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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39권, 정조 18년 2월 22일 경진 3번째기사 1794년 청 건륭(乾隆) 59년

동지 정사 황인점과 부사 이재학이 치계하다

동지 정사(冬至正使) 황인점(黃仁點)과 부사(副使) 이재학(李在學)이 치계하였다.

"신들 일행은 지난 해 12월 22일에 북경(北京)에 도착하여 곧장 예부(禮部)에 나아가 표문(表文)과 자문(咨文)을 바쳤는데, 한인(漢人) 시랑(侍郞) 유약운(劉躍雲)이 여러 낭관들을 거느리고 공경히 받았습니다. 그런 다음 신들은 남소관(南小館)에 가서 묵었습니다.

24일, 황제가 영안사(永安寺)에 가서 향을 피운다는 사실을 예부가 알려줌에 따라 신들은 당일 꼭두새벽에 서장관 및 역관(譯官)과 함께 신무문(神武門) 밖에 나가서 대기하였습니다. 먼동이 틀 무렵 황제가 황옥 소교(黃屋小轎)를 타고 나왔는데 신들이 맞이하는 곳에 이르러 가마를 멈추고 묻기를 ‘국왕은 평안한가.’ 하기에 신들이 대답하기를 ‘평안합니다.’ 하였습니다. 신들이 전송한 뒤에 예부가 ‘황제가 환궁(還宮)할 적에는 맞이하는 절차를 생략해도 된다.’고 하기에 곧바로 남소관에 돌아왔습니다.

27일, 예부에서 알려주는 대로 신들은 홍려시에 나아가 설날 아침에 거행하는 조참(朝參) 의식의 연습을 행하였는데, 유구국(琉球國)의 사신이 와서 함께 의식을 연습하였습니다. 예부가 알려준 내용 가운데 ‘28일 황제가 직접 태묘(太廟)에 제사를 지내는데 두 나라의 사신들이 전송하고 맞이해야 된다.’는 말이 있었으므로 당일 꼭두새벽에 신들이 오문(午門) 밖에 나가서 전송을 하고 제례를 마치고 어가(御駕)가 돌아올 때에도 맞이하였습니다.

29일, 황제가 보화전(保和殿)에서 연종연(年終宴)을 베풀었는데 신들은 예부가 알려주는 대로 당일 꼭두새벽에 보화전에 들어갔습니다. 홍려시의 관원이 신들을 인도하여 보화전의 섬돌 위에 앉혔으며 유구국의 사신은 신들의 아래에 앉았습니다. 날이 환하게 밝자 황제가 전에 나오니 음악을 연주하며 음식을 올렸으며 여러가지 놀이가 벌어졌습니다. 신들에게도 잔치 음식이 나왔는데 두 사람이 한 식탁을 함께 먹었으며 각각 낙차[酪茶] 한 순배를 돌렸습니다. 조금 지나 예부 상서 덕명(德明)이 황제의 명에 의하여 신들을 인도하여 전 안으로 들어갔는데 어탑(御榻) 앞에 이르자 황제가 손수 술잔을 들어 신 인점에게 직접 주기에 신은 꿇어앉아 술잔을 받고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다음에 신 재학에게도 주기에 신도 꿇어앉아 술잔을 받고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잔치가 끝난 다음 광록시(光祿寺)가 잔칫상을 실어 보내었고 또 세찬(歲饌)도 각각 한 상씩 보내왔습니다. 날이 저문 뒤에 통역관이 대궐 안에서 귤과 석류를 싸가지고 와서 두 사신과 서장관에게 각각 10여 개씩 나누어 주었는데 이는 남방에서 바치는 공물이 이제 막 도착하였으므로 이렇게 나누어 준 것이었습니다.

이 해 정월 초하룻날 5경(更) 무렵에 신들이 서장관 및 공식 사절(使節) 27명과 함께 오문 앞에 나아가 대기하였습니다. 꼭두새벽에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당자(堂子)에 나왔다가 조금 지나 환궁하였는데 문무 백관들이 맞이하고 전송하는 절차를 이미 생략하였으므로 신들에게도 예부에서 생략하도록 하였습니다. 날이 환하게 밝을 무렵 황제가 태화전에 나와 조하(朝賀)를 받았습니다. 신들은 태화전 뜰에 들어가 서반(西班)의 끝에 앉아 있다가 다같이 세 번 꿇어앉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절차를 행하였습니다.

