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희당에서 시임·원임 대신·각신·약원 제조·비국 당상을 소견하다
임금이 중희당(重熙堂)에서 시임(時任)·원임(原任)의 대신과 각신(閣臣), 약원 제조(藥院提調),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소견하였다. 약원 도제조 홍낙성(洪樂性)이 울면서 아뢰기를,
"신들이 가슴에 맺힌 피가 쌓여도 참으며 감히 말을 하지 못한 것이 이제 몇 년이 되었습니다. 근일 여러 신하가 장주(章奏)하니 충정(衷情)이 배나 격분됩니다."
하였는데, 말을 다 마치기 전에 상이 이르기를,
"내가 경들에게 유시할 것이 있으니, 도제조는 분명히 들으라. 반수(班首)가 아직 주대(奏對)하지 않았으니, 다른 대신이 차례를 넘어 주대하기는 어렵다. 경은 먼저 물러가 합문 밖에 앉아 있다가 다른 대신이 연석에서 물러가거든 하교를 자세히 들으면 된다."
하니, 낙성이 먼저 물러갔다. 상이 이르기를,
"사람이 있고 나라가 있으니 천륜(天倫)과 인상(人常)이 중한 것이다. 부자간의 윤리가 있은 연후에야 임금과 신하의 분의(分義)가 있게 되는데 요즘의 현상은 과연 어떤가. 경들이 부자의 윤리가 밝혀지지 않았다고 말하는데 경들은 하루 동안 나를 이 자리에 앉혀 놓고서 나를 이처럼 곤란하게 하는가. 오늘 경들이 불령(不逞)한 한 사람의 머리를 잘라서 바친 연후에야 나라가 나라답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여러 신하가 하교를 듣고도 감히 이처럼 조용할 수 있겠으며, 또 어찌 감히 관(冠)을 쓰고 있겠는가."
하니, 영중추부사 이복원(李福源) 등이 관을 벗고 협양문(協陽門) 밖에 나아가 엎드렸다. 한참 후에 승지 서영보(徐榮輔)에게 입시하도록 명하여 구전 하교(口傳下敎)를 쓰게 하기를,
"모질어 죽지 못한 채 지난날을 참고 지내왔는데 지금 어찌 혹 입을 열어 살아온 세상 일을 말할 것이 있겠는가마는, 하루라도 이 땅 위에 살면서 경들에게 군림(君臨)하는 한 차마 윤리도 무시하고 원수도 잊어버린 사람이 될 수 있겠는가. 내가 비록 불초하고 무상하지만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조선(祖先)을 존경하는 마음은 다른 사람과 같은데, 만고 천하 어디에 털끝만큼이라도 당연히 해야 할 천상(天常)·인기(人紀)를 뒤로 늦추어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채 원통함을 삼키면서 30년을 하루처럼 지낸 사람이 있는가. 경들도 생각해 보라. 내가 등극한 이후에 모년(某年)의 의리에 대해 감히 한 번도 분명한 말로 유시하지 못했고, 그들을 주륙(誅戮)한 것도 다른 일을 인해서였으며, 그들을 성토한 것도 다른 조항에 의탁해서 하였다. 화가 났지만 감히 말을 하지 않았고 말을 하고자 했으나 감히 자세히 하지 않았는데, 이것이 과연 참으로 원수를 숨기고 원한을 잊어서 밝혀야 할 의리를 밝히지 못하고 시행해야 할 징토를 시행하지 않으려 해서 그런 것인가. 이런 사리는 오늘날 우리 나라 사람으로서 놋숟갈로 밥을 떠 먹는 자라면 누군들 내가 꾹 참고 있는 본심을 알아서 비통해 하지 않겠는가. 이는 다름이 아니다. 선대왕께서 숱하게 내리신 정녕한 유시와 엄격한 하교는 우선 감히 제기해 말하지 않겠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갑신년 2월 20일에 대신과 여러 신하를 진전(眞殿) 문 밖에 불러놓고 어필(御筆)로 손수 쓴 글과 구주(口奏)한 긴 문자(文字)를 반시(頒示)한 일이다. 그 대략은 ‘모년(某年)의 일에 혹 누구는 무슨 죄가 있고 누구는 무슨 일을 범하였는데, 장래에 제기하는 자는 그 일이 이렇고 저렇고를 막론하고 내가 이러이러하였다고 말할 것이다.’라고 하고, ‘차마 말할 수 없고 차마 들을 수 없으며, 차마 제기하지 못하고 차마 보지 못하며 차마 말할 수 없다.’는 구절로써 결론지으며 말하기를 ‘성궁(聖躬)이 담당하겠다.’고 하시어 간곡하게 신신당부하셨다. 심지어 이 일을 언급하는 자에게는 조태구(趙泰耉)·유봉휘(柳鳳輝)·김일경(金一鏡)·박필몽(朴弼夢)을 다스린 율로 처단하겠다고 하셨다. 그 아래에 또 차마 들을 수 없는 하교가 계셨고, 또 말씀하시기를 ‘이렇게 한 연후에야 네가 드러내지 못한 선지(先志)를 밝힐 수 있고, 나의 통석(慟惜)한 마음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게 된다. 대대로 벼슬하는 신하들도 차차 너의 본심과 선지를 알게 되고 또 나의 이런 뜻을 알게 되며, 너 역시 할아비에게 효도하는 손자가 되고 아비에게 효도하는 아들이 된다.’고 하교하셨다. 또 대신 이하를 재전(齋殿)으로 불러 종통 윤음(宗統綸音)을 내리셨는데, 그때의 사실은 모두 병신년 상소가 있은 후 세초(洗草)하는 가운데에 들어갔고 오직 윤음 및 진전(眞殿)에서 구주(口奏)한 문자는 아직도 사고(史庫) 및 《정원일기(政院日記)》에 남아 있다. 구주한 문자는 비록 감히 꺼내서 보지 못하더라도 《정원일기》의 경우는 한 번 조사해 보면 알 수가 있다. 내가 그때에 하순(下詢)함에 따라 전석(前席)하여 진실된 말을 하였는데, 만약 선조(先朝)께서 돌아가신 후이니 오직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해도 된다고 하여 한결같이 갑신년의 대답과 반대되게 한다면 이 어찌 죽은 사람을 산 사람 섬기듯이 하는 의리이겠는가. 