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군수 이면긍이 군내 잘못 조사된 호구와 전답에 의한 백성의 병폐를 아뢰다
영천 군수(榮川郡守) 이면긍(李勉兢)이 상소하여 병폐를 진달하였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본군(本郡)의 임자년 조사 호구 수는 총 3천 2백 83호인데, 중·과부·병폐인(病廢人)·무녀(巫女)·유장(柳匠) 등의 호를 제외하면 2천 7백여 호에 불과하며, 조정의 관리와 양반 족속이 1천 2백여 호이고, 내노(內奴)·사노(寺奴)·교원노(校院奴)·역노(驛奴)·개인 노비[私奴]가 6백여 호이며, 충찬위(忠贊衛)·업무(業武)·교생(校生)·삼반관속(三班官屬)·석장(席匠) 등이 3백여 호입니다. 그 나머지 숫자를 계산하면 양정(良丁)으로서 역(役)에 응할 수 있는 호구가 대략 계산하면 5백 호도 못됩니다. 본읍(本邑)의 군액(軍額)은 수포군(收布軍)의 숫자를 통산하면 모두 2천 7백 83명입니다. 지금 5백 호의 양정(良丁)을 가지고 2천 7백 80여 명의 군역에 응하게 하려면 비록 호마다 5명씩 내더라도 오히려 부족한 숫자가 많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군액을 허위로 기록한 것이 3분의 2가 됩니다. 죽은 자에게 10년간의 군포(軍布)를 책임지우고 어린 아이에게 두세 가지의 신역(身役)을 겸하게 하니, 가난한 자나 부자나 모두가 고달퍼 솥이 남아 있는 집이 거의 없습니다. 지금 보병(步兵)의 군포(軍布)를 징수하는 때를 당하여 끝내 징수하지 못한 것이 4, 5백 금(金)에 이르고 기한이 이미 지나서 독촉하는 공문이 잇달아 내려오므로 부득이 진성(陳省)을 만들어 주고 담당 관리를 재촉하여 보내면 빈손으로 서울에 올라가 빚을 내어 채워서 바치곤 합니다. 그러므로 금년에는 가포(價布)를 징수하는 담당 관리를 보내고 명년에는 반드시 창고 담당자를 차출하여 보낼 것이니, 창고 담당자가 어찌 충당할 많은 재물이 있겠습니까. 다만 그로 하여금 도적질하고 농간을 부려 그 빚을 갚게 할 뿐입니다. 의논하는 자들은 이르기를 ‘민가에 반드시 누락된 장정이 있을 터인데, 혹 이장[里任]이 은폐시키고 간사한 아전이 농간을 부리므로 밝히지 못한다.’고 하지만, 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시임 장교(時任將校)와 수직하는 향교 유생도 태반이나 군안(軍案)에 이름이 실려 있습니다. 대저 어렸을 때에 채워넣었으므로 소속된 뒤에는 한정(閑丁)으로 대신 때워 넣지 못하고 해마다 신포(身布)를 바칩니다. 이들도 오히려 그 러하니 잔약한 백성들은 알 만합니다. 심지어는 아전들이 그 임무를 맡아서 미리 뇌물을 받고는 충당할 사람이 없어 자기 이름을 군적[軍案]에 넣으니, 과연 누락된 장정이 있다면 반드시 이런 일이 없을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특별히 명하여 잘 헤아려 감할 수 있는 것은 감하고 감할 수 없는 것은 본도(本道)와 다른 도를 막론하고 1천 명을 한도로 신역(身役)을 옮겨 정하여 위급한 근심을 풀도록 하소서.
본읍(本邑)이 보고한 재해는 복사(覆沙)039) 가 가장 많아 매년 수백 결(結)에 가깝습니다. 작년에도 5백 60여 결이 되었는데, 목화밭과 내재(內災)040) 는 그 속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지난 무술년041) 부터 새로 규정을 정하여 복사로 재해를 잡은 것은 다음해에는 반드시 다시 기경(起耕)한 것으로 기재하여, 비록 영영 전지의 형태가 없어진 것이라도 반드시 현재 복사(覆沙) 재해지로 기록하니, 당년의 재해지와 합치면 그 수가 또한 많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고 보면 터무니없이 징수하는 것을 면할 수 없습니다. 무술년 이후로 예전에 복사된 것이 70여 결이고, 작년에 복사된 것 중 영영 개간할 수 없는 것이 대략 1백 결이며, 개간할 수 있는데 힘이 모자라는 것이 또 몇백 결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금년 가을에 이르러 재해지를 4, 5백 결로 장부에 기록해 놓는다면 영문(營門)에서는 반드시 크게 삭감할 것이니, 명년에는 전보다 10배나 더 백징(白徵)해야 되리라는 것을 미리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신이 듣건대 중종조(中宗朝)에 고형산(高荊山)이 영동(嶺東) 감사로 나가서 토지가 척박하고 전답이 황폐되었다고 실상을 갖추어 아뢰어 기경(起耕)에 따라 세금을 받게 되었습니다. 본읍의 복사(覆沙) 피해는 자못 영동(嶺東)과 비할 바가 아니니, 삼가 원하건대 특별히 부세를 맡은 신하에게 명하여 본도(本道)에 행회(行會)하여 실제대로 장부에 기록하게 하소서.
