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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 36권, 정조 16년 10월 19일 갑신 2번째기사 1792년 청 건륭(乾隆) 57년

평안도 관찰사 홍양호가 중국 돈 무역의 불가를 건의하다

평안도 관찰사 홍양호(洪良浩)가 상소하였다.

"신이 삼가 조지(朝紙)를 보니 사역원 초기(草記)에 의해 이번 절사(節使) 편에 중국 돈을 무역해오게 하기 위해서 묘당과 의논한 끝에 자문(咨文)을 꾸며 들여보내기로 하였다고 했는데 신은 삼가 그것이 옳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돈이란 한 나라의 재보의 원천이며 백성들의 생명줄입니다. 그 권한을 위에서 쥐고 있고 아래서는 그 혜택을 받는 것이라서 남에게 빌려줄 수도 없는 것이고 또 남에게 빌려 달라고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황제(黃帝)가 처음으로 전폐(錢幣)를 만들었고 태공(太公)은 구부(九府)를 두어 돈과 물가를 관리해 왔으나 삼대(三代)의 화폐 제도는 같지 않았고 한(漢)·당(唐) 이후로는 나라를 새로 세우면 국호도 바꾸고 곧 새 화폐를 주조하여 한 시대의 이목을 새롭게 하고 사방의 이권을 거두어 들였던 것입니다. 그것이 한 나라에 주는 영향이 그만큼 소중했기 때문에 중국 주위의 여러 나라들도 각기 자기 나라 화폐를 사용하였으며 가령 거북등딱지·자개·칼·가죽 같은 것들을 나라의 돈으로 만들어 백성들의 생활을 편리하게 하였으나 다른 나라와 서로 유통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 나라는 기씨 시대부터 이미 돈이라는 것이 있었고 고려 시대에는 은병(銀甁)을 화폐로 사용하거나 혹 쇠돈을 주조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 나라에 구리가 생산되는 곳이 없기 때문이었지만 고려원나라는 의복이며 관직이 한 집안처럼 같았어도 일찍이 중국 돈을 빌려다 쓰지는 않은 것을 보면 형세가 서로 걸맞지 않고 구애됨이 있어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숙종조 때 와서 옛날 제도를 고증하여 비로소 동전(銅錢)을 주조하였는데 나라의 재용이 이로 인해 넉넉해지고 백성들이 그 혜택을 입었으며, 시행한 지 1백여 년이 되었어도 위아래가 다 편리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다만 왜동(倭銅)의 값이 비싸고 주조하는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돈의 품귀가 근래에 심해졌고 은의 생산도 줄고 하여 장사치와 역관들이 생업을 잃게 되었고 그리하여 그러한 변통책을 쓰려고 한 것이지만 중국 돈의 문제라면 선왕조 만년에 이미 그런 논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조정의 논의가 통일되지 않은 것은 사실 근거가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쓰고 있는 통보(通寶)는 본시 한 왕조가 제정한 제도로서 마치 의관이나 물건처럼 각기 제도와 법칙이 있어 다른 나라와 서로 혼동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제 소견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우리 나라가 연경이나 요동과 가까워 중국 본토나 매한가지이기 때문에 전폐를 통용해도 불가할 것이 없을 것이라고들 말합니다. 그러나 생각해야 할 것은 봉강(封疆)이 이미 나뉘어져 있고 명분과 제도가 각기 다른 이상 규제가 한번 무너지면 갖가지 농간이 쏟아져 나올 것이어서 그것이 첫번째 마땅치 않은 점입니다.

우리 나라가 비록 국토는 한쪽에 치우쳐 있지만 면적이 몇 천리이고 산을 끼고 바다에 둘러쌓여 있어 강국으로 호칭되고 있습니다. 겸하여 수륙 물산도 풍요롭고 은과 철(鐵)의 자원도 얼마든지 있어 비록 다른 나라와 유통하지 않더라도 재정을 제대로만 운영한다면 국가 재용의 부족을 걱정하지 않을 것인데 하필 중국에서 빌리겠습니까. 지금 만일 돈을 빌어 나라 재용에 보태 쓴다면 이는 남에게 빈약함을 내보이는 꼴이어서 장차 우리 국력을 넘겨볼 것이니, 그것이 두 번째 마땅치 않은 점입니다.

시험 삼아 이해 관계를 말해 보더라도, 지금의 역관 무리들이 중국 동전들이 거리에 가득 널려 있는 것을 익히 보았으므로 이것을 곧 기왓장이나 돌맹이 같이 여기고 교환하는 값도 갑절이나 5배의 싼 값으로 사들일 수 있기 때문에 적은 물건을 가지고서 많은 양을 사들여 10에 5의 이익을 남길 수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이 만일 그러함을 깨닫고서 차츰 그 파는 횟수를 줄여 가격이 서로 대등하게 해버리면 결국 이권은 다른 나라로 돌아갈 것이고 조종하는 것도 남의 손에 달려 있어 몇해 못가서 이익이라곤 없을 것입니다. 또 서쪽 변경의 백성들이 목전의 많은 이익을 보고서 다투어 은이며 삼이며 비단이며 베 등의 물품을 가지고 금지하는 것을 무릅쓰고 몰래 국경을 넘어 중국 돈을 사들여 오는 것이 마치 터진 시냇물 같고 달리는 사마(駟馬) 같아 막아 낼 수가 없게 된다면 우리 나라의 갖가지 물품들이 모두 압록강을 건너가게 되어 백성들의 일용이 날로 궁핍해 질 것이고 나라 재정도 날로 줄어들 것이니 장차 무슨 방법으로 그 뒤를 잘 마무리할 것입니까. 그것이 세 번째 마땅치 않은 점입니다.

