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 정사 박종악 등에게 당판의 수입 금지와 소설 문체 사용의 금지를 명하다
동지 정사 박종악(朴宗岳)과 대사성 김방행(金方行)을 불러들여 접견하였다. 상이 종악에게 전교하기를,
"어제 책문의 제목 하나를 내어서 위서(僞書)의 폐단에 관해 설문을 해보았다. 근래 선비들의 추향이 점점 저하되어 문풍(文風)도 날로 비속해지고 있다. 과문(科文)을 놓고 보더라도 패관 소품(稗官小品)의 문체를 사람들이 모두 모방하여 경전 가운데 늘상 접하여 빠뜨릴 수 없는 의미들은 소용없는 것으로 전락하였다. 내용이 빈약하고 기교만 부려 전연 옛사람의 체취는 없고 조급하고 경박하여 평온한 세상의 문장 같지 않다. 세도와 유관한 것이어서 실로 작은 걱정이 아니다. 내가 그것을 바로잡아 보려고 고심 끝에 책문의 제목으로까지 내었던 것인데 만일 그 폐단만을 말하고 실효를 거두지 못하면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이러한 폐단의 근원을 아주 뽑아서 없애버리려면 애당초 잡서(雜書)들을 중국에서 사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제일이다. 그리하여 앞서의 사행 때도 물론 누누이 당부해 왔었지만 이번 사행에는 더욱더 엄히 단속하여 패관 소기(稗官小記)는 말할 것도 없고 경서(經書)나 사기(史記)라도 당판(唐板)인 경우 절대로 가지고 오지 말도록 하고, 돌아오는 길에 압록강을 건널 때 하나하나 조사해서 군관이나 역관 무리라도 만일 가지고 오는 자가 있으면 바로 교서관에서 압수하여 널리 유포되는 폐단이 없게 하라.
경사(經史)는 잡서와는 다르므로 이렇게 엄금한다면 다소 지나친 것 같으나 우리 나라에 있는 것만도 빠진 것 없이 다 갖추어져 있어 그것만 외우고 읽어도 무슨 일인들 참고하지 못하겠으며 어떤 문장인들 짓지 못하겠는가. 더구나 우리 나라 서책은 종이가 질겨 오랫동안 두고 볼 수 있으며 글자가 커서 늘 보기에도 편리한데 하필 종이도 얇고 글씨도 자잘한 당판을 멀리서 구하려 하는 것인가. 그런데 이것을 꼭 찾는 이유는 누워서 보기에 편리해서인 것이다. 이른바 누워서 본다는 것이 어찌 성인의 말씀을 존숭하는 도리이겠는가."
하니, 종악이 아뢰기를,
"지금 성교를 받자오니 문교(文敎)를 숭상하고 바른 학문을 부양하여 만세를 두고 영원한 장래를 염려하시는 위대한 전하의 말씀임을 알고 이루 말할 수 없이 흠앙스럽습니다. 신도 당연히 엄히 금하여 만에 하나라도 그 뜻을 받들도록 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대사성 김방행에게 이르기를,
"성균관 시험의 시험지 중에 만일 조금이라도 패관 잡기에 관련되는 답이 있으면 비록 전편이 주옥 같을지라도 하고(下考)로 처리하고 이어 그 사람의 이름을 확인하여 과거를 보지 못하도록 하여 조금도 용서가 없어야 할 것이다. 내일 승보시(陞補試)를 보일 때 여러 선비들을 모아두고 직접 이 뜻을 일러주어 실효가 있게 하라. 엊그제 유생 이옥(李鈺)의 응제(應製) 글귀들은 순전히 소설체를 사용하고 있었으니 선비들의 습성에 매우 놀랐다. 지금 현재 동지성균관사로 하여금 일과(日課)로 사륙문(四六文)만 50수를 짓게 하여 낡은 문체를 완전히 고친 뒤에야 과거에 응시하게 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그 사람은 일개 유생에 불과하여 관계되는 바가 크지 않지만 띠를 두르고 홀을 들고 문연(文淵)에 출입하는 사람들도 이런 문체를 모방하는 자들이 많으니 어찌 크게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는가.
