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정조실록 40권, 정조 18년 8월 29일 계미 2번째기사 1794년 청 건륭(乾隆) 59년

승정원에 보류 중인 계초의 비답을 받은 지평 강빈이 해명하다

지평 강빈(姜儐)이 주발을 소매 속에 넣고 가도(呵導)를 물리치고서 대궐에 들어와 징을 울리자 승정원에 명하여 물어보고 아뢰라고 하였다. 승정윈이 아뢰기를,

"지평 강빈에게 물으니 ‘신이 그저께 밤중에 지평으로 옮겨 제수받고 승정원으로 가서 구대(求對)할 때에 승지가 신으로 하여금 비답을 받게 하였습니다. 신이 삼가 생각건대, 이날 삼사의 합계 중 네 번째 계와 양사의 합계 중 일곱 번째 계를 당초 발론할 때 신이 미처 참가하지 못한 데다가 합사(合辭)는 체모가 중하기 때문에 추후에 들어간 대각의 신하 하나가 멋대로 비지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여겨졌습니다. 또 더구나 원 계사를 올린 대각의 신하들이 비답을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인데야 더 말할 게 있었겠습니까. 당초 대각의 신하들이 비록 승정원에 계를 전했더라도 처음부터 입계(入啓)되지 않았으니 비지를 받느냐 안 받느냐의 여부는 논할 것이 아니어서, 오로지 감히 받들지 못하겠다는 뜻으로 말했습니다. 그런데 승정원에서는 신이 전교를 받지 않는다는 뜻으로 다시 아뢴 뒤에 곧 다시 비지를 받게 하였으나, 신은 평소 정했던 마음이 동요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사관은 이내 예전의 계에 대한 관례적인 비답이라고 하면서 신으로 하여금 참견하지 못하게 하고는 등지고 등불 아래 앉아 소리를 낮추어 바삐 읽었습니다.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제각기 새로 올린 계에 대한 비지는 너댓 줄이었는데, 일이 갑작스레 발생하였고 소리 또한 낮고 작아서 미처 똑똑히 듣지 못하고 있을 즈음에 승지가 갑자기 일어나 나갔기 때문에 신도 즉시 물러났습니다. 그리하여 결국은 삼사가 연합으로 올린 새로운 계는 결론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교리 조홍진(趙弘鎭)과 만나 의논하고서는 구대하려 하였는데 승정원에서 끝내 봉입(捧入)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득이 홍진과는 날 밝을녘에 다시 구대하자고 약속하고 조방(朝房)으로 물러나 기다리다가 문이 열리자마다 곧 대청(臺廳)으로 나아가서 막 구대를 청하려 했습니다. 그때 홍진이 갑자기 상소의 초고를 보내왔는데, 신을 억제한 것이 아닌 게 없고 심지어 받들어 따랐다고까지 하였으니 이 무슨 말입니까. 그때 구대에 대한 승락을 얻지 못한 채 단지 결과적으로 비답 받은 죄를 지은 것은 실로 어리둥절하고 갑작스러운 상황에서 나온 것이니, 이것이 어찌 신의 본 마음이겠습니까. 당초의 거취는 신과 홍진이 다름이 없었는데 지금 갑자기 망측한 죄에 빠졌으니,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기 어렵기가 이러합니다.

