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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 33권, 정조 15년 11월 14일 을유 2번째기사 1791년 청 건륭(乾隆) 56년

홍낙안 등의 일로 승지 홍인호를 엄히 문책하자, 홍인호가 상소하여 변명하다

상이 홍낙안(洪樂安) 등이 장서(長書)를 올리고 통문으로 돌리고 상소를 한 이면에는 반드시 다른 속셈이 있을 것인데 승지 홍인호(洪仁浩)가 필시 참여했을 것이라고 하여 연석에서 엄히 문책하였다. 인호가 물러가 상소하기를,

"병오년·무신년 이후로 신의 자취가 불안한 가운데 의심과 비방이 걸핏하면 모여들었습니다. 조정에 들어와서는 연석(筵席)에서 꾸짖음을 받았고 나와서는 친구들의 비방을 받았으므로 그림자를 감추고 사귐을 중지하면서 오직 스스로 조용히 지낼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리고 한번 스스로 설파한 뒤로는 대료(大僚)도 정녕 마음 속에 유감을 품지 않겠다고 말하였는데, 신 역시 스스로 처신을 전처럼 하자고 마음을 먹어 원래 터럭만큼도 속에 담아둔 일이 없다는 것에 대해서 또한 일찍이 천한 이의 말도 들어주시는 상께 우러러 아뢰었습니다.

이번 홍낙안의 장서가 나온 것을 신은 늦게야 소문을 듣고 그 초본(草本)을 가져다 보았을 뿐입니다. 그러다가 두 차례 문계(問啓)할 때는 마침 승정원에 있었기에 그 문서의 출납이 모두 신의 손을 거쳤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끝난 뒤에 비로소 결정하여 논의하였는데, 이에 대해서는 분명히 있었습니다.

낙안은 스스로 벽이 척사(闢異斥邪)하려는 고심에서 나왔다고 합니다만, 그가 증거로 끌어대는 말같은 것들에 대해 신은 전혀 깜깜하게 모르고 있었으니, 또 어떻게 그를 지휘하고 간섭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 달 7일에 낙안이 또 이수하(李秀夏)의 대답한 말이 사실과 다르다는 이유로 스스로 변명을 하고자 상소를 지어 승정원에 이르렀을 때 신이 직접 상소문을 접어서 낙안에게 돌려주었는데, 그 때의 실상은 승정원의 동료들이 모두 압니다.

그리고 이기경의 일로 말하면, 초기(草記)와 공술한 말이 서로 어긋나는 점이 있다 하여 그가 상소로 변명하겠다는 뜻을 편지로 재상에게 통지했고 이어 정원에 편지를 하게 된 이유를 낙안이 신에게 와서 전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신이 말하기를 ‘기경이 스스로 변명하고자 한다면 원래 다른 사람이 권하고 막을 일이 아니지만, 승정원에 편지를 보낸 일은 전에 들어보지 못한 일이다.’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송익효(宋翼孝)의 소에 대한 비답이 내리자, 낙안이 또 와서 말하기를 ‘지금은 기경이 현재 상중에 있다 하여 끝내 한 번 폭로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하기에, 신이 과연 응답하기를 실상이 원통하고 잘못되었다면, 상중에 소를 올리는 것도 예가 없지는 않다.’ 하였을 따름입니다. 그러나 일찍이 그와 왕복하면서 그 상소문 초고를 본 일은 없었는데, 또 어찌 그 상소를 외람되게 재계하시는 날에 올리고 말이 패려(悖戾)한 것이 많으며 뜻이 사태를 험하게 만들려는 것이라 엄정하신 처분에서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미리 헤아리기나 했겠습니까.

대개 신은 낙안과 지친(至親)으로서 친한 사이이고 낙안기경을 뜻이 같은 사람으로 보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상에게 아뢰는 글에 증거로 삼을 말로 인용했고 끝에는 또 그가 황급한 사정을 보고 민망히 여긴 나머지 기경의 일이라면 모두 신에게 말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이 묻는 대로 대답해 주었으니, 이는 대체로 그들의 마음가짐이 오로지 벽사 위정(闢邪衛正)하려는 것에서 나왔고, 신 역시 그것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연석에 올라 거듭 엄한 하교를 받고 보니 오장이 떨리면서 죽음을 모면하려 해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 기경이 상소를 올리면서 어떤 다른 속셈이 있고 누구의 조종을 받았기에 이처럼 계속 갈등을 일으키는 일을 하려고 했단 말입니까. 그것을 증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이 낙안에게 대답했던 말을 보건대 실정을 따져보면 비록 딴 속셈은 없었다 하더라도 그 자취를 돌아보면 말을 잘못한 죄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신처럼 행적에 혐의가 있는 자가 조용히 입을 닫아야 한다는 경계를 전혀 모른 채 끝내 스스로 의심을 받아 변명하기 어려운 죄에 빠졌으니, 하나도 신의 죄요, 둘도 신의 죄입니다. 가슴을 치고 혀를 깨물며 후회해도 장차 어찌할 수가 없게 되었는데 상의 앞에서 쫓겨 나오고 보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삼가 살 길을 지시하시며 시종 곡진히 보존시켜 주시는 은혜로운 가르침을 받게 되었으니, 이는 그야말로 신이 살고 죽으며 사람이 되고 귀신이 되는 길목이라 할 것입니다.

