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훈을 삭직하고 권일신을 위리 안치시키도록 하다
이승훈(李承薰)을 삭직하고, 권일신(權日身)은 사형을 감해서 위리 안치(圍籬安置)하도록 명하였다. 의금부가 아뢰기를,
"이승훈이 공술하기를 ‘홍낙안(洪樂安)의 문계(問啓) 가운데 저를 모함한 것이 무릇 세 조목입니다. 하나는 책을 사왔다는 것이고, 하나는 책을 간행했다는 것이고, 하나는 성균관에서 회합했다는 것입니다.
책을 사왔다는 일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계묘년229) 겨울 부친을 따라 연경에 가서, 서양인이 사는 집이 웅장하고 기묘해 볼 것이 많다는 소문을 듣고, 여러 사신들을 따라 한 차례 가보았습니다. 서로 인사를 하고 바로 자리를 파할 무렵에 서양인이 곧 《천주실의》 몇 질을 각 사람 앞에 내놓으면서 마치 차나 음식을 접대하듯 하였는데, 저는 애초에 펴보지도 않고 돌아오는 여장에다 넣었습니다. 그리고 말이 역상(曆象)에 미치자 서양인이 또 《기하원본(幾何原本)》 및 《수리정온(數理精蘊)》 등의 책과 시원경(視遠鏡)·지평표(地平表) 등의 물건을 여행 선물로 주었습니다. 귀국한 뒤에 뒤적여 보았습니다만 점차 말들이 많아지자 을사년 봄에 저의 부친이 종족(宗族)들을 모아놓고는 그 책을 모두 태워버리고, 여러 의기(儀器)들도 역시 모두 부숴버렸습니다. 그리고 저도 드디어 이단을 배척하는 글을 지어서 통렬히 배척하기를 남김없이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낙안은 재가 된 수십 권의 책을 수백 권의 요서(妖書)라고 억지를 부리고, 구하지 않고 저절로 얻게 된 물건을 의도를 갖고 사온 일로 날조했고, 글을 지어 물리친 사람을 속임수로 유혹해 교세을 넓혔다는 말로 무함했으니, 그의 말이 오로지 화심(禍心)에서 나온 것임을 여기에서도 알 수가 있습니다. 대개 그 뜻은 제가 이미 태워버린 책을 가지고 오늘날 이단이 나오게 된 근본으로 삼으려고 하는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 학설이 유래되고 그 책이 전파된 것은 수백 년 이래의 문헌에서 상고할 수 있으니, 제가 드러내 변명하지 않더라도 자연히 온 세상이 보고 들은 바가 있을 것입니다. 비록 이단 사설(異端邪說)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자신이 독실하게 실천한 뒤에야 다른 사람들이 그 가르치고 유인하는 말을 믿는 법입니다. 스스로 물리치는 글을 짓고서도 그 가르침을 널리 펼 수 있었던 경우는 이 세상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이 한 조목으로 말하면 그의 말이 이치에 벗어난 것임을 자연히 간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책을 간행했다는 일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낙안의 문계(問啓)를 본 뒤에야 비로소 책을 간행했다는 말이 있다는 것을 알았는데, 이는 비단 아무 증거가 없는 것일 뿐만이 아닙니다. 공연히 근거없는 말을 만들어 낸 뒤 억지로 남에게 씌우면서 그가 모를 리가 전혀 없다고 한다면 어찌 천하에 살아 남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가 한 말을 그가 반드시 스스로 알 것입니다.
