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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 38권, 정조 17년 10월 23일 계미 1번째기사 1793년 청 건륭(乾隆) 58년

호조가 양향 이정 절목을 아뢰다

호조가 양향 이정 절목(粮餉釐整節目)을 바쳤다. 이에 앞서 호조 판서 심이지(沈頤之)가 아뢰기를,

"양향청(粮餉廳)의 1년 세입(稅入)으로 1년 동안의 지출을 감당하지 못하므로 호조에서 쌀·베·돈을 가져다가 쓰는 것이 거의 한정이 없습니다. 만일 지금 당장 변통을 하지 않으면 뒷날 폐단이 이루 말하기 어렵겠습니다. 대체로 근년의 결세(結稅) 총액이 가장 많았던 해는 바로 기해년125) 과 경자년이었는데 작년과 올해 지출한 것과 비교하면 거의 3천여 냥(兩)이나 부족합니다. 각 연도의 지출에는 약간 남거나 모자람이 있기는 하지만 그 숫자를 맞추어 그 부족분을 보충하지 않을 수 없는데, 현재 재정을 마련할 방도로는 다른 방도가 없어 부득이 쓰고 있는 경비 중에서 좀 긴요하지 않은 경비를 우선 적당히 줄여보고 있지만 그 수량은 5백여 냥에 지나지 않으므로 그 나머지 3천 냥 가까운 돈은 떼어낼 만한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신이 삼가 연석에서의 하교를 받들어 근래 예산 외에 더 쓴 경우를 조사하여 뽑아본 결과는 무예 별감(武藝別監)의 군복값과 등유값 그리고 겸내취(兼內吹)의 누른색 철릭값 등에 지출된 돈이 2천여 냥이었습니다.

대체로 경비가 부족한 것은 지출 증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둔결(屯結)이 줄어든 데 그 원인이 있습니다. 신이 지난봄에 그 원인을 깨끗이 바로잡을 방법으로 묵은 둔전을 조사하자는 말을 올리어 다행히 윤허를 받고 각도에 공문을 발송하였는데 황해도를 제외하고는 조사하여 보고한 곳이 없으니 참으로 개탄스럽습니다. 둔세(屯稅)의 원래 총액수는 7천 결인데 해마다 줄어서 이제 3천 결 이내가 되었고 또 3천 결도 조금씩 흉년을 당하면서 재해로 인하여 면세하는 경우가 늘 계속되고 있습니다. 갑신년126) 에 세금을 매길 때 원래 가볍게 하였는데, 그 이유는 풍년이건 흉년이건 더내고 덜내고 하는 일이 없게 하자는 뜻에서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방 고을에서는 군수(軍需)의 중요함을 생각지 않고 둔민(屯民)들의 요구만을 들어주어 오직 삭감하는 것만을 일삼았던 것입니다.

지금 폐단을 바로잡는 때를 당하여 모두 조사해서 본래의 결수(結數)를 채우는 것이 가장 긴요한 일입니다. 결수가 적어서 상납할 일이 없는 것은 그냥 내버려 두고라도 결수는 많은데 조세를 적게 내어 지나치게 형평이 맞지 않는 곳은 도신(道臣)에게 엄히 신칙하여 신임하는 비장(裨將)을 파견해서 고을 수령과 함께 측량하여 낱낱이 실제대로 환원시키도록 하여 조금이나마 폐단을 바로잡는 데 보탬이 되게 하소서.

