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성 축조에 대해 하명하다
상이 높은 곳에 올라 고을터를 바라보고 곁에 모신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이곳은 본디 허허벌판으로 인가가 겨우 5, 6호였었는데 지금은 1천여 호나 되는 민가가 즐비하게 찼구나. 몇 년이 안 되어 어느덧 하나의 큰 도회지가 되었으니 지리(地理)의 흥성함이 절로 그 시기가 있는 모양이다."
하였다. 인하여 팔달산(八達山)에 올라 성 쌓을 터를 두루 살펴보고 상이 이르기를,
"이곳은 산꼭대기의 가장 높은 곳을 골라 잡았으니 먼 곳을 살피기에 편리하다. 기세가 웅장하고 탁트였으니 하늘과 땅이 만들어낸 장대(將臺)라고 이를 만하다. 지금 깃발을 꽂아놓은 곳을 보니 성 쌓을 범위를 대략 알겠으나 북쪽에 위치한 마을의 인가를 철거하자는 의논은 좋은 계책이 아닌 것같다.
현륭원이 있는 곳은 화산(花山)이고 이 부(府)는 유천(柳川)이다. 화(華) 땅을 지키는 사람이 요(堯)임금에게 세 가지를 축원한 뜻007) 을 취하여 이 성의 이름을 화성(華城)이라고 하였는데 화(花)자와 화(華)자는 통용된다. 화산의 뜻은 대체로 8백 개의 봉우리가 이 한 산을 둥그렇게 둘러싸 보호하는 형세가 마치 꽃송이와 같다 하여 이른 것이다. 그렇다면 유천성(柳川城)은 남북이 조금 길게 하여 마치 버들잎 모양처럼 만들면 참으로 의의가 있을 것이다. 어제 화성과 유천의 뜻을 이미 영부사에게 언급한 바 있지만, 이 성을 좁고 길게 하여 이미 버들잎 모양처럼 만들고 나면 북쪽 모퉁이의 인가들이 서로 어울려 있는 곳에 세 굽이로 꺾이어 천(川) 자를 상징한 것이 더욱 유천에 꼭들어맞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아(貳衙)008) 에 이르러 배종하는 시임과 원임의 대신 홍낙성 등을 소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아까 팔달산에서 멀리 바라보니 영부(營府)가 웅장하고 여염(閭閻)이 즐비하여 참으로 큰 도회지였다. 5, 6년 안에 취락을 이루고 도회지를 형성하는 것이 이렇듯 빨랐으니 내 마음의 기쁨은 진실로 한량없다. 성터의 형세에 대해서는 이제 막 감독하는 당상관에게 하교하였다. 이 성을 쌓는 것은 장차 억만 년의 유구한 대계를 위함에서이니 인화(人和)가 가장 귀중한 것이다. 또 먼 장래를 생각하는 방책을 다해야 하는데, 아까 성터의 깃발 세운 곳을 보니 성 밖으로 내보내야 할 민가가 있었다. 어찌 이미 건축한 집을 성역(城役) 때문에 철거할 수 있겠는가. 이는 인화를 귀중히 여기는 뜻이 아니다. 성지(城池)의 남쪽과 북쪽 사이의 거리에 있어서도 지나치게 가까운 결점이 있으니, 먼 장래를 생각하는 방도에 있어 더욱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화산과 유천이 서로 바라보고 있으니 우리 나라의 억만 년 유구한 태평 시대를 여는 기업이 될 것이다. 성을 쌓을 때 버들잎 모양을 본뜨고 내천 자의 형태를 모방하여 구불구불 돌아서 기초를 정하고 인가들도 성 안에 들어와 살게 해야 할 터인데 경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낙성 등이 아뢰기를,
"전하의 계책은 신들이 미칠 바가 아닙니다."
하였다. 이아의 뒤에 있는 작은 동산에 올라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평지 가운데서 이 언덕이 갑자기 우뚝 솟아올라 이아의 터를 만들었으니 어찌 기이하지 않은가."
하였다. 이어서 일자문성(一字文星)에 이르러 여러 신하들이 의논드리기를,
"이곳의 일자문성은 겹으로 되어 있고 용연(龍淵)의 모래 삼각주[砂角]가 왼쪽으로부터 안으로 들어와서 옷깃을 여민 형국으로 되었습니다. 그러니 내문성(內文星)에 성을 쌓되 성의 형태를 조금 축소하여 모래 삼각주에 뒤지게 하고 외문성(外文星)에는 따로 토성(土城)을 쌓아 내성을 보호하게 하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하였는데, 상이 유수 조심태에게 이르기를,
"이 성을 곧장 외문성에 쌓되 용연의 모래 삼각주와 내문성을 넘어가게 해서 모두 성 안으로 들어오게 하면 좋겠다."
하였다. 인하여 용연에 나아가 귀봉(龜峰)을 가리키면서 심태에게 이르기를,
"오른쪽은 귀봉이고 왼쪽은 용연이어서 거북과 용이 서로 마주하고 있으니 그 이름 역시 우연하지 않다."
