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도 관찰사 홍양호가 평양의 무열사에 첨상 낙상지를 모시기를 청하다
평안도 관찰사 홍양호(洪良浩)가 장계하기를,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나라가 가방(家邦)을 재조(再造)하게 된 것은 황조(皇朝)의 은혜가 아님이 없으며 또한 우리 나라를 구원한 여러 장수들이 의(義)를 지니고 무공(武功)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를 구원한 공로로는 평양(平壤)에서의 승리보다 더 큰 것이 없었으니 우리 선조 대왕께서 특별히 화공(畵工)을 보내 석 상서(石尙書)086) 와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 총병(摠兵) 양원(楊元)·이여백(李如栢)·장세작(張世爵)의 상(像)을 그리도록 하셨습니다. 대개 석공은 우리 나라를 응원해야 한다는 의논을 힘껏 주장하였고 제독과 세 총병은 평양을 수복할 때 가장 뛰어난 공로를 세웠으므로 난리가 평정된 후 평양에 사당을 세웠으니 바로 지금의 무열사(武烈祠)가 그것입니다. 신이 부임한 처음에 맨 먼저 석 상서와 이 총병 두 분의 진상(眞像)을 배알하였는데 엄연한 기상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하였으며 그 나머지 세 분의 상은 병화(兵火)에 소실되어 신주(神主)로 대신하였으니 강개(慷慨)하고 애석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그 사당은 병란이 막 끝난 뒤 처음 세운 것이어서 제도가 좁고 누추하며 의문(儀文)이 갖추어지지 않아 몇 개의 기둥만 서 있어 집이 적막하고 황량합니다. 일찍이 수직소(守直所)가 없었고 단지 몇 명의 재임(齋任)만 있어 한 달에 두 번씩 분향(焚香)만 할 뿐입니다. 신이 개탄하여 경영하는 이에게 물어보고 유생과 무사를 초선(抄選)하여 새로 동서 두 양재(兩齋)를 지어 나누어 살면서 윤번으로 직수하게 하고 공부하는 장소를 삼았습니다. 밖의 터를 넓히고 대문을 세워 체모를 높이고 보기에 좋게 하였으니 숭보(崇報)하는 도리에 만에 하나나마 보탬이 되었을 것입니다. 삼가 당시의 사적을 상고해 보니 거행하지 않은 한 가지 일이 있습니다. 《평양지(平壤誌)》에 성을 회복한 시말이 자세히 실려 있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계사년 1월 6일에 제독 이여송이 세 협장(協將) 양원·이여백·장세작을 거느리고 군사 4만 2천 7백여 명을 이끌고 성의 북쪽으로 진격하여 진을 치니 왜장(倭將)이 홍의(紅衣)를 입은 천병(天兵)을 바라보고 말하기를 「양원의 절강(浙江) 군사는 사납고 용감하여 대적할 수가 없다.」고 하면서 두려워하는 기색이 있었다. 8일 새벽에 제독이 징을 한 번 울리자 삼군(三軍)이 일제히 진격하여 1군(軍)은 칠성문(七星門)을 공격하고 1군은 보통문(普通門)을 공격하고 1군은 함구문(含毬門)을 공격하였다. 적의 무리들이 장창(長鎗)·대검(大劒)을 사용해 칼끝을 나란히 하여 내려뜨리니 마치 고슴도치의 털같고 화살과 탄환이 비오듯하여 사람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제독이 손수 겁을 먹고 후퇴하는 자 한 명을 베어 진전(陣前)에 돌려보이니 참장(參將) 낙상지(駱尙志)가 몸을 솟구쳐 먼저 올라갔고 제군이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뒤따랐다. 낙상지가 겨드랑이에 대포(大砲)를 끼고서 크게 외치며 연달아 쏘니 연기가 하늘까지 뻗쳤다. 또 손 으로 죽은 시체를 움켜잡아서 성 위로 동댕이치자 적이 크게 놀라 말하기를 「중국 군사가 성으로 날아 올라왔다.」고 하면서 물러가 내성(內城)을 지켰다. 상지가 성문을 깨뜨리고 승승장구하며 적을 섬멸하니 적들이 움츠러들어 도망해 토굴(土窟)로 들어가 구멍을 많이 뚫고 바라보는 것이 벌집과 같았다. 그 구멍으로 어지럽게 총탄을 쏘아대어 중국 군사가 많이 죽자 제독이 군사를 거두어 영(營)으로 돌아와 말하기를 「짐승도 궁하면 덤벼드는 법이니 우선은 살 길을 터주는 것만 못하다.」하였다. 밤 삼경에 적이 대동문을 통해 도망하여 하룻밤 사이에 평산(平山)에 도착하였는데 길에서 많이 거꾸러져 죽었다.