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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 38권, 정조 17년 8월 8일 무진 1번째기사 1793년 청 건륭(乾隆) 58년

시임·원임 대신과 2품 이상인 경재와 내각·삼사의 제신을 소견하다

시임(時任)·원임(原任) 대신과 문관·음관(蔭官)·무관으로서 2품 이상인 경재(卿宰)와 내각(內閣)·삼사의 제신들을 소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 등을 소견한 것은 나의 뜻을 말하여주려고 해서이다. 요즈음 나타나고 있는 좋지 못한 꼴들을 보고 연석에 올라온 제신들도 어찌 요량되는 바가 없겠는가. 차마 말하지 못할 것을 차마 말하고 감히 제기하지 못할 것을 감히 제기하는 것은, ‘의리를 밝히고 윤리를 바루자.[明義理正倫綱]’는 이 여섯 글자에 지나지 않고 있다. 전 영상(領相)이 상소한 말을 경들은 정말 어느 사람에게 들었으며 또 무슨 일을 가지고 죄를 삼는가?"

하니, 영의정 홍낙성(洪樂性), 판중추부사 박종악(朴宗岳), 좌의정 김이소(金履素)가, 모두 원소(原疏)를 보지 못하였다고 말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문제에 만일 범법한 사실이 있다면 전 영상이라고 하여 무엇을 아낄 것이며, 혹시 이와 반대가 된다면 또 전 좌상이라고 하여 무엇을 아낄 것인가. 전 영상의 상소 가운데 한 구절의 말은 곧 아무해[某年]101) 의 큰 의리에 관한 핵심인데, 내가 양조(兩朝)의 미덕(美德)을 천양하고픈 마음이 있으면서도 감히 한번도 이를 제기하지 못한 이유는 참으로 이 일이 아무해에 관계된 것이어서 감히 말하지도 못하고 또 차마 제기하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전 영상의 상소 가운데는 비(非) 자 한 구절로 말머리를 꺼내고 즉(卽) 자 한 구절로 말을 끝맺었는데, 즉 자 이하의 내용은 아무해의 일과 관계되어 있는 지극히 중대한 일이었다. 가령 전 영상이 국가를 위하여 한 번 죽기로 작정하고 미덕을 천양하려는 애타는 마음과 피끓는 정성에서 한 말이라 하더라도 내가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것을 전 영상이 감히 말하였으니 그 겉면만을 얼핏 본다면 그의 죄는 용서하기 어려운 것이다. 내가 비지(批旨)로 이미 부월(鈇鉞) 같은 엄한 뜻을 보인 이상 오늘 조정에 있는 신료들이 어떻게 놀라 통분해 하지 않을 것이며 전 좌상이 성토(聲討)한 것도 형편상 그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 영상이 남이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것을 감히 말한 것은 대체로 곡절이 있어서였다. 전 영상이 도승지로 있을 때 선조(先朝)께서 휘령전(徽寧殿)에 나와 사관(史官)을 물리친 다음 도승지만을 앞으로 나오도록 하여 어서(御書) 한 통을 주면서 신위(神位)의 아래에 있는 요[褥] 자리 속에 간수하도록 하였었다. 전 영상의 상소 가운데 즉 자 아래의 한 구절은 바로 금등(金縢)102) 가운데의 말인 것이다.

내가 처음 왕위에 오른 병신년 5월 13일 문녀(文女)103) 의 죄악을 드러내어 공포할 적에 전 영상이 윤음(綸音)을 교정하는 일에 참여하여 아뢴 것이 있었고 승지와 한림(翰林)을 보내어 이를 받들어 상고한 일까지도 있었다. 지금 물러가기를 청하는 상소에서 죽음에 임박하여 이런 진실을 말한 것은 전 영상만이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 혼자서 그 일을 말한 것이니, 이는 속에서 우러나온 충성과 의리의 발로라고 함이 옳을 것이다. 전 좌상은 이런 본 내막을 모르기 때문에 단지 그 표면에 나타난 것만을 의거하여 지난 여름 이후로는 감히 말하지 못할 의리로써 성토한 것이니 이 또한 속에서 우러나온 충성과 의리에서 발로된 것이다.