또 더구나 성교(聖敎) 가운데 있는 ‘통석’이란 두 글자는 바로 후회하신 성의(聖意)여서 내가 받들어 가슴에 새겨 장차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있는 단서로 삼고 있다. 그러나 억제할 수 없는 것은 지극한 통분이며 막을 수 없는 것은 지극한 정(情)이다. 큰 윤리가 있는 곳에 피맺힌 원수가 저기에 있어서 이에 앞뒤의 사실들을 참작하면서 경(經)에서 권도(權道)를 찾았다. 천만 번 생각하여 간장(肝腸)이 타는 듯해서 먼저 을미년의 주토(誅討)를 자신이 대신 담당하였는데, 반드시 선조(先朝)에 재유(在宥)하실 때에 미치고자 하였다. 다음에 또 이듬해 병신년 봄에 진정(陳情)하는 상소를 서정(庶政)을 대리 청정(代理廳政)한 후에 울면서 호소하여 천지에 망극한 은혜를 입어 특명으로 차마 볼 수 없는 문자를 모두 세초하게 하셨다. 세초하는 날을 당하여서 성교에 말씀하시기를 ‘이 일이 사자지대(思子之臺)나 망자지궁(望子之宮)보다 나아서 내가 지하에 돌아갈 면목이 있게 되었다073) .’라고 하셨고, 그 아래에 또 감격 하시어 울먹이신 하교가 계셨는데 내가 어찌 차마 다 외우겠는가. 인하여 백관의 하례를 명하시고, 호(號)를 내리는 윤음(綸音) 및 어제(御製) 유서(諭書)와 어필(御筆) 은인(銀印)을 써서 내리셨다. 내가 처음에는 죽음을 무릅쓰고 감히 받들지 않자 조금 후 호를 내리는 명을 환수하시고 유서(諭書) 가운데 있는 가장(嘉奬)하는 구절을 삭제하라는 하교가 계셨기 때문에 내 부득이 공손히 받았다. 또 그 후에 어전(御殿)에서 연회를 받으시고 나에게 가서 전성(展省)의 예를 행하도록 명하셨으니, 지금 비록 1백 번 책을 편찬하고 1만 번 선양(宣揚)하려 해도 어찌 선대왕의 갑신년 하교와 병신년 세초하라는 명보다 더하겠는가. 이것이 선조의 본의(本意)의 대략이다.
선조의 성은(聖恩)은 선조의 성은이고 나의 지통(至慟)은 나의 지통인데 병신년·정유년 이후부터 여러 번 일어난 역옥(逆獄)은 모두 모년(某年)의 의리에 근본하고 있다. 나를 아는 자는 알 것이요 나를 모르는 자는 모를 것이나, 나의 집정(執政)은, 밖으로는 형적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안으로는 의리를 스스로 펴고 밖으로 원수를 잊었다는 비난을 감수하면서 안으로는 묵묵히 징토하는 방법을 생각하는 데 있으니, 위로는 성은을 등지지 않고 아래로는 나의 이마에 진땀을 내지 않고도 결말에 가서는 차례로 설욕(雪辱)을 하고 말게 될 것이다. 지난번 연석에서 영남 유생이 아뢴 말 가운데 해당되는 죄로 주토(誅討)하지 않았다는 것으로써 이극(里克)과 비교하였는데, 이극 때에 헌공(獻公)이 만약 이극을 경계한 일이 있었다면 공자(孔子)께서 어찌 폄하하는 평을 하였겠는가.074) 이는 영남 유생이 발걸음이 뜸해서 처음에는 몰랐겠지만 이 하교를 들으면 많은 말을 기다리지 않고도 반드시 즉석에서 이해할 것이다. 다만 조정 신하들은 북면(北面)하고 나를 섬겨 발걸음이 뜸하지 않아서 그 이면(裏面)을 아는 자들인데, 이에 대하여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나에게 극진히 처분하지 않아서 을해년 이전의 주토와 같다고 하는 자가 있다면 난적(亂賊)·역신(逆臣)이 아니겠는가. 을해년 이전에는 선대왕께서 일이 성궁(聖躬)에 관계된 것이라 하여 지나치게 윤허를 아끼셨으나 지금에 있어서는 내가 과연 반병(反兵)075) 하는 의리에 소홀하여 불공대천(不共戴天)의 원수를 포기하였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현상이 이르게 된 것인가. 이 때문에 9일 동안 재거(齋居)하면서 살고 싶지 않은 것처럼 하고 경들을 포함한 신하들을 대하려 하지 않은 것이었다. 대개 30년 동안 눈물을 머금었던 본심을 어찌 차마 사륜(絲綸)에 말할 수 있었겠으며 차마 장주(章奏)에서 볼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세월이 멀어지고 사실이 점점 어두워져 차마 제기하지 못한 것 때문에 후생(後生)이 막중한 의리를 모르게 되고,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막엄(莫嚴)한 일을 알지 못하게 되겠기에 좌상(左相)이 평소 의리를 잡은 사람으로서 한 차자를 진달하므로 부득이 말을 만들어 비답을 내렸었다. 이후에는 분분하게 시끄러운 것을 금하고자 하여 여러 신하의 장주(章奏)에 혹 비답을 내리지 않기도 하고 혹은 돌려주어 가지고 가게 하였으니, 이는 전후가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한편으로는 법령(法令)을 내걸어 알리는 뜻이요 한편으로는 사람을 살리는 방도를 보여준 것이다. 그후에 영남 유생들이 올라왔을 때 불러 보고 비답을 내린 것 역시 효유(曉諭)하기에 급한 데서 나온 것이었다. 또 영남 유생이 입시했을 때의 연석에서의 대화를 즉시 중외에 반포해 보였으니, 더욱 나의 뜻이 있는 바를 볼 수 있었다. 그러니 이해하는 자는 반드시 보고서 통읍(痛泣)하고, 잘 모르는 자들은 듣고서 마땅히 전율(戰慄)해야 할 뿐이다. 이제 혈기(血氣)가 있는 사람으로 하늘을 이고 땅을 밟고 사는 자라면 어찌 그 사이에 다른 마음을 두고자 하겠는가. 이런데도 혹 이에 반(反)해서 만에 하나라도 비지(批旨)와 사륜을 보고서도 혹심한 원통함을 알지 못하고 면유(面諭)와 연석의 주본(奏本)을 보고도 통읍하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서 감히 차마 말할 수도 없고 차마 말해서도 안 될 하늘과 땅에 사무치는 망극한 일을 말하며, 내가 선대(先代)를 잊고 근본을 등졌다고 한다면 이것이 과연 무슨 마음인가.