신이 만약 터럭만큼이라도 기경의 상소에 별다른 속셈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진실로 마땅히 낱낱이 밝혀 진술하기에도 겨를이 없었을 것입니다. 어찌 차마 우물쭈물하며 머뭇거려 거듭 기망(欺罔)하는 죄를 지었겠습니까. 이는 기경이 있으니, 한 번만 물어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신을 사패(司敗)243) 에 내려 기경과 대질(對質)시킴으로써 지극히 원통한 심정을 풀게 해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불쌍하여 살려주고 싶다. 사실을 자백한 말을 보니 양심이 없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특별히 지나간 일로 덮어둔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3책 33권 69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264면
  • 【분류】
    정론(政論) / 사상-서학(西學)

○上以洪樂安等之長書發通陳疏, 必有機關, 而承旨洪仁浩必與知, 臨筵嚴責。 仁浩退而上疏曰:

丙午戊申以後, 臣之踪地難安, 疑毁易集, 入而承筵席之誨責, 出而受知舊之嗔謗, 閉影息交, 惟思自靖, 而一自說破之後, 大僚以初不介懷爲言, 臣亦以自處如舊爲心, 元無絲毫芥滯之事者, 亦嘗仰徹於聽卑之天矣。 今番洪樂安之長書出, 而臣則晩後得聞, 取見其草本而已。 及其兩次問啓之時, 則適在院中, 出納俱從臣手, 然遂事後, 始爲質議之狀, 樂安私書, 固自在矣。 樂安則自以爲闢異斥邪出於苦心, 而若其援引證據之辭, 臣旣茫無所知, 亦何由指揮參涉乎? 今月初七日, 樂安又因李秀夏對語之失實, 欲爲自明, 陳疏到院, 而臣手自摺疊疏本, 還傳樂安。 伊時實狀, 院僚皆知。 至於李基慶, 則草記納供之語, 謂有相左, 渠以疏卞之意, 書告於揆地, 繼又抵書喉院之由, 樂安來傳於臣, 故臣曰: "基慶苟欲自卞, 則固非他人所可勸沮, 而抵書喉院, 事未前聞" 云云。 及夫宋翼孝疏批之下也, 樂安又來言曰: "今則基慶, 不可以方在草土之故, 終不一暴" 云。 臣果應之曰: "實狀冤枉, 則草土陳疏, 亦非無例" 云而已, 未嘗與渠往復, 見其疏草, 則又豈料其疏之冒呈於齋日? 辭多悖戾, 意在乖激, 無所逃於嚴正之處分也。 蓋臣與樂安爲至親情好之間, 而樂安基慶爲同志之人, 故始旣證援於奏御之辭, 終又愍念其惶隘之狀, 凡以基慶事, 酬酢於臣, 臣輒隨問隨應者, 槪以渠輩秉執, 專出於闢邪衛正, 臣亦不以爲疑故也, 而今日登筵, 荐承嚴敎, 五內震剝, 求死不得。 噫! 基慶之疏, 有甚機關, 被誰挑唆, 甘爲此轉輾葛藤之擧? 臣亦惡之, 而臣之答樂安一語, 究其情則雖無他腸, 顧其跡則難免失口。 以臣形跡之嫌, 全昧緘默之戒, 終自陷於受疑難白之科, 一則臣罪, 二則臣罪, 扣心咋舌, 悔將何及! 逬出前席, 罔知攸措。 伏況指示生路, 終始曲保之恩敎, 此乃臣生死人鬼之關也。 臣若一毫與知基慶疏之別有機關, 則固當披瀝指陳之不暇, 豈忍依違顧藉, 重被欺罔之誅乎? 此則基慶在焉, 一按可知。 伏乞下臣司敗, 仍與基慶對質, 俾伸至冤。

批曰: "矜之欲活, 首實之辭, 可見良心之不泯。 特付昧爽以前。"


  • 【태백산사고본】 33책 33권 69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264면
  • 【분류】
    정론(政論) / 사상-서학(西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