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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35권, 정조 16년 7월 25일 임술 1번째기사 1792년 청 건륭(乾隆) 57년

충무공 이순신과 충민공 임경업의 자손을 황단 망배례에 참례하게 하다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충민공(忠愍公) 임경업(林慶業)의 자손을 황단(皇壇) 망배례(望拜禮)에 배참(陪參)하게 하고, 고(故) 목사(牧使) 제말(諸沫)에게 시호(諡號)를 내리고 그의 조카 제홍록(諸弘錄)에게 벼슬을 추증하였으며 비석을 세워 그곳을 정표(旌表)하라 명하였다. 전교하기를,

"어제 황단에 공손히 절한 것은 신종 황제(神宗皇帝)의 기신(忌辰)이기 때문이었다. 그날 충신의 후예를 소견하고 유생은 시제(試製)하고 무사(武士)는 시사(試射)하였다. 그리고 나라를 다시 세워준 황제의 은혜를 길이 생각하고 우리 나라 충신에게 미치게 하여 전수(篆首)로 써서 충무공 이순신의 공렬(功烈)을 표창하고자 하였다. 이를 인하여 생각하니,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은 대의(大義)를 창명(倡明)하였으므로 그의 자손을 망배례의 반열에 참여하도록 허락하여 이미 정식을 삼았는데, 더구나 충무공은 황조(皇朝)의 도독(都督)이란 고인(誥印)을 받았음에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충무공의 후예도 문정공 집안의 예에 의해서 반열에 참여하게 하라. 정유년 척화(斥和)한 사람의 자손도 오히려 반열에 참여하는데 충민공 임경업의 후손이 반열에 참여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모두 반열에 참여하게 하라.

또 빠진 듯한 감상(感想)이 있어서 한번 전교하고자 한 지 오래이다. 절의[烈]가 충무공과 같고 공(功)이 충무공과 같으며 또 무후(武侯)085) 의 후예로 지금까지 제씨(諸氏) 성을 답습해 왔고 그 이름이 말(沫)이란 자는 고 성주 목사(星州牧使)가 그이다. 그걸 이어받은 자가 바로 홍의 장군(紅衣將軍) 곽재우(郭再祐)인데 재우는 갖추 숭보(崇報)하였으나, 제말고성(固城)을 보장(保障)하고 진양(晉陽)에서 부의(赴義)한 위대한 공훈은 고 감사 김성일(金誠一)의 천거에서 볼 수 있고 조정에서 격식을 넘어 탁용한 데서도 알 수가 있다. 그후 성주(星州)의 대첩(大捷)에서 죽었으니 참으로 충무공노량(露梁) 사적에 뒤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 후손이 영락하여 조정에 스스로 아뢰지 못하였고 끊어진 유사(遺事)가 대략만 고 정승 남구만(南九萬)의 문집에 보일 뿐이다. 증관(贈官)·시호(諡號)·정려(旌閭)·비석(碑石) 등 그 어느것 하나도 시행한 일이 없으니 흠전(欠典)·궐문(闕文)으로 이보다 더한 것이 없다. 고 충신 목사 제말을 특별히 정경(正卿)으로 추증하고, 인하여 홍문관으로 하여금 아름다운 시호를 내리게 하되 시호를 내리는 날 관원을 보내 치제(致祭)하게 하라. 일찍이 듣건대 묘가 진해(鎭海)칠원(漆原) 사이에 있다고 하니, 도신으로 하여금 고적(故跡)을 자세히 찾아서 장문(狀聞)하게 하라.

충장공(忠壯公) 김덕령(金德齡) 형제가 자란 마을에 이미 비석을 정려문으로 바꾸도록 명하였는데, 유독 제말과 그 조카 선무 공신(宣武功臣) 홍록(弘錄)을 똑같이 보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그가 성인(成仁)한 곳에다 정표(旌表) 하는 비석을 세우고 대서 특필하기를 ‘증 병조 판서 시호 제말(諸沫)과 선무 공신(宣武公臣) 증 병조 참판(贈兵曹參判) 제홍록(諸弘錄) 숙질(叔姪)이 함께 충성을 바친 곳’이라 하고, 인하여 문임(文任)으로 하여금 음기(陰記)를 쓰게 하여 불후(不朽)의 밑천이 되게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5책 35권 35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321면
  • 【분류】
    왕실(王室) / 외교(外交) / 인사(人事)

○壬戌/命忠武公 李舜臣忠愍公 林慶業後孫, 陪參皇壇望拜禮。 贈故牧使諸沫謚及其姪諸弘錄職, 立石旌其地。 敎曰: "四昨祗拜皇壇, 爲神皇忌辰也。 其日召見忠臣之裔, 儒以試製, 武以試射, 而永惟再造之皇恩, 推及我國之忠臣, 欲書篆首, 表章忠武公 李舜臣之功烈。 因此思之, 以文正公 宋時烈倡明大義, 許其子孫, 陪參于望拜之班, 已爲成式。 況忠武之受皇朝都督之誥印者乎? 忠武後裔, 依文正家例, 使之參班。 丁酉斥和人孫, 猶參班, 則忠愍公 林慶業後裔之不參班其可乎? 一體參班。 又有曠想之感, 一欲提敎者久矣。 烈如忠武, 功如忠武, 又以武侯之後, 至今襲姓諸氏, 而其名曰者, 故星州牧使是也。 其交承, 卽紅衣將軍 郭再祐, 再祐則崇報備至, 而諸沫之保障於固城, 赴義於晋陽之偉勳膚功, 觀於故監司金誠一之甄剡, 而朝廷之越格擢用, 可以知之。 其後裹革於星州之大捷, 誠不多讓於忠武公 露梁事蹟。 然其後承零替, 無以自達于朝廷, 斷爛遺事, 略見於故相南九萬文集而已。 贈官也、易名也、綽楔也、竪碑也, 尙未有一事之擧以施之, 欠典闕文, 莫過於是。 故忠臣牧使諸沫, 特贈正卿, 因令弘文館, 鍚以義謚, 宣謚日, 遣官致祭。 嘗聞墓在鎭海漆原之間, 令道臣, 詳訪故跡狀聞。 忠壯公 金德齡兄弟生長之村, 旣命以牲繫代烏頭, 獨於諸沫與其姪宣武功臣弘錄, 其可不一視乎? 就其成仁之地, 立旌表之石, 大書特書之曰: ‘贈兵曺判書謚號諸沫、宣武功臣贈兵曺參判諸弘錄叔姪雙忠之址。’ 仍令文任, 記其陰, 以示不朽之資。"


  • 【태백산사고본】 35책 35권 35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321면
  • 【분류】
    왕실(王室) / 외교(外交) / 인사(人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