이밖에는 모두 직접 보거나 들은 일이 아니어서 우선은 말을 꺼내지 않지만 천고(千古) 전이나 천고 후까지도 어찌 이처럼 말하지 못하고 감히 말해서도 안 될 모년(某年)의 큰 의리와 같은 것이 있겠는가. 내 본심은 위에서 누누이 말한 것과 같으니, 처분함에 미진함이 있다면 비록 시간(尸諫)하는 데까지 이른다 하더라도 안 될 것이 없다. 또 혹 이른바 아직 징토가 미치지 않고 있다고 말한 무리는 각자 곡절이 있어서 자세히 헤아려서 짐작해 작정한 것이니 내가 이들에 대해 까닭없이 편안하겠는가. 설혹 내 뜻을 모르는 자가 있다면 마땅히 본의(本意)가 있는 바를 연역(演繹)하여 스스로 의심이 없는 데로 돌아가기를 기약해야 한다. 오늘날의 신하된 자들은 이런 일을 차마하고 이를 인하여 사감(私憾)을 풀고 이를 빙자하여 협잡할 계책을 하여 원수를 숨겨주고 원한을 잊었다는 것으로 은근히 위에다 돌리면서 이에 감히 징토한다는 핑계로 헤아리지도 않고 조리도 없이 넣어서는 안 될 것을 넣고 넣어야 할 것을 넣지 않는 유를 다반사로 공사(公私)간의 화제를 삼고 있으니 지금 조선 천지에 이른바 군장(君長)이란 자는 과연 어떤 사람이겠는가. 조금 전 연석에서 먼저 두 글자로서 경들에게 하교한 것은 격노해서가 아니었다. 내가 비록 배우지는 못했으나 마음대로 말하지 않으며, 하늘과 땅에 사무치는 통심(慟心)이 있지만 나의 사정(私情)과 나의 사의(私意)대로 하고자 하지 않는데 더구나 신하를 대하여 어찌 이처럼 이치에 어긋난 일을 말하겠는가. 사람으로서 인륜(人倫)이 없으면 사람이 되지 못하고 나라에 인륜이 없으면 나라가 되지 못하는데, 더구나 임금으로서 나라를 다스리는 자가 만약 효친(孝親)·존선(尊先)의 일에 털끝만큼이라도 분의(分義)를 다하지 못한다는 한탄이 있어 조정 신하들이 손뼉을 치고 입을 놀린다면 나라는 그의 나라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경들이 어찌 연교(筵敎)를 기다려서 알겠는가. 인륜이 있는 연후에야 사람이 되고 나라가 되는데, 경들이 한나절 동안 관을 벗고 단지 명을 기다린다고만 말하면 과연 대의(大義)에 무슨 도움이 되며 나에게는 무슨 도움이 있겠는가. 천명하고 발휘할 방도를 경들은 생각하라."
하니, 영보(榮輔)가 아뢰기를,
"전하의 하교는 분석함이 정미하고 의리가 밝아서 글을 받들어 읽는 즈음에 눈물이 흘렀습니다. 다만 그 구어(句語)에 이따금 신하로서 차마 들을 수 없는 바가 있으니, 바라건대 고쳐서 내리소서."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더는 말하지 말라."
하고, 인하여 명하기를,
"이 하교(下敎) 및 갑신년 연설(筵說)을 초출(抄出)하여 합외(閤外)의 여러 신하에게 보여줄 것인데, 이번의 하교에는 소중한 것이 있으니, 여러 신하들은 관을 쓰고 받들어 읽은 후 천명(闡明)하는 방도가 있거든 사알(司謁)을 들여보내 아뢰라."
하니, 여러 신하들이 받들어 읽은 후 "막중 막대한 일을 사알을 들여보내 아뢰는 것은 불가하므로 사대(賜對)를 기다려서 앙주하겠다."는 뜻을 전품(轉稟)하니, 인하여 여러 신하들을 소견하였다. 복원(福源)이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조금 전의 연석에서의 하교를 듣고도 즉석에서 죽지 못하였으니, 신하의 분의가 모두 사라졌으며 어둡고 어리석기가 극에 달했습니다. 또 삼가 격기(膈氣)가 더해진다는 하교를 들으니, 아랫사람들의 마음이 참으로 어쩔 줄을 몰라 만 번 죽음을 무릅쓰고 연석에 나왔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나의 신기(神氣)가 실로 대응해 주기가 어렵다. 조금 전의 하교는 경들의 잘못을 말한 것이 아니다. 경들이 더위를 무릅쓰고 합문을 지키니 병이 날까 염려되고, 또 듣건대 천명할 방도가 있다고 하기 때문에 소견한 것이다."
하자,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이 아뢰기를,
"신이 전하를 섬겨온 지 몇 년이 되었지만 말씀하시는 가운데 일찍이 급한 말투나 당황해하는 기색이 없으시어 신들이 흠앙(欽仰)하여 마지않았습니다. 조금 전의 하교는 참으로 지나치시니 신들이 억울하여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말씀을 너무 허비하시면 기도(氣度)가 올라가기 쉬워서 성상의 몸을 보양(保養)하는 도리에 방해될까 염려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몇 년 동안 차마 말하지 못하고 차마 듣지 못하던 일에 대하여 근래에 세도(世道)가 날로 떨어지고 의리가 점차 어두워짐을 인해서 유성한(柳星漢) 같은 자가 나오기까지 하였고 경이 평소 의리를 잡은 바가 있어서 맨 먼저 하나의 차자를 진달하여 나 역시 부득이 비답을 내렸던 것이다. 또 두 기신(耆臣)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서 대략 나의 의사를 펴보였으니, 이는 대개 법령을 내걸고 사람을 살리는 방도를 보여준 것으로서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영남 유생들이 천리 길에 발을 싸매고 와서 1만 명이 연명했기 때문에 이미 비답을 내렸고 또 인견하여 상세히 하교함으로 해서 다 보여 주었었다. 중외에 반시(頒示)한 것은 오늘날의 신하와 모든 백성들까지 의리의 근원을 알게 하고자 하는 데 내 뜻이 있었다. 근일에 여러 신하들이 다반사로 알아서 서로 번갈아가며 글을 올려 마치 내가 차마 듣고 볼 수 있는 것처럼 하니 이미 너무나 해괴하다. 지난번 이른바 외방(外方) 유생의 재소(再疏)는 승지가 열어보지도 않았고 또 들이지도 않아서 상소의 말이 어떠하였는지 모르나 병조(兵曹)의 초기(草記)를 보니 이병정(李秉鼎)이 격고(擊鼓)한 일이 있었다고 하여 그 곡절을 물었더니 ‘유생의 상소 가운데서 이창수(李昌壽)를 배척한 일로 인해 그의 종손(從孫)이 소청(疏廳)에 가서 할명(割名)하고 왔기 때문에 이로써 억울함을 호소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일전에 제조(提調)가 입시하였기에 창수가 배척받은 대개를 들었는데 바로 두 가지 일로서, 하나는 조진도(趙進道)를 삭과(削科)한 일이요, 하나는 장주(章奏)의 말 때문이었다고 하였다. 