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의정 김이소가 이가환의 상소를 논핵하나 받아들이지 않다
우의정 김이소가 상차하여 말하기를,
"신이 삼가 이가환이 올린 상소의 내용을 들어보니, 감히 흉악한 이잠의 일을 장황하게 늘어 말하여 그의 더없이 패악스럽고 무엄하기가 끝이 없었습니다. 참으로 사람의 마음이 불측하기가 한결 같이 이 지경에 이를 줄은 미처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저 보(溥)와 잠의 상소는 더없이 흉험하고 극악하며 지극히 요망하고 끔찍하여, 의리를 원수처럼 보았고 국시(國是)와 승부를 겨루었으니, 이는 실상 기사년017) 의 여러 역적들의 뒤를 따른 것이자 신임 사화(辛壬士禍) 때의 뭇 흉험한 역적의 선발대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숙종께서 크게 진노하시어 급히 토죄하셔서 대의를 밝히고 난의 싹을 잘라버렸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백세(百世)를 기다려도 의혹이 없을 일인 것입니다.
대체로 잠의 흉험한 상소문이 처음에는 민암(閔黯)·장희재(張希載)와 흉역의 심술을 똑같이 부린 것으로서 마침내는 또 김일경(金一鏡)·박필몽(朴弼夢) 등 여러 역적의 장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신임 연간에 추악하고 흉험한 무리들이 걸핏하면 선견지명이었느니 나라를 위해 죽은 충신이었느니 하면서 그 흉험한 잠을 추켜 세우며 그에게 포장할 것을 청하기까지 한 데에서 이미 맥락이 은밀히 통하고 일의 기맥이 서로 이어졌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끝에 가서는 역적 김일경에 대한 교문(敎文) 속에서 바로 잠의 성명을 거론하여 곡돌 사신(曲突徙薪)을 말한 무릉(茂陵)018) 이라고까지 하였으니, 가슴이 섬짓하고 뼈가 아픔을 더욱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숙묘(肅廟)의 성교(聖敎)에서는 ‘잠은 보보다 백배나 더하다. 이를 만일 심상하게 처리한다면 반드시 훗날 무궁한 염려가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친국을 하게 된 동기였는데 끝내 자복하지 않고 죽어버렸다. 세도가 이에 이르렀으니, 실로 국가의 깊은 염려가 된다.’고 하였고, 또 보의 죄는 당연히 사형에 처하여야 하는데도 법대로 처리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잠의 상소가 또 나왔으니, 잠의 헤아릴 수 없는 음흉함은 결코 한 사람의 소위가 아니라고 여기시고서, 인하여 다시 역적 보를 국문하라고 명해서 전형(典刑)을 통쾌히 시행했었습니다. 그리고 이어 문충공(文忠公) 이이명(李頤命)을 상직(相職)에 발탁하면서 어필로 직접 써서 전교하기를 ‘흉험한 자들이 경을 헤아릴 수 없는 지경으로 몰아넣으려 하였으나 내가 그들의 속임수를 잘 알고 경을 재상의 자리에 발탁하노라.’ 하였습니다. 무릇 이러한 성교들이 태양과 별처럼 환히 빛나고 있어, 오늘날에 상하가 준수하고 있는 바입니다.
그런데 그는 역적의 집안 사람으로 조그만 문묵(文墨)의 기예를 지녔다 하여 과람하게 죄를 씻어줌을 입고 벼슬이 재신의 반열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일분이라도 사람의 마음이 있다면 의당 흠을 용인하여준 성은을 우러러 알아차리고서 몸을 움추리고 두려워 떨면서 한쪽으로는 은혜의 보답을 도모하고 한쪽으로는 허물을 덮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도리어 힘을 다해 공론과 싸우면서 방자하게 공공연히 시비를 다투어 일의 본 모습을 변화시키고 충직과 사특함을 혼동시켰습니다. 근래에 예법이 비록 씻은 듯이 사라졌다고는 하나 어찌 이처럼 경악스러운 일이야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속히 처분을 내려서 호오(好惡)를 분명히 보이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가환의 상소는 무단히 원통함을 하소연한 일과는 다르다. 바로 지난번에 특지로 벼슬이 제수된 것으로 인하여 여기저기서 밀어닥치는 공격을 견디지 못해 이렇게 한참이 지난 뒤에야 소장을 올려 변명한 것이니, 오히려 딱하고 안타깝다고 말할 일인데 어찌 꼭 경의 말처럼 할 필요가 있겠는가. 더구나 선왕조 임술년019) 9월의 하교와 다음 해 여름의 하교가 기거주(起居注)의 기록에 자세히 실려있거니와, 잠의 조카 이맹휴(李孟休)의 일에 관해서도 성교가 오히려 아래와 같이 정중하고 간곡하였다. 그 성교에 ‘내가 죄를 씻어주고자 하면 그를 등용할 수 있다. 전일의 성상020) 께서는 기미를 막고자 하는 뜻에서 처분한 바가 있었던 것인데, 그 뒤에는 진달(陳達)하여 증직을 하기까지에 이르렀으니, 그를 표창하려는 것도 당파의 마음이고 그를 헐뜯는 것도 당파의 마음이다. 만일 그의 조카라 하여 등용하지 않는다면 국가에 어찌 등용할 만한 사람이 있겠는가.’라고 하시었다. 내가 승선을 시켜 이 성교를 찾아내게 해서 본 뒤에야 비로소 가환을 등용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경도 이미 알고 있었으리라고 여긴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7책 37권 9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374면
- 【분류】정론(政論) / 인사(人事)
- [註 017]기사년 : 1689 숙종 15년.