물러나 신의 처소에서 밤새도록 생각하건대, 지금 나라의 역적을 치지 못해서 온 조정 신하들이 애태우며 어쩔 줄 모르고 있는 때에, 단지 예전 계에 대한 관례적인 비답만을 받고 물러났으니, 그렇다면 이 두 계의 결말을 끝내 보지 못한 결과 중대한 논의도 그 때문에 펴지 못하게 되리라 여겨졌습니다. 신은 이에 실로 배를 가르고 가슴을 찔러 본심을 드러내고 싶었습니다만 그러지도 못한 채 이내 스스로 변명하는 행동을 하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그 당시 새로 제수받은 대간들은 모두 지방에 있다고 하고, 지난번 후보자 중에서 낙점된 옥당은 단지 저 한 사람만 들어왔다고 했기 때문에 지평으로 옮겨 제수해서 비지를 받도록 하였다. 비답을 받을 때에 신칙하는 분부를 여러 번 내렸고 밤도 깊었었다. 네가 어떤 계의 비답인지도 모르고 갑자기 받게 된 것은 사세가 본디 그러했기 때문이다. 비록 다시 말하려고 했으나 승지가 이미 일어나 가버려서 역시 주선하기도 어려웠을 터이니 이것으로 너의 죄를 삼는다면 원통하지 않겠는가. 일의 실상을 환히 알고 있으니 설령 인정 밖의 배척이 있더라도 어찌 분명히 풀어주고 보호해 줄 방법이 없겠는가. 너는 드러나거나 알려지지 않은 일로써 분부한다고 하지 말라. 비록 원통하고 번민하는 마음이 있더라도 현재 대각의 직책에 있는 이상 피혐하거나 상소하거나 뭐가 불가하겠는가. 그런데 소매 속에 징을 울리는 기구를 감추고 벙어리 종을 앞세워 들어 왔으니, 대각을 존중하는 도리에 있어서 신칙하는 일이 없을 수 없다. 우선은 사정을 헤아려 관대히 봐주는 법에 따라 전 지평 강빈을 파직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0책 40권 59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501면
  • 【분류】
    정론(政論) / 인사(人事)

○持平姜儐袖鉢盂, 屛呵導, 入闕鳴錚, 命政院問啓。 政院啓言: "問于持平姜儐處, 則以爲: ‘臣於再昨夜中, 移拜持平, 往復喉院, 求對之際, 承宣使之承批。 臣竊伏念, 伊日三司合啓中, 第四啓及兩司合啓中第七啓, 當初發啓之時, 臣未及參, 合辭體重, 有非追後入去之單臺擅承批旨者。 又況原啓辭發啓之臺臣, 旣未承批, 而當初臺臣, 雖得傳之喉院, 初不入啓, 批旨承受與否, 非所可論, 唯以不敢承受之意爲言, 而及當喉院, 以臣不受之意更稟之後, 旋令更爲承批, 而臣則以素定之心, 無或撓改而已。 史官乃以舊啓例批, 不令臣參見, 背坐燈下, 低聲忙讀府與院各新啓批旨四五行。 事出倉卒, 音又低微, 未及諦聽之際, 承宣遽然起去, 臣亦卽地退出。 遂以三司合新啓, 無下落事。 與校理趙弘鎭面議, 將求對, 喉院終不捧入, 故不得已與弘鎭, 以天明更爲求對相約, 退待朝房, 門鑰纔啓, 旋卽詣臺, 方請求對矣。 弘鎭忽地送示疏草, 而無非向臣抑勒, 至謂之將順, 此何言也? 伊時之求對不得, 只歸承批之科者, 實出蒼黃急遽之際, 是豈臣本情哉? 當初去就, 臣與弘鎭無所異同, 而今忽陷之於罔測之科, 人心之難測如是。 退伏私次, 終夜思惟, 則方此國賊未討、滿廷臣僚焦迫罔措之時, 只承舊啓例批而退, 則此兩啓訖無究竟, 將使大論, 緣之以未伸。 臣於是實欲剸腹刺胸以暴本心, 而不可得, 乃有自明之擧’ 云矣。" 敎曰: "伊時諸臺之新除者, 皆稱在外, 玉堂之前望點下者, 只爾一人入來云, 故移拜持平, 使之承批矣。 承批時飭敎屢下, 更皷且深, 爾之不識何啓之批而倉卒受之, 事勢固然。 雖欲更言, 承宣已起去, 亦難周旋。 以此爲爾案, 不亦冤乎? 洞燭事狀, 設令有情外之斥, 豈無昭釋庇覆之方乎? 爾勿以未暴知之事分付, 而雖有冤悶之心, 時在臺職, 以避以疏, 何爲之不可, 而袖藏鳴錚之具, 前導啞隷而入, 其在尊臺閣之道, 不可無飭。 姑從恕諒之典, 前持平姜儐罷職。"


  • 【태백산사고본】 40책 40권 59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501면
  • 【분류】
    정론(政論) / 인사(人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