조진도의 일은, 창수가 그때의 독권관(讀券官)으로서 이미 사람들의 말이 있었으니 상소하여 의(義)를 이끈 것은 별난 일이 아니며 장주의 말에 이르러서는 바로 성후(聖候)가 평복(平復)된 후였다. 비단 사실이 이러할 뿐만 아니라 또 창수가 모년(某年)에 평안도 관찰사로서 3개월 동안 곡림(哭臨)한 일을 비단 평양 사람들만이 지금까지 전해올 뿐만 아니다. 내가 고(故) 정승 이성원(李性源)에게서 들었는데, 이성원이 어찌 사사로이 창수를 좋아하여 그런 말을 했겠는가. 이병정을 다시 사로(仕路)에 둔 것은 바로 그 아버지를 위해서 한번 붙여준 것인데 이에 도리어 상소 가운데 넣어 이처럼 논척하였으니, 이것을 보면 그밖의 것은 짐작할 만하다 하겠다. 그 무리가 감히 더없이 중대하고 지극히 엄격한 일에 은밀히 사정을 둘 계책을 품고 있단 말인가. 한 점의 고기를 맛보면 한 솥의 맛을 알 수 있다. 이창수를 삽입했으니 마땅히 넣어야 할 자는 넣지 않고, 넣어서는 안 될 자는 넣지 않았는지 어찌 알겠는가. 이렇게 되면 의리가 점차 어두워지고 막혀서 나의 뜻을 천명할 수가 없게 된다. 심지어는 한 나라의 공공(公共)의 논의가 또 문호(門戶)가 나누어져 유희(遊戱)하는 말처럼 보고 있으니, 어찌 이런 세계가 있겠는가. 나를 이 자리에 있게 하고서 어찌 감히 이렇게 하는가. 유생들은 오히려 사실을 몰라서 그렇다고 핑계하겠지만 유생 가운데도 반드시 진신(搢紳)의 자질(子姪)이 많을 것이니, 또 어찌 사모를 쓴 자에게서 나오지 않았는지 알겠는가. 내가 상소의 비답에서 말하고 연석에서 뜻을 펴 보이면서 생각하기를 ‘오늘날 조정의 식견이 있는 신하는 이것을 보고 눈물을 삼키고 모르는 자는 듣고 전율(戰慄)할 것이며, 의리가 이로부터 천명되고 내 뜻도 거의 이해하게 될 것이다.’고 여겼다. 이제 유생의 상소로 말한다면 비단 비답이 무익하고 연석의 하교가 효과가 없을 뿐만 아니라 아울러 슬픔을 머금고 비통한 생각을 참으면서 차마 교시한 본의에 마저 상반되니, 어찌 놀랍고 통분하지 않은가.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는 것이 천경 지의(天經地義)인데 이렇게 하기를 그만두지 않는다면 장차 무슨 꼴이 되겠는가.
경들이 마땅히 해야 할 것에는 두 가지가 있다. 형벌(刑罰)로써 다스리는 것이 예(禮)로써 다스리는 것만 못하니, 의리의 근원을 천명 발휘하여 한 세상 사람으로 하여금 분명하게 깨닫도록 하는 것이 최상이요, 만일 덕화가 제대로 힘을 발휘할 수 없을 경우에는 완악하여 하교를 따르지 않는 사람 하나를 잡아내어 삼척(三尺)의 법을 시행함으로써 의리는 민멸(泯滅)시켜서 안 되고 병집(秉執)을 흔들 수 없음을 밝혀야 하니, 이 두 가지에 대하여 경들은 생각하라."
하자, 채제공이 아뢰기를,
"무릇 지금 전하의 조정에 선 자치고 그 누군들 우리 성상께서 잡으신 지극히 정미(精微)한 의리를 흠앙하여 말하지 않겠습니까. 신의 소견으로는 지금 세상에는 결코 이러한 무리가 없을 것이니 성려(聖慮)가 너무 지나치십니다. 또 근일 이래로 의리가 분명해져 우리 나라의 신민(臣民)이 30년 동안 감히 말하지 못하고 차마 말하지 못하여 비록 집에서 처자(妻子)를 대할 때에도 감히 입을 열지 못하던 일을 지금은 장주(章奏)에서 언급하고 부인과 아이들까지 말하게 되었으니, 의리의 밝음이 어찌 이보다 더 하겠습니까. 그러나 한 사람이라도 협잡하려는 사의(私意)를 품고 원한을 풀려는 계책을 한다면 참으로 난신(亂臣)입니다. 이러한 자에게는 나라에 상률(常律)이 있으니 치토(致討)함이 어찌 어렵겠습니까. 형벌로써 다스리는 것이 예(禮)로써 인도하는 것만 못하다는 성교는 참으로 지당합니다. 신의 뜻에는 모름지기 온 나라 사람으로 하여금 황연(怳然)히 이 의리를 알게 하여 저절로 시끄러운 폐단이 없도록 하는 것이 상책이고, 오늘날 의리를 천명 발휘해야 할 방도는 조금전 내리신 구전 하교가 그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신의 차자에서 말한 ‘바라건대 애통(哀痛)한 윤음(綸音)을 내리소서.’라고 한 것이 바로 이 하교를 얻기 위해서였으며 영남 유생이 청한 바 역시 이것입니다. 이밖에는 별다른 방도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의리는 바로 천하 만세의 공공(公共)한 큰 의리이다. 내 말은 오히려 한 개인의 사견인데 어찌 후세에 징신(徵信)되겠는가. 경은 본디 의리를 잡아 지켰으니 내가 더는 면려하지 않겠으며, 오늘날의 일은 깊이 이 영부사(李領府事)에게 바라는 바가 있다."
하자, 이복원(李福源)이 아뢰기를,
"신은 늙어 정신이 혼미하여 갑자기 좋은 도리를 생각해 낼 수가 없는데, 중신(重臣) 서유린(徐有隣)의 책(冊)을 편찬하자는 청은 아주 좋은 의견입니다. 근일의 전교와 비답과 연본(筵本)을 모아 한 책으로 만들어 인쇄하여 세상에 반포하면 큰 의리의 근원과 우리 성상의 본의를 천명 발휘할 수 있고 전후 여러 적이 역적이 된 까닭이 저절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들 문자는 조지(朝紙)에 이미 반포하였고 연본 역시 비밀로 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눈이 있는 자라면 모두 보았을 터인데 인행(印行)과 등본(謄本)이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경의 말은 동문 서답(東問西答)을 면치 못한다. 천하에 막중한 것은 윤상(倫常)이니 윤상이 밝지 않으면 사람은 사람이 되지 못하고 나라는 나라가 되지 못한다. 지금 입을 놀리는 자들이 은연중 ‘마땅히 행해야 하는데 행하지 않고, 마땅히 징토해야 하는데 징토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니, 참으로 이렇다면 어찌 윤상이 밝아져 사람이 되고 나라가 될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종기가 나면 터뜨려야 하는데 지금의 종기는 성하다고 할 수 있으니, 경들은 모름지기 터뜨리라. 그렇게 한 연후에야 의리가 쾌히 펴지고 내 마음이 밝아지며, 내가 선대왕을 뵐 면목이 있게 되고 또 현륭원(顯隆園)을 뵐 수 있게 될 것이다.