성균관에서 회합했다는 일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경자년 진사시에 합격한 뒤로 성균관에 들어가 원점(圓點)을 한 것이 몇 번인지 모를 정도인데, 그가 꼭 정미년 겨울이라고 말한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책을 태운 뒤로는 애당초 한 권의 책자도 없었고 보면 책을 끼고 갔다는 말이야말로 정말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또 그 증인으로 내세운 사람이 바로 그 친구인 이기경(李基慶)이고 보면 이미 공평한 증인이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기경의 생각이 음험하고 말하는 것이 허황된 것은 낙안보다도 열 배나 됩니다. 제가 벗을 취함이 아무리 단정하지 못하다 하더라도 기경이 이미 낙안의 절친한 친구가 된 이상 또 어떻게 그와 절친한 친구가 될 수 있겠습니까. 함께 연마한 절친한 친구라고 한 그의 말도 호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대개 절친한 친구[切友]라는 두 글자를 가지고 그 말이 무함이 아님을 분명히 증명하려고 한 것일 뿐입니다. 또 그가 함께 책자를 보았다고 한 것도 속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대개 함께 보았다[同看]는 두 글자를 가지고 그 일이 사실임을 증명하려고 한 것일 따름입니다. 또 그가 이른바 경계시키고 권면했다는 말도 대개 스스로의 격조를 높이면서 눈도 깜짝하지 않고 남을 해치려고 한 것입니다. 그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는 길가는 사람들도 다 아는데 그만 팔다리 사이에 끼고 농락하려 하다니, 진실로 한 번의 웃음거리도 못된다 할 것입니다.
그들이 애초부터 아무런 흔적도 없는 일을 가지고 서로 화답하고 증명하는 것은 반드시 얽어매어 모의한 일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일 것입니다. 그가 꼭 정미년 겨울이라고 한 것은 을사년에 책을 태운 일을 없었던 일로 돌리려고 한 것이고, 그가 꼭 성균관에서 설법했다고 한 것은 막중한 성묘(聖廟)의 지역을 등대고 저의 죄를 더욱 무겁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남의 이목을 가리기 어렵고 남의 비난을 막기가 어려운 곳으로 말하자면 성균관 같은 곳이 없는데, 어찌 가르치는 장소를 크게 열어 팔을 휘두르면서 설법한 일을 기경 한 사람 이외에는 누구 하나 본 사람이 없고 낙안 이외에는 누구 하나 말하는 사람이 없단 말입니까. 그리고 편지를 서로 왕복했다고 했는데 그것도 무슨 속셈이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미 절친한 친구가 아니고 또 그런 사실도 없고 보면 이 역시 혼자 나서서 증거를 대고 허구를 날조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였습니다.
또 공술하기를 ‘이단을 물리치는 글은 을사변 봄에 지었는데, 원래의 초고는 평택(平澤) 부임소에 가지고 가서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이제 공술을 드리자니 정신이 혼미해서 전편의 내용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겠습니다만, 그 가운데 기억나는 것을 말한다면 「천하의 학문은 정사(正邪)를 가릴 것 없이 이해(利害) 관계가 있은 뒤에야 사람들이 마음을 기울여 따르게 마련이다. 만약 서학(西學)에 천당(天堂)·지옥(地獄)의 설이 없었다면, 사람들이 어찌 패관 잡설(稗官雜說) 보다도 못하게 여겼겠는가.」라고 한 것이 있고, 「서양에서 온 학술은 반드시 천당과 지옥으로 주를 삼아 천하의 수많은 사람들을 기만한다.」 한 것이 있고 「서학에 가짜 천주(天主)가 횡행한다는 말이 있으니, 요사스럽고 허망하기가 이와 같은 것이 없다. 이미 하늘이라 말하면서 가짜가 있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내가 반드시 그 학설로 그 학설을 깨겠다.」 한 것이 있습니다. 일찍이 을사년에 형조에서 서학을 다스릴 때 이 글을 지어 그때 형조 판서였던 김화진(金華鎭)에게 보내 보여주었고, 또 책을 태운 뒤에 시를 짓기를 「천지(天地)의 경위(經緯) 동서 갈랐는데, 무덤 골짜기 무지개 다리 아지랭이 속에 가렸어라. 한 줄기 심향(心香) 책과 함께 타는데, 멀리 조주묘(潮州廟) 바라보며 문공(文公)230) 을 제사하노라.」 하였습니다. 이제 이 글과 시야말로 더욱 제가 이단을 물리친 뚜렷한 증거가 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상께서 재결하소서."
