고 있는 글이라 할 것인데 그 한 편의 주요 내용을 살펴본다면 또 궁궐과 조정이 한 몸이 되어야 한다는 몇 구절에 불과하다고 하겠습니다. 이를 본다면 제왕의 성덕(盛德)으로는 척행(戚倖)을 억누르고 사문(私門)을 막는 것 이상의 것은 없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임금의 자리에 계신 20년 동안 일찍이 척리(戚里)로서 진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으니, 보고 듣는 이들치고 그 누가 우러러보며 칭송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신들로 말하면 직접 성대한 이 기회를 만나 특별한 은혜를 입고 있으니, 어찌 감히 스스로 순결한 마음을 지니고 만분의 일이라도 성상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노력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술이 몇 순배 돌자 상이 세심대의 대자(臺字) 운(韻)을 써서 입으로 칠언(七言)의 소시(小詩) 한 수(首)를 지어 읊은 다음 대신과 제신(諸臣)에게 화답하라고 명하였다. 또 부용정(芙蓉亭)의 작은 누각으로 거둥하여 태액지(太液池)에 가서 낚싯대를 드리웠다. 여러 신하들도 못가에 빙 둘러서서 낚싯대를 던졌는데, 붉은색 옷을 입은 사람들은 남쪽에서 하고 초록색 옷을 입은 사람들은 동쪽에서 하고 유생들은 북쪽에서 하였다. 상이 낚시로 물고기 네 마리를 낚았으며 신하들과 유생들은 낚은 사람도 있고 낚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한 마리를 낚아 올릴 때마다 음악을 한 곡씩 연주하였는데, 다 끝나고나서는 다시 못 속에 놓아 주었다. 밤이 되어서야 자리를 파했다.
- 【태백산사고본】 42책 42권 50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565면
- 【분류】왕실(王室)
- [註 109]장릉(長陵) : 인조(仁祖).
- [註 110]
○辛酉/賞花釣魚于內苑。 諸閣臣子姪兄弟亦與焉, 凡五十四人。 又特召領議政洪樂性、直赴李始源。 領相以齒德之俱邵, 每歲是會, 輒召與筵, 始源以儲望奎選也。 上曰: "今年卽曠千載一有之慶年也。 凡所以飾慶志喜者, 予心容有旣乎? 每年花釣之遊, 閣臣子姪之召入者, 只及於子若弟若姪, 而今年則推及於再從三從, 蓋亦寓與衆樂之義也。" 少頃, 乘馬以出, 許諸臣乘馬以從。 至魚水堂前, 命諸臣下馬, 設御座於天香閣, 賜大臣、閣臣酒壺、肴榼, 俾各隨意游憩於水石佳處。 有頃, 上復御尊德亭之西太淸門內幕次, 語諸大臣曰: "自古內苑之遊, 非戚里不得入參。 以外臣與內宴, 異數也。 在昔長陵癸亥以後, 眷遇勳臣, 曲宴陪遊, 禮同家人。 孝廟初服, 痛革勳貴之弊, 招延士林, 契合密勿, 魚水堂、天香閣尙傳宋文正登對故事, 而朝著分張之患又作焉。 自肅廟朝曁乎先朝, 不得不托肺腑於戚聯之臣, 出入禁臠, 有非外朝之比, 時勢使然耳。 予自春邸, 深知左賢右戚之義, 御極之初, 首建內閣, 非爲賁飾文治也, 蓋欲朝夕密邇, 藉其啓沃獻納之益耳。 故好爵以縻之, 優禮而待之, 以至燕閒花釣, 與諸閣臣同焉, 竝與其子姪兄弟, 而皆許赴筵。 簡其禮數, 接以恩意, 一堂歡樂, 歲以爲常, 其眷遇也, 榮寵也, 可謂從古人臣之所難得, 而畢竟貴近之弊, 至於近日而極矣。 進退弛張, 理之常也。 安知戚臣之不繼此而進也? 然親近士大夫, 卽予素性也, 苦心也, 行之數十年, 今不可中塗而掇。 特召卿等, 敷示心曲, 登筵諸臣, 須各警惕, 毋忘予今日之諭也。" 彦鎬曰: "程子以接賢士大夫, 爲人主出治之要道。 近臣之有罪, 渠自負國耳, 何與於我聖上用人之政乎? 臣等之遭逢蒙被, 卽曠世罕有之榮寵。 況承今日恩諭, 敢不交相勉勵, 思所以一分對揚之方乎?" 濟恭曰: "漢 文帝卽三代後明主, 而後之尙論者, 每艶稱於不侯竇廣國一着。 諸葛亮 《出師表》, 與《伊訓》、《說命》相表裏, 而苟求其一篇肯綮, 又不過宮府一體數句。 是知帝王之盛德, 莫尙於抑戚倖杜私門。 殿下臨御二十年, 曾無一人以戚里進者, 凡係瞻聆, 孰不欽仰攅頌, 而臣等躬逢盛際, 蒙被殊恩, 敢不精白自持, 毋負聖上期勉之萬一乎?" 酒數巡, 上用洗心臺臺字韻, 口占爲七言小詩一首, 命大臣、諸臣賡進。 又御芙蓉亭小樓, 臨太液池垂釣。 諸臣環池投竿, 緋衣在南, 綠袍在東, 章甫在北。 上釣獲四魚, 諸臣諸生有獲有不獲。 每一得魚, 輒奏樂一曲, 旣又放生于池中, 夜乃罷。
- 【태백산사고본】 42책 42권 50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565면
- 【분류】왕실(王室)
- [註 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