옛날의 흉적으로 세상에 생존해 있는 자가 차례로 주토(誅討)되어 거의 누락된 자가 없는데 주토한 까닭은 모두 나에게 관계된 것이었음을 세상에 눈이 있는 자라면 모두 알 것이다. 두 기신(耆臣)에게 내린 비답에서 ‘《춘추》의 필법을 빌렸다.’라고 말한 것이 이것이었다. 공자(孔子)가 《춘추》를 지으면서 다만 ‘춘왕정월(春王正月)’이라고만 하였는데 뜻을 발휘한 자는 좌씨(左氏)가 있고 공양씨(公羊氏)가 있고 곡량씨(穀梁氏)가 있으며 기타 부연하여 발명한 자는 몇십 가(家)인지 알 수가 없다. 무릇 의리(義理)가 미세한 것은 그 말이 은미한데, 미세하고 은미한 것은 성인(聖人)에게 달려 있고 미세한 것을 드러내고 은미한 것을 나타내는 것은 후인에게 달려 있다.
을해년·병자년에 토벌한 역적은 어찌 모두가 옛날의 역적이 아니었겠는가. 그런데도 의리를 밝힌 1부(部)의 책에서 일찍이 아무 역적은 아무 해의 역적이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내 나름대로 《춘추》의 필법에 부치려는 뜻이었다. 역적 구선복의 일은 그의 극도로 흉악함을 어찌 하루라도 용서할 수 있겠는가만 역시 반드시 그 스스로 천주(天誅)를 범하기를 기다린 연후에 죽였던 것이다.
영남 유생이 입시해 연석에서 한 말 가운데 ‘손에 중병(重兵)을 쥐고 그 무리가 번성하였다.’라고 한 말은 기주(記注)의 잘못이기 때문에 고치게 하고자 하였으나 하지 못하였다. 역적 구선복 같은 자가 어찌 중병을 장악하고 무리가 많다 하여 손을 쓰지 못하였겠는가. 참으로 전후의 처분을 자세히 따져보면 나의 뜻이 있는 바를 거의 이해하여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요즈음 현상이 이에 이른 것을 경들은 생각해 보라. 천리(天理)가 밝지 않고 인기(人紀)가 서지 않는데 모든 사람이 바라보는 지위에 있으면서 천명할 방도를 생각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하니, 제공이 아뢰기를,
"비단 형벌로써 다스리는 것이 예로써 인도하는 것만 못할 뿐 아니라 혹시 알지 못하는 자가 있는데도 도리어 ‘이 의리는 다시 말해서는 안 된다.’ 하여 지난해에 사람들이 제기해 말하지 못한 것처럼 된다면 이미 펴졌던 의리가 장차 다시 어두워지게 될 것이니 이 역시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비록 그럴 듯하나 어찌 그럴 염려가 있겠는가."
하니, 제공이 아뢰기를,
"참으로 따져 조사하고자 한다면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병신년 사한(師翰)의 옥사(獄事)는 대개 그 무리가 선대왕께서 어극(御極)해 계실 때에 감히 말하지 못하던 것을 감히 내가 공묵(恭默)하고 있는 날에 말한 것이 아주 흉악하였기 때문에 부득이 국청을 설치하여 처분한 것인데, 이제 어찌하여 다시 이 일을 문목(問目)을 내어 조사해 그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을 차마 들어야 하겠는가. 오늘날 조정에 비록 기강이 없지만 자수(自首)하게 한다면 어찌 감히 하지 않겠는가마는 이 역시 색언(索言)하고 싶지 않다. 만일 싸움에서 피를 흘리지 않고 이기는 것처럼 해서 미혹(迷惑)된 자를 깨우쳐 스스로 의리가 크게 정해지기에 이르도록 한다면 어찌 한 세상을 구제하는 도리가 아니겠는가.
이번의 이른바 외방(外方)의 상소는 첫번째 것은 대중을 따라서 휩쓸린 죄과(罪科)여서 단지 다시 내주기를 명하였으나, 두 번째 것은 비단 대중을 따라서 했을 뿐만 아니라 오로지 협잡(挾雜)하는 데서 나온 것이니, 이런 습성을 감히 오늘날 조정에서 이루려 하는가. 참으로 상소로 진달하고자 하는 뜻이 있다면 어디에 가 있느라고 하지 않다가 영남 유생들이 재소(再疏)한 것을 보고나서야 비로소 상소하는 것인가. 이것이 과연 진정한 충분심에서 나온 것이겠는가. 영남 유생의 소의 경우에는 단지 의리를 위주로 한 것이어서 식견이 있다고 하겠으나 말하는 즈음에 혹 자구(字句) 사이에 망발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먼 지방 사람들이 이 일을 잘 알지 못해서 그런 것이므로 괴이할 것이 없기 때문에 내가 갖추기를 구하지 않지만 도성에 사는 진신(搢紳)과 유생(儒生)에 이르러서는 어찌 내 뜻이 있는 바를 모르겠는가."
하니, 복원(福源)이 아뢰기를,
"세월이 점차 멀어져 그때의 사실을 후생(後生)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비록 사모를 쓴 자라 하더라도 역시 알지 못하는 자가 더러 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서운하다. 사모를 쓴 사람이 어찌 이 의리를 모르겠는가. 알고서 말을 하면 신하의 분의(分義)가 없는 것이요, 이 의리를 알지 못하는 것 역시 신하의 분의가 없는 것이니 말이 되는가. 경의 말에는 어폐가 있다."
하니, 복원이 아뢰기를,
"신이 우러러 진달한 바는 성상의 뜻과 의리를 몰라서가 아닙니다. 갑신년 연석의 이야기 역시 혹 미처 들어서 알지 못하는 것이 있는데다가 정신이 혼미하여 말로 뜻을 나타내지 못하였습니다."