금등 속의 말은 하나는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요 하나는 지극한 효성에서 나온 것이니 이 어떠한 미덕인가. 단지 감히 말하지 못할 일이라는 이유 때문에 차마 제기하지 못하고 장차 묻혀진 채 드러나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 지금 전 영상의 상소로 인하여 그 단서가 발로되었고 그대로 잠자코 있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동호지필(董狐之筆)이라는 네 글자에 있어서는 그 뜻이 대개 이 다음에 동호와 같은 훌륭한 사가(史家)가 있어서 전하의 마음을 십분 이해하고 신들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한다면 지금 굳이 들추어내려고 할 필요가 없다는 것으로 이 역시 흉악한 말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하고는, 금등 가운데의 두 구절을 베껴낸 쪽지를 여러 대신들에게 보여주게 하고는 【피묻은 적삼이여 피묻은 적삼이여, 동(桐)이여 동이여, 누가 영원토록 금등으로 간수하겠는가. 천추에 나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바라고 바란다.】 이르기를,

"내가 이덕사(李德師)조재한(趙載翰)을 사형에 처하게 하던 날 문녀김상로(金尙魯)도 처단했을 것이지만 나는 그때 이미 금등의 글 가운데 들어 있는 선왕의 본의(本意)를 이해하고 그 뜻을 약간 반영하였던 것이다. 내가 비록 보잘것 없기는 하지만 일단 결정을 하려면 저울질을 해보고 결정하지 어떻게 내맘대로 경중을 좌지우지할 것인가. 내가 차마 이 말을 하는 것은 나도 생각이 있어서이다. 요컨대 온 세상 사람들에게 전 영상이 상소에서 말한 것이 위에서 말한 바와 같고 또 전 좌상이 준엄한 성토를 한 것도 내면의 사실을 모른 데에서 나온 것임을 알리고 싶을 뿐인 것이다. 그리고 또 분명히 밝혀두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다. 오늘날의 신하들은 언제나 한 가지 문제가 일어나면 곧 그것을 제멋대로 추측하는 버릇이 있어서 예컨대 전례(典禮) 문제 같은 것은 의심하지 않아도 될 것을 의심하고 있으니 그것이 어디 감히 마음이나 둘 일인가. 즉위한 처음에는 으레 정청(庭請)이 있으면 뒤에 애써 따르곤 하지만 나는 세 번의 사양에만 그치지 않고 세 가지 일은 끝까지 사양하며 여러 신하들이 그 뜻을 따라줄 것을 바랐다. 그 첫째는 강왕(康王)이 면류관을 벗은 일이 선유(先儒)들로부터 예가 아니라는 비난104) 을 받았기 때문에 차마 문에 임하여 조하(朝賀)를 받지 못했던 것이고, 둘째는 영릉(永陵)105) 을 추존하는 일은 선왕(先王)께서 비록 유언까지 하였으나 다시 더 신중을 기함이 합당했던 것이고, 셋째는 왕대비전의 칭호에 대하여 왕(王) 자 위에 대(大) 자를 감히 더 놓을 수 없었던 것이다. 속된 견해에 얽매이어 맨 아래 한 조항 이외에는 모두 거론할 수도 없게 되고 말았다. 이것도 오히려 이와 같았는데 더구나 전례에 관한 문제를 감히 의논한단 말인가. 병신년 3월 10일의 하교를 보면 나의 본의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분명히 밝혀두는 것은 대체로 ‘대고(大誥)’의 뜻을 모방하여 사람마다 그 뜻을 충분히 알고 있었으면 하는 생각에서이다. 지금으로부터는 다시 이를 빙자하여 이러쿵저러쿵 시끄럽게 구는 일이 있으면 사람마다 성토할 것이다. 오늘 이후로 사리를 천명할 책임은 오로지 경 등에게 있는 것이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8책 38권 6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403면
  • 【분류】
    왕실(王室)

  • [註 101]
    아무해[某年] : 사도 세자(思悼世子)가 부왕인 영조(英祖)에 의해 뒤주에 갇혀서 굶어죽은 영조 38년(1762)을 말함.
  • [註 102]
    금등(金縢) : 쇠줄로 단단히 봉하여 비서(秘書)를 넣어주는 상자. 주공(周公)이 무왕(武王)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과 바꾸게 해달라고 하늘에 기원했던 글을 넣어둔 데서 나온 말. 여기서는 영조(英祖)가 사도 세자(思悼世子)를 죽인 뒤 이를 후회하여 기록한 비서를 말한다.
  • [註 103]
    문녀(文女) : 영조(英祖)의 후궁(後宮) 숙의 문씨(淑儀文氏)를 말함. 사도 세자(思悼世子)를 무고하여 죽음에까지 이르게 한 죄로 정조(正祖)가 즉위하자 곧 폐하여지고 사가(私家)에 안치되었다.
  • [註 104]
    강왕(康王)이 면류관을 벗은 일이 선유(先儒)들로부터 예가 아니라는 비난 : 주 성왕(周成王)이 죽은 후 아직 장례를 지내기 전에 강왕이 면복(冕服)을 입고 성왕의 고명(顧命)을 군신(群臣)들에게 전한 다음 면류관을 벗고 다시 상복(喪服)으로 갈아입은 일에 대해서 소씨(蘇氏)가 바른 예가 아니라고 말한 것을 이름. 《서경(書經)》 권9 주서(周書) 강왕지고(康王之誥) 주(注).
  • [註 105]
    영릉(永陵) : 진종(眞宗)의 능 이름.

