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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 33권, 정조 15년 10월 24일 을축 1번째기사 1791년 청 건륭(乾隆) 56년

좌의정 채제공이 양사의 이단을 배격하는 상소로 인해 차자를 올리다

좌의정 채제공이 차자를 올리기를,

"삼가 양사가 함께 제기한 논계를 보니 이단을 물리치는 논의가 실로 사람으로 하여금 감복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 말은 오로지 홍낙안(洪樂安)이 쓴 장문의 편지를 근거로 삼은 것인데, 이른바 장문의 편지란 바로 신에게 보낸 것입니다. 신이 이미 그 속사정을 알고 있는 이상 어찌 침묵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이단의 간특한 설 가운데 양주(楊朱)묵적(墨翟) 같은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양주는 스스로 의리를 가탁하고 묵적은 스스로 인애를 가탁하였으니, 언제 임금이 없어도 되고 아비가 없어도 된다고 한 적이 있었습니까. 맹자(孟子)가 그들을 변론하여 물리치지 않았다면 그 재앙이 아비도 없고 임금도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더라도 사람들이 쉽게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늘날 서양학은 부모를 도외시하고 임금을 소홀히 하는 것을 하나의 의리로 삼아 세상 사람들의 자식들을 모조리 망치려고 하니, 그 피해는 실로 양주나 묵적보다 백배나 됩니다.

신은 그 학술을 원수처럼 미워하여 일찍이 글을 지어 분명하게 논변하였고 사람들을 대할 때마다 간절히 경계하였으며, 또 재작년 연석에 올랐을 때도 반복해 아뢰어서 영원히 그 근원을 막아버릴 것을 바랐습니다. 그러다가 이번에 홍낙안의 편지를 받고서 비로소 호남에 권상연·윤지충 두 자가 사판을 태워버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으니, 심장이 놀라고 간담이 떨려 반드시 천벌을 빨리 내리게 하고픈 생각이 어찌 낙안보다 못하겠습니까. 다만 이단을 물리치는 것은 가상한 일이긴 하나 만약 이로 말미암아 한층 더 젖어들고 뻗어나갈 걱정이 있게 된다면 이는 군자가 마땅히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한유(韓愈)가 좋은 말을 하였는데, 곧 ‘그 사람을 올바른 사람으로 만들고 그 책을 불태워버리고 그 거처를 민가로 만들어야 한다.’ 하였습니다. 이단의 책은 물론 불태워버려야 하고 이단을 믿는 자들이 거처하는 곳은 응당 민가로 만들어야 한다 하였으나, 유독 이단을 믿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 사람을 죽이라 하지 않고 반드시 그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라고 하였으니, 이 어찌 한유가 이단을 배격하는 것이 엄격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대체로 사람이 만약 이전에 하던 일을 부끄럽게 여기면 나쁜 사람이 좋은 사람으로 될 수 있고 사람이 만약 태도를 바꾸고 마음을 바꾸면 나쁜 사람이 좋은 사람으로 될 수 있으며 사람이 만약 형벌이 무서워 감히 못된 짓을 하지 못하면 역시 나쁜 사람이 좋은 사람으로 될 수 있는 것이니, 옛날 현인들이 글을 저술하고 논리를 전개하여 스스로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은 것이 또한 어찌 의미심장하지 않습니까.

