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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 34권, 정조 16년 4월 18일 병진 3번째기사 1792년 청 건륭(乾隆) 57년

정언 유성한이 임금께서 학문에 정념하기를 상소하다

정언 유성한(柳星漢)이 상소하기를,

"학문 공부가 진취하지 않으면 반드시 퇴보하는 것은 제왕과 신하가 다를 것이 없습니다. 경연(經筵)을 설치한 것은 몸을 수양하여 정치를 하는 데 자뢰(資賴)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 전하께서는 천성(天性)이 탁월하고 학문이 고명(高明)하셔서 비록 책을 펴놓고 강의하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경전(經傳)을 잠시라도 몸에서 떼지 않기를 마치 밥을 하루라도 먹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이 하셨습니다. 신이 삼가 듣건대 근일 전하께서 경연에 드물게 나아가신다 하는데, 경연 신하들의 문학과 덕행이 모두 성상의 마음에 부합하지 못하기 때문이니 이렇게 된 것은 모두가 여러 신하들의 잘못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각기 하나의 장점이 있으니 그 단점을 버리고 그 장점을 취한다면 조그마한 이익도 없을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는 혹 별다른 은미한 뜻이 있어서 그러한 것입니까? 신이 비록 그 연유를 상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또한 꼭 그렇지만은 않은 점이 있을 듯합니다. 목이 메임으로 인하여 밥을 먹지 않는 것은, 전하의 밝은 지혜로서 어찌 그 불가함을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우리 열성조(列聖朝)의 가법(家法)과 4백 년의 규모가 모두 여기에 있으니, 그 일이 또 중대한 것입니다. 예전 사람들의 케케묵은 말과 평상적인 말을 평상시 익히는 것은 비록 큰 유익이 없을 듯하나, 정유년044) 이후 16년 동안 태평한 것은 모두 전하께서 전일 독서한 효과이니, 그 도움을 속일 수 없음이 이와 같습니다.

신이 어제 삼가 성상의 전교 중 ‘칠정(七情)의 발함이 절도에 맞지 않았음을 면하지 못했다.’는 분부를 읽고 삼가 감탄해 마지않았습니다. 이는 《주역(周易)》에 이른바 ‘머지않아 회복한다.’는 것으로, 이미 지난 일인데 무슨 상심할 것이 있겠습니까. 지금 춘추(春秋)가 한창 왕성하시고 학문이 날로 진취하니, 깊이 자뢰(資賴)하고 두텁게 함양할 수 있는 것은 경연(經筵)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만약 고사(故事)를 다 회복하여 자주 유신(儒臣)들을 접견하고 날마다 마음을 다스리고 천성을 기르며 일에 응하고 사물을 대하는 도(道)를 강론한다면 그 말이 비록 신기하고 들을 만한 것은 없으나 요컨대 요(堯)·순(舜)을 배우는 사업이니, 형식적으로만 응하고 준례만 갖추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성실하게 하는 것은 또한 전하에게 달려 있을 뿐입니다. 일용(日用)에 간절하고 덕성(德性)을 성취하는 것이 어찌 하찮다 하겠습니까. 이미 알았어도 더욱 지극한 것 알기를 구하고 이미 행하였어도 더욱 지극한 것 행하기를 구하며 절차탁마(切磋琢磨)로 오랜 세월을 유지하면, 흠뻑 젖고 익숙하여 마음이 치우치지 않고 바르게 되어서 발함에 공평하고 순조로와 일을 대하여 종용하고 처리를 합당하게 하며, 기뻐하고 성내는 것이 도리에 어긋나지 않고 형벌과 상(賞)이 온당하여 인심으로 하여금 기꺼이 복종하게 하는 것은 반드시 기약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그렇게 될 것입니다.