이렇게 세 가지 불가한 점이 있는데도 단지 사행의 팔포(八包)를 채워주기 위해서 전대에 없었던 일을 갑자기 만들어 내어 뒷날 무궁한 폐단의 길을 열어놓는다면 그 어찌 중대하고 어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신이 일찍이 《대청회전(大淸會典)》을 보았더니, 동철(銅鐵)은 외국으로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하는 문구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더욱이나 보국(寶局)에서 주조한 전폐가 쉽게 새나가도록 길을 열어놓아 나가기만 하고 들어오는 것은 없어도 그대로 내버려두겠습니까. 구구하고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지금 비록 자문를 보내 요청하더라도 거절을 당할 염려가 있는데 그리되면 나라 체면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점 더더욱 신중을 기해야 할 것입니다. 신은 직책이 지방관으로서 조정의 논의에는 참가할 입장이 못 되지만 신이 있는 지역이 서쪽 관문이고 문제도 변경의 정사와 관계되기 때문에 백성과 국가의 이해(利害)를 눈으로 보고 감히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성상께서 잘 생각하시어 처리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중국 돈의 통용문제는 세 가지 불가한 점을 지적한 경의 말이 아니더라도 그것이 전혀 폐단이 없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돈을 화천(貨泉)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을 두루 유통시켜 막힘이 없음을 이른 것이다. 그 길을 트자는 것은 물정에 따른 것이고 그 폐단을 바로잡자면 현실에 맞게 하면 될 것이다. 허락한 것은 시험해보기 위한 것이므로 그만두는 것도 호령 한 번이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경이 소견을 곧바로 아뢴 점은 가상한 일이라 하겠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6책 36권 18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349면
  • 【분류】
    외교(外交) / 금융(金融)

平安道觀察使洪良浩上疏曰:

臣卽伏見朝紙, 因司譯院草記, 今此節使之行, 以貿來唐錢事, 往復廟堂, 將有撰咨入送之擧, 臣竊以爲不可也。 夫錢者, 有國之寶源, 生民之命脈。 上操其權而下受其利, 旣不可以假人, 亦不可以求假於人也。 蓋自黃帝, 肇創錢幣, 太公乃造九府, 以權輕重, 而三代不同制。 以來, 開國改號, 輒鑄新幣, 以變一代之耳目, 以收四方之利權, 其爲有國之所重如此。 故域外諸國, 各用其國之貨, 如龜、貝、刀、皮之類, 用作國信, 以便民俗, 不相通用也。 惟我東方箕氏之世, 已有古錢, 而朝則貨用銀甁, 或鑄鐵錢。 蓋由地無銅産, 而之與, 衣服官職, 事同一家, 亦未嘗借用唐錢, 則可見形格, 而勢拘也。 逮我聖祖朝稽古定制, 始鑄銅錢, 國用以給, 民受其利, 行之百餘年, 上下便之, 而第以倭銅價高, 皷鑄費多, 故錢荒比甚, 銀産又縮, 以致商譯之失業, 有此變通之策, 然唐錢一事, 蓋自先朝晩年, 已有此議, 而朝論之不咸, 誠有所據。 夫我國所用通寶, 自是一王之制, 如衣冠、物采, 各有典章, 不可與他國相混也。 議者雖謂地近、遼, 便同內服, 錢幣通用, 似無不可云, 而第念封疆旣分, 名制各殊, 防限一壞, 奸弊百出, 此其不可一也。 我國雖偏壤, 地方數千里, 負山環海, 號稱强國, 兼水陸之饒, 擅銀鐵之利, 雖使不通他國, 苟得理財之方, 國用不患不足, 又何必借貸於中國乎? 今若請錢, 以資國用, 則旣示人以貧弱, 將窺我之淺深, 此其不可二也。 試以利害言之, 今之譯舌輩, 慣見唐錢之遍滿街巷, 便同瓦石, 交易之價, 輒售倍蓰, 故謂以持少易多, 可博什伍之利。 彼若覺其然也, 漸減其沽, 俾與相當, 則利權歸於異域, 操縱在於他手, 不出數年, 將無所利矣。 且西邊之民, 見其目前厚利, 爭以銀蔘紬布等物, 冒禁僭越, 換來唐錢, 譬如川決駟奔, 莫可防遏, 則域中百需, 皆渡水, 而民用日乏, 國計日耗, 將何以善其後耶? 此其不可三也。 以此三不可, 而只爲使行充包之利, 遽創前代未有之擧, 以啓日後無窮之弊, 寧不重且難哉? 然臣嘗見《大淸會典》, 有銅鐵不許外國之文, 則況以寶局鑄成之幣, 輕開尾閭之洩, 一任其有出無入耶? 區區愚意, 今雖咨請, 恐致見格, 則其於國體何如也? 尤不可不愼也。 臣職是外藩, 不宜與論朝議, 而地居西門, 事關邊政, 目見民國利害, 不敢不言。 伏乞聖明, 留神裁處焉。

批曰: "唐錢通用事, 不待卿三不可之說, 而旣料其未必十分無弊, 然貨泉云者, 周通無停礙之謂也。 通其路, 循物情也; 救其弊, 適時宜也。 許之, 欲其試可; 已之, 亦當在一號令間事, 而卿之有懷卽陳, 殊可嘉也。"


  • 【태백산사고본】 36책 36권 18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349면
  • 【분류】
    외교(外交) / 금융(金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