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이제 천명(闡明)하는 방도를 한결같이 경들에게 맡기니, 나는 많은 말을 하지 않겠다. 이후의 일은 경들이 잘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5책 35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311면
- 【분류】왕실(王室) / 정론(政論)
- [註 073]사자지대(思子之臺)나 망자지궁(望子之宮)보다 나아서 내가 지하에 돌아갈 면목이 있게 되었다 : 《한서(漢書)》 권63 여태자전(戾太子傳)에 "한 무제(漢武帝)가 강충(江忠)의 모함을 믿고 태자 거(據)를 자결하게 하였는데, 후에 전천추(田千秋)의 상소를 인해 뉘우쳐 태자를 위해 사자궁(思子宮)과 귀래망사대(歸來望思臺)를 지어 위로하였다." 하였는데, 이 일을 영조가 사도 세자에 대한 좋지 않은 기사를 세초한 것에 비유한 것이다.
- [註 074]
이극을 경계한 일이 있었다면 공자(孔子)께서 어찌 폄하하는 평을 하였겠는가. : 춘추 시대 진 헌공(晉獻公)이 총희(寵姬)의 참소를 믿고 태자 신생(申生)을 죽이고 해제(奚齊)를 태자로 삼자, 왕자 중이(重耳)도 망명하였다. 후일 헌공이 죽으면서 신하 순식(荀息)에게 해제를 부탁하자 순식은 죽음으로써 충성할 것을 맹서하였다. 그러나 신생과 중이를 추종했던 이극(里克)이 해제를 죽이자 순식은 자기 말에 책임을 지고 죽었다. 이에 대해 공자는 "백옥의 흠은 갈아 없앨 수 있지만 말의 실수는 어쩔 수 없다."는 시경의 말을 인용하여 폄하하였다. 여기서 정조가 인용한 의도는 영조가 자신에게 경계한 것처럼 당시 헌공이 이극에게도 경계를 했더라면 이극의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라는 뜻이다. 《춘추좌전(春秋左傳)》 희공(僖公) 9년 10월.- [註 075]
반병(反兵) : 복수.○己未/召見時原任大臣、閣臣、藥院提調、備局堂上于重熙堂。 藥院都提調洪樂性泣而奏曰: "臣等之忍蓄腔血, 而不敢開口者, 今幾年矣。 近日諸臣章奏, 衷情一倍憤激。" 言未畢, 上曰: "予有諭於卿等者, 都提調聽瑩。 班首旣未奏對, 則他大臣有難越次以對。 卿則先退, 留坐閤外, 待他大臣筵退, 詳聽下敎可也。" 樂性先退。 上曰: "有人有國, 則天倫人常爲重。 有父子之倫, 然後有君臣之分。 近日爻象, 果何如也? 卿等以爲父子之倫不明, 則卿等一日坐予於此位, 而困予至此乎? 今日卿等, 斷不逞者一人頭以獻, 然後國可以爲國。 不然, 則諸臣聞下敎, 而敢如是雍容乎? 又何敢冠乎?" 領中樞府事李福源等, 免冠退伏協陽門外。 良久命承旨徐榮輔入侍, 書口傳下敎曰: "頑不滅死, 忍過昨日。 此時豈或開口容喙於生世事, 而一日生在地上, 君臨卿等, 則其可忍爲無倫忘讎之人哉? 予雖不肖無狀, 其孝親尊先之心, 衆凡所同得, 則萬古天下, 豈有一毫歇後於天常、人紀所當然之事, 而當爲不爲, 含恤茹冤三十年如一日乎? 卿等亦須思之。 自予御極以後, 於某年義理, 不敢一番明言洞諭, 而其誅之也, 因他事, 其討之也, 托他條。 敢怒而不敢言, 欲言而不敢詳者, 予果眞箇匿讎而忘怨, 義理之可明而不明, 懲討之可施而不施乎? 此箇事理, 爲今日東土臣庶, 以鍮匙拘飯者, 孰不知予隱忍之本心, 而爲之悲苦傷痛乎? 此無他。 先大王許多丁寧之諭、嚴截之敎, 竝姑不敢提說, 最是甲申二月二十日, 召大臣、諸臣於眞殿門外, 有御筆手書, 口奏萬言文字頒示之擧, 而其槪略, 卽某年事之或有以某有何罪, 某犯何事, 提起於將來者, 則無論其事之如此如彼, 以予謂如此如此也。 以不忍言、不忍聞、不忍提、不忍見、不忍道之句, 結之曰: ‘以聖躬當之’, 諄諄申申, 至以語到此事者, 斷以耉、輝、鏡、夢之律。 其下又有不忍承聞之敎, 而又若曰: ‘如是然後, 可以明汝未暴之先志, 而予之慟惜之心, 可以有辭。 世臣又可次次知汝本心及先志, 又知予之此意, 而汝亦爲孝於祖之孫, 孝於父之子’, 爲敎, 又召大臣以下齋殿, 下宗統綸音。 其時事實, 皆入於丙申年上疏後洗草中, 惟綸音及口奏眞殿之文字, 尙在史庫及《政院日記》矣。 口奏文字, 雖不敢奉出而見之, 至於《政院日記》, 一按可知。 予於伊時, 因下詢, 質言於前席, 則若於先朝賓天之後, 謂可以惟意所欲爲, 一反甲申之對, 則是豈事死如事生之義乎? 且況聖敎中慟惜二字, 卽追悔之聖意, 予奉以銘肺, 將爲死且瞑目之端。 然不可抑者至慟也, 不可遏者至情也。 大倫所在, 血讎在彼, 於是乎參前倚衡, 求權於經。 千思萬量, 焦腸煎肝, 先之以乙未誅討, 以身替當, 而必欲及於先朝在宥之時, 而次又翌春丙申, 以陳情之疏, 泣籲於代聽庶政之後, 獲蒙天地罔極之恩, 特命以不忍見之文字, 竝付之洗草。 及其洗草之日, 聖敎若曰: ‘此擧勝於思子之臺、望子之宮, 予有歸見地下之顔。’ 其下又有感頌掩泣之敎, 予豈忍盡誦乎? 仍命行百官賀, 而書下錫號之綸音及御製諭書、御筆銀印。 