하니, 판하하기를,
"수백 권이라 해서 죄가 더 많아질 것도 아니고 수십 권이라 해서 반드시 적어질 것도 아니다. 그가 받아서 돌아오는 보따리 속에 넣어 가져와 뒤적여 본 것에 대해서는 그도 변명을 하지 못하니, 이 한 조목은 바로 그의 죄라고 하겠다. 그러나 그 아비가 일족을 모아놓고 그 책을 모두 태워버렸는가 하면 그도 그 학술을 비방하는 글과 시를 지었는데, 그 일이 을사년 조사 문서에 분명히 실려 있고 그 글은 해조 판서의 눈을 거치기까지 하였다. 그러니 이제 책을 간행한 일이 없었던 일로 밝혀진 셈이다. 그런데 뒤에 다시 이미 불태운 서책의 일을 가지고 재가 된 묵은 불씨를 일으키려 하는 것은 정실(情實)로 볼 때 타당하지 않을 뿐 아니라, 법리(法理)로 따져보아도 명령이 있기 전과 후의 구별을 두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이기경(李基慶)이 함께 보았다는 말이 증거가 될 듯도 하지만, 문계(問啓)와 초기(草記)가 크게 상반되는데다가, 저 기경으로 말하면 말을 이랬다저랬다 하면서 염량(炎凉)의 세태를 따르는 자이니 어찌 족히 믿을 수가 있겠는가.
이 죄수는 단지 잡서(雜書)를 받아 온 죄로 무겁게 처벌해야 하겠다만, 이것도 역시 생각해 볼 점이 있다. 대저 그 책이 우리 나라에 전해진 것은 이미 수백 년 전의 일로서 《지봉유설(芝峰類說)》에 이미 그 학설을 비평한 말이 있는데 홍문관의 장서각(藏書閣)에도 들어 있다. 그러니 요즈음 경외에 유포되는 것을 그가 전한 때문이라고 억지로 책임을 돌릴 수는 없다. 본율(本律)에서 한 등급 감하여 그를 삭직하고 석방해서 스스로 반성하도록 천천히 도모하라."
하였다. 형조가 아뢰기를,
"권일신이 공술하기를 ‘서양 책을 보기를 좋아해서 연전 금령이 내려지기 전에 《직방외기(職方外紀)》 등의 책을 보았는데, 그 사이에 좋은 곳도 있고 혹 좋지 않은 곳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본 내용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기도 하였기 때문에 이 학술을 숭봉(崇奉)한다는 지목도 받았지만 애당초 특별히 외워 익히거나 매혹되어 빠진 일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본조(本曹)에 와서 스스로 변명한 일은 이렇습니다. 을사년 연간에 그 이름을 잊어버렸으나 김씨 성을 가진 중인(中人)이 서학(西學)을 높이 받든 일로 심문을 당할 때, 저와 김가가 서로 친한 사이이고 그때 저와 김가가 함께 《천주실의》를 보았던 까닭에 자못 여러 사람들의 지목을 받았었습니다. 그래서 모른 체하고 스스로 피하기에는 미안한 점이 있기에 과연 몸을 드러내 형조에 자수했는데, 요는 변론하여 해명하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대저 그 학술은 천주(天主)를 소중하게 여기는데 그 공경하고 두려워하며 일을 삼가하는 의리가 고서(古書)의 「어두컴컴한 새벽 남 모르는 곳이 더욱 드러나니 엄히 공경하고 경건히 두려워하라.」는 가르침과 은연중 합치되기에 그때 과연 열람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단 금법(禁法)이 반포된 뒤로는 이런 종류의 책을 보기가 매우 어려워져 일체 보지를 못했습니다.’ 하였습니다.