2일, 황제가 자광각(紫光閣)에서 세초연(歲初宴)을 베풀었는데 신들은 예부가 알려준 대로 당일 꼭두새벽에 자광각에 들어갔습니다. 해가 뜬 뒤에 황제가 소교(小轎)를 타고 나오기에 신들이 맞이하고 따라 들어가 반열의 차례대로 앉았습니다. 황제가 자광각에 나온 뒤 음식을 올리고 여러가지 놀이가 벌어졌습니다. 신들 두 사람에게 각각 한 상씩을 주고 또 낙차 한 순배를 돌려주었습니다. 예부 상서가 황제의 명에 의하여 신들을 인도하여 어탑 앞에 이르자 황제가 신들에게 직접 술잔을 연종연 때와 마찬가지로 주기에 신들이 꿇어앉아 술잔을 받고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잔치가 끝난 뒤에 내무부(內務府)를 시켜 신들에게 상품을 주었습니다. 정사(正使)에게는 비단 3필(匹), 장융(漳絨) 3필, 팔사단(八絲緞) 5필, 오사단(五絲緞) 5필, 큰 주머니[大荷包] 1쌍, 작은 주머니[小荷包] 2쌍을 주었는데, 내무부 대신 화신(和珅)이 나누어 주는 일을 살펴보았습니다. 세폐(歲幣)와 방물(方物)을 잘못된 점이 없이 규정대로 바쳤습니다.

6일, 황제가 원명원(圓明園)에 거둥하였는데 신들은 예부가 알려준 대로 당일 꼭두새벽에 삼좌문(三座門) 밖에 나아가 대기하였습니다. 날이 환히 밝을 무렵 황제가 황옥 소교를 타고 나오기에 신들은 전송한 뒤에 돌아왔습니다.

10일, 황제가 원명원에서 환궁하였는데 신들은 예부가 알려준 대로 삼좌문 밖에서 맞이하였습니다.

12일, 황제가 기곡단(祈穀壇)에 나아가 재숙(齋宿)하기에 신들은 예부가 알려준 대로 당일 꼭두새벽에 오문(午門) 밖에 나아가 전송하였습니다.

13일, 곡식을 비는 제사가 끝난 뒤에 황제는 원명원으로 거둥하였고, 신들은 예부가 알려준 대로 당일 꼭두새벽에 삼좌문의 반열 자리에 나아갔는데 예부 상서 기균(紀昀)이 반열을 통솔하였습니다. 어선방(御膳房)의 관원이 황제의 명에 의하여 만두 한 그릇을 가지고 신들의 반열에 와서 나누어 주었습니다. 날이 환히 밝을 무렵 황제가 나왔는데, 각로 화신이 곁에서 신들이 맞이하는 뜻을 아뢰자 황제가 가마의 창으로 자세히 내다 보았습니다. 신들은 예부가 알려준 대로 그대로 원명원에 따라가서 행궁 근처에 머물렀습니다. 오후에 통역관이 신들을 인도하여 산고수장각(山高水長閣)에 들어가서 외반(外班)에 나아갔습니다. 석양이 되어 황제가 합문 앞으로 나오자 여러 가지 잡기(雜技)와 등불 놀이를 차례로 진행하였습니다. 내무부가 과일·숙육(熟肉)·원소병(元宵餠) 등의 음식을 신들에게 주었는데 내무부 대신 화신·김간(金簡) 등이 나와서 살펴보았습니다.

14일, 신들이 또 산고수장각에 들어갔는데 황제가 자리에 앉은 다음 신들에게 내반(內班)으로 들어오게 하여 낙차[酪茶] 한 순배를 주고 나서 외반으로 나가게 하였습니다. 등불 놀이와 음식을 준 것은 13일과 꼭 같았습니다.

15일, 꼭두새벽에 황제가 정대광명전(正大光明殿)에 나와 방생연(放生宴)을 베풀었습니다. 신들은 먼저 전각의 섬돌 위의 반열에 나갔다가 다시 홍려시 관원의 인도로 전각의 기둥 밖에 앉았습니다. 조금 지나 황제가 전각 위에 나와 앉자 음악을 연주하고 놀이를 진행하였는데 이는 자광각(紫光閣) 등의 잔치에서 진행한 것과 대략 같았습니다. 예부 상서가 황제의 명에 의하여 신들을 인도하여 어탑 앞에 이르자 황제가 직접 술잔을 주었는데 신들은 꿇어앉아서 받고 머리를 조아리기를 전날처럼 하였습니다. 잔치가 끝난 뒤에 개인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오후에 또 산고수장각에 들어갔는데 황제가 자리에 앉은 다음 신들이 내반(內班)으로 들어가자 낙차를 한 순배 주었고 신들은 외반(外班)으로 나왔습니다. 음식을 주고 등불 놀이를 하는 것은 전과 같았으나 화포(火炮) 놀이를 더 진행하였습니다. 숙소로 돌아온 뒤에 예부가 황제의 뜻에 의하여 신들에게 시(詩)를 지어 바치게 하였으므로 신들은 각각 칠언 율시 1수 씩을 지어서 예부에 보냈습니다.

