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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 35권, 정조 16년 8월 19일 을유 1번째기사 1792년 청 건륭(乾隆) 57년

황조의 부총병 등자룡을 강진 탄보묘에 배향하고 관리를 보내 제사지내다

황조(皇朝)의 부총병(副摠兵) 등자룡(鄧子龍)강진(康津) 탄보묘(誕報廟)에 배향하고 관리를 보내 치제(致祭)하였다. 전교하기를,

"근래에 이 충무(李忠武)의 유사(遺事)를 보다가 노량진 싸움을 추억하면서 저도 모르게 넓적다리를 만지면서 길게 탄식하였다. 중국의 부총병 등자룡은 70세의 노장(老將)으로 2백 명의 용사(勇士)를 이끌고 넓은 바다 위를 마음대로 횡행하면서 손에 침을 뱉으며 교활한 왜적을 섬멸할 것을 맹세했으니, 그 호탕한 담력은 대장부라 할 수 있다. 더구나 수공(首功)을 차지하고자 하여 충무공의 배로 뛰어올라 곧장 앞으로 돌격하여 수없이 많은 포로를 잡았으나 우연히 화기(火器)를 건드려 중류(中流)에서 불이 붙자 적이 달라붙었는데도 오히려 힘껏 싸웠다. 충무공이 달려가 구해주다가 함께 죽었으니, 이 일은 서희진(徐希辰)《동정기(東征記)》에 자세히 실려 있다. 내가 일찍이 불쌍하게 여겨 《명사(明史)》 본전(本傳)을 상고해 보니 ‘조선에서 묘식(廟食)을 받고 있다.’라는 말이 있었는데 애당초 묘식함이 없고 강진의 도독(都督) 사당에도 또 배향하지 못했으니, 흠전(欠典)·궐사(闕事)로 어느 것이 이보다 크겠는가. 평양 무열사(武烈祠)에 참장(參將) 낙상지(駱尙志)를 추가로 배향하자고 도백이 건청(建請)하여 이미 허락하였다. 같은 때 같은 일을 한 사람의 공덕을 보답하는 전례가 어찌 한 사람은 하고 한 사람은 하지 않아서 중국 장수의 영혼이 깃들 곳이 없게 하겠는가. 중국 부총병 등자룡 공을 진 도독(陳都督)의 사당에 승배(陞配)해야 하는데 처음에 듣기로는 사당이 남해(南海)에 있다고 하여 이제 평양낙공을 추배할 때에 미쳐서 함께 거행하고자 하였다. 다시 듣건대 도독은 충무공강진탄보묘 옆에 배향하였다고 하니 등공의 별사(別祠)도 마땅히 이 사당에 배향해야 한다. 승배(陞配)하는 날에 관원을 보내 치제하되 충무공을 이미 함께 배향하였으니 일체로 치제하라. 제문은 모두 마땅히 친히 짓겠다. 치제는 비록 명이 있지만 이때에 주전(廚傳)하는 데 폐단이 있으니, 헌관(獻官)은 부근의 문관인 원 가운데서 차출해 보내라. 등 총병충무공과 동시에 노량에서 목숨을 바쳤는데 충무공남해충열사(忠烈祠)에서 전향(專享)하고 있다 한다. 충무공의 유사를 근래에 내각(內閣)으로 하여금 전서(全書)로 찬(撰)하게 하였으니 인쇄가 끝나기를 기다려서 1본(本)을 본 사당에 보관하고 인하여 치제를 행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5책 35권 43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325면
  • 【분류】
    외교(外交) / 왕실(王室) / 출판(出版)

○乙酉/以皇朝副摠兵鄧子龍, 配於康津 誕報廟, 遣官致祭。 敎曰: "近閱李忠武遺事, 追想露梁之戰, 不覺撫髀長歎。 天朝副摠兵鄧子龍, 以七十老將, 提二百勇士, 縱恣於滄海上, 唾手而矢滅狡夷, 其氣豪膽麄, 可謂大丈夫哉! 況欲居首功, 躍上忠武之舟, 直前奮突, 所俘獲無計, 偶觸火器, 中流延爇, 賊乃傳之而猶力戰。 忠武馳救之, 與之同死, 其詳在徐希辰 《東征記》。 予嘗愍之, 取考《明史》本傳, 有廟食朝鮮之語, 而未始有廟食焉, 康津之都督祠堂, 又未之配, 其爲欠典、闕事, 孰大於是? 平壤 武烈祠, 以追配參將尙志事, 道伯建請, 朝廷旣許之。 同時同事之人, 酬功報德之典, 豈或一爲一否, 使天將之英爽, 無所寄泊乎哉? 天朝副摠兵鄧公子龍, 陞配於陳都督祠, 而初聞祠在於南海。 迨今箕城駱公追配之時, 欲與之同擧矣, 更聞都督, 與忠武配享於康津誕報廟之傍。 然則鄧公別祀, 嘗配於是祠。 陞配日, 遣官致祭, 忠武旣同享, 一體致祭。 祭文皆當親撰矣。 致祭雖有命, 此時廚傳有弊, 獻官以附近文倅中差送。 鄧緫兵忠武公, 同時捐軀於露梁, 而忠武專享於南海 忠烈祠云。 忠武遺事, 近令內閣, 撰成全書。 待活印, 藏一本於本祠, 仍行致祭。"


  • 【태백산사고본】 35책 35권 43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325면
  • 【분류】
    외교(外交) / 왕실(王室) / 출판(出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