또 공술하기를 ‘이번에 올라올 때 대략 홍낙안의 무리가 이런 말을 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낙안은 바로 저의 8촌 족조(族祖)인 권부(權孚)의 외손입니다. 비록 얼굴을 보지는 못하였으나 안부는 서로 통하였는데, 교주라는 이름을 저에게 돌리다니 실로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습니다. 전 도정(都正) 목만중(睦萬中) 부자와는 원래 서로 친한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됨이 원만하지 못한 점이 많았기 때문에 항상 친구들을 대하면 그 단점을 배척하였으므로 이로 말미암아 관계가 나빠졌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처럼 증거를 서는 행동을 하다니, 이는 필시 기회를 타서 유감을 풀려고 하는 것으로서 좌도(左道)에 미쳐 미혹되었다는 죄과에 빠뜨리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실로 드러난 죄가 없는데, 무슨 연고로 이렇게까지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른바 교주란 반드시 주장하는 것이 있고 또 따르고 사모하는 사람이 있어야 그렇게 지목할 수 있는 법입니다. 그러나 저는 일찍이 다른 사람에게 이 학술을 말한 적이 없는데, 실로 어떤 원수진 사람의 입에서 나온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는 필시 저에게 유감을 풀려고 하는 것이니 저는 정말 애매하기만 합니다.’ 하였습니다.
세 번째 공술하기를 ‘시골에서 올라올 때 동생이 중도에 마중 나와서 대략 홍낙안과 목만중 두 사람의 일을 알려주어 이로써 알았습니다만, 저와 저의 장인인 고 동지중추부사 안정복(安鼎福)이 서로 사이가 어긋났다는 말은 모두 시속의 부박한 자들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천주문답(天主問答)》 한 가지 일로 말하더라도 장인이 분명히 이 책을 지었으나, 그와 더불어 강론할 때 입론(立論)이 준엄하지 못해 인심을 격려하고 경계시킬 수 없다고 말을 주고받은 일이 있으니, 제가 이 학술을 위하지 않았음을 미루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제 자식이 외조부의 상을 당했을 때 장례에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말하면, 그때 마침 제가 중병에 걸려 사경(死境)에 처했기 때문에, 힘을 다해 구호하느라 다른 것을 돌볼 겨를이 없어 가서 참여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초상 때에는 두 아들이 모두 가서 호상(護喪)하였고, 또 장사지낸 뒤에도 계속 왕래를 하였으니, 이로써 애초부터 서로 어긋난 일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네 번째 공술하기를 ‘야소(耶蘇)는 그 책에서 그 나라의 현인(賢人)이라 불리는 사람인데, 제가 같은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고 같은 나라에 있지 않아 그 행적을 참으로 알지 못하는 이상 그가 어진지 사악한지는 변론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말이 사람의 오륜(五倫)에 벗어나니, 반드시 사교(邪敎)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의 사악함을 일단 분명히 알지 못하는 이상 어떻게 남이 하는 대로 구차하게 좇을 수 있겠습니까. 권상연(權尙然)은 애초부터 서로 모르고, 윤지충(尹持忠)은 약간 안면이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이 만약 과연 사판을 태워버린 일이 있다면, 이는 진실로 놀랍고 망령된 짓입니다. 조상을 섬기는 한 조목은 특히 그 학술에서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니, 제사를 예법대로 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생일에도 제물을 올리는 것이 정례(情禮)에 합치된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이 사판을 태워버린 사람은 어떤 책을 보고서 이처럼 패역스럽고 망령된 일을 했는지 모르겠으나, 실로 이해하지 못할 바입니다.’ 하였습니다.
다섯 번째 공술하기를 ‘제가 만약 그것이 사학(邪學)임을 진정으로 알았다면, 어찌 그것이 요사스럽다고 말하기를 어려워하겠습니까. 그 책 가운데 「밝게 천주를 섬긴다.」든가 「사람들에게 충효(忠孝)를 느끼게 한다.」는 등 몇 구절의 좋은 말 외에는 다른 것은 실로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억지로 요서(妖書)라고 하겠습니까.’ 하였습니다.
