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정조실록 38권, 정조 17년 10월 11일 신미 3번째기사 1793년 청 건륭(乾隆) 58년

비변사가 군복의 개혁에 대한 논의를 아뢰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군복의 편리 여부에 대하여 대신과 제신(諸臣)들의 의견을 모아 보았더니, 판중추부사 김종수(金鍾秀)는 아뢰기를 ‘철릭을 버리고 군복을 착용하자는 주장은 크게 이해가 걸려 있는 일인데 누군들 다른 의논이 있겠습니까. 다만 나라의 법이 언제나 제도를 변경하는 것을 어렵게 여기며 사람들 마음도 처음 보는 제도는 의아하게 여기는 법이니, 지금은 우선 능행(陵幸) 때 시위와 근신들에게만 실시하고 앞으로 서서히 편리 여부를 보아가며 그 다음으로 백관들에게까지 미치면 그것이 신중한 뜻을 가지고 가부를 시험하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하였고, 병조 판서 정호인(鄭好仁), 장용 대장 김지묵(金持默), 훈련 도정 조심태(趙心泰), 금위 대장 이한풍(李漢豊)은 모두 군복으로 제도를 정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하였습니다.

대체로 옛 제도를 변경하려면 당연히 신중을 기해야 하고 그래서 판부사 박종악(朴宗岳)도 그러한 차론(箚論)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신들의 생각으로는, 군복과 융복이 모두 시위에 쓰는 복장인데 한 반열 안에서 누구는 군복을 입고 누구는 융복을 입는다는 것은 구별을 하는 데에도 전혀 의의가 없고 의장만 번잡할 뿐일 것입니다. 더구나 전립(戰笠)과 협수(狹袖)를 배위하는 반열이 이미 시험삼아 착용했던 전례도 있으니, 의리에 어긋나지만 않고 쓰기에 편리하다면 변경하는 일이라는 데 구애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순전히 군복만 착용하는 것으로 그 제도를 통일하는 것이 아마 번잡을 줄이고 편리함을 취하는 방법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차제에 또 하나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될 것이 있습니다. 근래 벼슬아치들의 공복(公服)이 소매와 깃의 폭이 점점 넓어져서 자못 옛날 제도에 어긋나고 심지어 조례(皂隷)들의 철릭 소매도 따라서 넓어져서 거의 온 폭의 비단을 쓰기까지 하니 그 낭비가 민망할 정도입니다. 이 역시 바로잡을 방도를 충분히 의논하여 공복의 소매와 깃을 한결같이 옛 제도를 따르게 하고 조례들의 철릭도 되도록 짧고 좁게 하면 옛 제도를 다시 찾고 비용을 줄이는 실질적인 효과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또 창의(氅衣)는 그것이 비록 한가롭게 지낼 때 입는 옷이기는 하나 그 역시 조정 관원들의 복장임에 틀림없는데 공복 안감을 이왕 푸른색을 쓰면서 자기 집안에서는 반드시 흰색을 입도록 하고 있으니, 이 또한 뒤섞여 복잡할 뿐만 아니라 한갓 낭비만 하는 것이 되고 있습니다. 더구나 선왕조에서도 일찍이 흰옷 입는 것을 엄금한 일이 있었으니 이렇게 의장(衣章)을 바로잡는 날에 흰색 창의는 영원히 금지하여 잘못된 습속을 꼭 바로잡아야 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비록 옛날에 없던 일이라도 참으로 유익함이 있으면 단연코 시행하여야 될 것이다. 더구나 이 군복 제도는 예로부터 있었던 것이며 또 더구나 온천에 거둥할 때 입었던 사실이 의문(儀文)에 기재되어 있는 데이겠는가. 그러나 여러 사람들 말이 모두, 융복을 없애고 나서 군복을 착용함이 합당하다고들 하는데, 전립과 철릭은 이미 옛 제도에 속한 것이며 함흥 본궁(本宮)에도 간수해둔 것이 있으니 융복을 없앨 수는 없다. 군복 통용 문제는 일단 그냥두고, 덧붙여 진술한 두 가지 조항은 연석에서 대면할 때 말하겠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8책 38권 29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415면
  • 【분류】
    군사(軍事) / 의생활(衣生活)

○備邊司啓言: "軍服便否, 收議於大臣諸臣, 則判中樞府事金鍾秀以爲: ‘祛帖裏用軍服之論, 大關利害, 孰有異論, 而惟是國法, 每以變制爲重, 人情亦以創覩爲訝。 今若先從陵幸時侍衛與近臣爲始, 徐觀來頭便否, 次及百官班, 不害爲持重試可之道’ 云, 兵曹判書鄭好仁、壯勇大將金持默、訓鍊都正趙心泰、禁衛大將李漢豐, 皆以軍服定制爲宜云。 大抵變更舊制, 固宜審愼, 此所以有判府事朴宗岳之箚論。 然臣等之意以爲, 軍服戎服, 俱是陪衛之服, 而一班之內, 或着軍服, 或着戎服, 區別全無意義, 儀章徒致繁冗。 況戰笠狹袖之試用於陪班, 旣有古例。 苟不悖於義而便於用, 則不必以變更爲拘, 純用軍服, 一定其制, 則恐合省繁從便之道。 因此而又有不可不釐正者。 近來搢紳之公服, 袖袂漸廣, 殊非古制。 至於皂隷輩帖裏之袖, 亦隨而廣, 幾至全帛, 濫費可悶。 亦令爛商矯捄之方, 公服袖袂, 一遵古式, 皂隷帖裏, 務從短狹, 則恐不無復古省費之實效。 且氅衣雖是燕居所着, 亦係朝官之服, 而公服之裏, 旣用靑色, 私室之中, 必着白色, 此亦不但斑駁, 徒作糜費之資。 況於先朝, 亦嘗嚴禁白衣, 則及此衣章釐改之時, 尤宜永禁白氅, 以矯俗習。" 批曰: "雖是無於古之事, 苟有所益, 當斷然行之。 況此軍服之式, 自古有之, 又況溫幸所御, 載於儀文者乎! 然諸說皆以祛戎服然後, 當用軍服爲言, 而笠與帖裏, 旣屬舊制, 咸興本宮亦有藏奉之本, 則戎服不可祛也。 軍服通用事, 置之; 兩條附陳事, 當言於登對時矣。"


  • 【태백산사고본】 38책 38권 29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415면
  • 【분류】
    군사(軍事) / 의생활(衣生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