予初則抵死不敢承當, 尋有收還錫號之命, 及諭書中, 嘉奬句語刪去之敎, 故予不得已祗受。 又其後御殿受宴, 命予往伸展省之禮。 今雖欲百番編書, 萬番揄揚, 豈有過於先大王甲申之敎及丙申洗草之命乎? 此其先朝本意之大略也。 先朝聖恩, 自先朝聖恩, 予之至慟, 自予之至慟。 自丙申、丁酉以後, 屢起之逆獄, 無不本之於某年義理。 雖知我者知之, 不知我者不知, 而予之所執, 政在於外而形迹之不露, 內而義理之自伸, 外而甘受忘讎之譏, 內而默運致討之方, 上而不負聖恩, 下而不泚吾顙, 而要之歸趣, 不越乎次第酬雪而後已。 向筵嶺儒所奏中, 誅討之不以其罪, 取譬於里克, 里克之時, 獻公若有遺戒里克之事, 孔子豈有貶議? 此則嶺儒跡踈, 初雖未悟, 聞此敎, 不待多言, 必當立解矣。 但廷臣之北面於予, 而跡不踈外, 識其裏面者, 於此若有一毫謂予未盡分處, 殆若乙亥以前之誅討者, 非亂賊乎, 逆臣乎? 乙亥以前, 則先大王, 以事屬聖躬, 過加靳持, 而在今時, 則予果忽於不反兵之義, 抛却不共戴之讎, 故致此近日爻象乎? 此所以九日齋居, 如不欲生, 而不欲對卿等臣隣者也。 蓋以三十年含茹之本心, 豈忍言於絲綸, 忍見於章奏, 而星霜浸遠, 事實漸晦, 以不忍提, 而後生不知莫重之義, 以不敢道, 而世人不識莫嚴之事。 左相以素所秉執之人, 抗陳一箚, 不得不措語賜答, 伊後卽欲禁其紛然, 只於諸臣章奏, 或不賜批, 或令還持去者, 此非前後之矛盾, 一則象魏懸法, 一則生道示人也。 其後嶺儒之來也, 召見賜批, 亦出於急於曉諭。 又以嶺儒入侍時筵話, 卽令頒示中外, 尤可見予意之所在, 則領會者見必痛泣, 迷昧者聞當戰慄而已。 凡今血氣之倫頂天立地者, 寧欲有他意於其間哉? 此而或反於是, 萬一有見批旨與絲綸, 而不知冤酷之意, 聞面諭與筵本而未見痛泣之容, 敢於不忍言、不忍道之撑天蟠地罔極之事, 謂予忘先而背本, 則此果何許心腸? 外此皆屬於不覩不聞, 姑不索言, 而前乎千古, 後乎千古, 豈有若不忍言、不敢道之某年大義理, 則予之本來所執之上叚縷縷云云者, 果若有未盡分處, 則雖至尸諫, 無所不可。 又或所謂未及懲討之類, 各自有委折, 而細細斟酌料定者, 予於此, 其可無端恬然乎? 設有未知予意者, 但當紬繹本意所在, 期於自歸無疑而已。 爲今日臣子, 忍於此事, 爲因此逞私之端, 爲藉此挾雜之計, 以匿讎忘怨, 隱然歸之於上, 而乃敢托以懲討, 不稱量無倫脊, 不當入而入, 當入而不入之類, 茶飯說去於公私話頭, 則惟今朝鮮世界, 所謂君長者, 果何如人也? 俄筵, 先以二字, 下敎於卿等, 非激也。 予雖不學, 不爲任情之說焉。 徹天窮地之至慟, 猶不欲任己私而任予意, 況對臣隣, 豈有此蔑理悖事之言乎? 人而無人倫, 不得爲人, 國而無人倫, 不得爲國。 況君人而御國者, 若於孝親、尊先之事, 有一毫未盡分之歎, 而爲廷臣之所抵掌容喙, 則國非其國, 卿等豈待筵敎而知之乎? 有人倫然後, 爲人爲國。 卿等之半日免冠, 只曰俟命, 果何益於大義, 而何益於予乎? 其所闡揮之方, 卿等思之。" 榮輔曰: "十行絲綸, 剖析精微, 義理昭揭。 奉書之際, 涕淚無從, 而第其句語, 往往有爲人臣子所不忍承聞者。 伏乞改下。" 上曰: "勿復言。" 仍命持此下敎及甲申筵說, 抄出本, 示閤外諸臣, 而今此下敎, 所重有在, 諸臣冠而奉覽後, 有闡明之方, 以司謁入奏。 諸臣奉覽訖, 以爲莫重莫大之事, 不可以司謁入稟, 恭俟賜對, 以爲仰奏之意, 轉稟, 仍召見諸臣。 福源曰: "臣等伏承俄筵下敎, 不卽地致滅, 臣分都虧, 冥頑極矣。 又伏聞膈氣添加之敎, 下情萬萬罔措, 冒萬死登筵矣。" 上曰: "今予之神氣, 實難酬接, 而俄者下敎, 非謂卿等之過也。 卿等冒熱守閤, 生病可慮, 且聞有闡明之方, 故召見矣。" 左議政蔡濟恭曰: "臣之事殿下, 凡幾年也, 辭敎之間, 未嘗有疾言遽色, 臣等不勝欽仰。 俄者下敎, 誠萬萬過中, 臣等抑鬱罔措, 而第伏念過費辭敎, 易致氣度上升, 恐有妨於保嗇聖躬之道矣。" 上曰: "幾年不忍言不忍聞之事, 近因世道日下, 義理慙晦, 至有柳星漢者出。 卿以素所秉執, 首陳一箚, 予亦不得已而賜批, 又於兩耆臣疏批, 略爲敷示。 此蓋懸法象魏, 生道示人之意, 不如是, 則不可故也。 至於嶺儒, 千里裹足, 萬人聯名, 故旣賜批, 又引見, 縷縷筵敎, 悉爲敷示。 至若頒示中外者, 欲使今日臣子愚夫愚婦, 咸知義理源頭, 予意攸在矣。 近日諸臣之視若茶飯, 迭相謄呈, 有若予忍聞忍見者然, 已極怪駭, 而向日所謂方外儒生再疏, 承旨不爲開見, 亦不入徹, 未知疏語之如何, 而見兵曹草記, 有李秉鼎擊皷之事, 故聞其委折, 則以儒疏中論斥李昌壽, 其從孫往疏廳, 仍爲割名而來, 故以此鳴冤云, 而日前提調入侍, 槪聞昌壽之被斥, 卽二件事, 而一則趙進道削科事, 一則章奏句語云, 而趙進道事, 則昌壽卽其時讀券官, 而旣有人言, 則陳疏引義, 不是異事, 至於章奏句語, 卽聖候平復之後也。 非但事實如此, 且昌壽於某年, 以箕伯, 有三月哭臨之事, 非但箕城人, 尙今傳之, 予聞於故相李性源。 故相豈有私好於昌壽而然乎? 李秉鼎之復置仕路, 卽爲其父一着也, 乃反揷入於疏中而論斥之如此, 可以三隅反。 渠輩敢以莫重莫大至敬至嚴之事, 暗懷挾私之計乎? 一臠可知全鼎。 如李昌壽者揷入, 則安知無當入者不入, 不當入者入乎? 