여섯 번째 공술하기를 ‘본 책자는 단지 《직방외기(職方外紀)》와 《천주실의》 두 책인데, 금법을 설치한 뒤로는 다시 보고 익히지 않았습니다. 금서를 간행한 일은 보지도 듣지도 못하였으니 소문이 허황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야소(耶蘇)의 사람됨의 사정(邪正)은 비록 그 책의 전체적인 대의는 모르지만, 그 가운데 기억나는 것으로 「엄숙 공경하고 삼가 두려운 모습으로 천주를 받들면 법이 없어도 자연 임금에게 충성하고 명령하지 않아도 자연 그 부모에게 효도한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는 사람되는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듯합니다. 이것이 이치에 벗어난 사설이 아닌 이상, 어떻게 그 사람이 삿되다고 배척해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만약 스스로 교주로 자처하거나 타인이 교주라고 불렀다면, 반드시 근거할 단서가 있은 뒤에야 바야흐로 진실한 증거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교주라는 두 글자가 뜬소문에서 생긴 것을 죄로 삼아 형장(刑杖) 아래에 귀신이 되는 것을 면하지 못하게 한다면, 정말 애매합니다.’ 하였습니다.
일곱 번째 공술하기를 ‘그 학술은 대체로 공(孔)·맹(孟)의 학문과 달라 인륜에 어긋날 뿐더러 나아가 제사를 폐지하고 사람의 마음을 빠뜨리게 하였으니, 이 점에 있어서는 사학(邪學)입니다.’ 하였습니다.
그가 교주라는 칭호에 대해서는 뜬 소문으로 돌려 극구 변명을 하면서도, 유독 야소에 대해서는 끝내 그가 사특하고 망령되다고 배척하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엄한 매를 치면서 묻는데도 전과 같은 말만 되풀이하니, 그가 그 학문에 빠져 미혹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엄한 형장을 시행한 뒤에 비로소 사학(邪學)이라는 두 글자의 자복(自服)을 받았지만, 교주와 서책에 관한 두 가지 일과 관련하여 그가 변명한 것을 근거로 믿을 수가 없으니, 더욱 엄히 형문(刑問)하여 반드시 자백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하니, 판하하기를,
"홍낙안이 이른바 교주라고 말한 것은 꼭 무리를 모아 설교(說敎)했다는 것이라기 보다는 거기에 빠져서 떠받들고 믿는 것을 지적한 것인 듯하다. 그의 두 번째 공술 가운데 ‘이는 이치에 벗어난 사설(邪說)이 아니다.’고 한 것을 보면 그의 실정이 저절로 드러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세 번 추문을 받은 뒤에 비로소 ‘사람의 오륜에 어긋나며, 나아가 제사를 폐지한 것은 사학이 되는 것이다.’ 하는 등의 말로 공술을 하였고 보면, 이것이 유가(儒家)의 말을 하면서 묵자(墨者)의 행동을 하는 것은 오도(吾道)의 죄인이 된다고 하는 것과 똑같다고 하겠으나, 척사(斥邪)에 한 발자취를 세운 것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가령 그가 입으로만 그렇다고 하고 마음으로는 그렇다고 하지 않으면서 이처럼 묻는 데 따라 적당히 대답한 행동을 한 것이라 하더라도 꾸짖고 욕하는 말이 이미 그 자신의 입에서 나온 이상 그가 잘못 배운 십 년의 공부가 저절로 햇빛을 받아 녹아내린 얼음이 되어버렸다고 하겠다. 마음과 입이 진짜 서로 호응하지 않는 경우가 얼마나 되겠는가.