하였다. 대체로 용연 기슭은 앞면이 석벽(石壁)으로 되어 있고 아래에는 작은 소(沼)가 있는데, 그 물은 광교산(光敎山)에서 흘러나와 석벽 아래에 이르러 물이 돌아흐른다. 이곳에서 휘돌아나와 북쪽으로부터 남쪽으로 읍치(邑治)를 경과하는데, 기슭을 따라가다가 꺾여지는 곳에 장차 다리를 걸쳐놓고 성을 쌓아 수문(水門)을 만들려는 것이다. 상이 심태에게 이르기를,
"일자문성이 두 겹으로 되어 있으니 더욱 두껍고 공고한 기상을 보겠고, 용연의 기슭이 용의 머리로 되어 있고 석벽이 웅크린 것처럼 솟아 있으니 풍기(風氣)가 응결되어 매우 활기찬 기상이 있음을 볼 수 있으며, 겸하여 수해(水害)를 막는 공이 있게 되었으니 마치 이 성쌓는 역사를 위하여 만들어 놓은 곳인 듯하다. 지리와 지세가 매우 좋아서 오늘 살펴본 뒤로 나의 마음은 매우 만족스럽다. 성을 쌓는 역사의 큰 줄거리는 이러하니, 예컨대 여기에 윤색(潤色)을 더하는 데에 있어서는 이를 맡아 하는 사람에게 달려 있을 뿐이다."
하였다. 미륵당 고개[彌勒堂峴]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잠시 쉬면서 승지에게 이르기를,
"언제나 현륭원에 갔다가 돌아올 적에는 나의 발걸음이 나도 모르게 더디어지고 배양재[陪養峙]를 지나 이 고개에 이르면 절로 고개를 들고 서성거리게 된다."
하였다. 사천(沙川) 행궁에 이르러 잠시 쉬고 과천 행궁에 이르러 오늘밤부터 내일밤까지 통행금지를 완화하라고 명하였다. 이어 성문은 관광하는 사람들이 다 들어가기를 기다려 빗장을 잠그라고 명하였다. 망해정에 이르러 잠시 쉬었다가 환궁하니 밤 2경이 넘었다.
- 【태백산사고본】 39책 39권 6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438면
- 【분류】과학(科學) / 왕실(王室) / 군사(軍事)
○癸卯/上登覽邑基, 謂左右曰: "此地本是空曠大野, 人家僅爲五六戶, 而今則千餘民戶, 屋舍櫛比, 不出數年, 居然一大都會。 地理之興旺, 自有其時矣。" 仍登八達山, 周覽築城基址。 上曰: "此地占得山頂最高處, 便於瞭望。 氣勢雄爽, 可謂天造地設之將臺矣。 今見揷旗處, 則築城範圍, 可以領略, 而至於北里人家毁撤之論, 終非計之得者。 園所, 花山也; 此府, 柳川也。 取華人祝聖之意, 名此城曰華城, 花與華通。 花山之義, 蓋以八百峰巒, 拱護一岡, 圓正如花瓣之謂也。 然則柳川之城, 南北稍長如柳葉, 則實有意義矣。 昨以華城、柳川之義, 已有諭及於領府事者, 而此城挾而長, 旣似柳葉, 則於北角人家相錯處, 三曲折以象川字, 豈不尤襯於柳川耶?。" 至貳衙, 召見陪從時原任大臣洪樂性等。 上曰: "俄於八達山瞭望, 則營府之雄偉, 閭閻之櫛比, 眞大都會也。 五六年之內, 成聚成都, 如是之速, 予心欣喜, 實爲不淺。 城址形便, 才有下敎於監董堂上者, 築斯城也, 將以爲億萬年悠久之計, 人和爲貴, 且當務盡經遠之謨, 而俄見城址竪旗處, 則民家之當出城外者, 豈可以已建之家舍, 因城役撤去乎? 此非人和爲貴之意也。 至若城池, 南北之相距, 亦有太近之歎。 經遠之道, 尤不當若是。 花山與柳川相望, 爲我家萬億年太平悠久之業。 築城之時, 象柳葉之形, 倣川字之樣, 逶迤定基, 而人家亦宜入諸城內, 卿等以爲如何?" 樂性等曰: "聖籌非臣等所及也。" 登衙後小園, 謂諸臣曰: "平地中忽起此阜, 爲貳衙之基, 豈不異哉?" 遂至一字文星, 諸議皆曰: "此處一字文星爲兩重, 龍淵砂角自左內入爲合襟。 築城於內文星, 少縮城形以讓砂角, 而外文星則別築土城, 以護內城爲宜。" 上謂留守趙心泰曰: "此城直築於外文星, 跨越龍淵之砂, 與內文星幷入城裏, 則好矣。" 仍詣龍淵, 指龜峰, 謂心泰曰: "右爲龜峰, 左爲龍淵, 龜龍相對, 名亦不偶矣。" 蓋龍淵之麓, 前面爲石壁, 下臨小潭, 水自光敎山來, 至石壁下滙焉。 迤出自北而南過邑治, 其循麓屈折處, 將跨橋築城爲水門者也。 謂心泰曰: "(文)〔一?〕 字文星之兩重, 益見完厚鞏固氣像, 龍淵之麓爲龍頭, 而石壁之蹲峙, 可見風氣鍾結, 甚有精神, 兼有捍水之功, 有若爲此役設施者然。 地理地勢, 十分恰好。 今日看審之後, 予心充然有得矣。 城役之大綱領如此, 若夫潤色之, 則在述者之能耳。" 至彌勒堂峴, 下馬少憩, 謂承旨曰: "每於園幸回鑾, 不覺吾行之遲遲, 過陪養峙及此峴, 自爾延佇矣。" 至沙川行宮少憩, 至果川行宮, 命今夜至明夜弛禁。 仍命城門, 待觀光人畢入後下鑰。 至望海亭少憩, 還宮, 夜已二皷矣。
- 【태백산사고본】 39책 39권 6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43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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