如是則義理漸至晦塞, 予意無以闡明。 甚至於一國公共之論, 又爲分門割戶, 看作遊戲之言, 豈有如許世界乎? 使予在此位, 而豈敢若是乎? 儒生輩, 尙可諉以不知事實, 而儒生中必多搢紳子姪, 亦安知不出於着帽者乎? 予於疏批言之, 筵席敷示, 意謂今日廷臣, 有識者見而飮泣, 無知者聞而戰慄, 義理從此闡明, 予志庶皆領會矣。 今以儒疏言之, 非但批答無益、筵敎無效, 竝與含哀茹慟, 忍而敷示之本意而相反, 寧不駭痛? 君君臣臣, 自是天經地義, 如此不已, 則將成何許貌樣? 卿等之所當爲者有二焉。 齊之以刑, 不如導之以禮。 闡明發揮於義理源頭, 使一世之人, 曉然開悟上也, 如或干戚之舞, 不可以爲力, 則拈出頑不率敎者一人, 施以三尺之律, 以明義理之不可泯, 秉執之不可撓, 可也。 於斯二者, 卿等思之。" 濟恭曰: "凡今立於殿下之庭者, 孰不欽誦我聖上所秉執至精至微之義乎? 以臣所見, 今世上決無如此之類, 聖慮已涉過當。 且近日以來, 義理分明矣。 東國臣子三十年不敢言不忍言, 雖屋下對妻子之時, 不敢開口之事, 今則章奏言之, 婦孺誦之, 義理之明, 豈有加於此乎? 然而一或有挾雜私意, 以爲逞怨之計, 眞亂臣也。 如是者國有常律, 何難致討? 齊之以刑, 不如導之以禮之聖敎, 誠至當。 臣意則須使擧國之人, 怳然知此箇義理, 自無紛然之弊, 上也, 而今日闡揮之方, 俄下口傳下敎是也。 臣箚所云, 乞下哀痛之綸, 正欲得此敎也, 嶺儒所請亦此也。 外此恐無他道矣。" 上曰: "此義理, 卽天下萬世公共之大義理。 予言則猶以一己之私, 何以徵信於來後乎? 卿則自來秉執, 予不加勉, 而今日事, 深有望於李領府矣。" 福源曰: "臣耄昏倉卒, 不能思得好道理, 而重臣徐有隣編書之請, 儘有意見。 以近日傳敎、批答、筵本, 彙成一書, 印頒於世, 則大義理源頭、我聖上本意, 可以闡揮, 而前後諸賊之所以爲逆, 自可以彰著矣。" 上曰: "此等文字, 朝紙已布, 筵本亦令勿秘, 有眼者皆見之, 印與謄何間乎? 卿言未免向東答西矣。 天下莫重者倫常。 倫常不明, 則人不人國不國。 今之容喙者, 隱然以爲當行而不行, 當討而不討, 苟如是, 則其可曰倫常明而爲人爲國乎? 癰成則潰之。 今之癰也, 可謂盛矣, 卿等須決之。 夫然後義理夬伸, 予心得明, 予有拜先大王之顔矣, 亦可以展省於顯隆園矣。 昔日凶賊之生存於世者, 次第誅討, 幾乎無漏, 而所以誅討, 則皆屬之寡躬, 世之具眼者, 自當知之。 兩耆臣批答, 以借《麟經》之筆爲辭者此也。 孔子作《春秋》, 但曰春王正月, 則發揮其義者, 有左氏焉, 有公羊焉, 有糓梁焉, 其他敷衍而發明者, 不知幾十家。 凡義理微者, 其言隱微, 而隱者在乎聖人, 微者顯之, 隱者著之, 在乎後人。 乙、丙所討之逆, 何莫非昔年之逆乎? 然而一部明義, 未嘗言某逆爲某年之賊者, 予意竊自附於《麟經》之筆法矣。 復賊事, 其窮凶極惡, 豈可一日容貸, 而亦必待渠之自干天誅, 然後誅之。 嶺儒入侍筵說中, 手握重兵, 寔繁其徒云云, 記注之誤, 故欲令改之而未果矣。 如復賊者, 豈以握重兵 多徒黨, 不敢下手乎? 苟能細加紬繹於前後處分, 則予意所在, 庶幾領會而曉悟。 近日爻象之所以致此者, 卿等試思之。 天理不明, 人紀不立, 而在具瞻之位, 不思所以闡明之方乎?" 濟恭曰: "非但齊之以刑, 不如導之以禮, 如或有不知者, 反謂此義理, 不可復言, 或如向年人不敢(捉)〔提〕 說, 則旣伸之義理, 將歸復晦, 此亦不可不念矣。" 上曰: "卿言雖似然矣, 亦豈有是慮乎?" 濟恭曰: "苟欲究覈, 何難之有乎?" 上曰: "丙申師翰之獄, 蓋渠輩, 以不敢言於先大王御極之時者, 敢言於予之恭默之日, 窮凶絶悖, 故不得已設鞫處分, 今何可復以此事, 發問目究覈, 忍聞其不忍聞乎? 今日朝廷, 雖無紀綱, 使之自首, 則豈敢不爲, 而此亦不欲索言。 如可兵不血刃, 而牖迷曉惑, 使自底於義理大定, 則豈非拯濟一世之道乎? 今番所謂方外疏, 初次則隨衆波蕩之科, 只命還給, 而再次則非特隨衆而已, 專出挾雜, 此等之習, 敢售於今日朝廷乎? 如果有疏陳之意, 則何去而不爲, 見嶺儒再疏後, 始爲之者, 此果出於眞正忠憤乎? 如嶺儒疏, 只以義理爲主者, 可謂有識見。 遣辭之際, 或不無字句間妄發, 而遐方人無怪其未諳本事而然。 故予不責備, 而至於搢紳儒生之居在城闉者, 豈不知予意所在乎?" 福源曰: "歲月浸遠, 伊時事實, 後生未得領會, 雖着帽者, 亦容有不知者矣。" 上曰: "卿言慨然矣。 着帽之人, 豈不知此義乎? 知而言之, 無臣分也, 不知此義理, 亦無臣分也, 其可成說乎? 卿言轉成語病矣。" 福源曰: "臣所仰陳, 非不知聖意與義理也。 甲申筵話, 亦或有未及聞知者, 而精神昏迷, 辭不達意矣。" 上曰: "今則闡明之方, 一付於卿等, 予不多誥。 此後事, 卿等善爲之也。"
- 【태백산사고본】 35책 35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311면
- 【분류】왕실(王室) / 정론(政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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