왕정(王政)에서 힘쓰는 바는 그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만한 것이 없다. 그 집에 있는 잡서들은 별도로 관원을 보내 즉시 조사한 뒤 가져와 형조의 뜨락에서 태워버리고, 그는 고신(拷訊)의 기한이 차기를 기다려 다시 엄히 형문한 뒤에 제주목(濟州牧)에 사형을 감해 위리 안치시키도록 하라. 그리고 이와 함께 목사에게 명하여 초하루와 보름에 점고할 때 글이나 말로 반드시 사학을 비난하고 배척하는 형적을 보이도록 하고, 자주 감시하는 사람을 보내 그 행동거지를 살피되 만일 옛날처럼 개전의 모습을 보이지 않거나 혹 다른 사람을 미혹시키는 일이 있을 경우에는 목사가 직접 심문을 하고 곧바로 결안(結案)을 받아 먼저 참(斬)한 뒤에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형조가 또 최필공(崔必恭)과 양윤덕(梁潤德) 등의 공초를 아뢰기를,
"윤덕은 철모르고 무지해서 남에게 속임수와 유혹을 당한 듯합니다. 그러나 필공은 흉악하게 굳게 참으면서 목석(木石)처럼 완악하기만 한데 갑자기 눈을 부릅뜨고 말하기를 ‘큰 부모를 위해 죽는 것이 실로 효도가 된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밖에는 비록 배를 치거나 협박을 하면서 온갖 수단을 동원해 말을 하게 해도 아무 것도 모르는 자처럼 굴고 있으니 미혹을 깨우쳐 살려줄 길이 전혀 없습니다. 율을 상고하여 품처(稟處)토록 하소서."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3책 33권 58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259면
- 【분류】사법(司法) / 사상-서학(西學) / 출판(出版)
○命李承薰削職, 權日身減死, 圍籬安置。 義禁府啓言: "李承熏供: ‘洪樂安問啓中, 謀陷渠者, 凡三條。 一是購書, 一是刊冊, 一是泮會。 購書事, 則渠於癸卯冬, 隨父赴燕, 聞西洋人所居之館, 壯麗瓌奇, 多有可觀, 隨諸使臣, 一番往見, 則寒暄纔罷, 西洋人卽將《天主實義》數秩, 分置各人前, 有若茶飯之接待。 渠初不展看, 納之歸裝。 且語及曆象, 則西洋人, 又以《幾何原本》、《數理精蘊》等書, 及視遠鏡、地平表等物, 贈爲贐行。 歸後繙閱, 漸多辭說。 乙巳春, 渠父聚會宗族, 悉焚其書, 竝與諸儀器, 亦皆撞破。 渠遂作闢異之文, 痛斥無餘。 今樂安, 以數十卷灰燼, 勒作數百卷妖書, 以不求自得之物, 捏作用意購貿之事, 以作文闢廓之人, 誣作誑誘廣敎之說。 其言之專出禍心, 此亦可見。 蓋其意, 必欲以渠旣焚之書, 爲今日異端之本, 其說之流來, 其書之播傳, 數百年來文獻可考, 則不待渠之暴卞, 自有一世之聞見。 雖異端邪說, 必自己篤行而後人信, 其敎誘之說, 則世未有自作排闢之文, 反能以廣張其敎者也。 卽此一款, 彼言之出於理外, 自可覰破。 刊冊事, 則渠見樂安問啓之後, 始知有刊冊之說。 不但參證之歸虛, 做白地無根之說, 勒加之某人曰, 彼萬無不知之理云爾, 則天下豈有可生之人? 渠自爲說, 渠必自知。 泮會事, 則渠於庚子榜進士之後, 入泮圓點, 不知爲幾次, 則其必曰丁未冬云者, 莫曉厥由。 焚書以後, 初無一卷冊子, 則帶去之說, 可謂無麪之不托。 