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이 첩보를 주달하기를 「죽은 왜병이 2만여 명이며, 포로가 되었던 조선 사람 1천 2백 명이 각기 그 집으로 돌아갔다.」고 하였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성을 회복한 공적은 비록 제독과 여러분이 협력하여 군사의 위엄을 드날린 데에 힘입은 것이지만 몸을 날려 성을 함락해 소굴을 소탕한 것에 이르러서는 오로지 낙 참장의 공로를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가 번쩍이는 칼날을 무릅쓰고 대포를 끼고 시체를 던진 것을 보면 크고 용맹스러운 담력(膽力)이 산을 무너뜨리고 강을 거꾸로 돌릴 만하였으니 비록 옛날의 명장(名將)이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어찌 위대하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까지 평양 사람들이 어제의 일처럼 이야기를 전하고 있으니 그 공로를 갚고자 한다면 실로 집집마다 제사를 지내야 합당하겠지만 당시에 철향(腏享)087) 하지 못한 데에는 까닭이 있습니다. 제독과 총병은 모두 대수(大帥)였고 낙공은 그 휘하의 편장(偏將)이었기 때문에 화상을 그리는 가운데 들지 못하였고 마침내는 제사지내는 열에서 누락된 것이니 애석함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 또 신이 일찍이 선배들의 말을 듣건대 낙 참장은 용맹스러움이 삼군 가운데 으뜸이어서 ‘낙천근(駱千斤)’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당시 왜적을 토벌하는 싸움에서 매양 적을 꺾고 성을 함락한 공로가 많아 찬획사(贊畵使) 이시발(李時發)이 그와 함께 주선하고 행군하면서 그 장한 용기에 감복하여 의기(義氣)가 서로 투합하여 의형제를 맺었습니다. 낙장이 중국 책 수천 권을 실어다가 주어 이씨(李氏) 집안이 마침내 장서가 많다고 일컬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보건대 그는 극곡(郤縠)이 시서(詩書)에 대해 잘 알고088) 관공(關公)이 《춘추(春秋)》를 즐겨 읽은 것089) 에 거의 가까워 세상에 드문 기남자(奇男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인물로 이런 공적이 있으니 우리 나라에서 어찌 드러내고 보답하는 전례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평양에 이미 세운 사우(祠宇)에서 일체로 향사하는 것을 어찌 아끼겠습니까. 바야흐로 사우를 증수(增修)하는 날을 당했으니 따라서 배식(配食)하는 것이 시기적으로 옳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신의 이 장계를 예관(禮官)에게 물으시어 특별히 명나라의 참장 낙상지를 무열사에 제향(躋享)하도록 명하신다면 비단 우리 나라 사람이 정성을 다해 공로를 갚는 것이 될 뿐만 아니라 성조(聖朝)에서 명나라를 존숭하는 뜻에도 빛이 날 것입니다."
하니, 상이 회유(回諭)하기를,
"무열사의 중수(重修)를 조령(朝令)을 기다리지 않고 경이 녹봉을 내놓고 재물을 모아 북쪽 터를 넓히고 대문과 양무(兩廡)를 세웠으며 또 유생과 무사를 뽑아 안접하게 했다니, 경의 마음에 감동하고 경의 일이 가상하다. 역사를 준공하는 날에 마땅히 향축(香祝)을 보내 상서(尙書) 이하에게 치제(致祭)할 것이니 경은 그때에 임해 향축을 장계로 청하라.
아, 낙 참장이 우리 나라에 위대한 공로가 있는데도 아직껏 일체로 향사하는 것에서 빠졌으니 실로 흠전(欠典)이다. 한 달 전에 신종 황제(神宗皇帝)의 기신(忌辰)을 인해 생각이 나서 한두 가지 표창하고 숭보(崇報)한 일이 있었는데 미처 참장의 일은 기억하지 못해 그날의 전교에 함께 언급하지 못하였다. 경이 이처럼 진술하니 더욱 체모를 얻었다고 하겠다. 예를 관장하는 신하에게 물어도 어찌 다른 견해가 있겠는가. 특별히 장계의 요청을 윤허하니, 경은 길일(吉日)을 가려 위판(位版)을 만들어서 신령을 편히 모시도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5책 35권 37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322면
- 【분류】외교(外交) / 군사(軍事) / 왕실(王室)
- [註 086]석 상서(石尙書) : 석숭(石崇).