16일, 예부가 황제의 명에 의하여 사신들은 우선 물러가라고 하므로 신들은 객관(客館)으로 돌아왔습니다.

18일, 신들이 또 원명원에 갔습니다.

19일, 꼭두새벽에 예부가 신들에게 가상(加賞)하는 예단(禮單)을 수령하라고 알려주므로 신들은 예부의 조방(朝房)에 나아갔습니다. 예부 낭중 명선(明善)이 대단(大緞) 2필, 견전지(絹牋紙) 4권, 붓 4갑, 먹 4갑, 벼루 2장, 복(福)자를 넣은 방전지(方牋紙) 1백 장, 조각하여 옻칠을 입힌 다반(茶盤) 4개를 전하여 주기에 신들이 이를 상통사(上通事)와 역관(譯官)에게 주어 귀국하여 복명하는 날 바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들에게는 각각 단(緞) 1필, 견전지 2권, 붓 2갑, 먹 2갑씩을 상으로 주었습니다. 이날 오후에 산고수장각의 내반으로 들어갔는데 황제가 자리에 앉은 다음 응제(應製)한 여러 신하들이 모두 사은(謝恩)하기에 신들도 똑같이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황제가 신들을 앞으로 나오라고 명하고는 이르기를 ‘너희들이 돌아가서 모쪼록 나의 뜻으로 국왕에게 안부를 전하도록 하라.’ 하기에 신들은 다시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물러나 반열에 앉은 다음 낙차를 주었으며, 등불 놀이·화포 놀이를 하는 것은 15일에 한 것과 꼭 같았습니다. 황제가 내전(內殿)으로 들어갈 때 신들에게 뒤를 따르도록 하였으므로 통역관이 신들을 인도하여 몇개의 문을 지나가자 앞에 호수가 있고 한창 얼음이 얼었는데 황제가 썰매를 탔습니다. 종관(從官)과 신들도 썰매를 타고 경풍원(慶豊園)으로 따라 들어갔는데 전우(殿宇)와 등불은 산고수장각과 대략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신들은 섬돌 위에 앉아서 등불 놀이를 관람하고 조금 지난 뒤에 물러나왔습니다.

20일, 꼭두새벽에 예부가 알려준 대로 원명원으로부터 곧장 오문 앞으로 나아가서 서장관 및 공식 사절 27명과 함께 상품을 수령하였습니다.

24일, 신들이 예부에 나아가 하마연(下馬宴)을 받고 객관에 돌아와서 곧이어 상마연(上馬宴)을 진행하였습니다. 표문(表文) 7통은 18일 개봉한 다음 내각(內閣)에서 청어(淸語)로 번역하여 들였는데 그날로 ‘알았다’는 말을 관례대로 내렸습니다.

30일, 회답하는 자문(咨文) 22통을 받고 2월 2일에 북경(北京)을 떠났습니다.

황제의 유시(諭示)는 이러합니다.

‘계축년 4월 26일에 선대 황제의 명을 받고 하늘의 도움을 입어 황제의 법통을 계승하였다. 황제에 오른 이후로 천하가 태평하고 먼 지방 나라들도 귀화(歸化)하여 큰 공로와 빛나는 업적이 다행스럽게도 완전하게 이루어졌다. 황제에 즉위한 햇수가 꼭 60년이나 되었으니 실로 25세에 즉위한 임금으로서는 얻기 어려운 일이다. 전에 일찍이 즉위한 지 61년이 되면 정사(政事)를 돌려주는 것이 합당하다는 명을 내렸었다. 즐거운 이 은택이 충만하였으니 천하의 신민(臣民)들과 함께 이 복을 나누어 가져야 될 것이며 사림(士林)에게 혜택을 주는 은전을 더욱 미리 거행해야만 마땅하다. 건륭(乾隆) 59년 가을로부터 특별히 향시 은과(鄕試恩科)를 열고 60년 봄에는 회시 은과(會試恩科)를 실시하며 60년 가을에는 바로 사황제(嗣皇帝)의 은과 향시를 보이고 병진년 봄에는 곧 사황제의 원년(元年)을 기리는 은과 회시를 시행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 따라 당연히 시행해야 될 사항들을 해부(該部)에서는 전례를 살펴서 미리 준비해야 할 것이다. 각 직례성(直隷省)에서는 응시자를 널리 뽑아 60년의 회시에 응시하게 한 다음 해부에서는 주청하여 처리할 것이다. 다만 현재 정사를 물려 줄 시기가 멀지 않기에 짐(朕)은 날마다 더욱 힘써서 감히 조금도 자만함을 가지지 않고 천하의 모든 백성들과 함께 하늘이 보살펴주는 복을 같이 맞이하려 하고 있다. 이 내용을 가지고 통지하여 알리도록 하라.’"


