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 정사 박종악 등이 중국의 사정을 치계하고 돈 무역에 대한 중국 황제의 회답 자문을 받아 오다
동지 정사 박종악(朴宗岳)과 부사 서용보(徐龍輔)가 연경에서 치계하였다.
"신들 일행이 지난해 12월 22일에 북경에 도착하였습니다. 23일에 예부(禮部)의 통지 안에 ‘전지를 받자오니 「짐이 서화문(西華門)에 나가 외국의 사신들을 만나보고 영대(瀛臺)의 난실(蘭室)에서 아침을 먹고 일을 살핀 다음 잠깐 얼음타는 것을 보겠노라.」 하였다.’ 하고, 이어 서화문으로 나와 신들로 하여금 〈황제의 행차를〉 공경히 맞이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24일 오경(五更)에 신들이 서화문 밖에서 행차를 기다리고 있으니, 예부 상서 상청(常靑)·기균(紀昀)과 시랑 철보(鐵保)가 함께 와서 반열을 주관하였습니다. 안남(安南)·섬라(暹羅)·후장(後藏) 세 나라의 사신들도 반열에 참석하였는데 모두 신들의 아래에 있었습니다. 후장은 새로 귀순한 나라로서 모두 나마승(喇嘛僧)이었는데, 붉은 비단으로 머리부터 허리까지 휘감고 있어 모양이 매우 추악하였습니다.
날이 밝을 무렵에 황제가 누른 빛의 작은 가마를 타고 나오더니, 신들이 맞이하는 곳에 이르러서 가마를 멈추고는 신들을 앞으로 나오게 하여 묻기를 ‘국왕은 평안하시느냐?’ 하기에 신들이 대답하기를 ‘평안합니다.’ 하였습니다. 또 ‘세자도 평안하느냐?’고 묻기에, 대답하기를 ‘평안합니다.’ 하였더니, 황제가 신들에게 서원문(西苑門)으로 따라 들어오라 하였습니다. 영대에 이르자 전지를 내려 음식을 하사하는데, 예부의 관리가 신들을 인도해 근정문(勤政門) 안쪽에 앉혔고 내무부(內務府)의 관리가 밥상을 차려 주어 수행한 정관(正官)들까지도 일일이 밥을 먹였습니다. 황제가 아침을 든 다음에는 나와서 용(龍) 모양의 썰매에 앉아 빙희(氷戱)를 구경하였는데, 신들도 따라 가서 함께 구경하였습니다.
26일에는 황제가 어선방(御膳房)의 관리를 시켜 회회국(回回國)의 포도 한 상자를 보내 왔는데, 모양이 잘고 씨가 없었으며 맛은 매우 달았습니다.
29일에는 황제가 태묘(太廟)에 나가 친히 제사를 드렸습니다. 신들은 오문(午門) 앞에 나아가 맞이하고 배웅하였습니다. 오후에는 어선방이 또 황제의 분부에 의해 석류(石榴)와 감귤(柑橘) 한 상자를 보냈는데, 남쪽에서 공물로 올린 것으로 갓 도착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30일에는 황제가 보화전(保和殿)에서 제석연(除夕宴)을 열었는데, 신들도 보화전 동쪽 계단 윗쪽에 들어가 앉았습니다. 아침이 되어 황제가 전각 안의 어탑(御榻)에 나와 앉자 내무부가 음식상을 올리고 또 술잔을 올렸으며, 이어 여러 나라의 각종 유희가 벌어졌습니다. 전각 안의 여러 신료들에게는 개개인 앞에 식탁 하나씩이 놓여졌고, 전각 밖에는 두 사람 앞에 식탁 하나씩이 놓여졌습니다. 낙다(駱茶)가 한 순배 돌고 술이 한 순배 돈 뒤에 예부 상서 상청(常靑)이 신 종악(宗岳)을 인도해 어탑 앞에 이르자, 황제가 손수 상에 있는 술을 하사하므로 신 종악이 머리를 조아리고 마신 다음 다시 제자리로 나와 앉으니, 황제가 또 어상(御床)에 놓인 떡 한 그릇을 집어서 신들에게 하사하였습니다.