또 면세(免稅) 문제로 말하면, 3천 결에 대한 면세는 바로 사목(事目)에 규정되어 있는데 근자에 와서 혹 재상전(災傷田)으로 처리하고 미처 원상대로 환원시키지 못하였거나 토지를 다른 것과 맞바꾸어서 현재 줄어진 숫자가 거의 수백 결이 됩니다. 이 문제는 면세가 안 된 숫자를 찾아내어 다른 둔전에다 그 수만큼 면세를 실시하고 그대로 규정을 정하여 시행하도록 하시고, 그밖의 조세 납부에 따른 폐단에 관하여도 엄격히 절목(節目)을 정하여 별단으로 작성하여 재가를 받은 다음 각도에 공문을 보내 감히 어기지 못하도록 하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따랐다. 전교하기를,

"폐단을 바로잡는 이 시기에 예전에 없던 것이 근래에 있게 된 것은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다. 이 뒤로는 정례에 따라 내려주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이지가 아뢰기를,

"협련군(挾輦軍)이 예전에는 4백 명에 불과하였는데 지금은 6백 명이나 됩니다."

하니, 상이 이 뒤로는 전례에 따라 4백 명으로 정하라고 명하였다. 이지가 또 아뢰기를,

"연(輦) 앞에 배치하는 군사가 예전에는 40명이었는데 지금은 98명이나 됩니다."

하니, 상이 60명으로 정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이르러 절목을 바쳤다.

【1. 본청의 둔전 가운데 3천 결은 실제 결수로 면세한다는 규정이 일찍부터 있어 왔는데도 간혹 3천 결이 차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번에 연주(筵奏)하여 옛 규정대로 하기로 하였으니 일체 정해진 규정대로 면세하지 못한 실제 결수 중에서 3천 결을 채워 면세하기로 규정을 정한다. 1. 본청의 둔세(屯稅)를 절충 조절할 적에 되도록 가볍게 한 것은 대체로 풍년이건 흉년이건 조세 가감이 없도록 하기 위한 뜻에서였던 것이다. 그런데 지방 고을에는 여유있는 곳에서 곡식을 옮겨다가 모자라는 곳에 보충하는 방도가 있는데도 조금만 흉년이 들면 곧장 탈을 잡아 감면해 주기를 요청해 왔다. 이는 기경(起耕)하는 데 따라 세금을 매기는 경우와는 사정이 아주 다른 것이다. 지금부터는 각종 공세(公稅)의 납부 기한을 물려주거나 면제해 주는 때라도 본청의 둔세에 한해서는 핑계를 대어 기한을 물리거나 감면하지 못하고 일체 규정에 따라 정해진 숫자에 맞추어 바치게 한다. 1. 본청의 둔세를 혹 돈으로 대신 바치기도 하고 배로 곡식을 운반하기도 하여 해변과 산골짜기에 따라 각각 정해진 것이 있다. 