  • 【태백산사고본】 39책 39권 29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450면
  • 【분류】
    외교(外交)

    ○冬至正使黃仁點、副使李在學馳啓曰: "臣等一行, 上年十二月二十二日到北京, 直詣禮部, 呈表、咨文, 侍郞劉躍雲, 率諸郞官祗受後, 臣等住接於南小館。 二十四日, 皇帝幸永安寺拈香, 臣等因禮部知會, 當日曉頭, 與書狀官及任譯, 詣神武門外待候。 黎明, 皇帝乘黃屋小轎出來, 到臣等祗迎處, 駐轎問曰: ‘國王平安乎?’ 臣等謹對曰: ‘平安矣。’ 臣等祗送後, 因禮部言, 還宮時祗迎停免, 故卽爲還歸。 二十七日, 因禮部知會, 臣等詣鴻臚寺, 行元朝朝參演禮, 而琉球國使臣來到, 同爲演禮。 禮部知會內, 二十八日, 皇帝親祭太廟, 兩國使臣祗送祗迎, 故當日曉頭, 臣等詣午門外祗送, 而禮成回鴐時, 亦爲祗迎。 二十九日, 皇帝設年終宴於保和殿。 臣等因禮部知會, 當日曉頭入保和殿。 鴻臚寺官引臣等, 坐於殿陛上, 琉球國使臣在於臣等之下。 平明, 皇帝御殿, 動樂進饌, 設雜戲。 臣等亦有宴饌, 而兩人共一卓, 各賜酪茶一巡。 少頃, 禮部尙書德明, 因皇旨, 引臣等入殿內, 至御榻上, 皇帝手擧酒盃, 親授於臣仁點, 臣跪受叩頭, 次授臣在學, 臣亦跪受叩頭。 宴罷後, 光祿寺輸送宴卓, 又送歲饌各一卓。 晩後, 通官自闕內齎來橘柑、石榴, 兩使臣及書狀官處, 各賜十餘枚, 而南邊進貢纔到, 有此頒給。 本年正月初一日五更量, 臣等與書狀官及正官二十七人, 詣午門前等候。 曉頭, 皇帝出幸堂子, 少頃還宮, 而文武諸官祗迎祗送, 已爲停免, 故臣等則禮部亦令停免。 平明, 皇帝出御太和殿受賀。 臣等入殿庭, 坐西班末, 同行三跪九叩之禮。 初二日, 皇帝設歲初宴於紫光閣。 臣等因禮部知會, 當日曉頭入紫光閣, 日出後皇帝乘小轎出來。 臣等祗迎, 隨入班次。 皇帝御閣後, 進饌設雜戲。 臣等兩人各賜一卓, 又賜酪茶一巡。 禮部尙書因皇旨, 引臣等至御榻上, 皇帝親賜酒盃於臣等, 如年終宴時, 臣等跪受叩頭。 宴罷後, 使內務府, 頒賞於臣等。 正使錦三匹、漳絨三匹、八絲緞五匹、五絲緞五匹、大荷包一對、小荷包二對, 內務府大臣和珅, 監視頒賜。 歲幣方物, 無弊準納。 初六日, 皇帝幸圓明園, 臣等因禮部知會, 當日曉頭, 詣三座門外等候。 平明, 皇帝乘黃屋小轎出來, 臣等祗送後退歸。 初十日, 皇帝自圓明園還宮, 臣等因禮部知會, 祗迎於三座門外。 十二日, 皇帝詣祈穀壇齋宿, 臣等因禮部知會, 當日曉頭, 詣午門外祗送。 十三日禮成後, 皇帝幸圓明園, 臣等因禮部知會, 當日曉頭, 詣三座門班次, 禮部尙書記均押班。 御膳房官員, 以皇旨, 頒來饅頭一器, 頒給臣等於班次。 平明, 皇帝出來, 閣老和珅, 傍奏臣等祗迎之意, 皇帝自轎窓諦視。 臣等因禮部知會, 仍爲隨詣圓明園, 住接於行宮近處。 午後, 通官引臣等入山高水長閣, 就外班。 向夕, 皇帝出御閤門之前, 諸般雜技及燈戲, 次第設行。 