금년 정월 초하룻날에는 신들이 오문 밖 조방(朝房)에 들었는데, 날이 아직 밝기 전에 황제가 당자(堂子)032) 에 행행하였다가 바로 내전으로 돌아갔습니다. 여명에는 신들이 태화전(太和殿)의 뜰에 들어가 설날의 하례에 참석하였는데, 안남·섬라·후장의 사신들도 참석하였습니다.
7일에는 황제가 천단(天壇)에서 기곡 대제(祈穀大祭)를 지냈는데, 하루 전에 단 아래서 재계하며 밤을 새우고 이어 제사를 드렸습니다. 신들은 초엿샛날 새벽에 오문 앞에서 황제의 행차를 맞았고 초여드렛날 새벽에도 오문 앞에서 맞이하였습니다.
8일에는 황제가 자광각(紫光閣)에서 세초연(歲初宴)을 열게 되어 신들은 그날 이른 새벽에 자광각의 계단 아래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황제가 아직 나오기 전에 떡과 돼지고기 등의 음식물이 상으로 내려졌고 조금 뒤에 황제가 누른 빛의 작은 가마를 타고 나왔습니다. 신들은 공경히 맞이하고 이어 동쪽 계단 위로 올라갔는데, 음식을 차리고 놀이를 벌이는 것은 보화전의 잔치와 대략 같았습니다. 예부 상서 상청이 신 종악을 인도해 어탑에 이르자 황제가 손수 상 위에 있는 술을 내리었고, 시랑 철보(鐵保)가 다음으로 신 용보(龍輔)를 인도해 어탑 앞에 이르자 황제가 역시 손수 상 위에 있는 술을 내리고 묻기를 ‘너희들은 지금 무슨 벼슬에 있는가?’ 하기에 신들이 벼슬 이름을 들어 대답하고 본래 자리로 되돌아오니, 황제가 또 어상의 떡을 집어 신들에게 내려 주었습니다. 조금 뒤에 잔치가 끝나자 신 종악에게는 비단 16필과 멜주머니 5개를 하사하였고, 신 용보에게는 비단 8필과 멜주머니 4개를 하사하였습니다.
9일에는 신들이 오문 앞에 나아가 상으로 내리는 선물을 받았는데, 연례적으로 내리는 회송 예단(回送禮單)과 그외에 비단 2필, 견전(絹箋) 4권, 복자지(福字紙) 1백 방(方) 옻칠한 찻상[茶盤] 4개, 호필(胡筆) 4갑(匣), 휘묵(徽墨) 4갑, 벼루 2개를 더 보내 주었습니다.
12일에는 황제가 원명원(圓明園)에 행행하는데, 신들이 삼좌문(三座門) 밖으로 나가 있으니, 황제가 신들이 지영하는 곳에 이르러 따라오라고 하므로, 신들이 수행하여 원명원에 가서 그 근처에 거처를 정하였습니다.
13일에는 황제가 산고수장각(山高水長閣)에서 등희합자(燈戱盒子)를 베풀었는데, 신들은 내반(內班)에 참여하여 보았습니다. 낙다(駱茶)를 한 잔 주고 또 과일 상자와 대보름 음식 등을 주었습니다. 14일 저녁에는 신들이 또 산고수장각에 들어가 내반으로 나아갔는데, 놀이하는 것이나 음식 준비들은 또한 13일과 같았습니다.
15일에는 황제가 정대광명전(正大光明殿)에서 방생연(放生宴)을 열었는데, 신들은 전각의 계단 위쪽으로 들어갔습니다. 날이 밝을 무렵 황제가 전각 위에 나와 앉자 음식이 차려지고 차가 나왔고, 또 방생(放生) 등의 놀이를 베풀었습니다. 예부의 상서와 시랑이 차례로 신들을 인도하여 어탑에 이르자 황제가 손수 상 위의 술을 내려 주었고, 잔치가 파하자 내무부가 황제의 분부에 의해 양(羊)고기와 꿀떡[蜜糕]을 전해 주었습니다. 저물녘에 또 산고수장각의 내반에 들어가니, 폭죽이며 불꽃놀이며 등불놀이 등이 전날보다 갑절이나 더 성대하였습니다. 음식을 대접할 때에는 내무부 대신 화신(和珅)과 김간(金簡)이 매번 와서 살폈습니다.