- [註 018]
곡돌 사신(曲突徙薪)을 말한 무릉(茂陵) : 곡돌 사신은 즉 화재를 예방하기 위하여 굴뚝을 꼬불꼬불하게 만들고 아궁이 근처의 나무를 딴 곳으로 옮긴다는 뜻으로, 전하여 어떤 사건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을 뜻한다. 한(漢)나라 때 재상 곽광(霍光)의 후예가 한창 위세를 떨칠 적에 무릉의 서생(書生) 서복(徐福)이 글을 올려 곽씨 세력의 억제를 세 번씩이나 주장하였으나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가 마침내 곽씨들의 역모가 발각되어 그들이 몰락하고 말았는데, 그 후 그들의 역모를 고변한 사람들에게는 모두 상이 돌아갔으나, 서복에게는 돌아오는 상이 없자, ‘굴뚝을 굽게 만들고 아궁이 근처의 나무를 옮기라고 말한 사람에게는 상이 없고 불이 난 뒤에 불을 꺼준 사람들에게만 상이 후한 것과 무엇이 다르냐.’고 한 데서 온 말인데, 여기서는 곧 잠(潛)에게 바로 서복같은 선견지명이 있었다고 비유한 말이다. 《한서(漢書)》 권68.- [註 019]
임술년 : 1742 영조 18년.- [註 020]
성상 : 여기서는 숙종을 이름.○己未/右議政金履素上箚曰:
臣伏聞李家煥投呈一疏, 敢以匈潜事, 張皇爲言, 其絶悖無嚴, 罔有紀極。 誠不料人心之叵測, 一至於此也。 夫溥、潜之疏, 窮凶極惡, 至妖至憯, 讎視義理, 角勝國是, 實爲己巳諸賊之後殿, 辛壬群凶之前茅。 故我肅祖, 赫然震怒, 亟行天討, 以明大義, 以折亂萌, 所謂俟百世不惑者也。 蓋潜之凶疏, 始與黯、希載, 凶肚逆腸, 一串貫來, 而終又爲鏡、夢諸賊之張本。 向於辛壬年間, 醜類凶徒, 動輒以先見之明, 死國之忠, 推詡凶潜, 請以奬褒者, 已可見脈絡之潛通, 氣機之相襲, 而末乃於鏡賊敎文中, 直擧潜之姓名, 以爲徙薪之茂陵, 驚心痛骨, 尤何忍言之哉? 肅廟聖敎有曰: "潜則百倍於溥。 此若尋常治之, 則必爲日後無窮之慮。" 所以親鞫, 而終不承款而斃。世道至此, 實國家之深慮也。’。又以溥罪當死而不正法, 潜疏又出, 潜之陰凶叵測, 決非一人所爲, 仍命更鞫溥賊, 夬施典刑。 旣而, 以御筆擢拜忠文公 李頣命相職, 敎曰: "凶人驅卿於罔測之地, 而予察其誣, 置卿於具瞻之地" 凡此聖敎, 炳若日星, 今日上下之所遵守者也。 渠以釁孽之蹤, 薄有文墨之技, 過蒙拂拭, 位至宰列。 苟有一分人心, 惟當仰體含垢之聖恩, 縮伏畏愼, 一以圖報, 一以蓋愆, 而乃反力戰公議, 肆然顯訟, 變幻事狀, 混淆忠邪。 近來隄防, 雖曰蕩然, 豈有若此事之可驚可愕者哉? 伏願亟降處分, 明示好惡
批曰: "李家煥之疏, 與無端訟冤有異。 卽因向來中批事, 不堪拳踢, 有此久而後, 對章申暴之擧, 可謂矜悶。 豈必曰云云? 況有先朝壬戌九月下敎, 及翌年夏下敎, 詳載於起居注。 爲其姪子者之李孟休事, 聖敎猶如是鄭重丁寧, 若曰: "予欲蕩滌, 則可用之。" 昔日聖意, 以防漸杜微之意, 有所處分, 其後至於陳達而贈職, 褒之者, 黨心, 毁之者, 黨心。 若以其姪而不用, 則國家豈有可用之人, 爲敎。 予命承宣考出此聖敎然後, 始用家煥。 意謂卿旣知之。"
- 【태백산사고본】 37책 37권 9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374면
- 【분류】정론(政論) / 인사(人事)
- [註 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