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하들과 김우진·이승훈과 천주교·정창순과 홍낙안 등의 문제를 논의하다
차대(次對)하였다. 이어서 초계 문신(抄啓文臣)들의 친시(親試)와 일차 유생(日次儒生)의 전강(殿講)을 거행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금 교화(敎化)가 두루 미치지 않아서 나도 두려운 마음으로 스스로를 반성하고 있는 중인데 공자의 사당에 절하지 않는 자가 있다고 하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이와 같은 것을 그대로 두면 곧 백성을 살리는 도(道)로 악한 자를 죽이는 뜻이 아니기 때문에 조사하라는 조치까지 있게 된 것이다. 우의정은 바로 그때의 감사인데, 도내에서 일어난 이같은 일을 어찌 들어 알지 못했겠는가. 대저 내가 이 일에 대하여 특별히 한심스럽게 여기는 점이 있다. 연전에도 또한 운운한 바가 있었지만 나의 일념(一念)은 오직 은혜를 온전히 하는 한 가지 일에 있다. 은혜를 온전히 해야 할 곳에는 반드시 은혜를 온전히 하려 하고 법을 사용해야 할 곳에는 반드시 법을 사용하려고 하니, 대저 이러한 무리들에게 법을 사용한 뒤라야 비로소 은혜를 온전히 할 수 있는 것이다. 익노(翼魯)와 같은 자로 말하면 가차없이 참수하는 것이 법에 당연하고, 지금의 권위(權瑋)도 익노와 마찬가지다. 지난번 제방을 쌓는 등의 일로 해궁(該宮)에 드나들어 자취가 이미 드러났으나 다만 미처 법으로 처결하지 못했다. 저와 같이 흉악한 자가 감히 성균관에 통문(通文)을 돌리는 짓을 하였으니, 이런 일을 그대로 두면 의관(衣冠)을 한 선비들을 거느리고 금수의 지역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기에 부득불 본말(本末)을 펴보이는 것이다. 대개 그는 제방을 쌓는 일로 바로 연전에 형조에서 송사를 일으킨 자였으니, 일찍이 형조 판서와 호조 판서를 지낸 사람치고 누군들 알지 못하겠는가. 사람을 속이고 물건을 취한 것은 오히려 여사(餘事)에 속하니 그의 죄악이 어떠하겠는가. 그런데 지금 또 이처럼 날뛰어 그 이름이 다시 조문(詔文)에 오르게 되었으니 어찌 몹시 놀랄 일이 아니겠는가. 이런 추한 무리들을 각별히 통렬하게 다스린 뒤라야 동기(同氣)도 보전할 수 있는 것이다. 속담에 이르기를 ‘너의 소 뿔이 아니면 어찌 우리 담이 무너졌겠는가.’ 하였으니, 만약 익노(翼魯)와 권위(權瑋) 같은 무리가 없었다면 당초부터 어찌 저처럼 바다 섬으로 귀양가는 일이 있었겠는가. 이놈들은 바로 나의 원수이니, 반드시 한 번 보복하려고 하는데, 선비들과 대사성이 지금까지 한 마디 말이 없으니, 어찌 한심스럽지 않겠는가."
하였다. 채제공이 아뢰기를,
"이번에 역적 김우진(金宇鎭)을 교동(喬桐)에 두려 하신 것은 참으로 말이 되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의 삼사가 잘못한 것이다. 일찍이 먼 섬에 있을 때에도 오히려 법을 적용하지 않았는데, 더구나 지금 경기에서 가까운 곳으로 옮겨둔 뒤에 어찌 법을 적용하는 것을 허락하겠는가. 경기 감사 장계의 말을 들어보면 정배(定配)도 아니고, 천극(荐棘)016) 도 아니며 다만 보수(保授)하게 하였다고 하니, 이것이 어찌 말이 되겠는가."
하니, 박종악(朴宗岳)이 아뢰기를,
"역적 우진은 우선 제주도로 귀양을 보내고 다음으로 법 적용을 논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대계(臺啓)가 이미 발론된 뒤에 귀양을 보내지 못하는 것은 바로 3백 년이나 된 옛 규례이다. 어찌 갑자기 폐지할 수 있겠는가. 그가 가고 오는 것도 모름지기 박자가 맞아야 한다. 지금 만약 정계한다면 즉시 도로 귀양을 보낼 수 있는데, 한갓 쟁집만을 일삼으니, 오직 그대로 두는 한 가지 일만 있을 뿐이다. 어찌 이러한 사체가 있겠는가.
권위(權瑋)의 일도 연석에서 하교한 내용을 상세히 안핵 어사(按覈御使)에게 전하여 그로 하여금 다 알게 하라."
하고, 박종악(朴宗岳)에게 하교하기를,
"예조 판서의 상소를 보았는가?"