16일에는 내각(內閣)의 통지에서 신들에게 은혜를 기념하는 시를 지어 올리도록 하였으므로, 신들이 각각 칠언(七言)의 사운 율시(四韻律詩) 한 수씩을 지어 예부에 보냈습니다. 18일에는 또 원명원에 갔습니다.
19일 저녁에는 산고수장각에 들어가 내반으로 나아가니, 황제가 신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이 귀국하면 꼭 국왕에게 안부를 전해야 한다.’ 하고, 또 이르기를 ‘너희 나라 세자가 지금 몇 살인가?’ 하기에 ‘4세입니다.’고 대답하니, 또 묻기를 ‘국왕에게 다른 아들은 있는가?’ 하기에 ‘아직 없습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이때 내무부 대신 화신 등이 누른 함에 담은 상품을 주면서 시를 지은 데에 대한 상으로 내린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신들에게 각각 비단 1필, 견지(絹紙) 2권, 붓 2갑, 먹 2갑이었는데 바로 어좌 앞에서 전해 주었고, 전날과 같이 놀이를 베풀고 음식을 대접해 주었습니다. 땅거미가 질 무렵에 이르러 황제가 산고수장각에서 경풍도(慶豊圖)로 들어가자, 예부 상서가 신들을 인도해 경풍도로 따라가서 계단 위에 앉았습니다. 차를 한 차례 대접하고 등불을 켠 무대에서 여러 가지 놀이를 베풀었는데, 밤이 되어서야 물러나왔습니다. 전폐(錢幣)의 무역을 청하는 일은 신들이 표문과 자문을 올린 뒤 여러 길로 탐색해 들어보았더니, 동철(銅鐵)은 외국에 내보내는 것을 금한다는 규정에 관계되는 일이고 또 외국에 이미 시행한 규례가 없었다 하여 여러 가지로 꺼리고 의심하며 논설이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정월 18일에 재차 원명원에 가보고 나서 또 들으니, 관리예부사(管理禮部事) 각로(閣老) 왕걸(王杰)이 우리 나라 자문의 말을 아뢰었다가 많은 책망을 들었는데, 지금 예부에서 바로 회자(回咨)를 보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들이 그날로 정문(呈文)을 따로 작성하여 왕걸이 머문 곳에 올리고, 또 다음날에는 왕걸이 관아에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예부의 조당(朝堂)에 올렸으며, 또 다음날에는 관소(館所)로 되돌아와 예부에 올렸습니다. 또 24일에는 예부가 잔치를 주관하여 베풀 때에 얼굴을 마주해 말을 나누어보았는데, 관리(管理) 왕걸과, 상서 상청(常靑)·기균(紀昀)과, 시랑 철보(鐵保)·유권지(劉權之), 승(僧) 보주(保住) 등의 전후 대답에 달갑지 않게 여기는 뜻이 현저하여 만회할 수 있는 형세가 만무하였습니다. 2월 초하룻날에 이르러서야 회답 자문이 비로소 도착했는데 말들이 온당치 않은 곳이 매우 많았습니다. 그래서 신들이 예부를 찾아가 그대로 새벽까지 머물면서 감히 규례에 따라 수령해 돌아갈 수 없다는 뜻으로 다시 글을 갖추어 올리고 여러 말을 주고받았습니다. 그랬더니 시랑 철보가 처음에는 마치 숨기는 것처럼 하다가 끝에 가서는 말하기를 ‘이것이 어찌 아랫사람이 이같이 말을 하였겠는가. 바로 만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으로 지시하는 말을 받은 바가 있어서 그런 것이니, 실로 본 예부가 감히 마음대로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이 몇 구절의 말을 배신(陪臣)들이 어찌하여 묵묵히 이해하지 못하고 이렇게 서로 버티며 운운하는가.’ 하였습니다. 그래서 처음의 형세와 나중의 일들을 찬찬히 살펴보니 실로 말하기 어려운 염려가 있었으므로, 부득불 회자를 받기로 하였습니다. 신들의 성의가 족히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하고 지혜가 족히 일의 기회를 잘 주선해 내지 못하여, 필경에는 자문의 일에 대하여 비준을 얻지 못하였고 회답 자문의 내용은 또 저렇게 괴상하게 되었으니, 이는 모두가 일을 잘 처리하지 못한 소치인지라, 황공하고 부끄러워서 몸둘 곳이 없습니다."