·의 죄가 과연 전하는 자의 말대로라면 이는 오랑캐나 짐승만도 못한 짓으로서 사람이라 하여 사람으로 인정하지 못할 자이니, 나라에 떳떳한 형벌이 있는 이상 다시 더 논의할 여지도 없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낙안의 글은 옳은 말을 하면서도 잘 가리지 못하고 문제 이외의 것을 부질없이 언급하였습니다. 노나라의 술맛이 박하여 한단(邯鄲)206) 이 포위당하고 장공(張公)이 술을 마셨는데 이공(李公)이 취했다는 말처럼 이는 천고에 그럴 이치가 없는 말입니다. 낙안은 나이가 아직 어려 사실 깊이 책망할 것이 없지만 그의 말은 어찌 이처럼 근거가 없단 말입니까. 더구나 성명(聖明)께서 위에 계셔서 조정이 편안하고 국내에는 시끄러운 일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장각(張角)백련교(白蓮敎) 등의 말을 장황하게 끌어대 사람을 무섭게 만들면서 마치 국가의 재난이 당장 눈앞에 박두한 것처럼 하였으니, 비록 이단을 배척하는 마음이 급해서 말을 적절히 헤아리지 못했다 하더라도 유독 민심이 쉽게 놀라고 의심하는 것은 생각지 않는단 말입니까. 지금 그 글이 온 세상에 두루 퍼져 대각의 계사에 급한 편지라고 말하기까지 하였으니, 이는 낙안이 스스로 만들어 취한 것입니다.

사특한 학술은 물론 응당 깊이 미워하고 엄히 처벌하여 종자를 퍼뜨리지 못하게 할 일이지만 만약 무슨 의도가 아무런 관계도 없는 다른 사람에게까지 미친다면 꼭 세상일에 관한 걱정이 되지 않는다고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일전에 낙안이 낸 통문속에 쓸데없는 말이 들어있다는 소리를 듣고는 신이 신의 자식에게 신의 이름을 삭제하게 하였으며 나중에 그 말을 고쳐 ·만 배격하였다는 소리를 듣고 또 신의 자식으로 하여금 신의 이름을 함께 기록하게 하였습니다. 한 번은 삭제하고 한 번은 기록하게 한 것이 신은 스스로 대략 참작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며 또한 이것을 가지고 두 끝을 잡고서 그 가운데를 취하는 우리 전하의 정사를 우러러 돕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엄하게 대처하고 밝게 살피시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정치를 밝히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경은 어제 대간의 계사에 대한 비답을 보았는가? 이단이라 불리는 것은 비단 노자(老子)석가모니양주묵적이나 순자(荀子)장자(莊子)신불해(申不害)한비자(韓非子)뿐만 아니라, 제자 백가(諸子百家)의 수많은 글들로서 올바른 법과 떳떳한 도리에 조금이라도 어긋나 선왕(先王)의 정당한 말씀이 아닌 것들은 모두 해당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 때는 사특한 설이 횡행하는 것이 맹자 때와 같은 지경에 이르지 않았다. 맹자는 이단을 홍수와 맹수, 난신 적자(亂臣賊子)처럼 배척하였으나 공자는 단지 평범하게 그것이 해롭다고만 말하였는데, 그 이유는 각기 처해 있는 시대가 같지 않았기 때문이고 처지가 바뀐다면 반드시 다 그렇게 할 것이다. 지금 사람들은 소인의 마음으로 성인의 마음을 헤아려, 마치 탕서(湯誓)태서(泰誓)의 글이 각기 여유있고 각박한 차이가 있는 것처럼 여기니, 공자가 진짜 이단에 들어가지 않은 제자 백가들까지도 오히려 이단이란 명목을 처음으로 만들어 교훈을 보여주고 미리 막으려 했던 것을 너무도 모른다고 할 수 있다. 《논어》의 본지가 어찌 《맹자》의 호변장(好辯章)보다 더 엄격하지 않은 것이겠는가. 더구나 지금은 공자 때와는 천수백 년이나 떨어졌으니, 그 오도의 본지를 드러내 밝히고 이단을 배격하는 책임이 우리 무리의 젊은이들에게 있지 않겠는가.