셋째는 곡식으로 대납하는 것과 돈으로 내게 하는 폐단에 관한 것입니다. 영남에서 단곡(單穀)으로 대신 바치는 것은 그렇지 않은 고을이 없지만, 본읍(本邑)이 특히 심하여, 흉년에 대신 바치라는 명령이 있으면 반드시 단대곡(單代穀)으로 받아들이고 그후에 비록 풍년을 당해도 다시 본색(本色)으로 환원시키지 않습니다. 곡식 장부를 소급하여 상고해 보면, 콩[黃豆]을 단조(單租)로 대신 징수한 것이 8천 6백 40여 석이고, 팥[小豆]을 단조(單租)로 징수한 것이 1천 1백 10여 석이며, 좁쌀[小米]을 단속(單粟)으로 징수한 것이 2천 7백 80여 석입니다. 해조(該曹)나 감영에 올린 장부는 모두 본래의 곡식으로 회록(會錄)되었는데 본읍의 창고에는 모두 대신 바친 곡식으로 출납을 합니다. 대저 환곡법(還穀法)의 규정이 얼마나 엄중한데 곡식 장부가 서로 틀리는 것이 1만 2천여 석에 이르니 매우 한심스럽습니다. 근년 이래로 본조(本曹)에서 쌀과 좁쌀을 돈으로 바꾸어 내게 한 것이 7천여 석인데, 회계 장부에는 이미 본색(本色)으로 기록되었고 팔 때에도 또한 원래의 가격을 요구합니다. 당초 받아 먹거나 대신 바치는 것은 모두 백성들이 했었으니, 지금에 이르러 추징하여도 그들이 억울할 것은 없습니다. 다만 이미 지난 일은 스스로 잘못을 알지 못하고 당장 급한 사정에 대해서는 반드시 모두 탄식을 할 것입니다. 지금 만약 도로 본색(本色)으로 만들려고 하면 어떻게 해볼 수 없는 형편이고 예전대로 덮어두려고 하면 반드시 영구히 폐단을 끼치게 될 것이니, 이는 불가불 변통해야 합니다.
작년에 경시관(京試官) 서영보(徐榮輔)가 명령을 받들고 본도(本道)에 왔다가 풍기(豊基)와 순흥(順興) 두 고을의 대신 바치는 곡식에 관한 일을 돌아가 아뢰자 특별히 현재 남아 있는 곡식을 돈으로 바꾸어 내게 하라는 명령을 내리셨는데, 두 고을의 백성들이 지금까지 감동하고 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특별히 감사에게 명하여 두 고을의 준례에 의거하여 창고에 있는 것이든 나누어준 것이든 기한을 물려준 것이든 막론하고 모두 현재 있는 곡식으로 고쳐 기록하여 무궁한 폐단을 없애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내가 자나깨나 밤낮 매여 있는 일념은 바로 백성을 위하는 것이다. 한 가지 폐단을 듣거나 한 가지 고통을 알게 되면 반드시 소생시키고야 말려고 한다. 그런 즈음에 너의 상소를 보니, 쇠잔한 5백여 호(戶)로 3천 명의 군역(軍役)에 응하게 하고, 1만여 포의 단대곡(單代穀)042) 으로 몇 배의 본색(本色)을 내게 하니, 눈앞의 것만 보느라 숨겨진 백성들의 고통을 알지 못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런데도 괄시한다면 영천군(榮川郡)에 백성을 기르는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고을 원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니 네가 어찌 조정에 진달해 호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특별히 임명한 뜻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할 만하다. 즉시 묘당으로 하여금 품의 처리하도록 하겠다. 전결(田結)에 백징(白徵)하는 것은 호조의 신하로 하여금 감사에게 상세히 물어 즉시 장계로 아뢰게 하겠다. 네가 이미 가까운 반열에서 나갔으니, 관리의 일을 비루하게 여기지 말고 굶주린 백성을 주급하고 곤궁한 백성들을 구제하는 데 더욱 마음을 다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4책 34권 31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287면
- 【분류】호구(戶口) / 재정(財政) / 군사(軍事) / 농업(農業) / 구휼(救恤)
- [註 039]복사(覆沙) : 모래가 밀려 전답에 덮여 쌓이는 것.