- 【태백산사고본】 37책 37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377면
- 【분류】외교(外交)
- [註 032]당자(堂子) : 청나라 때 여러 신(神)을 제사하던 곳.
○冬至正使朴宗岳、副使徐龍輔, 在燕馳啓曰: "臣等一行, 去年十二月二十二日到北京。二十三日禮部知會內, 奉旨: ‘朕出西華門, 見外國使臣, 往瀛臺 蘭室用早饍辦事, 觀一分氷鞋。’ 仍進西華門, 令臣等祗迎, 故二十四日五更, 臣等待候於西華門外, 禮部尙書常靑ㆍ紀昀、侍郞鐵保, 竝來押班。 安南、暹羅、後藏三國使臣, 亦爲參班而俱在臣等之下。 後藏卽新爲納款者, 而俱是喇嘛僧, 以紅錦, 從頭纏腰, 形甚醜惡。 黎明, 皇帝乘黃小轎以出, 到臣等祗迎處, 住轎, 令臣等進前問曰: ‘國王平安乎?’ 臣等對曰: ‘平安。’ 又問: ‘世子平安乎?’ 對曰: ‘平安’ 皇帝令臣等, 隨入西苑門, 至瀛臺, 有旨賜食。 禮部官引臣等, 坐於勤政門內, 內務府官, 饋以飯卓, 幷隨行正官, 一一饋食。 皇帝早膳後, 出御龍形雪馬, 觀氷戲。 臣等亦隨後觀戲。 二十六日, 皇帝令御膳房官, 傳頒回回匍萄一帒, 形小無核, 味甚甛美。 二十九日, 皇帝詣太廟親祭, 臣等詣午門前迎送。 午後, 御膳房, 又以皇旨, 傳頒石榴、柑橘一桶, 謂是南邊進貢新到者。 三十日, 皇帝設除夕宴於保和殿。 臣等入詣保和殿東陛上。 平明, 皇帝出御殿內榻上, 內務府進饌卓, 又進爵, 仍設諸國雜戲。 殿內諸臣, 人各一卓, 殿外則兩人共一卓。 駱茶一巡, 酒一巡後, 禮部尙書常靑, 引臣宗岳, 至御榻上。 皇帝手賜卓上之酒。 臣宗岳叩頭飮訖, 還就本班。 皇帝撤御床, 餠糕一器, 以賜臣等。 本年初月初一日, 臣等入午門前朝房, 未明, 皇帝幸堂子, 卽爲還內。 黎明, 臣等入太和殿庭, 參正朝賀禮。 安南、暹羅、後藏使臣, 亦爲入參。 初七日, 皇帝行祈穀大祭於天壇, 前一日齋宿壇下, 仍爲行祭。 臣等初六日曉, 祗迎於午門前, 初八日曉, 袛迎於午門前。 初八日皇帝設歲初宴於紫光閣, 臣等當日曉頭, 入紫光閣階下。 皇帝未出來之前, 賞餠糕、猪肉等物。 少頃, 皇帝乘黃小轎以出。 臣等祗迎, 仍爲陞詣東陛上。 設饌陳戲, 槪如保和殿宴儀。 禮部尙書常靑, 引臣宗岳, 至御榻上, 皇帝手賜卓上之酒。 侍郞鐵保, 次引臣龍輔, 至御榻上, 皇帝亦手賜卓上之酒。 問: ‘爾等現居何職?’ 臣等擧職名以對, 還就班次。 皇帝又撤御床, 餠糕以賜臣等。少頃宴罷, 賜臣宗岳緞十六疋、荷包五對。 臣龍輔緞八疋、荷包四對, 初九日, 臣等詣午門前領賞。 年例回送禮單之外, 加送緞二疋、絹箋四卷、福字紙一百方、漆茶盤四箇、湖筆四匣、徽墨四匣、硯二方。 