풍년이 들면 곡식이 여유가 있고 흉년이 들면 곡식값이 뛰는 것은 원래 자연적인 이치인데도 풍년이 들어도 돈으로 대신 내는 것을 반드시 기한을 물리거나 감면하려 하고 흉년이 들면 바칠 곡식을 반드시 돈으로 대신 내려고 하여 풍년이건 흉년이건 탈을 잡아 보고하면서 시끄럽게 하고 있다. 이 뒤로는 돈으로 대신 바치겠다는 요청과 값을 덜어달라는 문서를 지방 고을에서 감히 번거롭게 보고하지 못할 것이고 본청에서는 이의 시행을 허락하지 않겠으며 일체 돈이건 쌀이건 정한 규정에 따라 상납한다. 1. 세금의 납부 기한은 그 군(郡)·읍(邑)의 거리가 멀고 가까움을 우선 고려하여 돈·곡식·무명·베로 구별하여 세금을 매겼는데도 지방 고을에서는 정해진 규정대로 이행하지 않고 아랫것들이 제멋대로 농간을 부리어 기한을 넘기고 거친 곡식으로 바꿔치기하는 폐단이 고을마다 모두 있다. 이 뒤로는 상납 기한을 넘기는 경우와 쌀과 베의 좋은 것을 거친 것으로 바꿔치기하는 경우에는 해당 수령을 초기(草記)로 논죄하여 법에 따라 처리한다. 1. 둔전은 그 고을 수령이 관리하기로 되어 있는 것인데 고을 수령이 공공 조세는 생각하지 않고 대부분 사사로운 안면 관계로 반호(班戶)와 둔장(屯長)을 정하는 경우가 많다. 이른바 반호는 둔토를 자기 물건처럼 인식하고 세금을 감면해주므로 본청에 피해가 돌아오게 하고, 절반을 나누어 차지하므로 둔민(屯民)에게도 원망이 미치게 되어 갖가지 폐단이 모두 여기에서 생겨난다. 지금부터는 고을 수령이 혹 사사로운 안면으로 반호와 둔장을 바꾸어 둔전의 폐단을 일으키는 자는 본청이 듣고 보는 대로 초기로 논죄하여 법에 따라 처리한다. 1. 본청의 둔세는 그것이 친병(親兵)의 비용으로 쓰이기 때문에 사체(事體)가 지극히 중요하다. 그러므로 한 포대의 곡식이나 한 냥의 돈이라도 거두지 못했을 경우 그것이 해유(解由)에 구애가 된다는 규정이 《대전통편(大典通編)》에 분명하게 기재되어 있다. 이는 옛 규정이 그렇다는 것을 밝힌 것이지만 만일 거짓으로 해유를 낸 자가 있으면 발각되는 대로 초기로 엄히 논죄하여 법에 따라 처리하고, 해유는 취소할 것이며 근무 일수를 따져 무겁게 죄를 다스린다. 1. 세곡의 수량을 적은 장부를 만들어 멀고 가까운 거리에 따라 10월부터 동짓달 내에 마감하며 세곡을 바치는 곳도 멀고 가까운 거리에 따라 그해 10월부터 이듬해 4월 내에 빠짐없이 상납하고, 돈으로 바꾸어 바치는 몫도 이듬해 3월부터 4월 내에 상납한다. 그러나 근래에 지방 고을들이 이러한 규정을 무시하고 장부를 마감하는 일, 돈으로 바꾸어 바치거나 곡식으로 상납하는 일 등을 한 가지도 기한을 지키지 않아 매우 놀랄 일이다. 각도에 엄중히 신칙하여 기한에 맞추도록 하고 만일 기한을 넘긴 수령이 있을 때는 본청에서 초기로 논죄하여 감영에서 곤장을 치고 5년 동안 금고(禁錮)에 처하도록 한다.】