- [註 087]
철향(腏享) : 배향(配享).- [註 088]
극곡(郤縠)이 시서(詩書)에 대해 잘 알고 : 극곡은 춘추 때 진(晋)나라 사람. 문공(文公)이 피려(被廬)에서 군사를 모집할 때 조최(趙衰)가 "극곡은 예악(禮樂)에 대해 잘 알고 시서(詩書)에도 능숙하니 필시 군대를 통솔하는 법을 잘 알 것입니다." 하자, 문공이 그를 중군장(中軍將)으로 삼았다. 《사기(史記)》 권39, 《상우록(尙友錄)》 22.- [註 089]
관공(關公)이 《춘추(春秋)》를 즐겨 읽은 것 : 관공은 삼국 때 촉(蜀)의 장수 관우(關羽)를 말함. 그가 평소에 《춘추》를 즐겨 읽었으므로 붙여진 말임.○平安道觀察使洪良浩狀啓言:
竊伏念我東方再造家邦, 莫非皇朝之恩, 而抑由東援諸將仗義奮武之功也。 東援之功, 莫大於平壤一捷。 肆我宣祖大王, 特遣畫工, 圖寫石尙書曁提督李如松、總兵楊公元ㆍ李公如栢、張公世爵之像。 蓋石公力主東援之議, 提督、三總兵, 收復平壤, 傑然爲功宗, 亂旣定, 建祠于平壤, 卽今之武烈祠是也。 臣赴任之初, 首先瞻謁石尙書、李緫兵二公眞像, 儼然颯爽如生, 其餘三公之像, 佚於兵燹, 代以木主, 不覺慷慨嗟惜, 而況其建祠, 草創於兵亂之餘, 制度狹陋, 儀文不備, 數楹屋宇, 寂寞荒涼。 曾無守直之所, 只有數箇齋任, 月再焚香而已。 臣竊爲之慨然, 咨詢經紀, 抄選儒生、武士, 新構東西兩齋, 使之分居輪直, 以爲肄業之所。 恢拓外基, 將建大門, 以尊體貌, 以賁觀瞻, 其於崇報之道, 庶補萬一, 而謹稽當時事蹟, 抑有一事未擧者。 《平壤誌》詳載復城始末, 而其略曰: "癸巳正月六日, 提督李如松, 領三協將楊元、李如栢、張世爵, 率兵四萬二千七百餘人, 進陣城北, 倭將望見天兵之紅衣者曰: ‘元浙江兵也。 勁悍無敵’, 憮然有懼色。 八日黎明, 提督鳴鑼一聲, 三軍齊進, 一軍攻七星門, 一軍攻普通門, 一軍攻含毬門。 賊徒上用長鎗、大劍, 齊刃下垂, 森如蝟毛, 矢丸雨下, 人不敢近。 提督手斬退縮者一人, 徇示陣前, 參將駱尙志, 奮身先登, 諸軍皷噪從之。 尙志腋挾大砲, 大呼連放, 烟焰漲天。 又手攫死屍, 擲之城上, 賊大驚以爲: ‘天兵飛上城’, 退保內城。 尙志打破城門, 乘勝勦殺, 賊窮縮走入土窟, 多穿孔穴, 望之如蜂窠。 從穴中亂發銃丸, 天兵多死者。 提督收軍還營曰: ‘獸窮則搏, 不如姑與生路。’ 夜三鼓, 賊從大同門遁, 一日夜至平山, 道多顚仆而死。 經略宋應昌奏捷曰: ‘倭兵死者二萬餘人, 鮮人被俘者一千二百人, 各還其居’ 云云矣。" 惟此復城之績, 雖藉提督諸公協力耀兵之威, 而至若奮身陷城, 掃蕩巢窟, 專由駱將之功。 觀其衝冒白刃, 挾砲投屍, 雄膽猛氣, 摧山倒河, 雖古之名將, 無以過之, 豈不偉哉! 至今箕城之人, 傳說如昨日事。 欲報其功, 實合家尸戶祝, 而當時之不列於腏享者, 厥有由焉。 提督、總兵, 皆是大帥, 駱公, 乃其麾下偏將, 故未入於圖像之中, 遂漏於秩祀之列, 可勝惜哉! 且臣嘗聞前輩之言, 駱將勇冠三軍, 號稱駱千斤。 當時討倭之役, 每多摧陷之功, 贊畫使李時發, 與之周旋行陣, 服其壯勇, 氣義相契, 結爲兄弟。 駱將載唐書數千卷以贈之, 李氏之家, 遂以多藏書稱。 以此觀之, 其於卻糓之詩書, 關公之《春秋》, 庶幾近之, 可謂稀世之奇男子也。 以若人物, 有若功績, 在我國, 豈可無表揚酬報之典, 而況於箕城已建之祠, 何靳一體之祀乎? 方當祠屋增修之日, 從以配食, 時則可矣。 伏乞將臣此啓, 下詢禮官, 特命皇明參將駱尙志, 躋享於武烈祠, 則不亶爲邦人報功之誠, 抑有光於聖朝尊周之義。
上回諭曰: "武烈祠之重修, 不待朝令, 卿乃捐俸鳩財, 拓其北基, 建其門廡, 又選儒武以接之云, 卿之心可感, 卿之事可尙。 役告成日, 當送香祝, 致祭于尙書以下, 卿其臨時狀請香祝。 噫! 駱叅將之有大功偉勞於我國, 而尙闕一體之祀, 實爲曠典欠事。 月前起感於神皇諱辰, 有一二表章崇報之擧, 而參將事, 未及記憶, 不能幷提於伊日之敎。 卿能敷陳若此, 尤可謂得體。 詢于掌禮之臣, 豈有別見? 特許狀請, 卿其涓吉, 造版妥靈。"
- 【태백산사고본】 35책 35권 37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322면
- 【분류】외교(外交) / 군사(軍事) / 왕실(王室)
- [註 0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