하니, 종악이 아뢰기를,
"보긴 보았지만 이번 사건을 이미 알지 못하니, 외면만 가지고 논한다면 예조 판서는 이 일에 관여했을 리가 없을 듯합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본 사건의 속사정을 아는 사람이 없으니 온 세상이 모두 취했다고 할 만 하다. 대저 내가 도(道)를 보호하는 마음이 어찌 금일 조정 신하들만 못하겠는가. 이른바 장서(長書)는 ‘위정척사(衛正斥邪)’라는 명분을 내세웠으니 겉으로 논하면 비록 배척한 것이 아니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그의 심적(心跡)을 추측해보면 지극히 통탄할 만한 것이 있다. 대저 이 일을 말하고자 했다면 변고를 아뢰는 상소로 진달하더라도 안될 것이 무엇인가? 그런데 장서(長書)로서 덫을 조성해 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과연 무슨 마음인가. 내가 좌의정에게 싫어하는 뜻이 있었다면 출척(黜陟)의 권한이 나에게 있다. 저들 무리가 어찌 감히 선동하고 흔들어 임금으로 하여금 그 사이에 손을 쓸 수 없게까지 하는가. 이후부터 좌의정에 관계된 일이라면 내가 참으로 사적인 내 일로 보아서 휴척(休戚) 영췌(榮悴)를 그와 함께 하려고 한다. 사건이 한 번 생기면 대우를 더욱 더할 것이다. 조화(造化)의 권한이 어찌 이 무리들에게 놀림을 당하겠는가. 보검(寶劒)이 저기 있으니 그 갑(匣)은 비록 좀먹었다 하더라도 그 칼날은 있으니, 어찌 홍낙안(洪樂安)의 머리에 시험할 수 없겠는가. 다만 이 일은 이미 사학(邪學)을 공박하는 데서 나왔으니 급히 처리하는 것도 또한 불가하다. 모름지기 온 세상이 내가 정학(正學)을 보호하는 뜻을 알고 낙안의 자취가 다 드러나기를 기다린 뒤에 비로소 결말을 지을 것인데, 좌의정은 늙어서 미처 보지 못할 듯하다. 예조 판서의 일로 말하면, 낙안의 문계(問啓)를 본 뒤라서 스스로 판단할 것이 아닌 듯하기에 홍인호(洪仁浩)로 하여금 물어보게 하였더니, 낙안은 중신(重臣)이 간섭하였다고 대답하였다. 그런데 중신이 궁중의 연석에서 아뢴 말을 들어보니, 크게 다른 점이 있었다. 내가 예조 판서에게서 취한 바는 그 성품이 결백하고 곧은 점이다. 중신이 어찌 나를 속이겠는가."
하였다. 정창순(鄭昌順)이 아뢰기를,
"일전 신의 상소에서 대략 이 일을 폭로하였습니다. 대저 낙안의 아비가 수령이었을 때 신의 형에게 폄체(貶遞)되었으므로 일찍이 찾아온 일이 없었는데, 갑자기 문계(問啓)하는 날 잠깐 와서 보기에 신은 나름대로 의아해 하였습니다. 다른 곳에서 들어보니 과연 인호가 보낸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이처럼 권하여 보내고 뒤에는 이처럼 모함하니 심술(心術)에 크게 관계된 일입니다. 이는 그대로 둘 수 없으니 즉시 조사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또 장서(長書)는 이미 흉한 말이 아닌데, 신이 만약 참여하여 알았다면 어찌 감히 숨기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병신년017) 과 정유년018) 에 대대적으로 처리한 일이 있었는데, 만약 이처럼 중지하지 않는다면 병신년과 정유년처럼 처리하는 일을 어찌 다시 오늘에 사용하지 않겠는가. 비록 대신과 각신(閣臣)으로 예우를 받고 또 친밀한 자라 하더라도 죄를 지은 것이 있으면 결코 용서할 수 없다. 태양이 밝은데 감히 이러한 습성을 이루려고 하는가. 지금 한 해가 지났는데 아직까지 스스로 그 몸을 벗어나려는 한 마디 말도 없으니, 무리가 많다고 할 수 있다. 인호(仁浩)처럼 용렬한 자를 논할 가치가 무엇이 있겠는가."
하였다. 창순이 아뢰기를,
"그가 이미 낙안(樂安)을 신에게 보냈으니, 반드시 맥락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당초에도 그렇게 말한 사람이 있었지만 내 뜻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여긴다. 다시 물어본 뒤에 중신(重臣)에게 끌어다 붙였으니, 지금 만약 다시 물어본다면 다른 사람을 끌어대겠는가."
하였다. 창순이 아뢰기를,
"대저 이 일은 인호(仁浩)가 반드시 알 것이니, 즉시 조사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해가 많이 지나다 보면 자연히 드러날 것이니, 드러난 뒤에 마땅히 처분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승지 신기(申耆)가 아뢰기를,
"창순이 자기와 관계된 일에 대해 말이 매우 장황하니, 추고하소서."