十二日, 皇帝幸圓明園, 臣等詣三座門外, 皇帝到臣等祗迎處, 令隨後, 故臣等隨往圓明園, 住接於近處。 十三日, 皇帝設燈戲盒子於山高水長閣, 臣等入參內班。 饋駱茶一巡, 又饋菓盒、元宵等物。 十四日晩後, 臣等又入山高水長閣, 就內班設戲, 饋饌亦如十三日。 十五日, 皇帝設放生宴於正大光明殿。 臣等入詣殿陛上。 黎明, 皇帝出御殿上, 設饌行茶, 又設放生等戲。 禮部尙書、侍郞, 次第引臣等至御褟上。 皇帝手賜卓上之酒。 宴罷, 內務府, 以皇旨來傳羊肉、蜜糕。 晩後, 又入山高水長閣內班, 炮𤍤烟、火燈戲, 倍盛於前日。 饋饌時, 內務府大臣和伸、金簡, 每每來視。 十六日, 內閣知會內, 令臣等製進紀恩詩, 故臣等各製七言四韻律詩一首, 送于禮部。 十八日, 又詣圓明園。 十九日晩後, 入山高水長閣, 就內班, 皇帝語臣等曰: "爾等歸國, 須問國王平安可也。’ 又曰: ‘爾國世子, 年今幾歲?’ 對曰: ‘四歲矣。’ 又問曰: ‘國王又有斯男之慶乎?’ 對曰: ‘姑未有之矣。’ 內務府大臣和伸等, 盛賞物於黃函, 諭以製詩賞賜。 臣等各緞一疋、絹紙二卷、筆二匣、墨二匣, 而直自御座前傳授, 設戲饋饌, 一如前日。 至初昏, 皇帝自山高水長閣, 入慶豐圖, 禮部尙書, 引臣等隨詣慶豐圖, 坐於陛上, 饋茶一巡, 設燈棚雜戲, 至夜退出。 錢幣請貿事, 臣等呈納表咨之後, 多岐探聽, 則事關銅鐵禁條, 且無外國已例, 猜疑多端, 論說不一。 正月十八日, 再往圓明園之後, 又聞管理禮部事閣老王杰, 以咨辭提奏, 而多被呵責。 至今自禮部, 直送回咨云云, 故臣等當日別具呈文, 呈于王杰所住處, 又於翌日, 待王杰赴公, 呈于禮部朝堂, 又於翌日, 回到館所, 呈于禮部。 又於二十四日, 禮部領宴時對面往復, 則管理王杰及尙書常靑ㆍ紀昀、侍郞鐵保ㆍ劉權之、僧保住等, 前後所答, 顯有不樂之意, 萬無挽回之勢。 及至二月初一日回咨, 始爲來到, 而句語之間, 極多未穩, 故臣等進往禮部, 仍爲達曉, 以不敢循例領還之意, 再度呈文, 多般往復, 則侍郞鐵保, 始若秘諱, 末乃以爲, 此豈在下之人, 如是遣辭。 直由於萬不獲已之致, 有所受辭而然, 實非本部所敢擅改。 只此數句語, 陪臣豈不默會而有此相持云云。 細察頭勢末梢事端, 實有難言之慮, 故不得不受回咨, 而臣等誠不足以感動人心,知不足以斡運事機, 畢竟咨事, (來)〔未〕 得承准, 回咨辭意, 又如彼乖常。 莫非不能事事之致, 惶隕恧蹙, 無地自容。"
- 【태백산사고본】 37책 37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377면
- 【분류】외교(外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