신이 또 삼가 항간에 전하는 말을 듣건대 ‘광대[倡優]가 대가(大駕) 앞에 외람되게 접근하고 여악(女樂)이 난잡하게 금원(禁苑)에 들어간다.’ 하니, 이는 비록 사소한 절목이지만 또한 성상의 큰 덕에 누가 될 염려가 없지 않으니, 이런 것들도 또한 등한시할 수 없습니다. 우리 전하의 성덕(聖德)으로서 우연히 미처 살피지 못하셨습니다. 빨리 경연(經筵)을 베풀어 앞으로의 성과를 구하고 더욱 덕(德)에 증진하기를 힘쓰소서. 신은 본래 불초한 자로서 외람되게 현직(現職)에 있으면서 전후로 한 번도 바로잡고 구원하는 말을 하지 않았으니, 성은(聖恩)을 저버린 것이 부끄러워 스스로 용납할 곳이 없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빨리 체직시키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윗조목의 일은 ‘은미한 뜻이 있어서 그러한 것인가?’ 하였으니 그 연유를 반드시 속으로 알고 있을 듯한데, 어찌 ‘꼭 그렇지 않은 점이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이는 이로 인하여 저것을 소홀히 한 것이 아니고, 스스로 재량한 것이다. 이 밖에 아뢴 것은 말이 모두 진심에서 나왔고 글이 겉치레를 하지 않았으니, 근래에 이러한 작문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한 번 웃을 만한 것은 네가 말한 항간에 전한다는 것 중 둘째 조목이다. 대저 병신년045) 부터 이와 비슷한 호화로운 짓을 하였다면 윗조목에 이른바 ‘경연(經筵)을 열지 않는 연유를 상세히 알지 못한다.’는 말이 어떻게 네 상소에 올랐겠는가. 사직하지 말고 임무를 살펴라."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서 이민보(李敏輔) 등의 상소로 인하여 근래에 이러한 작문이 없었다는 구절을 빼버리라고 명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4책 34권 32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288면
  • 【분류】
    정론(政論) / 왕실(王室)

○正言柳星漢上疏曰:

爲學之工, 不進則必退, 帝王與臣庶無異。 經筵之設置, 所以資修身而出治也。 我殿下天賦卓越, 聖學高明, 雖不待乎開卷講義, 而經傳之不可須臾去身, 猶茶飯之不可一日廢也。 臣伏聞近日殿下, 罕御經筵。 筵臣之文學德行, 皆不足以仰副聖心, 卽有以致此, 莫非群下之罪, 而人各有一長, 捨其短而取其長, 則安知無分寸之益也? 此或別有微意而然郁? 臣雖未詳其所以然, 而亦恐有不必然者, 因噎而廢食。 以殿下之聖明, 豈不念其不可也? 況我列聖朝家法, 四百年規模, 皆在於是, 則其事又重且大矣。 前人之陳談、常語, 鎭日燖溫, 雖似無甚有益, 丁酉以後十六年治平, 皆殿下前日讀書之效也, 其裨補之不可誣如是矣。 臣昨日, 伏讀聖敎中, 未免七情之發不中節之敎, 臣不勝欽歎之至。 此《易》所謂不遠復也。 事屬旣往, 何傷之有! 方今春秋鼎盛, 聖學日進, 其所以資之深而養之厚者, 無過於經筵。 若盡復故事, 頻接儒臣, 日講治心養性、 應事接物之道, 則其言雖無新奇可聽, 而要之, 學事業也, 其不以應文備例, 而必以誠實, 亦在乎殿下耳。 切於日用, 成就德性, 豈其淺淺哉! 旣知之矣, 而又求其至, 旣行之矣, 而又求其極, 切磋磨礱, 維持歲月, 則沈潛純熟, 本源中正, 發之爲平順, 臨事從容, 處置得當, 喜怒不差, 刑賞允協, 使人心悅服, 必有不期然而然者矣。 臣又伏聞街巷所傳, 倡優褻近駕前, 女樂雜入禁苑。 此雖細節, 亦不能無累大德之慮, 此等亦不可闊略。 以我殿下聖德, 偶未及照檢耶? 亟設經筵, 以責來效, 益懋進德焉。 臣本以無似, 猥叨見職, 前後無一匡救之語, 慙負聖恩, 無地自容。 伏願亟賜鐫改。

批曰: "上款事, 謂有微意, 則其所以然, 似必默會, 豈可曰不必然? 此非因此忽彼, 自有裁量者。 外此敷陳, 言皆由中, 文不飾外, 可謂近來無此作。 但可供一笑者, 爾所謂巷傳中第二條。 自夫丙申, 有依俙髣髴於似此豪華, 則上款所云經筵之所以然, 何從而登諸爾疏乎? 勿辭察職。" 尋因李敏輔等疏, 命拔可謂近來無此作之句。


  • 【태백산사고본】 34책 34권 32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288면
  • 【분류】
    정론(政論) / 왕실(王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