내가 일찍이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서양학을 금지하려면 먼저 패관 잡기(稗官雜記)부터 금지해야 하고 패관 잡기를 금지하려면 먼저 명말 청초(明末淸初)의 문집들부터 금지시켜야 한다.’ 하였다. 대체로 그 근본을 바르게 하는 것은 오활하고 느슨한 것 같아도 힘을 쓰기가 쉽고, 그 말단을 바로잡는 것은 비록 지극히 절실한 것 같아도 공을 이루기가 어려운 것이다. 지금 내가 금지하려는 것이 근본을 바르게 하는 데에 하나의 도움이 안 되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공자가 지위를 얻어가지고 도를 행하여 제자 백가의 설들이 경전과 함께 행세할 수 없었더라면 맹자가 무엇 때문에 그처럼 많은 이야기를 해서 당시 사람들에게 논변을 좋아한다는 비평을 받았겠는가.

마침 경의 차자로 인해 다시 대간에 대한 비답 가운데 미처 다하지 못했던 곡절을 거듭 밝혔다. 경은 묘당에서 국가의 대계를 세우는 자리에 있으니, 모름지기 명말 청초의 문집과 패관 잡기 등의 모든 책들을 물이나 불 속에 던져 넣는 것이 옳겠는가의 여부를 여러 재상들과 충분히 강구하도록 하라. 이것을 만약 명령으로 실시하기가 혐의가 있다면 연경에 가는 사신들이 잡서를 사오는 것을 금지시키는 문제를 추진하는 것이 경의 뜻에는 어떻겠는가?

서양학의 고질적인 폐단에 대해서는 경의 차자 가운데 심지어 ‘그 학술을 원수처럼 미워하여 글을 지어 분명히 논변하고 사람을 만날 때마다 깊이 경계하였다.’고까지 하였는데, 경은 일찌감치 인심을 바르게 하지 못하고 성학(聖學)을 밝히지 못한 것을 가지고 도리어 자신의 책임으로 삼는 것은 정말 지나치고 또 지나친 것이다. 내가 군사(君師)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일이 일어나기 전에 바른길로 인도하여 교화가 행해지고 풍속이 아름답게 만들지 못하였으니, 경이야 무슨 책임이 있겠는가. 또 홍낙안 무리의 사적인 글 가운데 한두 구절 비유로 취한 말은 어제 대간의 계사 속에서 사실 보았지만 사방에서 알고 의혹을 일으킬까 염려하여 쓸데없이 드러내 쓰지 말고 즉시 수정하도록 하였었다. 나이 어린 신진들의 말만 잘하는 병통을 경은 어째서 그대로 방치하려 하는가. 이 점은 도리어 내가 경에게 개탄스럽게 여기는 것이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3책 33권 46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253면
  • 【분류】
    정론(政論) / 사상-서학(西學)

  • [註 206]
    한단(邯鄲) : 조(趙)나라 서울.

○乙丑/左議政蔡濟恭上箚曰:

伏見兩司俱發之啓, 闢異之論, 實令人心服, 而其言專以洪樂安長書爲信契。 所謂長書, 卽抵於臣者也。 臣旣知裏面, 安可默然乎! 竊惟異端邪說, 孰如, 而則自附於義, 則自附於仁, 曷嘗自以爲君可無而父可無也! 非孟子之辭以闢之, 其禍之至於無父無君, 人未易識也。 今之西洋學, 以遺親後君, 爲一副當義理, 欲以盡賊夫天下人之子, 其爲害, 實百倍於楊墨。 臣嫉其學如嫉仇讎, 嘗作書而明辨之矣, 每對人而切戒之矣。 又於再昨歲登筵, 反覆陳達, 冀有以永塞其源, 乃於樂安書至, 始知有湖南兩漢燒燼祠版之事。 其心驚膽掉, 必欲亟行天討者, 何遽在樂安之後哉? 第闢異可尙, 若因此而有浸淫滋蔓之患, 則此君子所宜戒也。 善乎! 韓愈之言曰: "人其人, 火其書, 廬其居。" 異端之書, 固宜火也, 異端之居, 固可廬也。 獨於異端之人, 不曰誅其人, 而必曰人其人, 此豈之不嚴闢異而然哉? 蓋人若羞前之爲, 則以非人而可以人矣。 人若革面革心, 則以非人而可以人矣。 人若懷刑而有所不敢, 則以非人而可以人矣。 昔賢之著書立言, 以開自新之路者, 不亦意深而旨遠也哉! 之罪, 果如傳者之說, 則此夷狄禽獸之不若, 不可以人而人之, 則國有常刑, 無容更議, 而惜乎! 樂安之書, 語焉而不擇, 漫及題外, 酒薄而邯鄲圍, 張公喫酒而李公醉, 此千古無理之言也。 樂安年尙少, 固不足深責, 而其爲言, 何若是無憑也? 況聖明在上, 朝著寧謐, 域內無狗吠之警, 而乃以張角白蓮等說, 張皇恐動, 有若國家禍變之迫在朝夕者然。 雖以急斥異端之心, 語無所斟量, 而獨不念人心之易致驚惑乎? 今其爲書, 遍行一世, 臺閣之啓, 至以急書爲言, 是樂安之自取也。 邪學固當痛疾嚴誅, 無使易種, 若有甚麽之意, 浸及於不干他人, 則未必不爲世道之憂, 故日前聞有樂安發通, 而中及剩語, 則臣使賤息割名, 後聞改其措語, 只誅, 則又使賤息同錄。 其一割一錄, 臣則自以爲略有權度, 而亦不可不以此仰贊我殿下執兩端用厥中之政, 惟殿下嚴以處之, 明以照之, 以昭無偏之治焉。"

批曰: "卿見昨日臺批乎? 異端云乎者, 非獨老爲然, 佛爲然, 楊爲然, 墨爲然, 荀爲然, 莊爲然, 申爲然, 韓爲然。 凡諸子百家, 有萬其類之書, 少拂於正經常道, 而非先王之法言, 皆是也。 故孔子之世, 邪說之橫流, 不至如孟子之時。 孟子則斥之以洪水猛獸ㆍ亂臣賊子, 孔子則只似汎說其爲害者, 蓋所遇之不同, 而易地則必皆然。 今人以小人之腹, 度聖人之心, 認以若《湯誓》《泰誓》裕與迫之各有間然者。 然可謂大不識孔子, 竝與諸子百家, 未入於眞箇異端者流, 猶且創立異端之目, 揭訓而預防。 《論語》本旨, 何嘗不尤嚴而愈厲於好辯章耶? 況今距孔子爲千有百年, 其所闡發廓闢之責, 不在於吾黨之小子乎? 予嘗語筵臣曰: ‘欲禁西洋之學, 先從稗官雜記, 禁之; 欲禁稗官雜記, 先從明末淸初文集禁之。’ 大抵正其本者, 若迂緩而易爲力, 捄其末者, 雖切至而難爲功。 今予所欲禁者, 未必不爲正本之一助。 若使孔子得位而行道, 諸子百家之說, 不得與經傳竝行, 則孟子何苦而費盡多少說話, 以取時人好辯之譏哉? 適因卿箚, 更申臺批未罄之輪囷。 卿居廟堂籌謀之地, 須以明末淸初文集及稗官雜記等諸冊, 投之水火當否, 與諸宰, 爛加講究, 而此若以令不便爲嫌, 赴燕使行購雜書之禁, 在所申明。 卿意云何? 至於西洋學之痼弊, 卿箚中, 至以嫉其學如嫉仇讎, 作書而明辨, 對人而切戒云爾, 則卿之不早正人心明聖學, 反以爲自引, 誠過且過矣。 予在君師之位, 尙不能先事導迪, 化行俗美, 何有於卿! 何有於卿! 又若洪樂安輩私書中, 一二取譬之句語, 昨於臺啓, 果見之, 爲念四方聽聞之起惑, 勿煩於具書, 使卽釐改年少新進利口之病。 卿何乃一任之? 此則還爲之慨然于卿。"


  • 【태백산사고본】 33책 33권 46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253면
  • 【분류】
    정론(政論) / 사상-서학(西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