○戊辰/召見時原任大臣、文蔭武卿宰二品以上、內閣、三司諸臣。 上曰: "召見卿等, 欲諭予意。 近來爻象, 以著見者觀之, 登筵諸臣, 亦豈無料量乎? 不忍言而忍言, 不敢提而敢提者, 不過明義理、正倫綱六字而已。 前領相疏語, 卿等果聞於何人, 而亦以何事爲罪?" 領議政洪樂性、判中樞府事朴宗岳、左議政金履素, 皆言未見原疏。 上曰: "此事若有所犯, 何惜乎前領相? 如或反是, 又何惜乎前左相乎? 前領相疏中一句語, 卽某年大義理頭腦, 而以予闡揚兩朝德美之心, 猶不敢一番提起者, 誠以事關某年, 不敢言不忍提也。 前領相疏中, 以非字一句起端, 以卽字一句結辭, 卽字以下, 事關某年至重至大。 假使前領相出於爲國一死, 闡揚德美之苦心血誠, 予之所不敢言者, 前領相敢言之, 驟看外面, 其罪難赦。 予之批旨, 已示嚴於鈇鉞之意, 則今日在廷, 安得不驚痛, 而前左相之聲罪致討, 其勢固然矣。 然而前領相之敢言人所不敢言之事者, 蓋有委折。 前領相知申時, 先朝御徽寧殿, 屛去史官, 獨命知申進前, 授御書一文字, 使藏于神位下褥席中。 前領相疏中卽字下一句, 乃金縢中語也。 御極初丙申五月十三日, 文女罪惡之昭布也, 前領相與聞於絲綸校正之事, 有所奏, 至有遣承宣及翰林奉考之擧。 今於告退之疏, 有此將死之言, 獨知是事, 故獨言其事者, 謂之忠肝義膽可也。 前左相之不知本事, 只據外面, 以昨夏以後不敢言之義, 聲罪致討者, 亦出於忠肝義膽。 蓋金縢中語, 一則止慈之天, 一則至孝之天。 此何等德美, 而特以不敢言之故, 置諸不忍提之地, 將不免掩翳而不章。 今因前領相疏, 旣發其端, 不容泯默矣。 至於‘蕫狐之筆’四字, 其意蓋以爲, 日後良史, 有如蕫狐者, 以殿下之心爲心, 以臣等之心爲心, 則固無事乎闡發云爾, 亦不可謂之凶言矣。" 遂命以金縢中二句, 謄出於小紙者, 示諸大臣 【血衫血衫, 桐兮桐兮, 誰是金藏千秋? 予懷歸來望思。】 曰: "予於正法之日, 亦有文女尙魯之處分而已。 於其時, 以金縢中先朝本意, 微發其端。 予雖無似, 一段所執權然後執之, 豈可輕重出入乎? 予之忍爲此言者, 予意有在, 要使一世之人, 知前領相疏語之如右所言, 而前左相嚴討之, 亦出於不知裏面而已。 又有不可不曉諭者。 今日諸臣, 每因一番事端, 輒有一番妄度, 以典禮間事, 致疑於不當疑之地, 此豈敢萌於心者乎? 御極之初, 例有庭請後勉從, 而予則不止於三辭, 以三條事件, 爲固辭之端, 欲使諸臣將順。 其一, 康王釋冕, 不免先儒非禮之譏, 故不忍臨門受賀。 其二, 永陵追崇, 雖有先朝治命, 而更合致愼也。 其三, 王大妃殿稱號, 猶不敢加上一大字於王字之上也。 俗見所拘, 下一條外, 皆歸於不得擧論。 此猶如此, 況敢議到於典禮間乎? 觀於丙申三月初十日下敎, 可知予本意也。 今日洞諭, 蓋倣大誥之意, 欲使人人領會也。 繼自今更有憑藉紛紜之事, 則人得而討之。 日後闡明之責, 專付之於卿等。"


  • 【태백산사고본】 38책 38권 6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403면
  • 【분류】
    왕실(王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