일전에 남공철(南公轍)의 대책(對策) 중에도 소품(小品)을 인용한 몇 구절이 있었다. 그가 누구의 아들인가. 나도 문청(文淸)121) 에게서 배웠지만 지성으로 가르치고 인도해 주었기에 비로소 글을 짓는 방법을 알았다. 그의 문체는 고상하고 전중(典重)하여 요사이의 문체에 비할 바 아니었으므로 나도 그 문체를 매우 좋아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 아버지의 아들로서 그러한 문체를 본받는다면 되겠는가. 오늘 이 하교가 있었음을 듣고서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올바른 길로 가기 전에는 그가 비록 대궐에 들더라도 감히 경연에 오르지는 못할 것이며 집에 있으면서도 무슨 낯으로 가묘(家廟)를 배알하겠는가. 공철의 지제교 직함을 우선 떼도록 하라. 그 밖에 문신들 중에서도 너무 좋아하는 자들이 상당히 있으나 일부러 한 사람 한 사람 지명하고 싶지 않다. 정관(政官)으로 하여금 문신 중에서 그런 문체를 쓰는 자들을 자세히 살펴 다시는 교수(敎授)의 후보자로 추천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6책 36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349면
- 【분류】왕실(王室) / 출판(出版) / 인사(人事)
- [註 121]문청(文淸) : 남공철의 아버지 남유용(南有容)의 시호.
○甲申/召見冬至正使朴宗岳、大司成金方行。 上敎宗岳曰: "昨日出一策題, 設問僞書之弊, 而近來士趨漸下, 文風日卑。 雖以功令文字觀之, 稗官小品之體, 人皆倣用經傳, 菽粟之味, 便歸弁髦。 浮淺奇刻, 全無古人之體, 噍殺輕薄, 不似治世之聲, 有關世道, 實非細憂。 以予矯捄之苦心至意, 至有發策之擧, 而若徒說其弊, 而未責實效, 則亦何益哉? 如欲拔本而塞源, 則莫如雜書之初不購來。 前此使行, 固已屢飭, 而今行則益加嚴飭, 稗官小記姑無論, 雖經書、史記, 凡係唐板者, 切勿持來。 還渡江時, 一一搜驗, 雖軍官譯員輩, 如有帶來者, 使卽屬公于校館, 俾無廣布之弊。 經史則異於雜書, 如是嚴禁, 雖似過矣, 而我國所存, 咸備無闕, 誦此讀此, 何事不稽, 何文不爲? 況我國書冊, 紙韌而可以久閱, 字大而便於常目, 何必遠求薄小纖細之唐板乎? 此不過便於臥看, 必取於此, 而所謂臥看, 亦豈尊聖言之義乎?" 宗岳曰: "今承聖敎, 右文敎扶正學, 爲萬世長遠之慮, 大哉王言, 不勝欽仰。 臣當嚴禁, 對揚萬一矣。" 上謂大司成金方行曰: "泮試試券, 若有一涉於稗官雜記者, 雖滿篇珠玉, 黜置下考, 仍坼其名而停擧, 無所容貸。 明日設陞補, 會多士而面諭此意, 俾有實效。 日昨儒生李鈺之應製句語, 純用小說, 士習極爲駭然。 方令同成均, 日課四六滿五十首, 頓革舊體, 然後許令赴科, 而此不過一儒生所關不大, 而至於垂紳正笏, 出入文淵之人, 亦多有依倣此體者, 寧不大可悶哉? 日前南公轍之對策中, 有數句引用小品處, 是誰之子? 予亦學於文淸, 至誠訓導, 始知爲文之方。 蓋其馴雅典重, 非比近日文體, 故予亦甚好之。 是父之子, 而效此文體, 其可乎? 今日聞此下敎, 革心歸正之前, 渠雖入闕, 而不敢登筵席, 在家而何顔拜家廟乎? 公轍知製敎之銜, 爲先減下。 此外文臣亦多有酷好者, 而姑不欲一一指名, 令政官詳察諸文臣中爲此體者, 勿復檢擬於敎授望。"
- 【태백산사고본】 36책 36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349면
- 【분류】왕실(王室) / 출판(出版) / 인사(人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