且其所證, 卽其友李基慶, 則已非公證。 基慶用意之陰險, 遣辭之虛謊, 十倍於樂安。 取友雖曰不端, 基慶旣爲樂安之切友, 則又安得與爲切友乎? 其所謂同硏切友者, 非出好意, 蓋欲以切友二字, 明證其言之不誣。 且其所謂同看冊子者, 非出直腸, 蓋欲以同看二字, 明證其事之實有, 其所謂切偲勉戒等語, 蓋欲高自標致, 不瞬目而戕殺人也。 其心所在, 路人皆知, 乃欲玩弄於股掌之間, 誠不滿一笑。 渠輩以初無影響之事, 雄唱雌和, 互相爲證者, 必有綢繆謀議而然也。 其必曰丁未冬者, 欲使乙巳焚書之事歸虛也。 其必曰泮中設法者, 欲以莫重聖廟之地, 彌重其罪也。 然耳目之莫掩, 辭說之難防, 莫如泮中, 則豈有大開敎場, 挺臂設法, 而基慶一人之外, 無一人見者; 樂安一人之外, 無一人言者乎? 其所謂書牘往復者, 亦未知有何排布, 而旣非切友, 且無事實, 則亦不過自立爲證, 構虛捏無而止也’ 云。 又供: ‘闢異文, 作於乙巳春間, 原草携往平澤任所, 未及持來。 今於納供之際, 精神迷錯, 全篇文字, 不能記得, 句語之間, 隨其所記憶者, 則有曰: 「天下之學, 無論邪正, 有利害而後, 人必傾心, 而向之使西學, 無堂獄之說, 人之視之, 豈下於稗官雜說?」 云云。 有曰: 「西來之學, 必以堂獄爲主, 誣罔天下億萬生靈。」 云云。 有曰: 「西學有僞, 天主橫行之說, 妖虛誕妄, 莫此若也。 旣曰天而有僞, 何哉? 吾必以其說, 破其說。」 曾在乙巳, 自秋曹推治西學時, 作此文, 送示於其時秋判金華鎭。 又於焚書後, 有詩曰: 「天經地紀限西東, 墓壑虹橋晻靄中。 一炷心香書共火, 遙瞻潮廟祭文公。」 今此文與詩, 尤爲渠闢異之明證’ 云。 請上裁。" 判曰: "數百卷, 不加多也; 數十卷, 非必歇也。 渠之受藏歸篋, 携來繙閱, 渠亦不得發明, 此一款, 卽渠之罪。 然而渠父會族人, 悉燒其書, 渠又作詬詆厥學之詩與文, 其事昭載於乙巳査案, 其書經眼於該曹判堂。 及今刊本事脫空之後, 更以已付丙之書冊事, 挑起已灰之宿烟, 不惟情實不稱當, 揆以法理, 自有令前令後之區別。 至於李基慶同看之說, 雖似爲證左, 問啓與草記, 太相反, 彼基慶二三其說者之從炎從涼, 何足爲信乎? 此囚, 則只當以雜冊受來罪重勘, 而此亦有欲商量者。 大抵厥冊之出來我國者, 已屢百年, 自《芝峰類說》已有評隲之語, 而弘文館藏書之閣, 亦有之。 近來京外之流播, 不可勒歸之於渠所歸傳。 本律減一等, 削其職放送, 徐圖自效。" 刑曹啓言: "權日身供: ‘喜看西洋冊子, 故年前禁令前, 得見《職方外紀》等書, 而間有好處, 或有不好處, 故以所見, 向人作談屑, 由是而有崇奉此學之目, 初無別般誦習惑溺之事。 至於本曹自卞事, 則乙巳年間, 中人忘其名金姓人, 以尊奉西學事, 被訊推, 而渠與金哥, 爲相親之間。 伊時以渠與金哥, 同看《天主實義》之故, 頗爲衆口之指目, 厭然自諱, 有所未安, 果挺身自服於曹庭, 要爲卞破解紛之計。 大抵其學, 以天主爲重, 而其寅畏謹事之義, 暗合於古書昧爽丕顯, 嚴恭寅畏之訓, 故其時果爲看閱, 而一自禁條頒示之後, 此等書甚稀罕, 一切不掛眼。’ 又供: ‘今番上來時, 略聞洪樂安輩, 有此言矣。 樂安卽渠八寸族祖權孚之外孫, 雖未見面, 聲息相通, 以敎主歸之於渠者, 實未知何故。 前都正睦萬中父子, 本來相親, 而其爲人, 多有不滿處, 故常對知舊, 斥其短處, 因是交惡, 今有此立證之擧。 必是乘機逞憾者, 陷於誑惑左道之科, 而渠實無現贓, 未知緣何致此。 