- [註 040]
○壬子/榮川郡守李勉兢上疏陳瘼, 略曰:
本郡壬子式戶, 摠爲三千二百八十三戶, 除僧戶、獨女戶、病廢、巫女、柳匠等戶, 則不過爲二千七百餘, 而朝官、班族, 一千二百餘戶, 內奴、寺奴、校院奴、驛奴、私奴六百餘戶, 忠衛、業武、校生、三班官屬、席匠等三百餘戶。 計其餘數, 良丁應役之戶, 大略計之, 殆不及五百戶。 本邑軍額則通計收布軍之數, 都合爲二千七百八十三名。 今以五百戶良丁, 應二千七百八十餘名之役, 雖戶出五丁, 尙多不足之數, 故軍額虛錄, 三居其二。 白骨而責十年之布, 黃口而兼數三之役, 貧富俱困, 家餘鼎鐺者無幾矣。 今當步兵收布之日, 畢竟未收, 多至四五百金, 而期限已過, 督關連下, 不得已成給陳省, 迫送色吏, 空手上京, 出債充納。 故今年價布色吏, 明年必差倉色, 倉色何嘗有應下沾漑之資哉? 特使之盜竊幻弄, 以償其債耳。 議者以爲: "民戶必有漏丁, 或爲里任之隱蔽, 奸吏之操縱, 而不之察也。" 此則有不然者。 時任將校、守直校生, 太半名係於軍案。 蓋其襁褓時充定入屬之後, 不得閑丁代疤, 歲納身布。 此而猶然, 殘民可知。 甚至吏輩之方帶該色, 預受情錢, 而無人可充, 以渠名編於軍案, 果有漏丁, 必無是矣。 伏願特命量宜裁度, 可以減額者減之, 不可減者, 無論本道他道, 限千名移定, 以紓危迫之患焉。 本邑報災, 覆沙最多, 每近數百結。 昨年爲五百六十餘結, 而綿田與內災, 不入其中。 粤自戊戌, 新爲定式, 覆沙執災, 明年必以還起載錄, 雖永無田形之地, 必以今沙錄災, 竝當年之災, 其數亦不得不多。 於是乎未免白徵。 戊戌以後, 舊沙爲七十結零, 昨年覆沙, 永不可耕墾者, 大略爲百結之數, 足可開墾而力不能者, 又不知爲幾百結。 若至今秋, 以四五百結懸錄, 則營門必大加減削, 明年白徵之十倍於前, 可以預料。 臣竊聞中廟朝高荊山出按嶺東, 以土磽田荒, 具狀上聞, 得隨起隨稅。 本邑沙患, 殆非嶺東之比, 伏願特命掌賦之臣, 行會本道, 從實懸錄。 其三, 代穀作錢之弊。 嶺南單穀代捧, 無邑不然, 本邑尤甚, 歉歲有代捧之命, 則必捧單代穀, 其後雖値豐歲, 更不還作本色。 溯考穀簿, 則黃豆代單租, 爲八千六百四十石零, 小豆代單租爲一千一百十石零, 小米代單粟爲二千七百八十石零。 曹上營上簿, 則皆以本穀會錄, 而本邑倉儲則皆以代穀出納。 夫還穀法例, 何等嚴重, 則穀簿之相左, 至於一萬二千餘石之多, 已極寒心, 而比年以來, 本曹大小米作錢, 爲七千餘石, 會簿旣錄本色, 發賣亦責原價。 當初受食與代納, 皆民所爲, 到今追徵, 於渠非冤, 但旣往之事, 不自知非, 目下之急, 必皆齎咨。 今若還作本色, 則其勢末由, 因舊掩置, 則必貽久遠之弊, 此不可不變通。 昨年京試官臣徐榮輔奉命本道, 以豐基、順興兩邑代穀事歸奏, 特下時存穀作錢之令, 兩邑之民, 至今皷舞。 伏願特命道臣, 依兩邑例, 無論留庫分給停捧, 竝以時存穀改錄, 以除無窮之弊。
批曰: "惟予寤寐夙宵, 一念如結者, 卽小民也。 聞一弊知一瘼, 必欲蘇而後已。 際見爾疏, 以五百餘殘戶, 應三千軍役, 以萬餘包單代, 責數倍本色。 莫曰見牛未見羊。 此而恝視, 其可曰榮郡有芻牧之人乎? 然非邑倅所可擅便, 則爾安得不陳籲朝廷? 可謂不負特補。 卽令廟堂稟處。 田結白徵, 許令度支之臣, 詳問道伯, 俾卽狀聞。 爾旣出自邇列, 勿鄙吏事, 務益盡心於賙飢濟窮之政。"
- 【태백산사고본】 34책 34권 31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287면
- 【분류】호구(戶口) / 재정(財政) / 군사(軍事) / 농업(農業) / 구휼(救恤)
- [註 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