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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33권, 정조 15년 12월 4일 갑진 1번째기사 1791년 청 건륭(乾隆) 56년

우의정 채제공이 고상 서명선의 집에 조문한 일로 효유하다

우의정 채제공(蔡濟恭)에게 효유하기를,

"경이 고상(故相) 서 영부사(徐領府事)252) 의 집에 갔다는 말을 듣고, 처음에는 무릎을 치며 찬탄하였고 곧 이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송하였다. 그래서 일전에 시호(諡號)를 의논하는 모임이 있은 뒤에 유감스럽게 생각했던 마음이 물이 흘러가 버리고 구름이 벗겨지듯 사라졌다. 경처럼 크고 넓은 도량을 지니고서 오직 나라와 공도(公道)만을 위해 《명의록(明義錄)》의 큰 의리만을 알 뿐 다른 것은 관계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면, 어찌 다른 사람은 할 수 없는 이런 일을 하기 위해 병을 무릅쓰고 추위를 이겨내며 분연히 떨쳐 갈 수가 있었겠는가. 여기에서 더욱 내가 경을 안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닌 줄을 알겠다. 만약 고상에게 지각이 있다면 경의 이와 같은 성의를 저버린 것을 부끄러워함이 진실로 클 것이다. 그래서 근거없이 무성한 말들만 편차적으로 믿은 것에 대해 반드시 후회하는 바가 많을 것인데, 죽은 사람을 다시 일으켜 경에게 사죄하게 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하니, 제공이 부주(附奏)하기를,

"신이 고상과 전날 비록 서로 용납하지 못하는 점이 있었으나, 이는 다만 개인적인 일에 속하는 것일 뿐입니다. 성상께서 《명의록(明義錄)》에 감회를 일으키신 이런 날에 어찌 감히 7, 8년 동안 설왕설래하던 혐의를 돌아본 나머지 다른 사람들은 가는 곳에 저만 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이 고상에게 가서 조문한 것은 고상을 생각해서만이 아니라, 오직 《명의록》을 소중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이에 앞서 고상 서명선의 시호를 의논할 때 정부(政府)가 서경(署經)을 해야 하는데도 제공이 자리에 나오려 하지 않았다. 이에 상이 사관에게 명하여 《명의록》을 가져다 보여 주게 하면서 이르기를,

"경은 이 책을 모르는가."

하니, 제공이 황공해 하면서 비로소 나왔고, 이 때에 이르러 또 그 집에 조문을 한 것이었다.


  • 【태백산사고본】 33책 33권 73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266면
  • 【분류】
    인사(人事) / 정론(政論)

  • [註 252]
    서 영부사(徐領府事) : 서명선(徐命善).

○甲辰/諭右議政蔡濟恭曰: "聞卿往問故相徐領府云。 始則擊節而歎賞, 旋又嘖舌而稱善。 日前諡會後, 致慨之心, 不翅水流而雲空。 如非卿量大心洪, 國耳公耳, 只知有《明義錄》大義理, 不知其他, 則寧或爲此人所不可爲之擧, 而强疾衝寒, 奮然作行乎? 於是乎, 益覺予之知卿, 非錯矣。 如使故相有知, 愧負卿如許誠忠誠大矣。 以傾信薈蔚之說, 必多尤悔, 恨不使逝者起而謝卿。" 濟恭附奏曰: "臣與故相, 前日雖有不相能者, 此不過屬自己事耳。 當此聖上興感《明義》之日, 安敢顧七八年說來說去之嫌, 而人簉卬否乎? 臣之往弔故相, 非特故相是思, 惟《明義錄》是重。" 先是, 故相徐命善議諡, 政府當署經, 而濟恭不肯赴坐。 上命史官, 以《明義錄》示之曰: "卿不知此書乎?" 濟恭惶恐始往赴, 至是, 又弔其家。


  • 【태백산사고본】 33책 33권 73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266면
  • 【분류】
    인사(人事) / 정론(政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