內務府以果盒、熟肉、元宵餠等饌, 饋臣等。 內務府大臣和珅金簡等出來監視。 十四日, 臣等又入山高水長閣, 皇帝御座後, 令臣等入內班, 賜酪茶一巡後, 出就外班。 燈戲及饋饌, 一如十三日。 十五日曉頭, 皇帝御正大光明殿, 設放生宴。 臣等先就殿陛班次, 鴻臚寺官, 更引臣等坐楹外。 少頃, 皇帝出御殿上, 動樂設戲, 槪如紫光閣等宴。 禮部尙書, 以皇旨, 引臣等至御榻上, 皇帝親賜酒杯。 臣等跪受叩頭如前日。 宴罷後, 還歸私次。 午後, 又入山高水長閣, 皇帝御座後, 臣等入內班, 賜酪茶一巡, 出就外班。 饋饌與燈戲, 皆如前, 而又設火(泡)〔砲〕 之戲。 退歸後, 禮部因皇旨, 令臣等製詩以進, 故臣等各製七言律詩一首, 書送禮部。 十六日, 禮部因皇旨, 使臣等姑爲退去, 故臣等還歸館所。 十八日, 臣等又詣圓明園。 十九日曉頭, 禮部知會, 令臣等領受加賞禮單, 故臣等詣禮部朝房。 禮部郞中明善, 傳授大緞二疋、絹牋四卷、筆四匣、墨四匣、硯二方、福字方牋一百張、雕漆茶盤四箇, 臣等祗受, 以授上通事譯官, 使之復命日呈納。 臣等各賞緞一匹、(縜)〔絹〕 牋二卷、筆二匣、墨二匣。 同日午後, 入山高水長閣內班, 皇帝御座後, 應製諸臣皆謝恩, 故臣等一體叩頭。 皇帝命臣等進前曰: ‘爾等回還, 須以吾意, 傳語國王平安可也。’ 臣等更爲叩頭。 退坐班次後, 賜酪茶, 燈戲、火砲, 一如十五日。 皇帝入內時, 令臣等隨後。 通官引臣等, 歷入數門, 前有湖水方氷, 皇帝乘雪馬。 從官及臣等亦乘雪馬, 隨入慶豐園。 殿宇燈火, 與山高水長, 槪是一樣。 臣等坐階上觀燈戲, 少頃退出。 二十日曉頭, 因禮部知會, 自圓明園直詣午門前, 與書狀官及正官二十七人, 領賞。 二十四日, 臣等詣禮部, 領下馬宴, 回到館所, 仍行上馬宴。 表文七度, 十八日開印後, 自內閣翻淸入奏, 當日以知道例下。 三十日, 受回咨文二十二度, 二月初二日, 自北京離發。 皇諭:

    癸丑四月二十六日, 奉上諭, 仰蒙昊蒼眷祐, 纉緖凝庥。 臨御以來, 海㝢敉寧, 遐方向化, 膚功熙績, 幸躋十全。 踐祚年滿六十, 實二十五卽位之人君所難得也。 前曾降旨于六十一年歸政, 允宜愷澤覃施與海內臣民。 歛時敷錫而嘉惠士林之典, 尤應預爲擧行。 着于乾隆五十九年秋, 特開鄕試恩科, 六十年春爲會試恩科, 六十年秋卽爲嗣皇帝恩科鄕試, 丙辰春間卽爲嗣皇帝元年恩科會試。 所有應行事宜, 着該部照例預備。 其各直省擧人, 大挑着于六十年會試後, 該部奏請辨理。 但此時雖距歸政之期不遠, 朕惟有日益孜孜, 不敢稍存盈滿, 以期與天下蒼生, 共迓天眷之福。 將此通諭, 知之欽此!


    • 【태백산사고본】 39책 39권 29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450면
    • 【분류】
      외교(外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