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정조실록33권, 정조 15년 9월 13일 을유 3번째기사 1791년 청 건륭(乾隆) 56년

영중추부사 서명선의 졸기

영중추부사 서명선(徐命善)이 죽었다. 명선의 자는 계중(繼仲)으로, 서명응(徐命膺)의 아우이다. 영종 계미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을미년171) 겨울 세손에게 정사를 대리하도록 하라는 명이 내렸을 때, 홍인한(洪麟漢)정후겸(鄭厚謙)을 끼고서 세 가지 알 필요가 없다는 말[三不必知之說]로 그 일을 막고 나서자 상하가 모두 놀라고 통분해 했다. 그리하여 금상의 궁료(宮僚)인 홍국영(洪國榮)이 조정의 관원 가운데 능히 홍인한을 성토할 사람을 찾았으나 인한의 세력이 한창 드세어 아무도 호응하는 자가 없었는데, 명선이 전 참판으로서 상소하여 인한의 죄를 논박하였다. 영종이 그를 불러 만나보고 크게 칭찬한 뒤에 그 아비에게 제사를 지내주고 드디어 인한 등을 축출함으로써 의리가 비로소 확정되었다.

상이 즉위한 뒤에 그에 대한 대우가 나날이 높아져 익대 공신(翊戴功臣)에 비길 정도였으며 몇 년 동안에 구경(九卿)172)융원(戎垣)173) 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다. 상이 매년 12월 3일에는 반드시 서명선홍국영·정민시(鄭民始)·김종수(金鍾秀) 등 여러 사람을 불러 음식을 내리고 따뜻한 말로 은근하고 친밀하게 대하면서 ‘동덕회(同德會)’라 불렀으니, 그것은 그의 상소가 들어온 날이기 때문이다. 명선은 일처리에 재간이 있는데다 기지가 남보다 뛰어났기 때문에 능히 정후겸을 물리쳐버리고 마침내 을미년과 병신년에 내세운 의리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때에 와서 죽으니 상이 애석해 하고 전교하기를,

"이 대신이 이룬 업적이야 어찌 하교가 있은 뒤에야 알겠는가. 백 대의 공론이 엄연히 있을 것이다. 이 대신의 덕을 그린 글은 시장(諡狀)이 아니라, 곧 《명의록(明義錄)》이니, 이 한 권의 책에서 그 인물을 논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부의하는 것은 이미 내탕고에서 주선해 보냈으나 예장(禮葬)에 부의하는 것도 즉시 유사로 하여금 규례를 살펴 거행하게 하라. 시호를 내리는 조처는 어찌 명정을 세우는 날을 넘길 수 있겠는가. 홍문관으로 하여금 시장이 들어오길 기다릴 것 없이 당일로 시호를 의논하게 하라."

하니, 홍문관에서 시호를 의논한 결과 ‘충헌(忠憲)’이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3책 33권 24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242면
  • 【분류】
    인물(人物)

  • [註 171]
    을미년 : 1775 영조 51년.
  • [註 172]
    구경(九卿) : 의정부의 좌·우 참찬, 육조 판서, 한성 판윤.
  • [註 173]
    융원(戎垣) : 금위 대장.

○領中樞府事徐命善卒。 命善繼仲, 命膺弟。 英宗癸未文科, 乙未冬代理命下, 洪麟漢鄭厚謙, 以三不必知之說, 沮格之, 上下驚惋。 於是宮僚洪國榮, 求朝紳之能討麟漢者, 麟漢勢張甚, 莫有應者。 命善乃以前參判, 疏論麟漢之罪。 英宗召見, 大加褒奬, 賜祭于其父, 遂黜麟漢等, 義理始定。 及上卽位, 眷遇日隆, 比之翊戴之功, 數年間歷九卿、戎垣, 至領議政。 上每歲於十二月三日, 必召命善洪國榮鄭民始金鍾秀等諸人賜饌, 溫言殷勤密勿, 謂之同德會, 蓋其疏以是日入也。 命善有榦局, 機穎過人, 故能斥絶鄭厚謙, 而遂爲乙丙義理主人。 至是卒, 上嗟惜, 敎曰: "此大臣事業, 豈待辭敎而知之? 百世之公議自在。 此大臣狀德之文, 非諡狀也, 卽明義錄也。 就此一部書, 論其人可也。 賵襚之典, 已自內帑辦送, 而禮葬致賻, 卽令有司, 按例擧行。 易名之典, 何可過立銘旌日乎? 令弘文館, 不待諡狀, 當日議諡。" 弘文館議諡忠憲


  • 【태백산사고본】 33책 33권 24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242면
  • 【분류】
    인물(人物)