전교하기를,

"이 별단을 이대로 준수하고 어기지 말도록 하라. 경은 경의 아버지가 이를 선왕조에 건의한 일이 있었는데 경이 또 이번에 이 규정을 만들었으니 이 일이 마치 오늘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하다. 그 폐단을 바로잡는 조치에 있어 다른 사람과는 더욱 다를 터이니 마음을 단단히 차리고 일을 추진하여 실질적인 성과가 있도록 하라. 그리고 또 각도에 엄히 신칙하여 조금이라도 전처럼 소홀히 하지 못하도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8책 38권 35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418면
  • 【분류】
    재정(財政)

○癸未/戶曹進糧餉釐正節目。 先是, 戶曹判書沈頣之啓言: "糧餉廳一年稅入, 不能當一年支放, 米布錢之取資於度支, 殆無限節。 若不及今變通, 後弊難言。 蓋結稅之近年最高摠, 卽己亥庚子, 而較視昨今年所下, 則不足幾爲三千餘兩。 各年用下, 雖有如干贏縮, 不可不準劃此數, 補其不足, 而顧今生財之道, 無他可措之術, 不得已先就需用中, 量減其稍涉冗散者, 則其數不過五百餘兩。 外近三千兩, 無他可劃之道。 臣謹奉筵敎, 考出近來加用者, 則武藝別監軍服債、燈油債、兼內吹黃帖裏等物力, 爲二千餘兩。 蓋經費之耗縮, 不但用下之增加, 專由於屯結之耗縮。 臣於春間, 以其端本淸源之道, 仰陳屯土査陳之說, 幸蒙允許, 行關諸道矣, 海西一道之外, 更無査報者, 誠甚慨然。 屯稅元摠爲七千數, 而年年減縮, 已入於三千結之內。 又於三千結之內, 不但歉荒災免相續, 甲申定稅, 本自輕歇, 實出豐凶無加減之意, 而外邑不念軍需之重, 一聽屯民, 惟事削減。 方當釐弊之日, 査括滿結, 最是要務。 結少而上納無事者, 姑置之, 就其結多稅少, 太不相當處, 嚴飭道臣, 發遣親裨與邑倅, 眼同打量, 一一還實, 以爲一分捄弊之道。 且以免稅一事言之, 三千結免稅, 乃是事目, 而間者或因災處之未及還實, 土地之從他移換, 見今縮少之數, 幾爲數百結。 此則考出未免稅之數, 移施於他屯土, 仍爲定式施行。 其他稅納之弊, 嚴成節目, 別單啓下, 行會諸道, 使之毋敢違越似好。" 從之。 敎曰: "當此釐正之時, 昔無近有者, 不可仍置, 此後勿爲例下。" 頣之曰: "挾輦軍, 昔不過四百名, 今爲六百名。" 上命此後依舊例, 以四百名定式。 頣之又奏: "前排舊只四十名, 今爲九十八名。" 上命以六十名定式。 至是進節目。 【一, 本廳屯田中限三千結, 以實結免稅, 曾有定式, 而間或未滿於三千之數。 今番筵奏復舊之後, 一以定式, 未免稅實結中充數免稅, 仍爲定式。 一, 本廳屯稅之折衷酌定, 務從輕歇, 蓋出於豐歉不得加減之意, 則外邑有移贏補縮之道, 而或値少歉, 輒請頉減。 此與隨起隨稅之地, 事面自別, 從今以往, 雖値各樣公稅停免之時, 本廳屯稅毋出憑藉停減, 一遵定式, 準數上納。 一, 本廳屯稅, 或代錢或船運, 隨其沿峽, 各有所定。 年豐則稅穀有裕, 歲歉則價直登踊, 自是固然之理, 而豐年則代錢必欲停減, 歉歲則本穀必欲代錢, 隨其豐歉頉報紛紜。 此後則代錢之請、減價之牒, 外邑無敢煩報, 本廳無得許施, 一從錢米間定規上納。 一, 稅納期限, 最其郡邑之遠近, 錢穀綿布區別定稅, 而外邑不有定式, 下屬惟意幻弄, 愆期之患, 換麤之弊, 邑邑皆然。 此後或有上納過限及米布換麤者, 該守令草記論勘。 一, 屯土旣付本官, 則本官不念公稅, 多以顔私或定班戶屯長。 所謂班戶, 認作己物, 減稅而害歸本廳, 分半而怨及屯民, 種種弊端, 皆出於此。 自今以後, 邑倅或行顔私, 移定班戶屯長, 以生屯弊者, 本廳隨聞見, 草記論勘。 一, 本廳屯稅, 旣是親兵所需, 事體至重, 故雖有一包穀、一兩錢之未收, 解由拘礙之法, 昭載於《大典通編》。 此則申明舊典, 若或有冒出解由者, 隨其現發, 草記嚴勘, 解由勿施, 計仕重治。 一, 穀數成冊, 隨其遠近, 十月至月內磨勘, 納穀處亦以遠近, 當年十月翌年四月內, 無遺上納。 作錢條, 亦於翌年三月四月內上納, 而近來外邑慢視定式, 成冊磨勘、錢穀等上納, 無一趁期, 事極駭然。 嚴飭各道, 使之趁限考尺, 過限守令, 本廳草記, 營門決杖, 五年禁錮。】 敎曰: "依此別單遵守, 俾勿違越, 而卿則卿之先卿, 建白於先朝, 卿又定式於今番, 事若有待。 其所釐弊之擧, 尤異於他人, 銳意修擧, 俾有實效, 仍又嚴飭諸道, 毋或如前泛忽。"


  • 【태백산사고본】 38책 38권 35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418면
  • 【분류】
    재정(財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