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의 정택부가 돈 무역의 폐단과 중국에 간 사행의 추궁을 청하다
집의 정택부(鄭澤孚)가 상소하여 아뢰기를,
"중국 돈[唐錢]을 우리 나라에 시행하는 것은 비록 받아들여졌다 하더라도 해롭기만 하지 이로움은 없으며,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나라를 욕되게 하고 부끄러움만 남기는 것입니다. 신은 전후로 내려진 전하의 하교에서 우리 전하의 슬기로우신 통찰력이 매우 뛰어나심을 흠앙해 왔습니다. 대체로 돈이란 것은 연호(年號)를 표시해 새기고 연대에 따라 모양도 달리하는 것이어서 예나 이제나 통행되는 비단·금·은·주패(珠貝)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근 2백 년 동안 없었던 일을 이제 새로 시작하여 화천(貨泉)의 유통을 중국의 내륙이나 다름이 없게 하고자 하시니, 그것이 옛날에 이른바 박부득이(迫不得已)의 의리에 있어 과연 어떠한 것입니까.
그런데 저 용렬하고 비천하여 송곳 끝을 다투고 전혀 의리를 모르는 통역 무리들이야말로 비록 도끼로 찍어서 거리에 매단다 할지라도 사람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고 나라의 수치를 씻어내기에는 부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묘당에서 국사를 도모하는 신료들마저 전하의 뜻을 받들어 돕지 못하고 나라 일을 크게 그르치고 말았으니, 신은 속으로 한심스럽게 여깁니다. 사행(使行) 길에 나선 자들이 진실로 사령(辭令)을 잘하여 임기 응변의 도리를 힘써 다하였더라면 반드시 이렇게는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공자가 말씀하기를 ‘사방으로 사신이 되어 나가 임금의 명을 욕되게 하지 않으면 선비라 이를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선비의 도리를 진실로 누구에게나 책임지울 수는 없겠지만, 어찌 당당한 천승국(千乘國)의 사신으로서 임금의 명을 이다지도 욕되게 할 줄이야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신은 분개함을 억누를 길이 없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사신의 일에 대해서는 작년에 비록 연교(筵敎)와 비지(批旨)로 난색을 표한 적이 있었으나, 조정에서 이미 한편으로 자문을 가져가도록 허락한 것이었으니, 어찌 꼭 묘당만을 책할 필요가 있겠는가. 더구나 그때 시임(時任)이 의리를 내세워 그만둘 것을 말함으로써 정사(正使)가 갈리게 된 사실을 사역원이 초기(草記)까지 하였음에랴. 사행이 저 나라에 가서 바로 그 자문을 올린 것에 이르러서는 형편에 따라 그렇게 된 것 같다. 그러나 부끄러움을 남긴 것은 작지 않으니, 그들이 복명하기를 기다려서 자세히 물어 처리하고자 한다. 너는 우물우물 넘어가는 요즘 세상 풍속 가운데서 관잠(官箴)의 의리를 능히 본받았으니 자못 가상하도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7책 37권 19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379면
- 【분류】정론(政論) / 외교(外交) / 금융(金融)
○執義鄭澤孚上疏曰:
唐錢之行於我國, 雖得請而有害無利, 不得請則辱國貽羞。 臣於前後所下聖敎, 欽仰我 殿下睿智之所燭, 出尋常萬萬。 夫錢之爲貨, 標刻年號, 隨代異制, 非若綾緞、金銀、珠貝之古今通行者。 今欲創開近二百年所未有之事, 通流貨泉, 無異內藩, 其在古所謂迫不得已之義, 果何如哉? 惟彼象舌輩, 庸瑣鄙賤, 錐刀是競, 而全不識義理者, 雖膏斧而懸街, 猶不足以夬人心雪國恥,而惜乎廟堂籌謨之臣, 不能承助聖意, 而僨誤國計也, 臣竊寒心焉。 爲專對者, 苟能善爲辭令, 務盡處變之道, 必不致此。 夫子曰: "使於四方, 不辱君命, 可謂士矣。" 爲士之道, 固不可責之人人, 而豈謂堂堂千乘國之使价, 有此辱命之甚? 臣不勝憤慨也。
批曰: "使臣事, 昨年雖有筵敎與批旨之持難, 而朝家旣許一邊䝴去, 何必專責廟堂? 況伊時時任引義, 正使替行, 譯院草記者乎? 至於到彼直呈, 似因事勢使然, 然貽羞則非細。 待其復命, 欲詳詢處之。 爾於呑棗之俗, 能效官箴之義, 殊可嘉也。"
- 【태백산사고본】 37책 37권 19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379면
- 【분류】정론(政論) / 외교(外交) / 금융(金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