하니, 내버려두라고 명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4책 34권 14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279면
- 【분류】왕실(王室) / 인사(人事) / 사상(思想) / 사법(司法) / 변란(變亂)
- [註 016]
○己巳/次對。 仍行抄啓文臣親試及日次儒生殿講。 上曰: "顧今敎化之不敷, 予方自反瞿然, 而乃有此不拜孔子者云, 天下寧有是也? 此若仍置, 卽非生道殺人之義, 故至有按覈之擧矣。 右相卽伊時道伯, 道內如許之事, 豈不聞知乎? 大抵予於此事, 別有所寒心者。 年前亦有所云云, 而予之一念, 惟在於全恩一事。 當全息處, 則必欲全恩, 當用法處, 則必欲用法, 蓋用法於此輩, 然後始可全恩故也。 如翼魯者, 千斬萬戮, 在法當然, 今之權瑋, 亦一翼魯。 向以築堰等事, 出沒於該宮, 蹤跡旣綻, 而特未及置法矣。 如渠函醜, 敢作通文泮中之擧, 此而置之, 便同率衣冠而歸禽獸之域, 不得不敷示本末矣。 蓋築堰事, 卽年前起訟於秋曹者也, 曾經秋判戶判之人, 孰不知之? 欺人取物, 猶屬餘事, 渠之罪惡何如, 而今又跳踉若此, 致使其名, 復登於絲綸之間, 豈不痛駭乎? 此等醜類, 各別痛治, 然後同氣可保。 俗云: ‘非汝牛角, 何壞我墻?’ 若無翼魯、權瑋輩, 則初豈有如彼海島之行乎? 此等漢, 卽予血讎, 必欲一番報復, 而士子也, 泮長也, 訖無一言, 寧不寒心?" 蔡濟恭曰: "今玆逆宇之置於喬桐, 誠萬萬不成說矣。" 上曰: "今之三司非矣。 曾在遠島之時, 猶不置法, 況今移置近畿之後, 豈許用法乎? 聞畿伯狀啓之言, 則非定配, 非荐棘, 只令保授云, 是豈成說乎?" 宗岳曰: "逆宇爲先發配於濟州, 次論正法宜矣。" 敎曰: "臺啓旣發之後, 不得發配, 卽三百年古例。 豈可遽廢乎? 其去其來, 須有節拍。 今若停啓, 卽可還配, 而徒事爭執, 惟有仍置一事而已。 寧有如許事面乎? 權瑋事, 亦以筵敎, 詳傳于按覈御史處, 使之知悉。" 敎朴宗岳曰: "禮判疏見否?" 宗岳曰: "果見之, 而本事旣未知之, 只就外面論之, 禮判似無干預是事之理矣。" 敎曰: "本事裏面, 人無知者, 可謂擧世皆醉。 蓋予衛道之心, 豈不若今日朝臣乎? 所謂長書, 名以衛正斥邪, 外面論之, 雖難非斥, 執其心跡, 有切可痛者。 大抵欲言此事, 則上變陳疏, 何所不可, 而乃以長書, 造成機關, 喧藉一世, 是果何心耶? 予於左相, 有厭之之意, 則黜陟之權, 在予矣。 渠輩何敢煽動敲撼, 至使君上, 不得容手於其間乎? 自玆以後, 事關左相, 予果看作一己之私, 休戚榮悴, 將欲與共。 事端一出, 則際遇愈加。 造化之權, 豈爲此輩之所簸弄乎? 寶劍在彼, 其匣雖蠧, 其刃則在, 豈不可試之於樂安之頭乎? 但本事旣出於攻邪學, 則遽爾處分, 亦或不可。 須待擧世, 知予扶正之意, 樂安之情跡, 盡綻然後, 始可究竟, 左相則似或老未及見矣。 至如禮判事, 見樂安問啓之後, 似非自辦, 故使洪仁浩問之, 樂安以重臣之干涉爲對。 乃聞重臣之宮筵筵奏, 大有異焉。 予所取於禮判者, 其性白直故也。 重臣豈欺予哉?" 鄭昌順曰: "日前臣疏, 略暴本事。 而蓋樂安之父, 以守令, 貶遞於臣兄, 故曾無來訪之事, 忽於問啓之日, 霎時來見, 臣竊訝惑。 從他聞之, 則仁浩果使送之。 初如是勸送, 後若是誣人, 大關心術。 此不可仍置, 卽令査覈宜矣。 且長書, 旣非凶言, 則臣若與知, 何敢隱諱乎?" 上曰: "予於丙丁年, 有大處分, 若此不已, 則丙丁處分, 豈不更用於今日乎? 雖大臣閣臣之敬禮與近密者, 有罪負則決不可容恕。 太陽亨午, 敢售此等之習乎? 今至經歲, 訖無一言自拔其身者, 可謂徒黨衆矣。 至於仁浩之孱劣, 何足論也?" 昌順曰: "渠旣送樂安於臣, 則必有苗脈矣。" 上曰: "當初亦有云云之人, 而予意未必然矣。 更問之後, 攙及於重臣, 今若更問, 則當引別人耶?" 昌順曰: "大抵本事, 仁浩必當知之, 卽令究覈宜矣。" 上曰: "年久自當綻露, 綻露後, 當有處分矣。" 承旨申耆曰: "昌順事關自己, 言甚張皇, 請推考。" 命置之。
- 【태백산사고본】 34책 34권 14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279면
- 【분류】왕실(王室) / 인사(人事) / 사상(思想) / 사법(司法) / 변란(變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