所謂敎主, 必有主張人, 亦趨慕, 乃有是目, 而渠未嘗與人說此學, 實未知出於何許仇人之口。 必欲甘心於渠, 而渠實曖昧’ 云。 三供: ‘渠自鄕上來之際, 同生弟迎到中路, 略傳洪、睦兩人事, 因是得聞, 而渠之與妻父故同樞安鼎福相睽事, 此皆時俗浮薄者做出者。 雖以《天主問答》一事言之, 妻父果著此書, 與之講確, 以其立論不峻, 無以警勵人心, 有所酬酢, 渠之不爲此學, 可以推知。 渠子於其外祖喪, 不會葬事, 則其時渠適患重病, 方在死境, 故盡力救護, 不暇他恤, 果不得往赴, 而初喪時二子,皆往護喪。 又於葬後, 連爲往來, 卽此可知其初無睽離之事。’ 四供: ‘耶蘇, 則其書中稱謂其國之賢人, 而渠生不倂世, 不在其國, 旣不眞知其行, 則其賢其邪, 不可雌黃, 而其言乖人五倫, 必是邪敎。 然其人之爲邪, 旣未眞知, 則豈可隨人苟從乎? 權尙然, 則初不相識, 尹持忠則略有面分。 使此二人, 若果有焚棄祠版之事, 眞是駭妄之擧, 而奉先一節, 尤是其學之所重, 非特祭奠之如禮, 至以生日設奠, 合於情禮云爾, 則今此焚棄祠版之人, 未知看得於何書, 作此悖妄之擧, 而實所未曉。’ 五供: ‘渠若眞見其爲邪學, 則豈難言其妖邪乎? 其書中昭事天主, 感人忠孝等數段嘉言外, 他實未見, 豈可强言其妖書乎?’ 六供: ‘所看冊子, 只是《職方外紀》、《天主實義》二冊, 而一自設禁後, 更不看習。 禁書刊行事, 則所未見所未聞, 可知傳說之虛謊。 至於耶蘇爲人之邪正, 雖不知其書之全體大意, 而記得其中, 有嚴恭寅畏, 奉天主, 則無法而自忠於君, 不令而自孝於親云者, 似不悖於爲人之道。 此非理外之邪說, 則何可斥言其人之爲邪乎? 若自處以敎主, 他人若稱之爲敎主, 必有端緖之可據, 然後方可謂眞贓。 若以敎主二字之出於浮言爲罪, 不免爲杖下之鬼, 則千萬曖昧。’ 七供: ‘其學, 大抵異於孔、孟之學, 乖人五倫, 至廢祭祀, 陷人心術, 此則邪學矣’ 云。 其敎主之稱, 歸之於浮言之科, 極口發明, 獨於耶蘇, 終不斥言其邪妄, 嚴訊之下, 一辭如前, 可見其沈溺迷惑。 雖於施威之下, 始於邪學二字, 遲晩, 至於敎主書冊兩段事, 不可以其發明, 有所準信, 請更加嚴刑, 期於取服。" 判曰: "洪樂安所謂敎主云者, 未必是聚徒設敎, 似指沈惑而崇信。 渠之再供中, 此非理外之邪說云云, 可見情實之自綻。 然於三推之後, 始以乖人五倫, 至廢祭祀, 爲邪學等語納供, 則正若儒言墨行, 爲吾道之罪人, 足可謂立跡於斥邪。 藉令渠口然而心不然, 有此隨問漫對之擧, 詆辱之說, 出自渠口, 渠所枉用之十年工夫, 自歸於氷厓之見晛日消, 幾何不心與口眞箇相應乎? 王政所務, 莫如人其人。 其家藏雜書, 則別定官差, 登時披驗取來, 焚於曹庭, 渠則待栲訊限滿, 更加嚴刑, 濟州牧, 減死棘置。 仍令牧使, 朔望點考時, 以文以言, 必捧毁斥邪學之跡, 頻送廉察, 考其行止, 萬一有依舊不悛, 或誑惑他人, 牧使親執訊推, 直捧結案, 先斬後啓。" 刑曹又以崔必恭、梁潤德等供招, 啓曰: "潤德穉騃無知, 似是被人誑誘。 必恭凶毒堅忍, 頑如木石, 忽地張目發言曰: ‘爲大父母死, 實爲孝。’ 云云。 此外雖撞之喝之, 欲其言萬方, 冥然若無知, 萬無開惑傅生之道。 請考律稟處。"
- 【태백산사고본】 33책 33권 58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259면
- 【분류】사법(司法) / 사상-서학(西學) / 출판(出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