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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 33권, 정조 15년 11월 5일 병자 1번째기사 1791년 청 건륭(乾隆) 56년

비변사가 권일신을 율대로 바로잡기를 청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하교에 따라 여러 사람들을 불러 신문하였더니, 홍낙안(洪樂安)은 말하기를 ‘제가 만약 간행한 책을 목격했다면, 어찌 문계(問啓) 가운데에 낱낱이 진술하지 않았겠습니까. 이는 사사로운 편지에 불과하니, 비록 착오가 있다 하더라도 무슨 죄가 되겠습니까. 제가 아는 것은 단지 권일신이 교주라는 것뿐입니다.’ 하였고, 이수하(李秀夏)는 말하기를 ‘저의 집은 호서(湖西)에 있는데, 사대부가 서학(西學)을 한다는 소문은 못 들었고, 단지 염전의 일꾼과 농부들 중에 미혹된 사람이 많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서울에 올라간 뒤에 친지들과 말하는 가운데 단지 통탄스럽고 놀랍다는 뜻만을 말하였을 뿐, 책을 간행한 것에 대해서는 눈으로 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이에 대해서는 말도 한 일이 없습니다. 실로 무슨 이유로 이름이 문계 가운데 들어갔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였습니다. 이 두 사람이 말한 것으로 따져 보면, 책을 간행한 중요한 부분에 대해서는 별도로 다시 규명할 방도가 없습니다.

권일신이 교주라는 말은 홍낙안의 문계 가운데 명백히 나왔을 뿐만이 아니고 지금 직접 공술할 때에도 분명히 단정지어 마지않았으니, 이는 허실을 명백히 규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목만중목인규가 바로 통문을 내고 편지를 보낸 사람이기 때문에 만중을 문초했더니, 그가 말하기를 ‘권일신이 사학(邪學)에 빠졌다는 것은 친지들이 모두 들어서 아는 바입니다. 일찍이 을사년에 형조에서 김씨 성을 가진 중인(中人)을 조사할 때, 일신이 사대부의 자제로서 스스로 형조의 뜰에 들어가, 김씨 성을 가진 사람과 함께 죄를 받기를 원하였으니, 이 한 가지 일만으로도 그의 죄를 단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이 때문에 친지들이 모두 그와 절교를 하였습니다. 이른바 교주란 관직도 아니고 임명장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가 힘을 기울여 주관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백성 가운데 높이고 믿는 자들이 교주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제가 항상 매우 가슴아프게 여겨 이 때문에 통문을 낸 것입니다. 천한 제 아들 인규는 응제(應製)를 보러 가서 아직 성균관에서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는데, 그가 홍낙안에게 보낸 편지에 역시 권일신을 교주라고 한 것은 제가 보낸 통문 속의 뜻과 같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였습니다.

이기경(李基慶)에게 물으니, 그가 말하기를 ‘저와 이승훈·홍낙안은 함께 공부한 절친한 친구입니다. 정미년 겨울 승훈과 함께 성균관에 있을 때, 이른바 서양서(西洋書)라는 것을 승훈과 함께 보았으니, 만약 책을 본 것이 죄가 된다면 저와 승훈은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책에 간혹 좋은 곳도 있었지만, 이치에 어긋나고 윤리를 해치는 일이 그 가운데 많이 있기에 있는 힘을 다해서 논척(論斥)하고 승훈에게도 많이 경계시켰습니다. 그 뒤 홍낙안과 얘기를 할 때 이것을 말한 일이 없지 않으나, 이것은 증거를 서 준 것과는 다르고, 단지 붕우 사이에 절차탁마하는 의리에 불과했을 뿐입니다.’ 하였습니다.

대저 일신이 스스로 형조에 들어와 함께 죄를 받기를 원한 것은 명백한 증거가 되는 일로서, 그가 요학(妖學)의 와주(窩主)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을사년 이후라도 그가 만약 회개하여 자책하고 정학(正學)으로 돌아왔다면, 온 세상이 어찌 이렇게까지 지목하겠습니까. 이를 엄히 징계하지 않는다면 사설을 단속할 길이 없게 되고 인심을 안정시킬 수 없을 것이니, 권일신을 해조로 하여금 엄히 조사하여 율(律)대로 바로잡도록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3책 33권 53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256면
  • 【분류】
    정론(政論) / 사법(司法) / 사상-서학(西學)

○丙子/備邊司啓言: "依下敎, 招問諸人, 則洪樂安以爲: ‘渠若目擊刊冊, 則豈不於問啓中歷陳乎? 此不過私書, 設有錯誤, 何足爲罪乎? 渠之所知, 只權日身之爲敎主而已。’ 李秀夏以爲: ‘渠家在於湖中, 而不問士夫之爲西學者, 但聞鹽漢、農夫, 多有誑惑。 上京後, 與親知語次之間, 只說其痛駭之意, 至於刊冊, 不特目所未見, 言語亦未及此。 實未知何由, 而名入於問啓’ 云。 以兩人所言論之, 刊冊肯綮, 別無可以更覈之道。 權日身敎主之說, 不特洪樂安問啓中明白說道, 今於面供之際, 亦齗齗不捨, 此不可不明覈虛實。 睦萬中睦仁圭, 乃是發通抵書之人, 故招問萬中則以爲: ‘權日身之溺於邪學, 卽親知所共聞知。 曾於乙巳年, 自秋曹推覈姓中人之際, 日身以士夫之子, 自入法曹之庭, 願與姓, 同被其罪。 卽此一款, 爲渠斷案, 故親知皆與之相絶。 所謂敎主, 此非官銜, 又非帖文, 而以其力主之故, 愚氓之崇信者, 號之以敎主。 渠常切痛, 故以此發通。 賤息仁圭, 爲赴應製, 自泮中未及還家, 而其所抵洪樂安之書, 亦以權日身爲敎主者, 不過如通文中辭意’ 云。 又問李基慶則以爲: ‘渠與李承薰洪樂安, 爲同硏切親之友矣。 丁未冬, 與承薰, 同在泮中, 所謂西洋書, 與承薰同爲看閱。 若以看書爲罪, 則渠與承薰, 別無異同矣。 其書間或有好處, 而悖理傷倫之事, 間多有之, 故論斥不遺餘力, 向承薰亦多勉戒。 伊後與洪樂安談話之時, 不無以此爲言。 此與立證有異, 不過朋友間切偲之義’ 云。 大抵日身之自入秋曹, 願被同罪者, 大是的贓明驗, 其爲妖學之窩主, 可以知之。 雖於乙巳之後, 渠若悔悟自責, 復歸正學, 則一世之指目, 豈至於此乎? 此不嚴懲, 邪說無以知戢, 人心無以底定。 請權日身, 亟令該曹, 嚴覈正律。" 允之。


  • 【태백산사고본】 33책 33권 53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256면
  • 【분류】
    정론(政論) / 사법(司法) / 사상-서학(西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