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계 부사 신대년이 변경 진의 개간을 청한 것을 평안도 관찰사 이병모가 아뢰다
평안도 관찰사 이병모(李秉模)가 치계하기를,
"강계 부사(江界府使) 신대년(申大年)의 첩정(牒呈)에 ‘영비(營裨)와 함께 황수덕령(黃水㯖嶺)에 이르러 지세를 살펴보니, 깎아지른 벼랑과 깊은 골짜기에 겹겹이 산이 둘려 있어 사람이 살 만한 곳이 아니었다. 그런데 좌우쪽 벼랑을 끼고 드문 드문 묵은 밭 흔적이 있어 부로(父老)들에게 물었더니, 지난 병술년030) ·정해년 연간에 10여 리 안팎에 사는 백성들이 잠시 들어와서 개간을 해보았으나 땅도 메마르고 서리도 일찍 내려 바로 묵힌 자리이니, 지금 개간을 허락해 준다 하여도 결코 실효가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또 황수덕령을 지나 그 북쪽은 바로 폐군(廢郡)의 경내인 데다가 또 여러 곳의 삼장(蔘場)을 침범하게 되어 있으니, 요새지와 삼장을 중히 하는 도리에 있어 개간을 허락하는 문제만은 논의를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상토진(上土鎭)의 마전령(麻田嶺) 7리 지역은 과연 인삼을 캐는 지역에는 방해될 것이 없으나, 여러 백성들이 그곳이 협착한 것을 탐탁잖게 여겨 마전령 북쪽 50리쯤에 있는 자작령(自柞嶺)에 푯말을 물려 세워줄 것을 힘써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 곳은 삼장에 방해되어 가벼이 허락할 수 없고, 단지 7리쯤에 푯말을 물려 세울 경우에는 또한 널리 개간하여 호수를 늘릴 가망도 없으니, 굳이 애써 허락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만포진(滿浦鎭)의 옥동(玉洞)은 이미 수십 리 밖으로 푯말을 물려 세울 것을 공문으로 알렸고 별다른 요새지의 한계도 없으니, 삼강(三江)의 구비보(仇非堡)까지 20여 리 밖으로 푯말을 옮겨 개간을 허락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회유하기를,
"땅을 비록 더 개간한다 하더라도 삼 캐는 것을 줄일 수 없음은 너무도 분명한 일이다. 만일 변경의 금령을 엄하게 하여 우리 백성이 이익을 독차지하게 할 수만 있다면 버려둔 네 군(郡)의 땅들을 모두 회복시킨다 하더라도 오히려 무한한 이익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급선무는 변경을 채우는 데에 있으므로, 매양 땅을 개간한다는 말을 듣기 좋아하였고 삼을 캐는 일은 생각하지 않았었다. 황수(黃水)와 마령(麻嶺)이 설사 해당 고을 원의 보고와 같더라도 어찌 대신할 만한 적합한 곳이 또 없겠는가. 이는 지금 당장 긴급한 일이 아니니, 모름지기 재임하는 동안에 다시 더욱 마음을 다해 찾아보고 또 수신(帥臣)들이나 고을 원들에게 세세히 물어서 만일 시행할 만한 계책이 있으면 후일에 방안을 마련하여 진달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7책 37권 13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376면
- 【분류】군사(軍事) / 농업(農業)
- [註 030]병술년 : 1766 영조 42년.
○辛巳/平安道觀察使李秉模馳啓言: "江界府使申大年牒呈: ‘與營裨偕到黃水㯖嶺看審, 則斷崖邃谷, 重巒周匝, 非人居之地。 左右夾崖, 往往有陳田之痕, 故問于父老, 則曾於丙戌、丁亥年間, 十數里內外居民, 暫入耕墾, 土薄霜早, 旋卽陳廢, 今雖許耕, 決無實效’ 云。 且‘過嶺以後, 便屬廢郡界內, 又犯數處蔘場, 其在重關阨重蔘場之道, 許耕一款, 有不可容議。 上土鎭之麻田嶺七里地, 則果不妨於採蔘之地, 而衆民嫌其窄短, 力請麻嶺以北五十里, 許退標於自柞嶺, 而此則有妨蔘場, 不可輕許; 只限七里退標, 則又無廣墾增戶之望, 亦不必黽勉許施。 滿浦鎭之玉洞, 則旣有數十里退標之知委, 別無嶺阨之界限, 故限三江 仇非二十餘里, 移標許耕’ 云。" 回諭曰: "地雖加闢, 蔘不縮採, 卽較然明甚之事也。 若使邊禁至嚴, 我民專利, 則雖盡復四郡之界地, 猶有無限餘利矣, 自下急務, 在於實邊。 每所以樂聞闢土之說, 不以採蔘爲念也。 黃水、麻嶺, 設如該倅之所報, 亦豈無可代可合處乎? 此非時日緊關之擧, 須於在任時, 更加悉心探究, 仍又細詢於帥臣、邑倅, 如有可行之策, 從後論理指陳。"
- 【태백산사고본】 37책 37권 13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376면
- 【분류】군사(軍事) / 농업(農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